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마스크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 죽는 날이구나
죽고 사는 것이 물소리 같구나
나는 이제 잠과 죽음을 구분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고
바다와 파도를 구분하고 사는구나
죽음은 용서가 아니라 용서이구나
사랑은 용서의 심장과 함께 사는구나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니지 못하고
만년필에 피의 잉크를 넣지도 못하고
늘 빈 밥그릇을 들고 서 있었지만
나의 데스마스크에 꽃이 피면
그 꽃에 당신만은
입맞춤 한번 해주길 바란다

벗에게


내 죽어 범어천 냇가의 진흙이 되면
그 흙으로 황소 한마리 만들어
가끔 그 소를 타고 우리집에 가주렴
우리집 꽃밭에 수선화는 아직 피는지
남향받이 창가에 놓아둔 춘란이
아직도 꽃을 피우지 않고 애태우는지
대문 곁 우물가 높은 감나무 가지 위에
새들은 날아와 나를 기다리는지
병든 노모는 오늘도 진지를 잘 드셨는지
가끔 가서 살펴봐주렴
내 죽어 범어천 개울가의 진흙이 되어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봄이 오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마지막 부탁


나의 발에도 편자를 박아다오
이제 내 발굽은 다 닳아 연약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먼동이 틀 때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야 할
광야의 지평선이 남아 있다

나의 목에도 맑은 말방울을 달아다오
설산 위로 떠오른 초승달을 뒤로하고
티베트의 협곡을 묵묵히 걸어가는 노새처럼 나에게는 아직 오체투지하며 넘어가야 할
슬픔의 산맥이 남아 있다

나의 등에도 쌍봉낙타처럼 봉우리를 달아다오
내 등허리에 짊어진 짐은 갈수록 무거워지지만
사막의 어두운 경사면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나에게는 아직 모래가 되어 걸어가야 할
눈물의 사막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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