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버나는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순전히 휴가를 보낼생각뿐이었다. 한숨 돌리고, 내면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고, 해묵은때를 벗겨 낼 생각. 그러기엔 북극이 제격이었다. 광활하고 시원스레 펼쳐진 북극의 빙하와 바위와 바다와 하늘에는 도시와 고속도로와 나무 그리고 남쪽의 풍경을 번잡하게 만드는 여타 방해 요소들과무관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버나의 마음을 번잡하게 하는 것 중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란 남자를 의미했다. 남자라면 한동안 만날 만큼 만났으므로버나는 남자들의 추파나 그로 인해 벌어질 일들에 눈길조차 주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더는 아니었다.
자신은 사치스럽지도, 탐욕스럽지도 않다고 버나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버나가 원했던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에게 해를 입힐 - P301

만큼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줄 다정하고 온화한 몇 겹의 단열재 같은 돈뿐이었다. 물론 버나는 이 소박한 목표를 마침내 이룬상태였다.
그러나 오랜 습관을 벗어던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속으로 다짐을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버나는 첫날 밤 공항 호텔 로비에서 바퀴 달린 가방을 끌며 갈팡질팡하는 양털 옷차림의 동료 여행자들을 눈으로 훑고 있다. 여자들은 힐끗 보고 말면서 무리에 속한남자들은 하나하나 뜯어본다. 여자가 딸린 남자들은 도의상 제외한다. 사서 고생할 필요가 뭐 있겠나? 첫 번째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혼자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고역일 수 있다. 버림받은 아내들이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터다. - P302

버나의 관심을 사로잡는 이들은 혼자 있는 사람, 구석에 잠자코있는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버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자기 기준에안 맞는 이들과는 일부러 눈맞춤을 피한다. 늙은 개에게도 삶은 지속된다는 믿음을 귀하게 간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버나의 표적이다. 그렇다고 뭘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낚을 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보여 주는 의미로 약간의 몸풀기를 하는건 나쁠 게 없지. 버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녁 시간에 펼쳐진 만남과 대화의 장에 버나는 크림색 스웨터 차림으로 왼쪽 가슴에서 조금 많이 낮은 위치에 ‘자북극을 향해‘가 적힌 명찰을 달고 간다. 수상 운동을 하고 코어 근육을 단련한 덕에 적어도 옷을 다 갖춰 입고 군살을 빈틈없이 감싸는 와이어 브래지어로가슴을 받쳐 주면 여전히 나이에 비해, 아니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 P302

훌륭한 몸매다. 하지만 비키니 차림으로 갑판 의자에 앉는 모험은하고 싶지 않았다. 무진 애를 써도 자글자글 오그라든 피부는 어쩔수 없으니까. 그래서 버나는 이를테면 카리브해가 아닌 북극을 택했다. 얼굴은 나이에 맞게 자연스러운데, 확실히 이 나이에는 돈을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 약간의 브론저와 엷은 아이섀도 마스카라, 반짝이 파우더를 바르고 광채를 조금 더하면 10년은 젊어 보일수 있다.
"뺏긴 것이 많지만 남은 것도 많지."라고 버나는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테니슨을 유독 광적으로 편애했던 버나의 세번째 남편은 툭하면 그의 문장을 인용했다. "정원으로 와요, 모드." 잠자리에 들기 전 남편은 습관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때마다 버나는뚜껑이 열릴 듯 화가 치솟았다. - P303

버나는 절제된 꽃내음과 그리움을 자극하는 향이 나는 향수를 톡톡 두드려 바른 다음 피부로 뭉개서 약간의 은은한 잔향만 남긴다.
향이 과하면 안 된다. 노인들의 후각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알레르기가 유발될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갑자기 재채기를 해대는 남자는 매력적이지 않다.
동행이 없는 여자가 눈에 너무 불을 켜고 다니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무심하지만 유쾌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모임 장소에 조금늦게 들어간 버나는 모두에게 조금씩 나눠 주는 도수 낮은 화이트와인 한 잔을 받아 든 다음 옹기종기 모여 안주를 집어 먹고 와인을홀짝이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거닌다. 남자들은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증권 중개인 등 전문직으로 일하다 은퇴했을 것이고, 북극 - P303

