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

1979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나태주 시인의 딸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문학평론가이자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 강의평가 1위를 기록한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다. 2007년문학사상 신인평론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저서로는「제망아가의 사도들」, 「내게로 온 시 너에게 보낸다」, 「책 읽고 글쓰기」, 「반짝이지 않아도 사랑이 된다」,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 등이 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동아일보에서 주간 시평 《시가 깃든 삶》을 연재하며 시대의 정신과 감수성에 맞는시를 찾고 소개하는 ‘시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EBS <나의 두 번째 교과서>, <딩동댕 유치원>, CBS <세바시>, 유튜브 <교육대기자TV>, <다독다독> 등에 출연해 대중에게 문해력의 중요성을 알리고, 국어의 재미를 전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책에 대해 우리는 저자만큼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읽는 사람은 책 뒤에 숨겨진 저자의 시간에 대해 추측할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책의 뿌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요. ‘왜 이 사람이 왜 이런 얘기를 했을까?‘, ‘이 사람은 어떤 배경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됐을까?‘,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겉으로 드러난 문자의 총합을 읽는 게 아니라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라고 조금이라도 깨닫는 것이 생기면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
나를 위한 메시지를 책에서 찾아내는 순간이 바로 책과 대화하는순간입니다. 이런 소통의 과정이 바로 진짜 독서죠. 유명한 사람이 무슨 말을 적어놓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들어온 어떤 메시지 혹은 구절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여러분은 독서라는 ‘대화‘를 시작하신 겁니다. - P28

책을 읽을 때 꼭 기억해 주세요. 책을 사면 텍스트만 오는 게 아니에요. 그 책을 쓴 저자의 영혼이 따라오고, 일생이 따라옵니다.
책은 저자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애써 피어올린 꽃과 같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배운 공부, 사랑했던 사람, 살았던 시대.
모든 게 꽃이 필연적으로 피어날 수밖에 없는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을 때는 보이지 않는 저자를 살펴주세요. 안 보이는 것을 읽었을 때 우리는 "아주 잘 읽었다"고 말합니다. - P29

혹시 여러분,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저는 지인들과 카페에서브런치를 할 때가 종종 있는데요, 신나서 막 떠들기도 하죠. 그런때 어떨 때는 공허해지고,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후회도 생깁니다. 회식은 더합니다. 회식할 때 분위기가 시끌벅적하잖아요. 신나게 먹고 마신 후 밤늦게 택시를 타면 소위 말하는 ‘현타‘가 올때가 있어요. 괜히 말했다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들이 있죠.
그 모든 대화를 지우고 싶을 때,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대화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럴 때 조용히 책을 봅니다. 졸릴 때까지요. 다음 날 아침이 돼서도 그 찜찜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면 또 조용히 앉아서 책을 봐요. 책을 볼 때는 가만가만, 저자하고 단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 P30

소설을 보면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작가가 특별히 나에게 보여주는 세계인 거죠. 지식이 담긴 학술서를 보면내가 몰랐던 것을 저자가 특별 과외 해주는 것 같아요. 제 마음이저자를 따라다니며 생기를 찾을 때도 있죠. 책을 매개로 한 저자와의 소통은 브런치나 회식에서 나를 잃어버리면서까지 떠들었던 말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독서라는 대화는 내가 시작하고, 내가 덮을 수 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서 소비되는 대화가 아니라 - P30

내 안으로 들어와 쌓이는 대화가 됩니다. 저는 인간관계에 지치면실제 사람이 아니라 책 속의 사람(저자)을 찾아갑니다.
한번 해보세요. 의미 없고 헛된 대화에 지쳤다는 생각이 들 때한 권의 책을 통해 단 한 명의 저자와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이런 대화는 나한테 유익한걸? 하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 P31

시집을 읽을 때 60편 중에서 단 한 편이라도 내 마음에 들면 저는 성공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실린 건 시인의 마음이잖아요. 그 사람의 마음을 쓴 것이지 내 마음을 쓴 게 아니거든요. 저는 수많은 시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이런 감탄사를 터뜨립니다.
"어머, 어머! 이거 내 마음인데, 이 사람이 벌써 갖다 써놨네"
시는 이미지, 언어,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어떤 단어나 구절이마음에 든다면 그것을 모아 간직하세요. ‘이 시를 다 이해하겠다‘ 는 욕심은 조금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한 줄, 또는 어떤 구절이 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시집은 이미 여러분한테 온 거예요.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어떤 때는 잘 모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를읽다 보면 ‘아, 내가 느낀 마음이 이거였구나!‘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꼭 내 마음을 미리 써놓은 것 같죠. 이렇게 시집을 읽으면 자기마음을 알게 됩니다. 알쏭달쏭 있는지도 몰랐던 내 감정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장점이 있어요. - P32

