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어느 산 밑
허물어진 폐지 더미에 비 내린다
폐지에 적힌 수많은 글씨들
폭우에 젖어 사라진다
그러나 오직 단 하나
사랑이라는 글씨만은 모두
비에 젖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나무 그림자


햇살이 맑은 겨울날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 한그루가
무심히 자기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길을 가던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나무 그림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전화를 한다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발을 구르고
허공에 삿대질까지 하며
나무 그림자를 마구 짓밟는다

나무 그림자는 몇번 몸을 웅크리며
신음소리를 내다가
사람을 품에 꼭 껴안고 아무 말이 없다

싸락눈


나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내가 늘 기다리는 사람과 함께 내리는
내가 늘 그리워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내리는 내가 미워한 사람도 이별한 사람도
꼭 한사람씩 데리고 내리는
어떤 때는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과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과 함께 내리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다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수선화를 기다리며


수선화가 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겨우내 불을 켜두고
문을 열어둔 채 너무 멀리 나왔다
수선화의 연노란 향기가
수의처럼 나를 감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불을 꺼야 한다
대문을 닫고
우물을 파묻고
고요히 홀로
수선화의 뿌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아름다운 인간의 구근이 되어
기다려도 오지 않는 봄을 또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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