탐험, 북극곰, 고고학, 새, 이누이트족의 수공예품, 혹은 바이킹족과식물, 지질학에도 관심이 있을 것이다. ‘자극을 향해‘는 진지한 애호가들과 그 애호가들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해 줄 열성적인 전문가들을 끌어들인다. 버나는 북극 투어를 제공하는 다른 업체도 두 군데알아보았지만 그리 끌리는 곳이 없었다. 한 업체는 하이킹으로 가득채운 프로그램을 내세우면서 버나의 타깃 밖인 50대 미만 손님을 끌어들이려 했고 다른 업체는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눈꼴사나운 옷을 입어야 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터라 버나로서는 익숙한 편안함을 제공하는 ‘자극을 향해‘ 투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세 번째 남편이 사망한 후에 이 업체 상품을 이용해 봤기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거의 다 알고 있기도 했다. - P304

"미안해요." 버나가 헐떡이며 말한다. 선명하면서도 희미한 카네이션 향기가 버나를 감싼다. 밥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갑자기 심한욕지기가 올라온다. 버나는 화장실로 내달린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화이트 와인, 크림치즈와 올리브를 곁들인 카나페를 변기에 게운 버나는 혹시 여행을 취소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닐지 걱정한다. 그런데 왜 또다시 버나가 밥에게서 도망쳐야 하나?
그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 주가 끝날 무렵 이미 온 마을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밥이 퍼뜨린 소문, 버나의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른 코미디로 둔갑한 소문이었다. 술에 절어서는 그걸 하고 싶어 안달난 헤픈 버나라니, 참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아닌가. 학교에서 집으로돌아가는 내내 버나는 자기를 곁눈질하면서 야유하는 소리를 내고 이름을 불러 대는 남자애들 무리에 시달렸다. 어디 한번 도망쳐 봐! 내가 태워줄까? 사탕도 좋지만 술이 효과가 빠르긴 하지! 이 정도가 그나마 심하지 않은 말이었다. 버나는 여자애들에게서도 외면당했는데, 그 불명예스러운 일, 그 모든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럽고 난잡한 일들이 자기들에게 옮겨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P308

하지만 버나는 그 현실을 그 현실 혹은 그 동네 전반을 마주할 수 없었으므로 집이 아닌 토론토 시내로 향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사실 어떤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뿐이었다. 서글픔, 비통함, 그리고 마침내 타오르는 번뜩이는 분노.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버나가 무가치한 쓰레기였다면 쓰레기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종업원 일과 호텔 청소 일을 병행하는 동안 버나는 그렇게 살았다.
버나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인 나이 많은 유부남을 우연히 만나게된 것은 전적으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버나는 3년간 정오에 그와 섹스를 하는 대가로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 공정한 교환이라고 버나는 생각했다. 그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었다. 그를 통해 가장 사소하게는 하이힐을 신고 걷는 법을 비롯해 많은 것을 배웠고 자기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ㅡ놀랍게도!ㅡ여전히 말린 꽃처럼 버리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간직했던 밥의 일그러진 형상을 조금씩 떼어 버릴 수 있었다. - P310

"아니, 버나 씨 정도면 그럴 필요도 없죠." 밥이 정중한 태도로 말한다. 이 개자식이 정말로 버나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세련된 매너 따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놈이었다. 버나의세 번째 남편이 자연인에 관한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했던 비열하고, 잔인하고, 단명할 놈이었다. 요즘 같으면 여자애들은 자신들이배운 대로 경찰을 부를 것이다. 요즘 같으면 밥은 어떤 거짓말을 늘어놓은 감옥에 갈 것이다. 버나가 미성년자였으니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행위를 지칭할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강간은 어떤 미치광이가 수풀에 숨어 있다가 덮쳤을 때 벌어지는 일이지, 무도회 공식파트너가 벌목이 두 번 이루어져 황량한 숲이 펼쳐진 어느 초라한광산 도시 인근의 곁길로 데려가서는 얌전히 주는 대로 받아 마시라고 겁박하다가 버나를 한 겹 한 겹 찢어발겼을 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밥의 친구 켄이 밥을 도와주겠다며 자기 차를몰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둘은 웃고 있었다. 둘은 버나의 팬티거들을 기념품으로 간직했다. - P315

