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초기 작품부터 빼놓지 않고 읽었다.
특히 인상적인 소설은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성적인간』,「세븐틴」 프랑스어를 그대로 일본어로 번역한 듯한 문장이 무척 멋있고, 과격하고 전위적인 점에 끌렸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뭔가 새로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도 엄청나게 많이 봤다. 우선은 남들 다 하는 대로 다카쿠라 켄이 나오는 야쿠자 영화, 신주쿠의 나카도리에 위치한 쇼와칸이라는 영화관에서 매주 세 편씩 연속상영을 했다. 「붉은모란 도박사」 같은 영화를 매주 빠짐없이 감상했다. 신주쿠 도로변에는 명화 전용 상영관이 있어서 제임스 딘이 등장하는 오래된 명화를 저렴한 값에 볼 수 있었다. 150엔 정도였던가. 그리고 ATG‘ 계열인 신주쿠 문화라는 영화관으로는 동시대의 영화 - P82

를 보러 다녔다. 기억에 남는 영화감독은 피에르 파솔리니, 프랑수아 트뤼포, 장뤼크 고다르, 페데리코 펠리니. 일본 감독으로는 마쓰모토 도시오, 요시다 요시시게, 오시마 나기사.
가장 좋았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고다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치광이 피에로」를 처음 감상한 뒤부터 그 이후의 작품은 거의 개봉 즉시 챙겨보았다. 중국 여인」, 「주말」, 「동풍」까지. 「중국 여인」은 1968년 5월 혁명 이전의 작품인데도 그것을완벽하게 예언해서 진심으로 흥분했다. 매우 대중적이고 색채감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 시기 이후 고다르의 작품은 메타 영화라고 할까, 영화라는 형식 자체를 되묻거나 해체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졌다. 「프라우다」 「동풍」 같은 작품이 바로 그런 예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건 영화의 경향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그다음 세대 미국 작곡가들의 음악에서도 고다르와 일맥상통하는 면을 찾아볼 수 있다. - P83

나는 겨우 열 살 정도였고 그때까지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만 들었으니 그 콘서트에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도 음악이란 말이야?‘ ‘와아, 이런 것도 좋구나!‘ 그런 생각들을했다.
그 얼마 뒤에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베토벤을 좋아하게 되고 마침내 드뷔시를 만났다. 앞서도 말했지만 외삼촌의 레코드 컬렉션에 있던 드뷔시의 현악 사중주를듣고 충격을 받은 나는 그야말로 흥분해서 내가 드뷔시의 환생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고는 라벨,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벨러 버르토크로 조금씩 새롭게 음악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올리비에 메시앙, 피에르 불레즈,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루차노 베리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를 돌아보니 도리어 학술적인 노선의 현대음악을 한바탕 훑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동일한 선상의 일본 작곡가, 이를테면 미요시 아키라, 야시로 아키 - P86

오, 유아사 조지, 다케미쓰 도루....... 모두 당시에 현역으로 곡을 쓰던 작곡가들인데, 그들의 음악도 자주 들었다.


그 한편에서 존 케이지의 음악과도 만났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때, 음악 잡지를 통해 알고서 듣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의 현대음악이 매우 복잡한 이론을 바탕으로 곡을구축해나가는 데 비해 케이지는 대담하게 우연성을 도입하고있었다. 주사위를 던져 그때마다 나온 숫자에 따라서 곡을 만들기도 했다. 그건 유럽 음악의 계보에서 크게 일탈한 시도였다. 내가 작곡 선생님 댁에서 매주 공부했던 음악과도 물론 맞지 않았다. 그런 특이한 음악을 만난 일은 정말 인상적이었고, 그 충격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초등학생 때 갔던 그 연주회에서 이미 케이지와 통하는 음악(어쩌면 케이지의 작품도 연주했었는지 모른다)을 접하기는 했지만. - P87

초등학생 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바흐부터 시작해 베토벤, 드뷔시, 그리고 이른바 현대음악, 뒤를 이어 시대를 따라잡듯이 수없이 밀려들어온 서양음악은 1960년대 말 시점의 내게 동시대의 음악이 되었다. 서양음악사와 개인사를 교차시키면서 문득깨닫고 보니 나는 작곡의 현장과 동일한 시간 속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음악가들의 문제의식이 나 자신의 문제의식과 겹쳐지면서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무렵은 고교생으로서 마지막에 접어든 시기였다. 나는 학교나 사회의 제도를 해체하겠다는 운동에 몸을 던졌지만, 동시대의 작곡가들도 기존의 음악 제도나 구조를 극단적인 형태로해체하려 하고 있었다. ‘서양음악은 이미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우리는 종래의 음악으로 막혀버린 귀를 이제 해방해야 한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말 그대로 해체의 시대였다.
그런 의식이 내 음악으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한 것은 한참더 나중의 일이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 P91

