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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장악하고 있지 못 하다는 것.
장악한 것을 향해 최단거리로 가라. 특히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러고는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P285
'느낌의 공동체'는 작가가 규정한대로 두 번째 평론집이 아니라 첫 번째 산문집으로 읽혔다. 그동안 내게 평론은 무조건 무겁고, 본문 중의 책을 읽지 않았을 때는 글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작 '몰락의 에티카'는 꽤 들고 다녔지만 여전히 마치지 못하고 군데군데 밑줄만 무성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 ‘느낌의 공동체’는 많은 작가들을 다루고도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책들을 그만의 문체로 쉽게 읽을 수 있었기에 감히 산문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시와 시인들을 향한 그의 애정이 이 산문집에서는 더욱 간절한 문장들로 채워져서 읽는 내내 내가 당사자 시인이라도 되는 양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그의 글이 주는 미덕은 거기 있지 않을까 싶다. 또 위에 인용한 부분처럼 베끼고 싶은 부분은 또 어찌나 많던지 옮겨 적은 분량도 꽤 된다. 옮겨 적다보면 내게 취약한 부분, 띄어쓰기의 감이 잡히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손가락이 아프게 몰두하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슬며시 스스로를 위안해준다.
"아마추어는 말줄임표를 마치 통행 허가증처럼 사용한다. 경찰의 허가를 받고 혁명을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줄임표는 겸손함이 아니라 소심함의 기호다. 마침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 없다.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 이사크 바벨은 이렇게 썼다. "어떠한 무쇠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사람의 심장을 관통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서른다섯 번 찍었다. -P254
어찌 이런 단락들을 옮겨 적지 않을 수가 있을까? 구두점 하나하나에 저토록 명쾌하고 간결한 결론이라니.
그렇게 시작한 옮겨 적기 내용이 수첩이 빼곡하다. 또한 읽어야 할 책 목록이 가득하다. 그 사실이 행복하기도하고 불행하기도하다.
그는 문학평론이라는 것이 꼭 무겁고 두려운 장르만은 아니라는 것을 거듭거듭 일러주는 작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진정성을 이야기하는데 비평가로서 그의 진정성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문학으로서 비평인 이유를 알게 한다. 일개 독자인 내게도 비수처럼 날카롭게.
이제는 책꽂이 장식중인 두꺼운 평론집들의 먼지를 이제는 털어주어야 할 때다.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에 가슴에서 절로 우러나게 해주는 문학평론가이다. 고마워요.
" 삶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 이라고 그러기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선(先) 해석의 커튼"을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이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나이 이제 팔순이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일의 가치에 대한 변함없는 이 확신과 애정! 그러고 보면 이 해박하고 우아하고 유쾌한 할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P312
이렇게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낸 '밀란 쿤데라'와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손택수' '이병률' '문태준' '김선우' 김경주' '박정대' '허수경' '김기택' '안현미' ‘김소연’ ‘이영광’ ‘황인숙’ ‘등등의 시와 시집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는 질책까지도 따뜻함으로 읽혀서 뭉클했다. 문학을 향한 근본적인 애정 없이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겠지만 어느 부분은 그와 기호가 많이 비슷하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치명적인 시, 용산’ -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와 경찰교신-P163, 시가 아니지만 시를 읽어내는 그의 시선 속에서 용산은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압도였고 장엄한 서사시였다. ‘그 화인火因이 진실로 불명확하다면, 그건 그 불이 목숨을 걸고 씌어진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덧붙이자.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
그런 글이 바로 그가 서문에서 쓰고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 의 노를 젓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는 나에게 덧붙인다. '몰락의 에티카'를 마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