그 후 밥은 동네로 돌아가는 길에 버나를 차에서 내쫓았다. 버나가 울어서였다. "안 닥칠 거면 걸어가." 밥이 말했다. 버나는 드레스와 어울리도록 담청색으로 염색한 얼음장처럼 차가운 하이힐을 맨발로 신고서 얼어붙은 도로를 절뚝절뚝 걷는 자기 모습을, 두 눈은핑핑 도는데 헐벗은 상태로 바들바들 떨면서 참 어처구니없을 만큼굴욕적이게도 딸꾹질을 하는 자기 모습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버나의 머릿속을 가장 어지럽혔던 것은 나일론 스타킹이었다.
대체 어디 간 거지? 약국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산 건데. 분명 그때버나는 큰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을 것이다.
버나의 기억은 정확한 걸까? 밥이 버나의 팬티거들을 자기 머리에 뒤집어쓰고 눈 속에서 춤을 추면서 어릿광대가 종을 울리듯 가터벨트를 펄럭인 것이 진짜였나? - P316

어째서 그날 밤에 벌어진 일로 버나만 고통받아야 했던 걸까? 버나는 물론 바보였다. 하지만 밥은 사악했다. 그리고 밥은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 없이 무탈히 상황을 모면한데 반해, 버나의 인생은 통째로 뒤틀리고 말았다. 그날을 기점으로이전의 버나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새로운 버나가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발이 묶이고, 일그러지고, 짓이겨진 버나가. 버나에게 강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약자는 무자비하게 착취당해야 마땅하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밥이었다. 버나를 이렇게 말하지 못할 이유 뭐 있겠나? 살인자로 만든 사람은 밥이었다. - P317

다음 날 아침 보퍼트해를 항해할 유람선을 타기 위해 전세기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동안 버나는 자기 앞에 놓인 선택지에 대해 생각한다. 일단 마지막 순간까지 밥을 갖고 놀다가 밥의 팬티가 발목언저리에 내려왔을 때 싸늘하게 돌아서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건 만족감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여행 내내 밥을 피해 다니면서 지난 50여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지금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밥을 죽여 버릴 수도 있다. 버나는 세 번째 선택지가 이론적으로 가능할지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 정말 밥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면 어떻게 크루즈 여행을 하는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인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약물과 섹스를 이용한 고전적인 수법은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뿐더러 효과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 밥이 아무 질병도 앓고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다로 밀어 버리는 방법은 현실성이 없다. - P317

다음 날은 승객들, 특히 여성 승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원기 왕성한 젊은 과학자가 지질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천만다행으로, 부빙 때문에 여행 일정을 변경한 덕분에 여러분은 뜻밖의 장소를 방문하게 되실 겁니다. 거기서는 아주 극소수에게만 허용되는 지질학 세계의 경이를 관찰하실 수 있는데요. 바로 지질학 역사 초기, 그러니까 어류, 공룡, 포유류가 등장하기도 전에 화석화된 무려 19억 년 된 스트로마톨라이트를, 지구에서 최초로 보존된 형태의 생명체를 보는 특권을 누리게 되실 겁니다.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뭘까요? 그가 눈을 번득이며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단어는 매트리스를 뜻하는 그리스어 스트로마(stroma)에 돌을 뜻하는 리토스(lithos)의 어원을 결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톤 매트리스(Stone Mattress), 즉 청록색 조류가 층층이 쌓여 둔덕이나 돔 모양을 형성한 화석화된 쿠션인 거죠. 이 청록색 조류는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산소를 형성한 것과 똑같은 조류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 P322

