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시선 326
천양희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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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보아라

 

                 천양희

 

 

자식들에게 바치느라

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장 쓰신다

'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

 

바닥 없는 바다이신

받침 없는 바다이신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밤늦도록

편지 한장 보내신다

'바다 보아라'

정말 바다가 보고 싶다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 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가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물의 가족

 

                천양희

 

 

물을 거꾸로 쓰면 룸이고

룸을 뒤집으면 물이 된다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는 거대한 물의 룸이라고 다시 너가 말했을 때

 

물소리 높아지면 파도가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길 깊어져 수심이 되었다고 말하고 말았다

 

수평선 바라보다 

수평한 세상에서 살고 싶네, 너가 말했을 때

하늘 쳐다보다 

땅에서 하늘까지 아직도 수직이네, 다시 말했을 때

 

경계 없는 것들이 좋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흘러가는 것들이 눈물겹다고 말하고 말았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바다는 위대한 것이라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의 모든 소리는 뒤에 여운을 남긴다고 다시 너가 말했을 때

 

마음에도 밀물 썰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결에도 들숨 날숨이 있다고 말하고 말았다

 

소리와 의미가 잘 맞아 철썩이는 

우리는 

물의 가족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2011)] 중에서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대학 3학년 재학중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시의 숲을 거닐다] [직소포에 들다]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부문) 등을 수상했다.

 

 

 

            

 

 

 

늦은 휴가를 떠나기 전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를 들고 다녔다.

그리고 떠나있는 내내 저 바다만 '바다 보아라'였다.

나는 단 한번도 '바다 보아라'를 받은 적 없고

'어머니 전상서' 한번도 써보지 못한 바침 없는 생을 살았는데...... 그저 바다는, 바다는 실컷 보았다.

거기 앉아서 맛있는 커피를 홀짝거리고 '장사익'을 듣고 '후지와라 신야'를 읽고 '두근두근 내 인생'이 덩달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다.

 

일주일 전의 저 바다가 아득한 한 시절로 그립다.

아니, 거기 앉기만하면 평온해지던 그 마음이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너무 황홀한 아름다움이라 내 것이 아닌 듯 여겨지던 순간들......

이 새벽,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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