소설은 작가가 낳은 자식입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누구냐가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 작가가 18세기 사람인지,
우리랑 동시대 사람인지, 동양 사람인지, 서양 사람인지에 따라 소설은 달라지죠. 그래서 작가의 이력을 확인하고 소설을 읽으면좋습니다.
또 소설은 작가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의실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결국 따뜻한 곳이야‘, ‘이 세상은 좀 이상한곳이야‘, ‘이 세상은 정말 살기 힘들어‘, ‘여긴 전쟁 같은 세상이야‘
등 각각 판단이 다릅니다. 작가는 주인공을 허구라는 실험실 안에 넣어 정답을 찾아보라고 시키고 그 과정과 결과를 모아 소설을 씁니다. 이걸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일종의 간접 경험인 셈이죠. ‘나는 잘 몰랐는데 이 소설의 세계가 사실 지금 세계네‘,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면, 나와 작가가 비슷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거예요. - P33

에세이는 작가의 일화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일화가 소설처럼 연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에피소드처럼 따로따로 읽히죠 그럼 연결되지 않는 이 이야기를 왜 읽을까요? 에세이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자세입니다. 작가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떠한 모토로 삶을 살고 있는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한두 개의 일화와 작가의 자세를 얻어갈 수 있다면 에세이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에세이에는 소란스럽거나 흥분된 글이 없어요. ‘주식 잘하는 법‘, ‘건물주 되는 법‘이런 실용적 내용이나 최신 정보도 없어요. 인생이란 무엇이고, 내가 걸어온 삶이란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삶의 잔잔한 에너지를 찾을 수 있는 게 바로 에세이입니다. - P34

책을 읽으면 내 안에 스며들어와서 내 정신과 영혼의일부가 됩니다.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가져와서 내 안에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이 독서의 끝입니다.
내 안에 꽂히지 않으면 어떤 읽기도 의미가 없습니다. 필사할때도 우리는 글씨를 쓰면서 의미를 되새기려고 하잖아요. ‘구절아, 내 맘에 들어오렴‘ 이런 뜻이죠. 결국 읽기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목표를 너무 원대하게 두지 말자고요. 그러면 가다가 지칩니다. 책에서 ‘나 자신의 구절 찾기‘를 해보세요. 이소박한 목표가 독서의 처음이자 완성입니다. - P43

영화 <곡성>을 보셨나요? 곡성이 지역 이름일까요? 곡하는 소리를 말하는 걸까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겠죠. 그런데 정리가 된 사람은 이를 다른 사람한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자신이 찾은 의미를 설명할 수 있으면 영화를 잘 본 겁니다. 영화의 디테일까지다 기억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쥐고 나오면 이 책은 내 안에 들어온 겁니다. 모든단어와 모든 이해를 완성하지 않았다고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 P46

저는 출발하는 순간부터 사진을 찍습니다. 덜 싼 여행 가방도 찍고, 아이들 표정도 찍고, 밥 먹으러 가서도 찍고, 돌아오는 순간에도 사진을 찍어요. 3년, 5년, 10년이지난 후에도 사진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르륵 보면 그 여행이 다시 복기가 됩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책의 귀퉁이를 접고, 밑줄 긋고,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고, 타이핑도 해보세요. 그러면 사진을 따라서 여행을 기억하는 것처럼 책을 다시읽는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는 즉각적으로 생기기보다 나중에 생기기도 합니다. 여행할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의미가 여행을되새기면서 따라오는 것처럼 말이죠. 스냅 사진 같은 메모를 통해책의 의미를 되새기는 깊이 있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 P47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김희성(변요한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농담 그런 것들."
대본을 쓰신 김은숙 작가를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시를 잘아는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대사는 나오기 힘들거든요. 김희성이 좋아하는 저 모든 것들은 바로 시인의 전형적인 친구들입니다. 선비에게 문방사우가 있다면 시인에게는 무용 - P57

한 아름다움이 있지요. 이백은 달을 노래했고 윤동주 시인은 「별헤는 밤」을 썼습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썼고, 마종기 시인은 「바람의 말을 썼지요. 별처럼 꽃처럼 무용한 것들을사랑한 사람들이 바로 시인입니다. 밥도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이왜 좋은 걸까요? 내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지도 못 하는데 왜 사랑하는 걸까요?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다 순간적으로 왔다가 금방 사라집니다. 시인은 지나가는 찰나의 감정을 포착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죠. 우리가 영원히 스무 살이라면 과연 스무 살이 찬란할까요?
저는 제가 가장 예뻤을 때 예쁜 줄을 몰랐어요. 스무 살 때 사람들이 "참 예쁜 나이구나"라고 말해도 저는 저를 미워했죠. 마찬가지로 지금 이십 대 청년들에게 "참 예쁜 시절입니다" 하면 그들은 잘모르더군요. 찰나니까 알 틈이 없어요. 하지만 찰나니까 아름답습니다. 금방 잃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지만 아주 소중하죠. - P58

시는 지금 이 순간을 남깁니다. 찰나에 나를 스쳐간 어떤 감정이스냅 사진처럼, 딱 한 번 찍을 수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남습니다. 공중으로 사라지는 감정의 시간을 포착해 내 앞에 현현시키