그리고 여기 V자 모양으로 자른 네덜란드 치즈처럼 네 조각으로부서진 스트로마톨라이트도 있다. 버나는 그중 한 조각을 집어 들어그 층층을 살펴본다. 해마다 검은색, 회색, 검은색, 회색, 검은색, 회색이 번갈아 쌓인 모양새인데 그 중심이 되는 가장 아랫부분은 아무특색이 없다. 무게는 묵직하고 가장자리는 날카롭다. 버나는 그걸 배낭에 넣는다.
때맞춰 밥이 온다. 좀비가 언덕을 오르듯 천천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에게 다가온다. 밥은 외투를 벗어 배낭끈 밑에 쑤셔 넣는다. 숨을 헐떡이고 있다. 순간 버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언덕을 올라오느라 힘을 뺏긴 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과거로 남겨 두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남자애들은 원래 그러니까. 원래 그 나이대 남자애들은 전부 호르몬의 노예 아닌가? 어째서 인간이 현재도 아닌 과거에, 그것도 몇 세기는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 한참 전에 저지른 일로 단죄받아야 하나?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돈다. 눈치챈 걸까? 기다리고 있나? 버나는 땅을 내려다보는 까마귀의 눈을 통해 한 늙은 여자를 인정하자, 이제 버나도 늙은 여자다, 시간이 한참 흘러이제 옅어질 만큼 옅어진 분노를 이유로 자기보다 더 늙은 남자를살해하려는 여자를 본다. 하찮은 짓이다. 악독한 짓이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삶이란게 원래 이런 법이다. - P325

밥은 조금도 움찔하지 않는다. "어쩐지 뭔가 낯이 익다 했어." 사실 능글맞게 웃고 있다.
저 웃음을 버나는 기억하고 있다. 열 살배기처럼 키득거리며 눈속에서 의기양양하게 까불까불 뛰어다니는 밥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버나 자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그때를.
버나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을 알고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를 힘차게 들어 올린 다음 밥의 아래턱에 짧고 강하게 한 방 날리는 것이다. 삐걱 하고 부서지는 소리만 난다. 밥의 머리가 뒤로 홱 꺾인다. 이제 밥은 바위 위에 대자로 뻗어 있다. 버나는 밥의 이마 위에 스트로마톨라이트를 갖다 대고 떨어뜨린다.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됐다. 이제 된 것 같다. - P327

번쩍 뜬 두 눈은 미동도 없고 이마는 짓이겨져 있고 얼굴 양옆으로는 피를 줄줄 흘리는 몰골이 우습기 그지없다. "꼴이 말이 아니네." 웃음이 나오는 꼴이라 버나는 웃는다. 버나의 예상대로 앞니는임플란트였다.
버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런 다음 옷은 물론이고 장갑에도 피가 묻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다시 집어 든 다음 물웅덩이에 살그머니 빠뜨린다. 바닥에 떨어진 밥의 야구모자와재킷은 배낭에 넣는다. 밥의 배낭을 털어 보니 별것 없다. 카메라와털장갑 한 켤레, 목도리, 작은 스카치 여섯 병뿐이다. 어찌나 희망에 차 있었던 건지 안쓰러울 정도다.  - P327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지질학 표본 전시대에 놓일 것이고, 사람들이 그걸 들어 올려 관찰하고 토론하는 동안 무수한 지문으로 범벅될것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버려질 것이다. 레졸루션II 여행 프로그램은 총 14일 일정으로 그동안 총 열여덟 차례 짧게 육지를 방문할 것이다. 빙원과 깎아지른 낭떠러지, 금색과 구리색과 흑단색과은회색의 산들을 지나칠 것이다. 유빙 사이를 미끄러지듯 통과할 것이고, 굴곡 없이 길게 쭉 뻗은 해안에 정박해 수백만 년 동안 빙하에깎여 나간 피오르드를 탐험할 것이다. 그토록 혹독하고 고된 여정중에 마주한 장관을 두고 과연 그 누가 밥을 기억하겠나?
여행 막바지에는 진실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밥이 제반 비용을 지불하지도, 여권을 찾으러 오지도, 자기 짐을 싸지도 않을 테니 어쩔 수 없다. 그러면 다급하고 근심 어린 말들이 오갈 것이고, 승객들이 놀라지 않도록 비밀리에 직원 회의가 열릴 것이다. 결국에는 이런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비통하게도 어젯밤 밥이 카메라로 북극광을 좀 더 잘 찍기 위해 난간에 기댔다가 유람선 밖으로 추락하고 말았다고 그 외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 P330

