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누군지 명확하게 모른다. 저 소설가도 그것을 찾고있다. 나는 소설을 보면서 그가 찾은 답변을 살펴보겠다."
우리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가능성이 있고, 진정한 나를 알아내는 것은 불교에 귀의해 오랜 수련을 거쳐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며 지속적으로 탐색해 보는 거죠. 수많은 경우의수를 말이에요. - P115

정리하면 소설은 일종의 인간 탐구 보고서입니다. 소설을 말그대로 풀면 작은 이야기거든요. 누군가는 소설을 ‘잡스러운 이야기‘,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뒷담화 같은 이야기‘라며 폄하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적으로나 양식적으로나 인간 존재를 이렇게까지 집중적으로 다양하게 탐구한 경우가 거의 없어요. 소설은 누적된 인간 경험의 총체이며,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한 일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고, 인간이 어디까지 될 수 있고, 어디까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탐색하며 소설을 읽으면 참 좋습니다. - P117

저는 드라마를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추리물과 청춘물을 즐겨보는데요, 우리나라 드라마를 싹쓸이하고도 더 이상 볼 게 없으면대만드라마로 갑니다. 일본 드라마와 중국 드라마로도 가요. 그런데 드라마가 좀 질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소설로 갑니다. 드라마도 재미있지만, 소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세계를 구현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압도적으로 많고요.
영상으로 보여줄 수 없는 무거운 진실이나 심의에서 탈락할수 있는 이야기, 깊고 내밀한 묘사, 시청률 때문에 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소설에서는 접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와 소설을 양손에쥐고 있을 수 있다면 정말 최고일 것 같네요. - P123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만 해도 10~20명 안팎의 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으면 어디 가서 대화할 때 빠지지 않았어요. "너그거 읽었어?", "너도 읽었어?" 이런 식이었죠. 그런데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다양한 경향의 작가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작가들이 많다는 건 우리에겐 축복이고 장점이죠. 골라 읽을 수있는 선택지가 늘어났다는 뜻이니까요.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 분모가 사라지고 다양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소설의 지형도가 북두칠성처럼 큰 별들이 반짝이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은하수입니다. 다양성의 지평이 확대되면서 ‘북두칠성의 시대‘에서 ‘은하수의 시대‘가 되었죠. 그만큼 본인 취향의 소설을 고르시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아쉬운 것은 책 읽는 독자가 줄어들었다는점입니다. 요즘엔 소설보다 영상을 더 많이 탐색하죠. 다양성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양성의 총합이 줄어드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많은 분들이 영상 탐색 외에도, 소설 탐색 또한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 P128

"세상에 홀로 우는 것은 없다. 혼자 우는 눈동자가 없도록 우리는 두 개의 눈으로 빚어졌다."
저는 이 구절을 읽고 위로를 받았어요. 세상에 홀로 우는 것이없도록 우리가 두 개의 눈으로 빚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손도 두 개입니다. 외로울 땐 나의 왼손이 오른손을 잡아줄 수 있죠. 이런 생각을 하면 비통한 마음을 쓴고전시가들은 나의 오른손을 잡아주는 나의 왼손, 혹은 혼자 울지말라고 생겨난 두 눈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아주 오래전부터 견뎌온 사람들을 보면서 오늘 나의 슬픔은 조금 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큰 슬픔 앞에서 내 슬픔은 위로를 받고 조금 더 견뎌볼 힘을 얻습니다. - P142

생명을 주제로 하는 동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가끔씩 사는 게 삶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경쟁이 일상화돼 있으니까 내가 살아남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거죠. 그런데 인간은 원래 같이 사는 존재이지 이기고 홀로 살아남는 존재가아닙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삶을 생존이라고 해석하는 게 요즘 사회입니다. 이런 현대의 문법에 아주 예쁜 말과 아름다운 스토리로맞서는 작품들이 바로 생명의 동화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죽여선 안 돼. 너를 살리는 게 나를 진짜 살아있게 해." - P182

좋은 듣기는 좋은 질문을 낳고, 좋은 질문은 좋은 답변을 낳고, 좋은 답변은 다시 좋은 듣기를 불러옵니다. 이런 선순환이 모여 아름다운 작품이 되기도 해요. 우리 전통 시의 양상에 문답시가 있는데요, 묻고 답하는 오고 감이 한 편의 작품이 되는 것이죠. - P205

에세이의 작법은 ‘격물치지格物‘의 원리와 비슷합니다. 격물치지란, 아주 구체적으로 사물을 들여다보며 추상적인 의미와 이치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제가 앞서 마중물로 제시했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사람, 경험이나 기억, 다른 사람이 쓴 글이나 한말 등이 바로 구체적인 것들이죠. 이렇게 구체적인 것들을 먼저세워놓고 그 뒤에 의미, 생각 등을 정리해 붙이는 겁니다.
에세이를 쓸 때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감정에 큰 지분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앞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일화나 사건이든 구체적인 무엇인가가 반드시 등장해서 중심을 잡아줘야 합니다. 추상적으로 모호하게 끝나는 게 에세이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죠. - P240

에세이의 묘미는 쓰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해석입니다. 에세이를 쓸 때는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에세이는 당연했던 것에의문을 가져 보는 시간입니다. 남들이 알려주는 의미에서 벗어나진정한 나만의 의미를 찾자는 겁니다.
이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이라고 쓰고 잠깐 멈추세요. 남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잠깐 멈춰서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나의 인생과 삶과 사건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한 가지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에세이에 넣어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쓰세요. 그 표현 뒤에는 나만의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이어쓰기 좋거든요. - P241

그런데 일단 써보시면 아실 겁니다. 과정 자체가 힐링이 된다는 사실을요. 에세이를 쓰는 시간은 감정의 디톡스 시간이 됩니다. 에세이를 쓰면서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타인에게 보여주어야만 글입니까. 가장 소중한 내가 볼 건데요. 그러니 쓰는 것 자체로도 충분한 기쁨을 느끼실 거예요. 조금더 열심히 쓰면 책으로 출간도 가능합니다. 요즘은 대량 생산만하는게 아니라 책 한 권만 출간해 주는 업체도 많거든요.
처음 에세이를 썼을 때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너무 못났더라도 지우지 말고 나의 비밀 폴더에 살포시 넣어두세요. 어렸을 적 보물들을 상자에 담아뒀던 것처럼 일단 담아두세요. 넣고 닫아버려도 그 글은 내 안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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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

1979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나태주 시인의 딸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문학평론가이자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 강의평가 1위를 기록한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다. 2007년문학사상 신인평론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저서로는「제망아가의 사도들」, 「내게로 온 시 너에게 보낸다」, 「책 읽고 글쓰기」, 「반짝이지 않아도 사랑이 된다」,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 등이 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동아일보에서 주간 시평 《시가 깃든 삶》을 연재하며 시대의 정신과 감수성에 맞는시를 찾고 소개하는 ‘시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EBS <나의 두 번째 교과서>, <딩동댕 유치원>, CBS <세바시>, 유튜브 <교육대기자TV>, <다독다독> 등에 출연해 대중에게 문해력의 중요성을 알리고, 국어의 재미를 전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책에 대해 우리는 저자만큼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읽는 사람은 책 뒤에 숨겨진 저자의 시간에 대해 추측할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책의 뿌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요. ‘왜 이 사람이 왜 이런 얘기를 했을까?‘, ‘이 사람은 어떤 배경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됐을까?‘,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겉으로 드러난 문자의 총합을 읽는 게 아니라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라고 조금이라도 깨닫는 것이 생기면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
나를 위한 메시지를 책에서 찾아내는 순간이 바로 책과 대화하는순간입니다. 이런 소통의 과정이 바로 진짜 독서죠. 유명한 사람이 무슨 말을 적어놓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들어온 어떤 메시지 혹은 구절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여러분은 독서라는 ‘대화‘를 시작하신 겁니다. - P28

