그리고 목적지인 쓰러져 죽은 나무 위로 새로운가문비나무가 자라나는 ‘가문비나무의 세대교체‘ 현장에 도착했다. "잘 찾아보세요, 그쪽에 있을 거예요. 저쪽에도 있을 거고요"라는 말에 순간 당황했다.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일대에는 그저 비슷하게생긴 나무 밑동들만 있었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오늘까지도 그치지 않아 울창한 숲속은 다소 어두웠고 나무는 흠뻑 젖어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우듬지는 가지가 이리저리 얽혀 우산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지난번에 듣기로는, 가문비나무의 세대교체 현장은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 P15
일본 홋카이도 후라노의 숲속에서는 ‘가문비나무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는데 가문비나무들은 한일자로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든 하나는 배워서 만족한다. - P25
아버지는 똑똑한 언니를 몹시 흡족해하며 이것저것 더 가르쳐주려고 했다. 언니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언니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걸어갔지만 나는 늘 뒤에 남겨졌다. 하지만 별도리 없으니 홀로 뒤따라갔다. 질투가 낳은 쓸쓸함이 있었다. 한쪽은 선천적으로 총명하다는 타고난 소질이 있는 데다 가르쳐주는 사람을흡족하게 하면서 자신도 즐겁고 화기애애한 상태에서 발전해간다. 그에 반해 다른 한쪽은 멍청하다는 부담이 있는 데다 가르쳐주는 사람을 한숨짓게 하면서 자신도 즐기지 못하고 질투를 맛본다. 그야말로비극적인 전개다. 환경도 부모님의 가르침도 초목과인연을 맺게 된 계기이기는 하지만, 언니를 향한 질투가 그 계기를 더욱 굳게 다져주었기 때문에 상당히 꺼림칙하다. - P29
꽃은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발밑은 보기도 무서워 이 뿌리를 보고 나서 꽃을 쳐다보면 꽃의 아름다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만다. 그러나 옆을 떠나가지도 않았다. 무서운 존재의 짓누르는 힘 때문에 일행이 재촉할 때까지 나는 우뚝 서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꽃에게 추억과 사죄를 마치고 온 것 같았다. 뿌리의 경우, 이번에 새로 대면했다는 인상이 강했다. 어쨌든 다음에 그 뿌리를 또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산과 골짜기에서 자라는, 자연 속의 오래된 등나무, 어린 등나무의 꽃과 뿌리를 보여달라고 할 심산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다리를 놓을 때 쓰일 정도로 질기다는 등나무의 강력한 힘에 묶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P44
8월의 편백나무는 기상이 높다. 멀리서 봐도 나무에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모든 편백나무가 의욕적으로 살고 있는모습을 보여주었다. 만약 나무가 떠들기 시작한다면 바로 이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곳의 편백나무는 적극적이고 왕성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더 높이 클 거다. 더 굵어질 거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의지를 느꼈다. 나무가 이런 식으로 기를 뿜어내는 존재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무의 생명력 혹은 생기, 정기란 바로 이것일까 싶었다. - P45
그러나 너무 우수하면 내가 쓸쓸해진다. 천박한마음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훌륭한 것 앞에 서면한시도 버티지 못하고 감탄사만 내뱉으며 깊이 감동한다. 거의 무조건 곧바로 감동한다. 민감하다고할 수 있고, 근사한 것에 약하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자신의 꼴사나움을 생각하고는 마음이 점점 시들해져서 자신은이런 근사한 것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 여기며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다. 감탄사를 내뱉으며 감동했다는말은 사실 그 시점에서 끈끈한 인연이 생겼다는 뜻인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반대로 인연이 끊어졌다고 착각해 결국 몸을 사림으로써 근사한 것과의 인연을 거부한다. - P53
평생 한쪽으로 기운 채 살아갈 편백나무의 높은 우듬지에 무성하게 달린 가느다란 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작은 흔들림에도 기울어진 구간어딘가는 인내를 요구받고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몸이 기울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까웠다.