그러는 동안 승객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을 테고 버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까, 버나가 성공한다면 말이다. 과연 성공할까?
그러려면 좀 더 기민하게 행동해야 하지만, 마땅히 지금 상황을 홍미진진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피곤하고어쩐지 공허할 뿐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그래도 안전하다. 세 번째 남편이 비아그라 체험 시간이 끝난 후 아주 밉살스레 내뱉곤 했던 말처럼 모든 열정을소진한 마음에 찾아든 평온이다. 빅토리아 시대인들은 늘 섹스를 죽음과 연관지었다. 시인도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키츠? 테니슨?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하나 떠오를 것이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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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손의 사랑」은 농담으로 시작되었다. 아니, 무모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는데, 마리화나를 적잖이 피워 대고 싸구려 위스키를 퍼마신 탓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화근이었다. 하겠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빌어먹을 계약 조건과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그 계약은 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를 수 없는 계약이다. 계약 종료일을명시하지 않은 탓이다. 우유갑이나 요거트 통이나 마요네즈 병에 적힌 상미기한 같은 유효 기간을 적어 두었어야 했는데, 대체 뭘 안다고 덜컥 계약을 해 버린 거지? 고작 스물둘밖에 안 됐으면서, 돈이필요했다.
그래 봐야 푼돈이었다. 고로 말도 안 되는 계약이었다. 착취였다. - P243

그 셋은 어쩌다 그를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었던 걸까? 물론 그들은 계약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서명까지 떡하니박힌 그 빌어먹을 계약서를 운운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그는현실을 받아들이고 돈을 내어줘야 했다. 처음에는 돈을 주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그러고 있으니 이레나가 변호사를 고용했고 이제는 다들 벼룩을 달고 사는 개처럼 변호사를 두고 있다. 이레나는 한때 그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조금 봐줄 법도 했으나 그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레나는 매해 태양 빛 아래서 더 단단해지고 더 건조해지고 더뜨거워지는 아스팔트 같은 심장의 소유자였다. 돈이 이레나를 망가뜨렸다. - P244

그의 돈이 이레나를 망가뜨렸다. 이레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변호사를 선임할 만큼 형편이 넉넉했던 건 그 덕분이니 이레나를 망가뜨린 것은 그의 돈이었다. 그가 선임한 변호사도 그들이 선임한 업계최고의 수완 좋은 변호사들 못지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가 승소의 기쁨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두고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고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골절상을 입은 하이에나의 아침 밥상에 오르는 먹이는 언제나 의뢰인이었다. 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처음에는 한입씩 베어 먹다가 나중에는 가죽이나 힘줄이나 발톱만 남을 때까지 휜담비나 쥐나 피라냐 떼처럼 조금씩 뜯어먹는 족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십 년간 돈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마땅히 지적했듯 이 일을 법정으로 끌고 가 봐야 승소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가 서명했다. 그 간악한 계약서에 새빨간 뜨거운 피로 그가 서명했다. - P244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다 안다고! 유약을 발라 반질거리는 파랗고 하얀 타원형 명판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 다 잊어버려야 하는데, 최대한 여기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잊어야 하는데 발목에 걸린 족쇄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영화제며 문학 페스티벌이며 코믹 페스티벌이며 몬스터 페스티벌이며 하는 것들에 참석하러 이 도시를 찾을 때마다 스리슬쩍 보고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계약서에 서명한 과거의 바보짓을 상기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호러클래식‘이라는 세 단어를 통해 씁쓸한 만족감을 주는 명판이니 어쩔수 없다. 잭은 이 명판에 지나치리만치 집착한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이룬 중대한 삶의 성취에 바치는 헌사이 터다. 그런 것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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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둘은 똑같은 질문이없다. 가능성은 제한되어 있었다. 밤이면 가족들은 덧창문을 전부닫고 식탁에 둘러앉아 비쩍 말라 푸석푸석한 소시지와 감자수프를먹으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끝도 없이 이 질문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정신이 명료할 때면 나도 내 그릇에서 감자 덩어리를 열심히 골라내 먹으며 가능한 한 대화에 참여하려 했다. 정신이 명료하지 않올 때면 집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진 곳에 떨어져 혼자 야옹야옹 울며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지저귐을 들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엄마가 말했다. "그 애한텐 아무 문제도 없었어." 나 같은 것을 낳았다는 사실이 엄마를 슬프게 했다. 그건 일종의 비난, 판결이었다. 엄마가 대체 뭘 잘못했을까?
- P165