책을 읽을 때 꼭 기억해 주세요. 책을 사면 텍스트만 오는 게 아니에요. 그 책을 쓴 저자의 영혼이 따라오고, 일생이 따라옵니다.
책은 저자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애써 피어올린 꽃과 같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배운 공부, 사랑했던 사람, 살았던 시대.
모든 게 꽃이 필연적으로 피어날 수밖에 없는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을 때는 보이지 않는 저자를 살펴주세요. 안 보이는 것을 읽었을 때 우리는 "아주 잘 읽었다"고 말합니다. - P29

혹시 여러분,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저는 지인들과 카페에서브런치를 할 때가 종종 있는데요, 신나서 막 떠들기도 하죠. 그런때 어떨 때는 공허해지고,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후회도 생깁니다. 회식은 더합니다. 회식할 때 분위기가 시끌벅적하잖아요. 신나게 먹고 마신 후 밤늦게 택시를 타면 소위 말하는 ‘현타‘가 올때가 있어요. 괜히 말했다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들이 있죠.
그 모든 대화를 지우고 싶을 때,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대화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럴 때 조용히 책을 봅니다. 졸릴 때까지요. 다음 날 아침이 돼서도 그 찜찜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면 또 조용히 앉아서 책을 봐요. 책을 볼 때는 가만가만, 저자하고 단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 P30

소설을 보면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작가가 특별히 나에게 보여주는 세계인 거죠. 지식이 담긴 학술서를 보면내가 몰랐던 것을 저자가 특별 과외 해주는 것 같아요. 제 마음이저자를 따라다니며 생기를 찾을 때도 있죠. 책을 매개로 한 저자와의 소통은 브런치나 회식에서 나를 잃어버리면서까지 떠들었던 말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독서라는 대화는 내가 시작하고, 내가 덮을 수 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서 소비되는 대화가 아니라 - P30

내 안으로 들어와 쌓이는 대화가 됩니다. 저는 인간관계에 지치면실제 사람이 아니라 책 속의 사람(저자)을 찾아갑니다.
한번 해보세요. 의미 없고 헛된 대화에 지쳤다는 생각이 들 때한 권의 책을 통해 단 한 명의 저자와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이런 대화는 나한테 유익한걸? 하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 P31

시집을 읽을 때 60편 중에서 단 한 편이라도 내 마음에 들면 저는 성공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실린 건 시인의 마음이잖아요. 그 사람의 마음을 쓴 것이지 내 마음을 쓴 게 아니거든요. 저는 수많은 시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이런 감탄사를 터뜨립니다.
"어머, 어머! 이거 내 마음인데, 이 사람이 벌써 갖다 써놨네"
시는 이미지, 언어,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어떤 단어나 구절이마음에 든다면 그것을 모아 간직하세요. ‘이 시를 다 이해하겠다‘ 는 욕심은 조금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한 줄, 또는 어떤 구절이 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시집은 이미 여러분한테 온 거예요.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어떤 때는 잘 모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를읽다 보면 ‘아, 내가 느낀 마음이 이거였구나!‘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꼭 내 마음을 미리 써놓은 것 같죠. 이렇게 시집을 읽으면 자기마음을 알게 됩니다. 알쏭달쏭 있는지도 몰랐던 내 감정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장점이 있어요. - P32

소설은 작가가 낳은 자식입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누구냐가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 작가가 18세기 사람인지,
우리랑 동시대 사람인지, 동양 사람인지, 서양 사람인지에 따라 소설은 달라지죠. 그래서 작가의 이력을 확인하고 소설을 읽으면좋습니다.
또 소설은 작가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의실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결국 따뜻한 곳이야‘, ‘이 세상은 좀 이상한곳이야‘, ‘이 세상은 정말 살기 힘들어‘, ‘여긴 전쟁 같은 세상이야‘
등 각각 판단이 다릅니다. 작가는 주인공을 허구라는 실험실 안에 넣어 정답을 찾아보라고 시키고 그 과정과 결과를 모아 소설을 씁니다. 이걸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일종의 간접 경험인 셈이죠. ‘나는 잘 몰랐는데 이 소설의 세계가 사실 지금 세계네‘,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면, 나와 작가가 비슷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거예요. - P33

에세이는 작가의 일화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일화가 소설처럼 연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에피소드처럼 따로따로 읽히죠 그럼 연결되지 않는 이 이야기를 왜 읽을까요? 에세이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자세입니다. 작가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떠한 모토로 삶을 살고 있는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한두 개의 일화와 작가의 자세를 얻어갈 수 있다면 에세이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에세이에는 소란스럽거나 흥분된 글이 없어요. ‘주식 잘하는 법‘, ‘건물주 되는 법‘이런 실용적 내용이나 최신 정보도 없어요. 인생이란 무엇이고, 내가 걸어온 삶이란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삶의 잔잔한 에너지를 찾을 수 있는 게 바로 에세이입니다. - P34

책을 읽으면 내 안에 스며들어와서 내 정신과 영혼의일부가 됩니다.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가져와서 내 안에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이 독서의 끝입니다.
내 안에 꽂히지 않으면 어떤 읽기도 의미가 없습니다. 필사할때도 우리는 글씨를 쓰면서 의미를 되새기려고 하잖아요. ‘구절아, 내 맘에 들어오렴‘ 이런 뜻이죠. 결국 읽기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목표를 너무 원대하게 두지 말자고요. 그러면 가다가 지칩니다. 책에서 ‘나 자신의 구절 찾기‘를 해보세요. 이소박한 목표가 독서의 처음이자 완성입니다. - P43

영화 <곡성>을 보셨나요? 곡성이 지역 이름일까요? 곡하는 소리를 말하는 걸까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겠죠. 그런데 정리가 된 사람은 이를 다른 사람한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자신이 찾은 의미를 설명할 수 있으면 영화를 잘 본 겁니다. 영화의 디테일까지다 기억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쥐고 나오면 이 책은 내 안에 들어온 겁니다. 모든단어와 모든 이해를 완성하지 않았다고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 P46

저는 출발하는 순간부터 사진을 찍습니다. 덜 싼 여행 가방도 찍고, 아이들 표정도 찍고, 밥 먹으러 가서도 찍고, 돌아오는 순간에도 사진을 찍어요. 3년, 5년, 10년이지난 후에도 사진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르륵 보면 그 여행이 다시 복기가 됩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책의 귀퉁이를 접고, 밑줄 긋고,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고, 타이핑도 해보세요. 그러면 사진을 따라서 여행을 기억하는 것처럼 책을 다시읽는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는 즉각적으로 생기기보다 나중에 생기기도 합니다. 여행할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의미가 여행을되새기면서 따라오는 것처럼 말이죠. 스냅 사진 같은 메모를 통해책의 의미를 되새기는 깊이 있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 P47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김희성(변요한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농담 그런 것들."
대본을 쓰신 김은숙 작가를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시를 잘아는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대사는 나오기 힘들거든요. 김희성이 좋아하는 저 모든 것들은 바로 시인의 전형적인 친구들입니다. 선비에게 문방사우가 있다면 시인에게는 무용 - P57

한 아름다움이 있지요. 이백은 달을 노래했고 윤동주 시인은 「별헤는 밤」을 썼습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썼고, 마종기 시인은 「바람의 말을 썼지요. 별처럼 꽃처럼 무용한 것들을사랑한 사람들이 바로 시인입니다. 밥도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이왜 좋은 걸까요? 내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지도 못 하는데 왜 사랑하는 걸까요?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다 순간적으로 왔다가 금방 사라집니다. 시인은 지나가는 찰나의 감정을 포착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죠. 우리가 영원히 스무 살이라면 과연 스무 살이 찬란할까요?
저는 제가 가장 예뻤을 때 예쁜 줄을 몰랐어요. 스무 살 때 사람들이 "참 예쁜 나이구나"라고 말해도 저는 저를 미워했죠. 마찬가지로 지금 이십 대 청년들에게 "참 예쁜 시절입니다" 하면 그들은 잘모르더군요. 찰나니까 알 틈이 없어요. 하지만 찰나니까 아름답습니다. 금방 잃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지만 아주 소중하죠. - P58