전자음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서양음악은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는 생각 외에도 "민중을 위한 음악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특별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음악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종의 게임 이론적인 작곡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이었다. 작곡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누구든 가능한 일이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좀더 끈기 있게 추구해나가면 방법적으로 알맹이 있는 것이 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런 바람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나 문제의식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의 내 안에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P110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하고 큰 감명을 받은 존 케이지, 발매되자마자 들었던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 그리고 라몬테 영. 그런 음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미술학부 친구들과는제법 말이 통했다. 그들은 미술수첩』 같은 책을 샅샅이 읽었기때문에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은 물론이고 동시대의 전위예술에무척 박식해서 그 연장선상에서 라이히 등의 음악도 당연하다는 듯 훤히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전적으로 미술학부 쪽에만 들락거렸다. - P113

내가 공부한 방식, 즉 계통을 세워서 레슨을 받고 학교 수업으로 음악에 대한 지식이나 감각을 배워가는 것은 사실 간단한일이라고 할까. 알기 쉬운 방식이다. 스텝을 차례차례 올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호소노 씨는 그런 식의 학습을 해오지도않았는데 분명하게 그 핵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대체 이건또 뭔가, 완전히 수수께끼였다. 뛰어난 귀를 가졌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한 도리가 없었다.
또 한 명, 거의 동일한 경이감을 느끼게 한 사람이 야노 아키코 씨였다. 아키코 씨의 음악을 들었을 때에도 고도의 이론을 모두 섭렵한 끝에 그런 음악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보니역시 이론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즉 내가 계통을 밟아 포착해온 언어와 그들이 독학으로 얻어낸 언어는 거의 같았다. 공부해온 방식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동일한 언어로 대화할수 있었다.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 P128

그리고 재즈 평론가 아이다 아키라. 그는 현대사상을 열정적으로 연구해서 난해한 비평을 써냈다. 고교 시절에 읽은 히라오카 마사아키의 비평에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지만, 그가 쓴 비평은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말도 통했다. 하지만 그도 아베 가오루가 사망한 직후 그 뒤를 쫓듯이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절친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인간이란 서로 얼마나 먼 사이인가, 나는 얼마나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서로 그럭저럭 말이 통했기 때문에 어쩐지 상대를 잘 아는 듯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친구가 죽었을 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항상 그렇다. 내 경우에는. - P135

일용직 노동자 같은 일을 계속하면서 속절없이 나이 들어가는 뮤지션도 많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업계에서 점점 지위가 올라간다. 제자 몇 명쯤 거느리고 스튜디오를 낼 정도가 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좀 별로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은 세계에서 골목대장이 되는 식이어서는 끝장이다. 벗어나야 한다, 라는 절박감이 있었다.
일용직 노동자일 때에는 편곡자, 디렉터, 프로듀서가 있어서 그들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이를테면 음악 로봇 같은 것이어서나 자신의 음악성 따위는 거의 들이밀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솔로 앨범이든 YMO의 앨범이든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할 수 있었다. 그건 엄청나게 큰 차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날이면 날마다 새벽까지 꼬박 나만의 창작을 할 수 있었다. - P145

영화음악을 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나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젊음의 기세라는 건 참 대단하다고나 할까. 하지만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막상 음악을 만들 단계가 되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영화음악?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야?‘ 영화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촬영을 통해 친해진 프로듀서 제러미 토머스에게 물어보았다. "참고할 만한 영화 한 편을 예로 들어보라고 한다면뭘 추천할 거야?" 그가 「시민 케인」이라고 대답했다. 당장 비디오테이프를 사 왔다.
그 영화에서 참고한 것은 오케스트레이션이나 멜로디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 음악을 붙이고 어떤 타이밍에 사라지는가, 즉 - P170

순수한 영상과의 관계였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지극히 단순했다. 영상의 힘이 약한 곳에 음악을 넣는다는 것. 신비한 분위기고 뭐고 없었다.
영화 일이니까 영화음악에 대해서도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감독이다. 미리 음악을 어디에 어떻게 넣을지 내 나름대로 리스트를 만들고, 오시마 씨도 자신의 리스트를 만들어 와서 회의를했다. 그랬더니 음악을 넣는 부분에 대한 의견이 99퍼센트 일치했다. ‘뭐야,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네.‘ ‘프로와 똑같은 답을 냈잖아‘ 그렇게 완전히 자신감이 붙었다. 정말 혼자 잘났었다. - P171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1983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나는5월에 칸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을처음으로 대면했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에 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이다"라든가 "그 영화를 위한 중국과의 협상이 너무 힘들어 죽겠다"라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의팬이었기 때문에 행복한 기분으로 아마도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들었을 것이다. - P171

이런 매력적인 인물과 함께 일하고 싶다, 오시마 씨뿐만 아니라 베르톨루치와도 일하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탐욕스러운 청년이었다. 하지만 설마 내가 그 작품의 음악을 담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쪽에서도 나한테 음악을 해달라는 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본적으로 바로 코앞의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타입인 데다 애초에 YMO에 참가해 음악을 평생 직업으로 의식한 것부터가 겨우 그 2-3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참여하고 칸에서 베르톨루치를 만났던 일이 내 작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음악의 축을 서서히 만들기 시작한 계기였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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