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序


문학동네의 권유로 시집 『답청』을 재출간하게 되었다.
이 시집은 원래 1974년 샘터사에서 자비출판 형식으로 간행되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의 독자가 흔치 않았던 터라 천 부를 인쇄하고 바로 해판해버렸는데 20여 년이 지난지금에 와서는 희귀본 행세를 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함께 『70년대」 동인 활동을 하던 김형영 시인의 주선으로 만들게 된 나의 첫시집은 이종상 화백의 좋은 그림 덕분에 겉모양새는 그럴듯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책꼴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보통의 시집들이 머리말이나 뒷말, 발문이나 해설, 사진과 약력 따위를곁들여 독자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이해도 돕도록 되어 있는점에 비추어보면 그 시집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터였다.
어차피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을 애송이 시인의 시집에 그런 치레를 한들 무엇하랴 하는 생각이었고 또 시의 질로 한몫 하면 됐지 남의 눈치를 보아서 무엇하랴 싶은 오기도 없

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다시 내는 이번 시집에는책의 체재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해서 재출간의 소회를 몇 자 쓸 수밖에 없게 되어 저간의 사정을 여기에 덧붙여 꼴을 갖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옛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추어내는 게 나로서는 못난 얼굴에 분칠을 하는것 같아 여간 민망한 게 아니나 그래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짓궂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못난 구석을 마냥 숨길수만은 없는 터이다.
1978년에 두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내면서 모자란 자리를 『답청』에서 몇 편 뽑아 채우기도 했거니와 그 시가 내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내 글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보는 이들이 살펴 읽으시기를 바랄 뿐이다.


1997년 6월정희성

얼은 강을 건너며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꺼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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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


건너편 승강장의 그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긴 터널을 뚫고 온 지하철이 잠시 머물다 떠나가고
그대 미소로이 서 있던 자리
섬광처럼 꽃이 피는 것을 보았다



햐~!
좋다
몇번이고 읽어도
섬광처럼 꽃이 피는 시집이다.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애월涯月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 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 미는 소리
물 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북제주군에 있는 마을 이름.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 P20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 P21

봄소식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꽃자리


촉촉이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 떨며 닿던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꽃자리
그날 그 꽃자리

소나기


날 기울고 소소리 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운우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

그 사람


무엇을 기다리나 그 사람
동구 밖 장승 곁에 서 있네
해가 져도 장승처럼 서 있네
어둠속에 동그마니 장승이 되었네




나는 안다
그대 눈 속에 드리운 슬픔을
내가 그윽한 눈으로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대 눈 속의 남해 바다
그대 눈 속의 보리암
그대 눈 속의 연꽃
그대 눈 속의 그림자가
그대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나를 저물게 한다
나는 예감한다
내 눈 속에 잦아들 어둠을

죽음이 내 눈을 감길 수는 있겠지*


*프란시스꼬 데 께베도의 시구를 인용.

파문


언제부턴가 마음속
향기로운 술이 익네
그녀가 스며든 내 시 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네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꽃샘


봄이 봄다워지기까지
언제고 한번은 이렇게
몸살을 하는가보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꽃을 피울까마는
어디서 남몰래 꽃이 피고 있기에
뼈마디가 이렇게 저린 것이냐

이른봄 저녁 무렵


이른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

사랑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저 너머


가을물 여위어
소리도 정갈한데

묵은 때 벗고저
운문사 오르는 길

不二門 저 너머
하늘대는 흰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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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 문학사상>




쇠를 치면서 


쇠를 친다
이 망치로 못을 치고 바위를 치고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실한 팔뚝 하나로 땀투성이 온몸으로
이 세상 아리고 쓰린 담금질 받으며
우그러진 쇠를 치던 용칠이
망치 하나 손에 들면 신이 나서
문고리 돌쩌귀 연탄집게 칼 낫
온갖 잡것 다 만들던 요술쟁이
고향서 올라온 봉제공장 분이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다던 용칠이
떡을 치고 싶으면 용두질치며
어서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용칠이
밀린 월급 달라고 주인 멱살 잡고
울분 터뜨려 제 손 찍던 용칠이
펄펄 끓는 쇳물에 팔을 먹힌 용칠이
송두리째 먹히고 떠나버린 용칠이 - P18

용칠이 생각을 하며 쇠를 친다
나 혼자 대장간에 남아서
고향 멀리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식모살이 떠났다는 누이를 생각하며
팔려가던 소를 생각하며
추운 만주벌에서 죽었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떡을 칠 놈의 세상, 골백번 생각해도
이 망치로 이 팔뚝으로 내려칠 것은
쇠가 아니라고 말 못하는 바위가 아니라고
문고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1978. 소설문예> - P19