시는 지금 이 순간을 남깁니다. 찰나에 나를 스쳐간 어떤 감정이스냅 사진처럼, 딱 한 번 찍을 수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남습니다. 공중으로 사라지는 감정의 시간을 포착해 내 앞에 현현시키

시는 지금 이 순간을 남깁니다. 찰나에 나를 스쳐간 어떤 감정이 스냅 사진처럼, 딱 한 번 찍을 수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남습니다. 공중으로 사라지는 감정의 시간을 포착해 내 앞에 현현시키는 겁니다. 마법 같은 순간이죠.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시인들도 살금살금 가서 휙 낚아챌 준비를 늘 하거든요. 아버지는 머리맡에 항상 종이와 연필을 두고 주무셨습니다. 왜 이런 습관이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다 사정이 있었어요. - P59

어느 아침에는 아버지가 잠에서 깨자마자 막 괴로워하셨습니다. "내가 어젯밤에 어떤 시를 꿈속에서 썼어. 정말기가 막힌 구절을 썼는데 아침에 눈 떠보니까 기억이 안 나." 이걸잡아야 한다며 시를 쓰십니다. 쓰면서 계속 지우세요. "이것도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그러더니 다음 날부터 아예 머리맡에다가 종이랑 펜을 두고 주무시더라고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쓰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도 성공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메모 준비는 항상 하셨어요. 비록 꿈에서 쓴 시는 못 잡더라도 어느 순간, 스쳐 지나가는 것을 훅 잡아서, 언어로 포착해서 시로 쓰겠다는 의지가 있으셨던 거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자라서인지 저는 시인들이 안쓰러울 때도 있습니다. 순간에 왔다 순간에 사라지는 무언가를 포착하겠다는 마음이 시인들에게 너무 간절하거든요. 예술가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 P59

시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지만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시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고 마법입니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살잖아요. 인생이 소중한 건 게임처럼 리셋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를 읽으면 지나간 줄 알았던 과거가 내 앞에 다시 돌아옵니다. 아주 순간이지만, 이런 순간을 놓칠 수가 없기에 저는 아직도 시를 읽습니다. - P64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서설》전문 - P67

아기가 뱃속에서 "엄마, 고마워, 한 달, 엄마, 고마워, 두 달" 이렇게 열 달을 헤아리기 위해서 손가락이 열 개가 되었다는 시적해석입니다. 이 시를 읽고부터는 제 손을 볼 때마다, 세면대에서손 씻고 나올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제가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닌데 손가락을 볼 때마다 감사해야 할 것 같고, 더불어 착해지는 것 같아요.
비합리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시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가 ‘인간은 본디 착하게 태어난 존재다‘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성선설을 믿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함민복 시인이 그 믿음을 대신 써준 거죠. 게다가 확실한 증거, 열 손가락을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었는데 몰랐던 뭔가를 하나씩 알아가게 됩니다. 내 마음을 수집한다고 할까요, 밝힌다고할까요. 저는 시가 어두운 밤하늘에 뜬 작은 별들 같습니다. 그 별들이 있다고 해서 엄청나게 환해지지는 않지만, 별들이 영영 없다면 내 마음이 또 얼마나 외롭겠어요. - P68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과거에 아이를 못 봐서 쩔쩔매던 저를용서했습니다. 한강 소설가처럼 대단한 분도 왜 그래, 왜 그래 울다가, ‘괜찮아‘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건 세상 모든 엄마가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정말 힘들었구나, 서른 살 민애야. 그때 정말 애썼구나‘라며 저를 다독였습니다.
이렇게 본인하고 비슷한 아픔을 찾아서 확인하면 애써 외면하던 아픔에 직면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냥 묻어두는 게 아니라 그때 충분히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되죠. 육아 초보 엄마인 제자신을 똥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시를 읽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한강 소설가는 소년이 온다 같은 좋은 소설도 여러 편 쓰셨는데 시집과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거예요. 시와는 또 다른 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 P71

일상의 순간도 시가 되지만 살다가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것을 토해냈더니 시가 되기도 합니다. 시는 산꼭대기, 구름 위에서본 풍경을 읊는 게 아닙니다. 시는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 우리 바로 옆에 있어요.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 P74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것

사람이 오면
사람이 가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더는 말하지 말아야지 - P75

암병원 흐릿한 건물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드는 마음
마음을 시로 쓰지는 말아야지
다짐하는 마음

_박소란, 「울고 싶은 마음」 전문, 
「있다」 수록, 현대문학, 2021 - P76

시인은 지금 울고 싶은 마음입니다. 울고 싶은데 울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버스를 타고 울음을참아요. 그래도 창밖을 내다보게 됩니다. 차창 밖으로 흐려진 간판들이 보입니다. 간판들이 왜 흐려졌을까요? 눈물이 차올랐거든요. 눈물이 차오르니까 간판이 뿌옇게 보입니다. 이렇게, 울음이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병원에 놓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적 있으신가요? 몸은 버스에 탔는데 마음은 타질 못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으면 그 이후로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할 수없어요. 비가 오는 날마다 내 마음 아프게 한 그 사람이 생각날 거잖아요. 이 시의 모든 단어가 저는 단 하나의 단어, ‘사랑한다‘로들립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울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저 시의 어느 한 구석에 내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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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에서

6개월에 걸친 중국 현지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들은 이탈리아로 이동해 로마의 치네치타(영화 도시)라는 촬영소에서 그다음 부분을 찍었다. 스튜디오 바로 옆 동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촬영을 하고,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휘적휘적 돌아다니고, 정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스트로이안니는 궐련을 입에물고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모습이 엄청 멋있었다.
치네치타는 무솔리니가 만든 거대한 영화 스튜디오여서, 성립 과정에 만주영화협회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히틀러도 그렇고, 파시스트는 아무래도 다들 영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일본의 파시스트가 만든 만주국의 수도 창춘에서 동시대에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만든 치네치타로 이동했다는 점도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같았다. 여기저기서 망령들이 어슬렁거리는 통에. - P202

파시즘에는 숭고한 미에 대한 강한 동경심 같은 게 있었다.
그저 야만적이었던 게 아니라 고귀하고 교양 있고 세련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베르톨루치의 작품 속에 묘사된 파시스트들도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아마카스의 사무실은 미래파 그림으로 장식해야 했던 것이다. - P202

런던에 도착해보니, 이럴 수가, 영화 편집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당연히 내가 만들어온 음악과 맞을 리가 없었다. 베르톨루치감독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반년이든 1년이든 편집을 거듭해서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었다. 편집이 자꾸만 바뀌어서 원래 있던 장면이 없어지고 순서가 달라지고, 완전 난장판이었다.
다음 날 다시 녹음하기로 했지만, 음악과 맞지 않는 곳이 여기저기 생겨버렸으니 철야로 당장 그날 밤 안에 우에노와 함께호텔 방에서 곡을 새로 썼다. 피아노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호텔방에서, 그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어서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몇 - P205

초가 줄어들었으니까 아귀를 맞추려면 몇 소절하고 몇 박자를빼야 한다며 죽을 둥 살 둥 계산해서 고쳐나갔다. 완전히 난리법석이었다. 결국 런던에 도착한 뒤로 1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낮에는 녹음, 밤에는 수정, 그 짓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그러나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푸이의 두 번째 왕비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뛰쳐나가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나는 그 장면도 좋고 그 여배우도 무척 좋아했는데, 그 부분의음악 「Rain」을 처음 들려주었을 때, 다들 "벨리시모bellissimo! 벨리시모!"라고 환성을 지르며 서로 끌어안고 춤이라도 출 것처럼크게 기뻐해주었다. 깜짝 놀랐지만, 그 순간의 일체감은 잊을 수가 없다. 아아, 이게 이탈리아 사람과 작업하는 기쁨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 P206

