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광


건너편 승강장의 그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긴 터널을 뚫고 온 지하철이 잠시 머물다 떠나가고
그대 미소로이 서 있던 자리
섬광처럼 꽃이 피는 것을 보았다



햐~!
좋다
몇번이고 읽어도
섬광처럼 꽃이 피는 시집이다.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애월涯月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 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 미는 소리
물 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북제주군에 있는 마을 이름.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 P20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 P21

봄소식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꽃자리


촉촉이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 떨며 닿던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꽃자리
그날 그 꽃자리

소나기


날 기울고 소소리 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운우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

그 사람


무엇을 기다리나 그 사람
동구 밖 장승 곁에 서 있네
해가 져도 장승처럼 서 있네
어둠속에 동그마니 장승이 되었네




나는 안다
그대 눈 속에 드리운 슬픔을
내가 그윽한 눈으로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대 눈 속의 남해 바다
그대 눈 속의 보리암
그대 눈 속의 연꽃
그대 눈 속의 그림자가
그대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나를 저물게 한다
나는 예감한다
내 눈 속에 잦아들 어둠을

죽음이 내 눈을 감길 수는 있겠지*


*프란시스꼬 데 께베도의 시구를 인용.

파문


언제부턴가 마음속
향기로운 술이 익네
그녀가 스며든 내 시 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네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꽃샘


봄이 봄다워지기까지
언제고 한번은 이렇게
몸살을 하는가보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꽃을 피울까마는
어디서 남몰래 꽃이 피고 있기에
뼈마디가 이렇게 저린 것이냐

이른봄 저녁 무렵


이른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

사랑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저 너머


가을물 여위어
소리도 정갈한데

묵은 때 벗고저
운문사 오르는 길

不二門 저 너머
하늘대는 흰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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