이곳에 살기 위하여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1978. 미발표> - P24

이제 내 말은


이제 내 말은
나의 슬픔도 그대의 설움도
잠재우지 않는다
바람이 바람을 잠재우지 않고
슬픔이 슬픔을 잠재우지 않는다
슬픔을 위한 말,
슬픔을 꾸미는 말,
모든 어둠의 下手人인
슬픔에 봉사하는 말,
그대와 나의 가장 깊은 곳에 회오리치던
슬픔의 찌꺼기인 눈물도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 내 말은
슬픔을 알아버렸다
가슴 쥐어뜯는 사랑도
이별도 알아버렸다
내 말은 허공을 떠돌지 않고
내 말은 죽지 꺾인 물새처럼 - P30

바다로 가서 혼자 울지 않는다
이제 내 말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1977. 문학과지성> - P31

아버님 말씀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 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에서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이렇다 하게 사는 애비 친구들도 - P38

평생을 살붙이고 살아온 늙은 네 에미까지도
이젠 이 애비의 무능한 경제를
대놓고 비웃을 줄 알고 더 이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구나
그렇다 아들아, 실패한 애비로서
다 늙어 여기저기 공사판을 기웃대며
자식새끼들 벌어 먹이느라 눈치 보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래도 나는 할 말은 해야겠다
아들아, 행여 가난에 주눅 들지 말고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부디 네 불행을 운명으로 알지 마라
가난하고 떳떳하게 사는 이웃과
네가 언제나 한몸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힘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
아직도 돌을 들고
피 흘리는 내 아들아

<1977.미발표> - P39

맨주먹


손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눈 씻고 보아도 낯선 손바닥
흠집에 기름투성이
이 손이 잡을 것은 무엇인가
일을 해도 일을 해도
내 손은 빈손
찬바람이 손가락을 빠져나갈 뿐
두 손으로 얼굴을 거머쥐어도
바람은 내 얼굴에 모래를 뿌린다
나는 안다
이 추운 겨울밤
뭇사람을 비탄에 떨게 한 바람이
어떻게 한 사람의 높은 담을 치솟게 하고
한 사람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어떻게
타인을 맨주먹 쥐게 하는가

<1975. 창작과비평> - P66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쉬는
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空氣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1975. 창작과비평> - P67

답청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1974. 세대>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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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마스크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 죽는 날이구나
죽고 사는 것이 물소리 같구나
나는 이제 잠과 죽음을 구분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고
바다와 파도를 구분하고 사는구나
죽음은 용서가 아니라 용서이구나
사랑은 용서의 심장과 함께 사는구나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니지 못하고
만년필에 피의 잉크를 넣지도 못하고
늘 빈 밥그릇을 들고 서 있었지만
나의 데스마스크에 꽃이 피면
그 꽃에 당신만은
입맞춤 한번 해주길 바란다

벗에게


내 죽어 범어천 냇가의 진흙이 되면
그 흙으로 황소 한마리 만들어
가끔 그 소를 타고 우리집에 가주렴
우리집 꽃밭에 수선화는 아직 피는지
남향받이 창가에 놓아둔 춘란이
아직도 꽃을 피우지 않고 애태우는지
대문 곁 우물가 높은 감나무 가지 위에
새들은 날아와 나를 기다리는지
병든 노모는 오늘도 진지를 잘 드셨는지
가끔 가서 살펴봐주렴
내 죽어 범어천 개울가의 진흙이 되어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봄이 오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마지막 부탁


나의 발에도 편자를 박아다오
이제 내 발굽은 다 닳아 연약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먼동이 틀 때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야 할
광야의 지평선이 남아 있다

나의 목에도 맑은 말방울을 달아다오
설산 위로 떠오른 초승달을 뒤로하고
티베트의 협곡을 묵묵히 걸어가는 노새처럼 나에게는 아직 오체투지하며 넘어가야 할
슬픔의 산맥이 남아 있다

나의 등에도 쌍봉낙타처럼 봉우리를 달아다오
내 등허리에 짊어진 짐은 갈수록 무거워지지만
사막의 어두운 경사면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나에게는 아직 모래가 되어 걸어가야 할
눈물의 사막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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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어느 산 밑
허물어진 폐지 더미에 비 내린다
폐지에 적힌 수많은 글씨들
폭우에 젖어 사라진다
그러나 오직 단 하나
사랑이라는 글씨만은 모두
비에 젖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나무 그림자


햇살이 맑은 겨울날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 한그루가
무심히 자기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길을 가던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나무 그림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전화를 한다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발을 구르고
허공에 삿대질까지 하며
나무 그림자를 마구 짓밟는다

나무 그림자는 몇번 몸을 웅크리며
신음소리를 내다가
사람을 품에 꼭 껴안고 아무 말이 없다

싸락눈


나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내가 늘 기다리는 사람과 함께 내리는
내가 늘 그리워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내리는 내가 미워한 사람도 이별한 사람도
꼭 한사람씩 데리고 내리는
어떤 때는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과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과 함께 내리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다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수선화를 기다리며


수선화가 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겨우내 불을 켜두고
문을 열어둔 채 너무 멀리 나왔다
수선화의 연노란 향기가
수의처럼 나를 감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불을 꺼야 한다
대문을 닫고
우물을 파묻고
고요히 홀로
수선화의 뿌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아름다운 인간의 구근이 되어
기다려도 오지 않는 봄을 또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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