그중에서도 이스트우드의 언급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9개 부문을 독차지했으니 올해는 「마지막 황제」의 해였다"라 치하하고 "미국은 이런 영화를 더 이상 찍을 수 없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이스트우드가 말한 "이런 영화"란 "군중을 찍어내는 영화였다. 할리우드는 멀리는 「인톨러런스」에서부터 대대적인 무대 장치를 준비하고 카메라와 조명 방법을 숙고하고 다양한 기술을 결집해 군중을 찍어내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영화는 완전히 내향적인 분위기로 바뀌어 거대한세계는 더 이상 묘사하지 않고 있었다. 내면으로, 내면으로, 아래로, 아래로, 라는 느낌이었다.
"옛날 할리우드에서 볼 수 있었던 대규모 군중이 움직이는영화를 이탈리아 감독 베르톨루치가 만들어주었다. 미국은 이런 영화를 더 이상 찍을 수 없다"라고 이스트우드는 말했다. 그한마디를 들었을 때,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 P209

배우나 작곡가의 입장을 떠나 관람자의 시선으로도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에는 재미있는 점이 아주 많았다.
베르톨루치는 역시 문화대혁명을 가장 중요한 테마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는 이 혁명을 통해서 황제에서 일개 평민으로 변모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건 이른바 마오쩌둥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곤충으로 치자면 번데기에서 성충이 되어가는 식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귀뚜라미가 푸이 황제와 중첩되는 존재로서 상징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때까지 베르톨루치의 작품에서 다뤄진 다양한 주제가 이영화에 집약적으로 나타났다는 점도 놓칠 수 없는 재밋거리이다. 「1900년」과 「마지막 황제는 그 무대가 이탈리아와 청나라로 완전히 다르지만, 내게는 형제와도 같은 영화로 생각된다. 이를테면 "천" 모티프, 「1900년」 속에는 붉은 깃발이 수없이 펄럭이는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황제」에서는 황제의 대관식에서 노란색의 거대한 천이 펄럭인다. - P210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자전거" 모티프이다. 자전거는 베르톨루치 감독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라면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소품인데, 「1900년」과 「마지막 황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몹시도 봉건적인 청나라 사회에서 황제가 자전거를 타는 일 따위 허용될 수 없었을 텐데도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는 역시 자전거를 탄다.
그밖에도 "문과 벽", "난무亂舞",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아버지" 등, 베르톨루치적인 주제가 많이 담겨 있다. 내가 만든 음악도 그런 베르톨루치적인 모티프를 충분히 의식한 곡들이었다.
문의 테마, 이별의 테마.
당연히 프로이트적인 시점에서 혹은 롤랑 바르트적인 시점에서 해석해보는 일도 무척 재미있다. 유럽의 관객들은 아마도 그런 점을 즐기면서 감상하지 않을까. - P211

베르톨루치라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감독과 한 팀이라는 사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역의 사람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했다. 아무리 작은 시골 마을이라도 정말 귀하게 대해주었다. 때때로 나는 "사람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와인도 끝내주니까 앞으로 콘서트 투어는 이탈리아에서만 할까?"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반드시 공연 홀이있고 모든 관객이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었다. 딱히 베르톨루치의 영화에 삽입된 곡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상당히 실험적인 음악을 연주해도 연주자의 그런 열정을 받아주었다. 그런 점은 역시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P212

이쿠타는 마지막 황제」의 촬영에도 동행해주었다. 그 작업은 이쿠타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은 그가 일본인의사 역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카데미상 수상식에도 물론 함께 참석했다.
영화도 괜찮은 형태로 완성되었고 서로 장기간 엄청난 밀도로 일했으니까 잠깐 우리 자신에게 상을 주자, 라는 생각에 처음으로 긴 휴가를 냈다. 약 한 달 예정이었다. 이쿠타는 멕시코로가고 나는 오키나와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길로 이쿠타는 여행지인 멕시코에서 죽고 말았다. 자동차 사고였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일이었다.
나는 오키나와로 떠나기 전날 밤 멕시코에서 걸려온 전화로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시 여행을 취소하고 텍사스를 경유해 멕시코로 시신을 인수하러 갔다. 그가 사망한 곳은 푸 - P217

에르토 바야르타라는 극히 평범한 관광지였다. 자동차가 절벽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대체 얼마나 굉장한 절벽이기에, 라고 생각하면서 가봤는데 딱히 높지도 않고그저 몇 미터에 불과한 곳이었다. 현장이 전혀 극적이지 않다는점이 도리어 더 슬펐다. 왜 이런 데서 죽어버리는 거야, 하고.
그로부터 반년쯤, 나는 도저히 떨치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럽게 잃으면 거기에 어떻게도 저항할 수 없다는 데에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강렬하게 느낀 바는, 이건 친한 사람을 잃었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얼마나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무지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와 몇 년씩 날이면 날마다 함께 지냈는데 그가 정말로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틈의 깊이에 나는 완전히 절망해버렸다. - P218

어린 딸이 있으니 여기저기 이사를 다닐 수 없었지만, 아마나 혼자였다면 분명 사방을 떠돌았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 쪽이 꽤 재미있다고 느낀 적이 많았고, 미국에 싫증이 나면 이탈리아로 가서 살 생각도 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형편만 닿는다면 어디에서 살건 상관없고 누군가 불러준다면 어디든 간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교토 근처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능하면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는 것만은 피하고싶다는 생각도 있고.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뒤에 주로 베를린이나 뉴욕에서 살았던 백남준 씨가 한 말 중에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게 있다. 한국인은 약간 수렵민적인 성향이라서 사냥 - P224

감이 있으면 어디든 따라가며 산다. 사냥감이 다른 쪽으로 옮겨가면 그것을 찾아 이동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어민적인 성향이라고 할까, 원양어업에 나서기는 해도 자신의 포구,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런 말이었다. 그게 맞는 말이라면 나 역시 지금은 원양어업을 나와 있지만 이러다가 문득 내 포구, 내 마을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 P225

뉴욕에는 그때까지 몇 번이나 일 때문에 들락거렸지만, 호텔 숙박과 실제 주민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역시 전혀 달랐다. 현지에서 생활하는 사이에 많은 것을 배웠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가구를 사게 되었다. 가게에 가서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주문했다. 그다음 주쯤에는 배달될줄 알았더니 3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내 귀를 의심했지만 어쩔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3개월 뒤에 드디어 물건이 도착해서 포장을 풀어보니 직접 조립해야 하는 가구였다. 화가 났지만 아무튼 조립에 돌입했는데, 이번에는 부품이 부족했다. 게다가 부품이 도착하는 데 다시 2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성질 급한 나는 정말 펄펄 뛸 만큼 분개했다. 전화를 개설할 때에도 업자가 도무지 - P225

와주지 않았다. 나는 있는 대로 화가 나서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업자와 대판 싸움을 했다.
그러나 물건을 주문하면 금세 도착하고 사람을 부르면 즉시달려오는 나라는 일본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뿐이다. 그러니 잘와주는 쪽이 오히려 특이한 편이다. 아마 이탈리아나 모로코나중국이라면 그런 서비스를 받기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일본의 잣대로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진리를 1년쯤 지나서야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 P226