낮 동안 나는 어두운 내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더는 웃어넘길 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햇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지내는 게.
내게는 괜찮았다. 밤이 되면 잠 못 이룬 채 집 안을 어슬렁거리면서가족들이 코 고는 소리와 악몽을 꾸며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내 동반자는 고양이였다. 나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내겐 피 냄새가, 오래되고 말라붙은 피 냄새가 났고, 어쩌면고양이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내 위에 올라타 나를 핥은 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족들은 이웃에게 내가 소모성 질병을 앓고 있다고, 열이 난다고, 섬망이 있다고 말했다. 이웃들은 달걀과 양배추를 보내왔고, 이따금 새로운 소식이 없나 궁금해 우리 집을 방문했지만 어떻게든 나를 한번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내 병이 어떤 병이든 전염될 수있다고 여겼다.
나는 죽어야 했다. 그래야 언니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도 않고, 언니에게 파멸의 그림자를 드리우지도 않을 터였다. 할머니는 내방문틀에 마늘 여러 쪽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둘 다 비참하느니 한사람이라도 행복한 게 낫지." 그 말에 나도 동의했다. 도움이 되고싶었다. - P168

그리고 이웃들에게는 내가 성인다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렸다. 나는 흰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동정녀라는 이미지에도 어울리고내 체모를 가리기에도 유용한 흰 면사포를 수 겹 두른 상태로 칠흑처럼 어두운 방에서 까마득히 깊은 관에 누워 전시되었다. 그 안에서 이틀을 누워서 지냈지만 물론 밤에는 관 밖으로 나와 걸어 다닐수 있었다.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면 숨을 죽였다. 이웃들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으면서 귓속말을 했고, 관에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않았다. 여전히 내 병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내가 꼭 천사같은 아이였다고 말했다.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내가 진짜 죽기라도 한 듯이 눈물을 흘렸다. 언니조차 침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빠는 검은 양복을 입었고, 할머니는 빵을 구웠다. 그리고 다들 빵으로 배를 채웠다. 셋째 날, 가족들은 축축한 지푸라기로 관을 채운 다음 묘지로 끌고가서 기도문과 수수한 묘비를 세우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3개월 후언니는 결혼을 했다. 가족들 중 처음으로 대형 사륜마차를 타고 교회로 갔다. 내 관은 언니가 밟고 올라갈 사다리의 가로장이었다. - P169

어스름 속에서 나는 푸시킨과 바이런 경과 존 키츠의 시를 읽었다. 나는 좌초당한 사랑, 과감한 저항, 그리고 죽음의 달콤함을 배웠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내게 감자와 빵, 피가 담긴 컵을 가져다주고 실내용 변기를 비워 왔다. 한때는내 머리도 빗겨 주었지만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부터는 그만두었다. 습관처럼 나를 끌어안고 눈물도 흘렸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지나갔다. 엄마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떴다. 가급적 숨기려고는했지만 엄마는 당연하게도 나를 원망했다. 누군가를 안쓰럽게 여길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대방의고통은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가하는 악의적인 행위로 느껴지는 법이다.
밤이면 나는 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닌 다음 마당도 마음대로 활보했고 그러고 나면 숲도 마음대로 누볐다. 더는 다른 사람의 삶이나 그들의 미래에 방해가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게는 미래가 없었다. 내게는 오로지 현재만, 달과 함께 변하는 변하는 듯했던 현재만 있었다. 발작, 고통의 시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지껄임만 없었더라면 나는 행복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 P170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나는 그들이 마음속으로는 좋은 의도를 품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장례식을 치렀을 때 입은 흰 드레스에 동정녀에 걸맞은 흰 면사포를 둘렀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상황에 맞는복장을 차려입을 수 있어야 한다. 지저귀는 소리가 몹시 시끄럽게울려 퍼진다. 비상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불타는 지붕에서 혜성처럼 떨어질 것이고, 모닥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내 재에 대고 무수한 주문을 외워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진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기형적인 성인이 될 것이고 내 손가락뼈는 어둠의 유물로 팔릴 것이다. 그즈음이면 나는 전설이 될것이다.
천국에서라면 내가 천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천사들이나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다들 얼마나 놀랄까! 기대해 볼 법한 일이다. - P175

