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 문학사상>
쇠를 치면서
쇠를 친다 이 망치로 못을 치고 바위를 치고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실한 팔뚝 하나로 땀투성이 온몸으로 이 세상 아리고 쓰린 담금질 받으며 우그러진 쇠를 치던 용칠이 망치 하나 손에 들면 신이 나서 문고리 돌쩌귀 연탄집게 칼 낫 온갖 잡것 다 만들던 요술쟁이 고향서 올라온 봉제공장 분이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다던 용칠이 떡을 치고 싶으면 용두질치며 어서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용칠이 밀린 월급 달라고 주인 멱살 잡고 울분 터뜨려 제 손 찍던 용칠이 펄펄 끓는 쇳물에 팔을 먹힌 용칠이 송두리째 먹히고 떠나버린 용칠이 - P18
용칠이 생각을 하며 쇠를 친다 나 혼자 대장간에 남아서 고향 멀리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식모살이 떠났다는 누이를 생각하며 팔려가던 소를 생각하며 추운 만주벌에서 죽었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떡을 칠 놈의 세상, 골백번 생각해도 이 망치로 이 팔뚝으로 내려칠 것은 쇠가 아니라고 말 못하는 바위가 아니라고 문고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1978. 소설문예> - P19
이곳에 살기 위하여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1978. 미발표> - P24
이제 내 말은
이제 내 말은 나의 슬픔도 그대의 설움도 잠재우지 않는다 바람이 바람을 잠재우지 않고 슬픔이 슬픔을 잠재우지 않는다 슬픔을 위한 말, 슬픔을 꾸미는 말, 모든 어둠의 下手人인 슬픔에 봉사하는 말, 그대와 나의 가장 깊은 곳에 회오리치던 슬픔의 찌꺼기인 눈물도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 내 말은 슬픔을 알아버렸다 가슴 쥐어뜯는 사랑도 이별도 알아버렸다 내 말은 허공을 떠돌지 않고 내 말은 죽지 꺾인 물새처럼 - P30
바다로 가서 혼자 울지 않는다 이제 내 말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1977. 문학과지성> - P31
아버님 말씀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 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에서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이렇다 하게 사는 애비 친구들도 - P38
평생을 살붙이고 살아온 늙은 네 에미까지도 이젠 이 애비의 무능한 경제를 대놓고 비웃을 줄 알고 더 이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구나 그렇다 아들아, 실패한 애비로서 다 늙어 여기저기 공사판을 기웃대며 자식새끼들 벌어 먹이느라 눈치 보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래도 나는 할 말은 해야겠다 아들아, 행여 가난에 주눅 들지 말고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부디 네 불행을 운명으로 알지 마라 가난하고 떳떳하게 사는 이웃과 네가 언제나 한몸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힘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 아직도 돌을 들고 피 흘리는 내 아들아
<1977.미발표> - P39
맨주먹
손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눈 씻고 보아도 낯선 손바닥 흠집에 기름투성이 이 손이 잡을 것은 무엇인가 일을 해도 일을 해도 내 손은 빈손 찬바람이 손가락을 빠져나갈 뿐 두 손으로 얼굴을 거머쥐어도 바람은 내 얼굴에 모래를 뿌린다 나는 안다 이 추운 겨울밤 뭇사람을 비탄에 떨게 한 바람이 어떻게 한 사람의 높은 담을 치솟게 하고 한 사람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어떻게 타인을 맨주먹 쥐게 하는가
<1975. 창작과비평> - P66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쉬는 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空氣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1975. 창작과비평> - P67
답청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1974. 세대>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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