무슨 동경심이 있어서 뉴욕으로 이주한 건 아니지만 이따금 뉴욕이란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물론 있다.
음악에 관해서 말하자면, 역시 "인종의 도가니"라는 말대로 전 세계의 음악이 바로 손이 닿는 곳에 모두 모여 있다. 이곳으로 건너온 뒤로 브라질 음악가 네트워크를 통해 힙합을 하는 젊은이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가까운 델리 deli의 한국인 점주가 사실은 가야금 명인이었던 일도 있었다. 레코딩을 할 때, 잠깐 아프리카의 기타를 넣고 싶어서 친구에게 문의하면 벌써 그다음 날에는 아프리카 연주가가 직접 와준다. - P226

도쿄도 꽤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지만 아무래도 그런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역시 뉴욕은 뮤지션 층이 다른 어느 곳보다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발리나 런던에도 외국인 뮤지션이 많지만 뉴욕만큼 다양한 나라의 폭넓은 음악을 커버하지는 못한다. 뉴욕이라면 남아메리카인, 중동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이 모두 모여 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또 한 가지, 뉴욕이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무관심이랄까, 그런 것이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뉴욕에서는 공동체적인 뭔가에 결코 기댈 수 없다고 할까, 그리 쉽게는 타인을 사랑해주지 않는 도시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어렸을 때부터 어딘가에 소속되는 일이 몹시 싫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편안하다. 우선은 어떤 사람도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다. 내성향에 딱 맞는 일이다. 아무튼 어느 날 훌쩍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문득 돌아보니 벌써 19년째이다. 어느 새 미국은 내 인생에서가 오래 머문 지역이 되었다.. - P228

9월 11일 아침 9시, 나는 뉴욕의 내 방에 있었고 슬슬 아침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항상 우리 집에 드나들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울면서 뛰어들어왔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세계무역센터가 불타고 있다. 친구가거기서 일하는데 아까부터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라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깜짝 놀라 얼른 텔레비전을 켜봤더니 불타오르는 빌딩 영상이 흘러나왔다. 사고가 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끼리 두런거리는 참에 두 번째 비행기가 빌딩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그때쯤에는 이미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영상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결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7번가로 뛰어나갔다. 빌딩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나는 평소에 사진을 그리 많이 찍는 편이 아니다. 그리 잘 찍 - P250

는 편도 아니다. 하지만 문득 깨닫고 보니 내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연히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반드시 기록을남겨두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곧 하나둘 정보가 정리되고, 탈레반과 알카에다에대한 내용이 보도되고, 아프간 공격이 시작되고, 나아가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이 그렇게 되자 그 모든 일의 참된 진상까지는 알지 못해도 어떻든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채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그려낼 수 있는 스토리를 짜내고 다양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도 그 한 가지 버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테러가 일어났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맛본 적이 없는 공포를 느꼈다. 완전히 새로운 진짜 공포와의 조우였다. - P251

그래서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이 9-11 직후에 "그것은 최대의 예술 작품이다"라고 말했던 게 나는 이해된다. 그는 이 발언으로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그 테러는 분명 모든 사람을 수수께끼 속으로 빨아들인, 해석을 뛰어넘는 사건이자 퍼포먼스였다. 인간을 단 한순간에 전혀 해석 불가능한 상태에 빠뜨리고 공포라든가 외경 같은 것을 부여한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 - P251

지향해온 바이다. 앤디 워홀만 해도, 요제프 보이스만 해도, 존케이지만 해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압도적인 충격의 이 사건앞에서 예술은 아예 묵사발이 되었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너무 무서워서 한시라도 빨리 뉴욕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1주일 동안 터널도 다리도 모조리 봉쇄되어 어느 누구도 도망칠 수 없었다. 맨해튼이 섬이었기 때문이다.
봉쇄가 풀린 뒤에도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알래스카에는 군사 기지가 있고 하와이에도 군사 기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고 일본은 온통 미군 기지투성이이다. 어디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 P252

인간은 위급한 처지가 되면 평소에는 무심코 넘기던 하찮은 정보까지 모조리 끌어모으려 들게 된다. 전방위적으로 과민해지는 것이다. 그러자 음악을 할 수 없었다. 감각의 허용량을 넘어버렸다. 음악이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그 소란스러운 뉴욕이 온통괴괴해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클랙슨을빵빵거리지 않고 제트기도 날지 않았다. 엄청나게 조용했다.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뉴욕 전체를 뒤덮었다. 그런 판에 누군가 기타 같은 걸연주했다면 아마 얻어맞았을 것이다. 아아, 이런 것이 전쟁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윽고 노래가 들려온 것은 체념 때문이었다. 테러로부터 사 - P254

홀이 지나고 더 이상 생존자가 나올 수 없음을 모두가 받아들였을 때 추모 기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 곳곳에서묵도를 올렸다. 음악이 다시 나타난 건 그때부터였다.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장송이라는 의식을 위해, 비로소 음악이 필요했다.
예술의 근원을 지켜본 것 같았다.
 
테러 직후는 공포 속에서 필사적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는나날이었다. 인간이란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하는 존재다. 정보를 수집하고 상황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고민하지 않으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공포가 정말로 극에 달하면 사고가 정지되는지도 모르지만,
그 한 걸음 전 단계에서 인간이란 필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였다. 예를 들어 옆집에 번개가 떨어지면 다음에는 과연 어디에 번개가 떨어질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분명 거기서 과학이 태어나고 예술이 창조되었을 것이다. - P255

환경 문제에 대해 발언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인지 "환경 친화적인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 기본적으로그런 음악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 답을 찾고있는데, 만일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죽었다"까지는 아니어도 인간을 부정하는 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신교적인 것, 즉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 역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식의 발상, 인간이 생각해낸 그런 것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고 싶다. 그런 마음이 점점 강해진다. 그 마음이 아마 이번 앨범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다. - P282

2008년 가을에 그린란드에 갔던 체험의 영향도 컸다. 열흘 남짓한 여행이었지만, 출발 시점이 마침 앨범 제작 시기와 맞물려본격적으로 창작 의욕이 솟구치던 참이었다. 일의 흐름이 끊기는게 싫어서 그 여행이 영 내키지 않았다. 결국 출발 직전에 "역시가고 싶지 않다"라며 한 차례 거절까지 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작업을 잠깐 멈춘 것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예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특별하고 풍성한 시사점을 얻어낸 자극적인 중단이었다. 그린란드에 다녀오기 전과 후는 분명 음악의 느낌도 크게 달라졌다. 작품의 방향성이 보다 선명해진 것 같다. - P282

과연 어떤 시사를 얻어왔는가. 그 체험의 의미를 열심히 소화해서 요약해보려고 하는데 아직은 제대로 언어적인 표현을할 수가 없다. 자연이라는 것의 거대함에 압도되었다, 라고 말할수밖에 없을 듯하다. 참으로 압도적인 양의 물과 얼음덩어리. 그것이 빚어내는 풍경과 추위. 그 인상이 너무도 강력해서 나오지를 않는다, 말이.
인간이 자연을 지킨다, 라는 식으로 우리는 말하곤 한다. 환경 문제를 언급할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건 발상 단계에서부터 잘못 짚은 말이다. 인간이 자연에 거는 부하負荷와 자연이 허용할 수 있는 한계가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패자가 되는쪽은 당연히 인간이다. 즉 난처해지는 쪽은 인간이지, 자연은 전혀 난처하고 말 것도 없다. 자연의 거대함, 강함에서 보자면 인간이란 정말 한주먹감도 되지 않는 소소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여행 내내 얼음과 물의 세계에서 보내면서 끊임없이 느꼈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 없어도 좋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 P283

뉴욕으로 돌아온 뒤에도 어쩐지 영혼을 북극권에 두고 온 것처럼 좀체 문명 사회의 일상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한편으로는 금융 위기에 따른 공황이 점점 확대되는 상황이지만 그 힘겨운 일조차 뭔가 정말로 작고 사소한 것처 - P283