오래전 캐리스와 토니와 로즈 모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지니아는 그들의 연인을 한 번씩 빼앗아 갔다. 토니에게서는 웨스트를빼앗았다. 하지만 토니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했고 혹은그렇게 믿기로 했고 지금 웨스트는 토니의 집에 무사히 뿌리를내린 채 전자 음악 기기를 갖고 놀면서 시시각각 청력을 잃고 있다. 로즈에게서는 미치를 빼앗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미치가 바짓가랑이 단속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남자였던 터다. 하지만지니아는 미치의 주머니까지 털어먹고도 캐리스가 미치의 정신적 고결함이라 부른 것까지 앗아간 후 그를 차 버렸고, 미치는 결국 온타리오호에 투신해 익사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서 배를 타다가 사고사를 당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로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로즈는 실연을 극복했다. 적어도 그런 일을 겪은 여자가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은 극복했고, 지금은 금융 회사를 다니며 자기와더 잘 어울리고 미치보다 유머 감각도 좋은 샘과, 미치보다 월등히 훌륭한 남편과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상처는 여전하다. 그리고그 상처는 아이들마저 아프게 하고 있다. 이는 로즈가 과거지사를말끔히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도 미치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더는 살아 있지도 않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어 봐야 뭐 하나 좋을 것도 없지만 말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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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관련된 우스꽝스러운 일화에 틴이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못하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엄마는 일찍, 그것도 호상이라 할수 없는 방식으로 죽었다. 죽음에 호상이라는 것이 있겠나 싶지만그래도 정도는 있다고 틴은 생각한다. 퇴근 후 슬픔에 잠겨 두 눈이눈물에 가려진 상태로 무단횡단을 하다가 트럭에 치여 죽는 것은 호상이 아니었다. 다만 신속한 죽음이기는 했다.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쌍둥이는 대학에 진학할 무렵 얼간이와 깡패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실로 선 없는 악은 없다라고 틴은 그 시절 드문드문일기에 적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있는 법이다. - P124

월간이들 중 두 명은 감히 엄마의 장례식에도 찾아왔다. 이는 조리가 장례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조리는 지금도 그 개새끼들을 가만두지 말았어야 했다고, 묘 옆에 나타나 슬픈 척을 하면서 쌍둥이에게 너희 엄마는 정말 멋지고 친절한사람이었다고, 정말 좋은 친구였다고 말하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친구?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냥 자기랑놀아날 여자나 원했던 거면서!" 조리는 노발대발했다. 그들에게 따줬어야 했다. 소란을 피웠어야 했다. 주먹으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어야 했다.
틴은 그 남자들이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엄마 메이브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는 게,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가지나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로 본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 - P124

지 않나? 아모르, 볼룹타스, 카리타스로 즉 사랑, 쾌락, 자선으로 말이다. 하지만 틴은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랬다간 조리의 분노를더 자극할 것이다. 특히 이렇게 라틴어를 써 가면서 말하면 더 그럴것이다. 조리는 라틴어와 관련된 모든 것에 인내심이 없으니까. 라틴어는 조리가 평생 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 중 하나다. 왜 사람들 기억에서도 잊힌 죽은 언어로 쓰인 그 곰팡내 나는 낙서 쪼가리에 인생을 낭비하는 거야? 너는 정말 영리하고, 정말 재능이 많고, 잘하면...... (뒤이어 틴이 잘하면 될 수도 있었을 많은 것이 길게 나열될 테지만 그중 무엇도 실제로 가능하지는 않다.)그러니 조리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 P125

최악은 개빈이 승승장구하며 찬사를 받자 다크 레이디 소네트가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고 대단하지는 않아도 경력 면에서 상당히의미 있는 상들을 연달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흐름에 따라 개빈의 이 초기 시들은 색다른 결을 가진 후기 시들을통해 변주되었다. 사랑에 빠진 화자는 처음에는 다크 레이디의 단순한 육체성을, 실제로는 추잡함과 변덕스러움을 좇았고, 나중에는 예전만 못해도 여전히 희미한 빛을 발하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의 뒤꽁무니를 다시 좋았다. 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기만 하고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나중엔 책으로 출간되기까지한 화자의 호소를 진정한 사랑은 차가운 눈길로 일축했다. - P138