시는 지금 이 순간을 남깁니다. 찰나에 나를 스쳐간 어떤 감정이 스냅 사진처럼, 딱 한 번 찍을 수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남습니다. 공중으로 사라지는 감정의 시간을 포착해 내 앞에 현현시키는 겁니다. 마법 같은 순간이죠.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시인들도 살금살금 가서 휙 낚아챌 준비를 늘 하거든요. 아버지는 머리맡에 항상 종이와 연필을 두고 주무셨습니다. 왜 이런 습관이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다 사정이 있었어요. - P59

어느 아침에는 아버지가 잠에서 깨자마자 막 괴로워하셨습니다. "내가 어젯밤에 어떤 시를 꿈속에서 썼어. 정말기가 막힌 구절을 썼는데 아침에 눈 떠보니까 기억이 안 나." 이걸잡아야 한다며 시를 쓰십니다. 쓰면서 계속 지우세요. "이것도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그러더니 다음 날부터 아예 머리맡에다가 종이랑 펜을 두고 주무시더라고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쓰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도 성공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메모 준비는 항상 하셨어요. 비록 꿈에서 쓴 시는 못 잡더라도 어느 순간, 스쳐 지나가는 것을 훅 잡아서, 언어로 포착해서 시로 쓰겠다는 의지가 있으셨던 거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자라서인지 저는 시인들이 안쓰러울 때도 있습니다. 순간에 왔다 순간에 사라지는 무언가를 포착하겠다는 마음이 시인들에게 너무 간절하거든요. 예술가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 P59

시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지만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시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고 마법입니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살잖아요. 인생이 소중한 건 게임처럼 리셋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를 읽으면 지나간 줄 알았던 과거가 내 앞에 다시 돌아옵니다. 아주 순간이지만, 이런 순간을 놓칠 수가 없기에 저는 아직도 시를 읽습니다. - P64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서설》전문 - P67

아기가 뱃속에서 "엄마, 고마워, 한 달, 엄마, 고마워, 두 달" 이렇게 열 달을 헤아리기 위해서 손가락이 열 개가 되었다는 시적해석입니다. 이 시를 읽고부터는 제 손을 볼 때마다, 세면대에서손 씻고 나올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제가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닌데 손가락을 볼 때마다 감사해야 할 것 같고, 더불어 착해지는 것 같아요.
비합리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시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가 ‘인간은 본디 착하게 태어난 존재다‘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성선설을 믿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함민복 시인이 그 믿음을 대신 써준 거죠. 게다가 확실한 증거, 열 손가락을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었는데 몰랐던 뭔가를 하나씩 알아가게 됩니다. 내 마음을 수집한다고 할까요, 밝힌다고할까요. 저는 시가 어두운 밤하늘에 뜬 작은 별들 같습니다. 그 별들이 있다고 해서 엄청나게 환해지지는 않지만, 별들이 영영 없다면 내 마음이 또 얼마나 외롭겠어요. - P68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과거에 아이를 못 봐서 쩔쩔매던 저를용서했습니다. 한강 소설가처럼 대단한 분도 왜 그래, 왜 그래 울다가, ‘괜찮아‘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건 세상 모든 엄마가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정말 힘들었구나, 서른 살 민애야. 그때 정말 애썼구나‘라며 저를 다독였습니다.
이렇게 본인하고 비슷한 아픔을 찾아서 확인하면 애써 외면하던 아픔에 직면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냥 묻어두는 게 아니라 그때 충분히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되죠. 육아 초보 엄마인 제자신을 똥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시를 읽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한강 소설가는 소년이 온다 같은 좋은 소설도 여러 편 쓰셨는데 시집과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거예요. 시와는 또 다른 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 P71

일상의 순간도 시가 되지만 살다가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것을 토해냈더니 시가 되기도 합니다. 시는 산꼭대기, 구름 위에서본 풍경을 읊는 게 아닙니다. 시는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 우리 바로 옆에 있어요.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 P74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것

사람이 오면
사람이 가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더는 말하지 말아야지 - P75

암병원 흐릿한 건물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드는 마음
마음을 시로 쓰지는 말아야지
다짐하는 마음

_박소란, 「울고 싶은 마음」 전문, 
「있다」 수록, 현대문학, 2021 - P76

시인은 지금 울고 싶은 마음입니다. 울고 싶은데 울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버스를 타고 울음을참아요. 그래도 창밖을 내다보게 됩니다. 차창 밖으로 흐려진 간판들이 보입니다. 간판들이 왜 흐려졌을까요? 눈물이 차올랐거든요. 눈물이 차오르니까 간판이 뿌옇게 보입니다. 이렇게, 울음이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병원에 놓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적 있으신가요? 몸은 버스에 탔는데 마음은 타질 못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으면 그 이후로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할 수없어요. 비가 오는 날마다 내 마음 아프게 한 그 사람이 생각날 거잖아요. 이 시의 모든 단어가 저는 단 하나의 단어, ‘사랑한다‘로들립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울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저 시의 어느 한 구석에 내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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