럼 느껴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인공적으로 구축된곳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의 맨해튼, 그야말로 금융 위기의 진원지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인간 세계나 현재의 일과는 조금 동떨어진, 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최대한 손을 대지 않고, 조작하거나 조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소리를 가만가만 늘어놓고 찬찬히 바라본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다. - P284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坂本龍一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78년 앨범 Thousand Knives』로 솔로 데뷔했으며, 같은 해에 YMO를 결성했다. YMO 해체 후에도 다방면으로 활약하며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음악으로 영국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마지막 황제」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 그래미어워드, 골든글로브상 등을 수상했다. 항상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자세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삼림보전단체 "모어 트리즈More Trees"를 설립하는 등 환경과 평화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립하여 음악을 통해 동일본대지진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다.
주요 영화음악 작품으로는 「마지막사랑」(1990), 「하이 힐」(1990),
「팜므 파탈」(2002), 「토니 타키타니」(2005),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분노」(2016), 「남한산성」(2017), 「당신의얼굴」(2018), 「미나마타(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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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초기 작품부터 빼놓지 않고 읽었다.
특히 인상적인 소설은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성적인간』,「세븐틴」 프랑스어를 그대로 일본어로 번역한 듯한 문장이 무척 멋있고, 과격하고 전위적인 점에 끌렸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뭔가 새로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도 엄청나게 많이 봤다. 우선은 남들 다 하는 대로 다카쿠라 켄이 나오는 야쿠자 영화, 신주쿠의 나카도리에 위치한 쇼와칸이라는 영화관에서 매주 세 편씩 연속상영을 했다. 「붉은모란 도박사」 같은 영화를 매주 빠짐없이 감상했다. 신주쿠 도로변에는 명화 전용 상영관이 있어서 제임스 딘이 등장하는 오래된 명화를 저렴한 값에 볼 수 있었다. 150엔 정도였던가. 그리고 ATG‘ 계열인 신주쿠 문화라는 영화관으로는 동시대의 영화 - P82

를 보러 다녔다. 기억에 남는 영화감독은 피에르 파솔리니, 프랑수아 트뤼포, 장뤼크 고다르, 페데리코 펠리니. 일본 감독으로는 마쓰모토 도시오, 요시다 요시시게, 오시마 나기사.
가장 좋았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고다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치광이 피에로」를 처음 감상한 뒤부터 그 이후의 작품은 거의 개봉 즉시 챙겨보았다. 중국 여인」, 「주말」, 「동풍」까지. 「중국 여인」은 1968년 5월 혁명 이전의 작품인데도 그것을완벽하게 예언해서 진심으로 흥분했다. 매우 대중적이고 색채감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 시기 이후 고다르의 작품은 메타 영화라고 할까, 영화라는 형식 자체를 되묻거나 해체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졌다. 「프라우다」 「동풍」 같은 작품이 바로 그런 예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건 영화의 경향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그다음 세대 미국 작곡가들의 음악에서도 고다르와 일맥상통하는 면을 찾아볼 수 있다. - P83

나는 겨우 열 살 정도였고 그때까지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만 들었으니 그 콘서트에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도 음악이란 말이야?‘ ‘와아, 이런 것도 좋구나!‘ 그런 생각들을했다.
그 얼마 뒤에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베토벤을 좋아하게 되고 마침내 드뷔시를 만났다. 앞서도 말했지만 외삼촌의 레코드 컬렉션에 있던 드뷔시의 현악 사중주를듣고 충격을 받은 나는 그야말로 흥분해서 내가 드뷔시의 환생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고는 라벨,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벨러 버르토크로 조금씩 새롭게 음악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올리비에 메시앙, 피에르 불레즈,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루차노 베리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를 돌아보니 도리어 학술적인 노선의 현대음악을 한바탕 훑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동일한 선상의 일본 작곡가, 이를테면 미요시 아키라, 야시로 아키 - P86

오, 유아사 조지, 다케미쓰 도루....... 모두 당시에 현역으로 곡을 쓰던 작곡가들인데, 그들의 음악도 자주 들었다.


그 한편에서 존 케이지의 음악과도 만났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때, 음악 잡지를 통해 알고서 듣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의 현대음악이 매우 복잡한 이론을 바탕으로 곡을구축해나가는 데 비해 케이지는 대담하게 우연성을 도입하고있었다. 주사위를 던져 그때마다 나온 숫자에 따라서 곡을 만들기도 했다. 그건 유럽 음악의 계보에서 크게 일탈한 시도였다. 내가 작곡 선생님 댁에서 매주 공부했던 음악과도 물론 맞지 않았다. 그런 특이한 음악을 만난 일은 정말 인상적이었고, 그 충격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초등학생 때 갔던 그 연주회에서 이미 케이지와 통하는 음악(어쩌면 케이지의 작품도 연주했었는지 모른다)을 접하기는 했지만. - P87

초등학생 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바흐부터 시작해 베토벤, 드뷔시, 그리고 이른바 현대음악, 뒤를 이어 시대를 따라잡듯이 수없이 밀려들어온 서양음악은 1960년대 말 시점의 내게 동시대의 음악이 되었다. 서양음악사와 개인사를 교차시키면서 문득깨닫고 보니 나는 작곡의 현장과 동일한 시간 속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음악가들의 문제의식이 나 자신의 문제의식과 겹쳐지면서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무렵은 고교생으로서 마지막에 접어든 시기였다. 나는 학교나 사회의 제도를 해체하겠다는 운동에 몸을 던졌지만, 동시대의 작곡가들도 기존의 음악 제도나 구조를 극단적인 형태로해체하려 하고 있었다. ‘서양음악은 이미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우리는 종래의 음악으로 막혀버린 귀를 이제 해방해야 한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말 그대로 해체의 시대였다.
그런 의식이 내 음악으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한 것은 한참더 나중의 일이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 P91

전자음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서양음악은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는 생각 외에도 "민중을 위한 음악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특별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음악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종의 게임 이론적인 작곡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이었다. 작곡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누구든 가능한 일이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좀더 끈기 있게 추구해나가면 방법적으로 알맹이 있는 것이 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런 바람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나 문제의식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의 내 안에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P110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하고 큰 감명을 받은 존 케이지, 발매되자마자 들었던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 그리고 라몬테 영. 그런 음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미술학부 친구들과는제법 말이 통했다. 그들은 미술수첩』 같은 책을 샅샅이 읽었기때문에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은 물론이고 동시대의 전위예술에무척 박식해서 그 연장선상에서 라이히 등의 음악도 당연하다는 듯 훤히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전적으로 미술학부 쪽에만 들락거렸다. - P113

내가 공부한 방식, 즉 계통을 세워서 레슨을 받고 학교 수업으로 음악에 대한 지식이나 감각을 배워가는 것은 사실 간단한일이라고 할까. 알기 쉬운 방식이다. 스텝을 차례차례 올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호소노 씨는 그런 식의 학습을 해오지도않았는데 분명하게 그 핵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대체 이건또 뭔가, 완전히 수수께끼였다. 뛰어난 귀를 가졌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한 도리가 없었다.
또 한 명, 거의 동일한 경이감을 느끼게 한 사람이 야노 아키코 씨였다. 아키코 씨의 음악을 들었을 때에도 고도의 이론을 모두 섭렵한 끝에 그런 음악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보니역시 이론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즉 내가 계통을 밟아 포착해온 언어와 그들이 독학으로 얻어낸 언어는 거의 같았다. 공부해온 방식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동일한 언어로 대화할수 있었다.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 P128

그리고 재즈 평론가 아이다 아키라. 그는 현대사상을 열정적으로 연구해서 난해한 비평을 써냈다. 고교 시절에 읽은 히라오카 마사아키의 비평에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지만, 그가 쓴 비평은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말도 통했다. 하지만 그도 아베 가오루가 사망한 직후 그 뒤를 쫓듯이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절친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인간이란 서로 얼마나 먼 사이인가, 나는 얼마나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서로 그럭저럭 말이 통했기 때문에 어쩐지 상대를 잘 아는 듯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친구가 죽었을 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항상 그렇다. 내 경우에는. - P135