인간에게 저마다의 이력이 있듯이 나무에도 저마다의 이력이 있다. 나무는 몸에 자신의 이력을 표시해서 보여준다. 몇 살인지, 별 근심 없이 오늘날까지 살아왔는지, 아니면 고통을 견디며 인내해왔는지, 행복하다면 행복했던 이유가 있을 터이고 고통을 겪있다면 몇 살 때, 몇 번, 어떤 종류의 장애를 만났는지 등을 자신의 몸에 전부 기록한다. - P57
그렇다면 뿌리, 우뚝 솟은 부분, 나무 또는 줄기로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모두를 통틀어 나무라고 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야쿠 삼나무는 그 애매한 부분을 통해 눈에 띄는 강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 년을 버텨온 인내의 집결과 같은 힘을. 어린 나무는 지면에서 완전한 원형으로 곧고 크게 자란다. 그것은 과거에 인내와 인고를 강요받은적 없는 경사스러운 원형이며 곧음이라 할 수 있다. 야쿠 삼나무는 곧고 크게 자라지 않는다. 원형이라고도 할 수 없다. 굳이 길게 이야기하자면, 부풀어 오른 혈관과 경련이 일어난 힘줄이 서로 다투고 얽히면서 어떤 부분은 기운이 넘쳐 불거지고, 어떤 부분은 반대로 깊게 쑥 들어간다. 자신의 무게를 오랜 세월 지탱해온 과정에서 생긴 거대한 혹을 갖는 변형이라 할 수 있는데 그저 힘, 힘의 작용인 것이다. - P82
강럭하다면 더없이 강력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참혹한 인내의 집약이기도 하다. 나는 도시에 살며 허약하게 늙어온 터라 가끔씩 자연에 나왔다가 그와 같은 강력함을 보면 곧바로 서글퍼지는데, 야쿠 삼나무는 빗속에서 태연하게 똑바로 서 있어 티 없이 맑아 보였다. 꾸불꾸불한 오르막길이다. 조금 올라가다 멈춰서서 바라보니 이 삼나무의 전체 모습이 비교적 잘보였다. 바람이 희뿌연 비를 몰고 삼나무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러면서 삼나무에 비를 남겨두고 가는지 비는 옅은 하얀빛으로 바뀌어 지나간다. 그렇구나, 알았다. 여기서 비는 삼나무에게 주는 선물인것이다. - P83
개중에는 꽃보다 신록이 좋다는 사람도 있다. 신선함과 상쾌함 때문일 것이다. 나는 둘 다 좋아하지만 자세히 말하자면 꽃을 피우려는 꽃망울, 잎을 피우려는 신록에 가장 마음이 끌린다. 꽃망울에서 꽃이 싹에서 잎이 되려 할 때 그들은 결코 재빨리 피거나 자라려고 하지 않는다. 꽃은 꽃잎을 서로 스쳐대며 피기 시작하고, 잎은 흔들거리며 피어난다. 조심성이 많다고도, 아니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 감나무 잎은고개를 숙인 자세로 느릿느릿 피어나고, 양귀비꽃은모자를 벗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꽃과 잎이 생명을 시작하는 데에는 각각 정체기가 있지만 그 정체기를 지나면 감나무는 초록 잎을 기르고 양귀비는 - P109
붉은 꽃을 피워내며 성숙한다. 나는 꽃과 잎의 시작혹은 탄생을 좋아한다. 그래서 신록이 피어나면 팬지 일단락된 듯한, 긴장을 늦춘 시각으로 보게 된다. 물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기는 하지만, 싹이었을 때는 지켜보던 시선이 신록일 때는 관망하는시선이 되는데 거기에는 약간의 심적 거리가 있다. 이전부터 싹을 유독 좋아하긴 했지만 근래 수년간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생긴, 다음 세대로의 계속이나 새로운 탄생에 왠지 모를 희망이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것 같다. 내가 꽃도 잎도 탄생 시기를 좋아하는 연유는 틀림없이 그런 은밀한 속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신록도 물론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지만, 잎이 피기까지 아직 정체기에 있을 아베고개 단풍나무 숲의 새싹이야말로 내가 정말 보고싶은 것이었다. - P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