일용직 노동자 같은 일을 계속하면서 속절없이 나이 들어가는 뮤지션도 많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업계에서 점점 지위가 올라간다. 제자 몇 명쯤 거느리고 스튜디오를 낼 정도가 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좀 별로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은 세계에서 골목대장이 되는 식이어서는 끝장이다. 벗어나야 한다, 라는 절박감이 있었다.
일용직 노동자일 때에는 편곡자, 디렉터, 프로듀서가 있어서 그들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이를테면 음악 로봇 같은 것이어서나 자신의 음악성 따위는 거의 들이밀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솔로 앨범이든 YMO의 앨범이든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할 수 있었다. 그건 엄청나게 큰 차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날이면 날마다 새벽까지 꼬박 나만의 창작을 할 수 있었다. - P145

영화음악을 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나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젊음의 기세라는 건 참 대단하다고나 할까. 하지만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막상 음악을 만들 단계가 되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영화음악?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야?‘ 영화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촬영을 통해 친해진 프로듀서 제러미 토머스에게 물어보았다. "참고할 만한 영화 한 편을 예로 들어보라고 한다면뭘 추천할 거야?" 그가 「시민 케인」이라고 대답했다. 당장 비디오테이프를 사 왔다.
그 영화에서 참고한 것은 오케스트레이션이나 멜로디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 음악을 붙이고 어떤 타이밍에 사라지는가, 즉 - P170

순수한 영상과의 관계였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지극히 단순했다. 영상의 힘이 약한 곳에 음악을 넣는다는 것. 신비한 분위기고 뭐고 없었다.
영화 일이니까 영화음악에 대해서도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감독이다. 미리 음악을 어디에 어떻게 넣을지 내 나름대로 리스트를 만들고, 오시마 씨도 자신의 리스트를 만들어 와서 회의를했다. 그랬더니 음악을 넣는 부분에 대한 의견이 99퍼센트 일치했다. ‘뭐야,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네.‘ ‘프로와 똑같은 답을 냈잖아‘ 그렇게 완전히 자신감이 붙었다. 정말 혼자 잘났었다. - P171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1983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나는5월에 칸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을처음으로 대면했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에 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이다"라든가 "그 영화를 위한 중국과의 협상이 너무 힘들어 죽겠다"라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의팬이었기 때문에 행복한 기분으로 아마도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들었을 것이다. - P171

이런 매력적인 인물과 함께 일하고 싶다, 오시마 씨뿐만 아니라 베르톨루치와도 일하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탐욕스러운 청년이었다. 하지만 설마 내가 그 작품의 음악을 담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쪽에서도 나한테 음악을 해달라는 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본적으로 바로 코앞의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타입인 데다 애초에 YMO에 참가해 음악을 평생 직업으로 의식한 것부터가 겨우 그 2-3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참여하고 칸에서 베르톨루치를 만났던 일이 내 작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음악의 축을 서서히 만들기 시작한 계기였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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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57년의 반생과 그를 둘러싼 음악의 세계,
모든 것을 이야기한 최초의 자서전


서구권에서 먼저 명성을 얻으며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세계적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전자음악의 개척자이자 작곡가, 영화음악가, 영화배우, 모델, 사회운동가 등 수많은 수식어로 설명된다. 이 책에서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2년간 잡지「엔진ENGINE」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하여 류이치 사카모토의 반생을 돌아본다. 그 안에서 유치원 시절 숙제로 「토끼의 노래를 작곡했던 어린아이는 세계적인 밴드 YMO의 멤버이자 솔로 음악가, 아카데미 음악상과 골든글로브상, 그래미어워드를 수상한 영화음악가로 성장하고, 같은 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10대 소년은 반전과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운동가로 탈바꿈한다. 독자들은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그의 반생을 통해 수십 년 후에도 결코 퇴색되지 않을 그의 음악과 철학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내 인생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속내를 밝히자면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기억의 단편을 정리해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낸다는 건 사실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현재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적잖이 흥미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 자신의 일이니까. 어떻게 이런 인생을 보내게 되었는지 나로서도 무척 궁금하다.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음악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적도 없고, 어릴 때부터 꼭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 P7

음악이란 "시간 예술"이라고 한다. 직선적인 시간 속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켜나가는 창작 활동이라는 말인 모양이다. 그런의미에서 애초부터 음악을 지어내는 재주는 내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공부하면 배울 수 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은 룰을 배우기만 하면 가능하다.
룰을 외우고 그 룰대로 뭔가를 축적해나간다. 일반적으로 성장이란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런 생각과 어딘가 항상 어긋난 듯한 느낌이 있었다. 공부를 하면 뭔가를 잘할 수는 있겠지만, 왠지 생리적으로 그런 과정이 내게 맞지 않는 듯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래서 과거에서 현재까지 나 자신을 정리해 이야기한다는 데에 사실은 적잖이 위화감이 든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부감해보고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기억과 사건을 순서대로 펼쳐놓고그것을 연결해본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현재의 나에 대해 뭔가 보일 것이고, 그런 표현 방식을 통해서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 P10

이를테면 현재 레바논에서처럼 전쟁이 벌어져서, 이 전쟁으로 혈육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고 하자. 어느 레바논 청년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랑하는 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건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시점부터 음악 세계의 소유가 되어버려서 아무래도누이의 죽음 자체로부터는 멀어진다.
분명 글을 쓰는 일도 그럴 것이다. 어떤 일을 글로 써내려가는 시점부터 이미 좋은 문장인가, 아름다운 문장인가. 힘이 있는 문장인가 하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누이의 죽음에 진심으로 비통한 심정을 품었다고 해도, 음악을 만드는 한 음악 세계의 문제로 진입하고 만다. 그것은 실제로 겪은 누이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어서 두 가지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생겨난다.
한편으로, 누이의 죽음은 그 청년의 기억이 사라지면 역사의 - P20

어둠 속에 묻혀 소멸되겠지만 노래가 되는 일을 통해 민족이나세대의 공유물로서 오래도록 남을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인 체험과의 박리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세계의 실존을 얻는 것으로써,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힘을 가졌다.
표현이란 결국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 타자와 공유할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추상화라고 할까, 공동화라고 할까,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개인적인 체험이나 아픔, 기쁨은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결손감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맞바꾸어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종의 통로가 생긴다. 언어도 음악도 문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 P21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바흐의 곡은 "여기에 조금 전의 멜로디가 나오는구나"라든가 "이번에는 반복해서 나왔어"라든가
"이번에는 두 배로 늘여서 나오는데?"라든가, 그저 멍하니 들었을 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점점 깨달을 수 있어서 정말즐거웠다. 와아, 음악이란 재미있는 것이구나, 하고 실감했다.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그 기초는 모두 도쿠야마 선생님에게서 배운 셈이다.

도쿠야마 선생님에게서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바흐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보통 피아노곡은 오른손이 멜로디, 왼손이 반주인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게 몹시 싫었다. 내가 왼손잡이였기 때 - P31

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흐의 곡은 오른손으로 나왔던 멜로디가 왼손으로 바뀌거나 나중에 형태를 바꿔 다시 오른손으로 나오기도 한다. 오른손과 왼손이 매번 역할을 바꿔가며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진행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건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팝이나 가요곡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자주 귀에 들어왔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은 바흐였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정말 연습이 싫다. 실은 집에서 연습이라는 걸 해본 적이 거의 없다. 한번 스윽 보고 연주하지 못하는 음악은 아무리 시간이흘러도 결국 치지 못했다.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미국 팝송 같은 걸 쳐보기도 했지만, 결국은「대탈주」 드라마를 흉내 내며 놀기에도 바빠서 피아노는 거의 치지 못했다. - P33

비틀스를 만난 시기는 마쓰모토 선생님 댁에 드나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작곡을 시작한 것, 비틀스를 만난 것, 두 가지 모두 내게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머릿속을 지이잉 울린 것은 사실 비틀스의 음악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잡지 표지에 실렸던 사진. 처음 본 순간 ‘와아,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부쩍 관심이 가면서 어떤 음악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도쿠야마 선생님에게서 레슨을 받는 중고등학생 누나들이그 잡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표지를 보고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비틀스라는 그룹"이라고 알려주었다. 정말 폼 난다고 생각했다. 그게 비틀스와의 충격적인 만남이었다. 그 잡지가 뮤직라이프였던 것 같은데, 분명하지는 않다. - P41

롤링스톤스도 큰 충격이었다. 연주가 너무 서툴러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멋있다, 너무 서툴러서 멋있다, 라고 생각했다. 펑크한 감각이다. 아직 어린 나름으로도 ‘이건 음악이 약간 틀리는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틀려도 괜찮은 거야?‘라고. 그런 점에서 비틀스는 상당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비틀스에게서 받은 영향도 물론 지대했지만, 롤링스톤스 쪽도 이후 내가 해온 음악 작업으로 이어졌다. 내 안에 롤링스톤스적인 것의 계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었고 그건 특히 아방가르드한 쪽으로 연결되었다.
고등학생 때쯤에는 존 케이지와 백남준 같은 사람들, 그리고 플럭서스와 네오다다이즘 같은 운동에 빠졌다. 그후에는 프리재즈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이단이랄까 전위적인 것을 좋아하는 - P42

경향은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롤링스톤스에서 시작되었다. 비틀스의 음악에서 보이는 세련미도 좋았고, 롤링스톤스적인 거친 맛도 좋았다. 어느 쪽도 버리기가 어려웠다.
비틀스는 우선 하모니가 굉장히 아름다웠다. 편곡도 아주 멋졌다. 그때까지의 아메리칸 팝의 심플한 3코드 음악이 아니라매우 복잡한 하모니를 사용했다. 이 울림은 뭘까, 하고 궁금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건 조지 마틴이라는 프로듀서가 상당히 공을 들인 결과였다. - P43

내가 얼마 전에 만나서 정신없이 몰두하게 된, 드뷔시가 좋아하던 바로 그 음이었다. 이 화음에 정말 엄청나게 가슴이 뛰었다. 오르가슴 같은 쾌감을 느꼈다. 너무 흥분해서 평소변변히 대화도 나누지 않던 아버지를 스테레오 앞으로 끌고 와서 비틀스의 레코드를 들려주기까지 했다.
드뷔시를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처음 들은 곡은 다른 외삼촌의 레코드 컬렉션에 있던 현악 사중주곡이었다. 여기에도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금세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자신을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거의 진심으로 믿었다. - P44

결국 도쿠야마 선생님과 마쓰모토 선생님을 찾아가 이번에는 나 스스로 다시 음악을 하게 해달라고 머리 숙여 부탁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내가 음악을 꽤 좋아하는구나, 라고 실감했다. 그만둬보고서야 깨달았다. 한 번 헤어진 뒤에 다시 만나 결혼하는 연인 비슷한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정말 뭔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내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농구부는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농구부 주장에게 찾아가 머뭇머뭇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뒤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퍽퍽 두들겨 맞고 길게 기른 머리칼을 뽑히기도 했다. 그런 시끄러운 의식을 거친 끝에 다행히농구부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음악에 빠져들었다. - P48

잠깐 멀리했던 반작용인지 나는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에 몰두했다. 이전까지 1주일에 한 번씩 산수 문제를 풀듯이 밤새 작곡숙제를 해서 선생님께 가져갔다면, 그즈음에는 좋아하는 곡의악보를 일부러 직접 구입해 숙제도 아닌데 열심히 연구했다. 이번에는 이 곡을 정복하자고 정해놓고,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는지 콩나물 같은 음표에서부터 분석해보거나 그것과 비슷한 곡을 만들어보는 등의 연습을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철저히 열중해서 해독해본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이었다. 지금 들어보면 그야말로 베토벤다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곡이지만 그때는 왠지 그 곡이 마음에 들어 반년 동안 반복해서 레코드를 듣고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중학교1학년 후반 때쯤의 일이다. - P50

그 곡은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음악과도 달랐다. 그토록 좋아하던 바흐나 베토벤과는 완전히 달랐다. 비틀스는 물론이고.
곡을 듣자마자 이건 또 뭔가 하고 흥분해서 완전히 드뷔시에게 사로잡혔다. 지나치게 공감하는 바람에 거기에 내 자아가 녹아들었다고 할까.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드뷔시가 바로 나 자신인 양 느꼈다. 드뷔시가 다시 태어나서 내가 되었다는 생각까지 했다. 나는 왜 이런 엉뚱한 곳에서 살게 되었는가, 왜 일본말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드뷔시의 필적을 흉내 내서 수없이 사인 연습을 하기도 했다. "Claude Debussy"라고.
그러나 내 주위에는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든 음악 이야기를 공유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학교에도 없고 집으로 돌아와도 없었다. 악보를 들여다보며 나 혼자 슬슬 피아노를 치면서, 아아,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까, 하고 고민했다. 혼자서 음악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었다. - P51

데모에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갔다. 재즈카페에 들락거리던 무렵에 스나가와의 투쟁에서 부상을 입고 머리에 붕대를 둘둘 감고 돌아온 선배가 있어서 스티브 매퀸처럼 멋있다고 부러워하던 끝에 나도 참여하기로 했다. 우선 샤켄에 들락거렸다. 그곳에 가면 어쩐지 눈매가 험악한 선배들이 잔뜩 모여서 몹시 난해해 보이는 책들을 읽고 있었다. 나도 따라서 읽었다. 맨처음 읽은 책이 경제학 철학 초고』였던가.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도 읽었다. 솔직히 뭐가 뭔지 전혀 알지못했다. 물론 빠뜨리지 않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선언』도 읽었다. - P76

3학년 가을, 신주쿠 고등학교에서도 수업 거부 활동이 펼쳐졌다. 1969년 가을이었으니까 당시로서는 다른 학교에 비해 늦은편이었다. 안보조약이니 베트남 전쟁 같은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국지적인, 학교의 개별 과제에 관한 비판운동이었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아마 7개 항목 정도로 정리해서 학교측에 요구했던 것 같다. 교복과 교모의 폐지, 모든 시험의 폐지, 생활 통지표 폐지 등등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인간을 수치로 평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는 내용이 핵심 요구 사항이었다. 그건 시험을 통해서 학생의 순위를 매겨 대학에 보내는 교육 구조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학교 제도의 해체를 주장한 셈이었으니, - P78

당연히 선생님들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평가를 하지 않으면 학생을 대학에 진학시킬 수없을 테니까. 하지만 시험을 강행하려는 선생님이 있으면 우리는 교실을 돌며 답안지를 찢어버렸다.
수업은 학생들끼리 진행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사건이 세계 역사라면서 베트남과 파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에드문트 후설의 책을 함께 읽으며 그의 현상학적 환원을 적용해보기도 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추진력과 용기였다. 돌이켜보면.
3학년 때는 절친한 친구 시오자키, 바바도 같은 반이어서 결속력이 더욱 강해졌다. 수업 거부가 4주일 동안이나 이어졌는데, 우리 반은 모두 마지막까지 지도부의 뜻을 따랐다. 결국 수업거부는 학생과 교사가 대화하기로 하면서 막을 내렸고, 선생님들이 그야말로 진지하게 토론에 응해준 끝에 교복도 교모도 시험도 정말로 없어졌다.
바리케이드로 봉쇄한 학교 안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헬멧을 쓴 채 드뷔시를 연주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정작 나는 잘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 그런 짓을 했다면 분명 인기 좀 끌어보려고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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