복수심에 사로잡힌 조리는 길거리의 도랑과 주차장을 훑고 돌아다니면서 마치 눈에 보이는 데이지 꽃을 죄다 꺾어 버리듯 성욕 강한 아무 남자하고 관계를 맺었다가 그들을 아무렇게나 버렸다. 그런행동이 조리를 함부로 내팽개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틴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붙잡기 위해 무슨 짓을 하며 망가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머리 없는 염소와 떡을 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계절의 수레바퀴가 돌아갔고, 매일의 새벽이 362차례 분홍빛 아침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진 후 또다시 362번의 아침을,
그리고 또다시 362번의 아침을 어루만졌다. 욕망의 달은 차올랐다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했고, 그러는 사이 정욕의 화신 같은 시인은 점점 희미하고 까마득한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아니, 그러기를 틴은 바랐다. 조리를 위해서.
하지만 정욕의 시인은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당장 죽어서 다시 사람들의 조명을 받는 것, 그게 너 같은 자식이 해야 할 일이야. 틴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개빈 퍼트넘의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가. 실제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 P139

틴이 조리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려 한다. 조리가 버럭 화를 내면서 이 노작가의 정강이를 걷어찰 수도,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다. 조리를 여기에서 빼내야 한다. 집에 가서 독한 술을 한 잔씩 하면서 조리를 진정시키고나면 이 모든 상황을 빈정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리는 틴의 팔을 놓더니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모든 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제 삶 전체가요." 우는 건가? 그렇다.
청동색과 금색으로 반짝반짝하며 흐르는 진짜 눈물이다.
"나도 고통스러웠어요." 콘스턴스가 말한다.
"알아요." 조리가 말한다. 두 사람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정신적 교감 속에 갇힌 채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장소에 살고 있어요. 알핀랜드에는 과거가 없어 - P161

요 시간 자체가 없죠.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존재하는 시간이요 우리에게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요.
"맞아요. 때가 온 거죠 저도 미안해요. 저도 당신을 놓아줄게요."
조리가 콘스턴스에게 다가간다. 포옹하려는 건가? 틴이 생각한다. 서로를 껴안을까, 아니면 바닥에 쓰러뜨릴까? 이게 일촉즉발의 순간인가? 어떻게 도와야 하지? 대체 지금 여자들끼리 어떤 이상한 짓을벌이고 있는 거지?
틴은 바보가 된 기분을 느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조리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조리에게 다른 면면이, 다른힘이 있는 건가? 틴으로서는 절대 상상하지도 못한 차원이?
콘스턴스가 뒤로 물러선다. 그러고는 조리에게 "축복을 빌게요." 라고 말한다. 흰 양피지 같았던 피부가 이제 황금 비늘이 발하는 빛으로 반짝인다.
젊은 너비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차마 믿지 못하고 있다. 입은 반쯤 벌린 채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숨죽이고 있다. 우리를 호박 결정으로 만들려는 생각이로군. 틴은 생각한다. 고대 곤충들처럼.
우리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호박 구슬 속에, 호박 단어 속에.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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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삶에 의해 보이는 삶이다. 나는 의미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맥동하는 혈관이 의미를 지니지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배우는 사람처럼 당신에게 글을 쓰고 싶다. 나는매 순간을 사진에 담는다. 음영을 넣은 그림을 그리듯 단어들에 깊이를 준다. 나는 왜냐고 묻고 싶지 않다. 당신은 언제든 왜냐고 물을 수 있지만 늘 답을 듣지 못할것이다 -대답 없는 질문에 따르는 기대감에 찬 침묵,
내가 거기에 굴복할 수도 있을까? 비록 그 어느 장소 혹은 시간 속에 나를 위한 해답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 P19

내가 당신에게 쓰는 글은 편안하지 않다. 나는 확신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나 자신을 금속화한다. 나는 당신에게든 내게든 편안하지 않다. 내 말들은 그날의 공간속으로 터져나간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알게 될 것은 그림자, 과녁에 명중한 화살의 그림자다. 화살은 내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나는 아무런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그림자를 헛되이 움켜쥔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나의 자유다. - P23

누구든 나와 함께할 사람은 함께해 주기를: 이 여정은 길고 험난하지만, 사는 것이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말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는다. 나는 말들 너머에 뒤엉켜 있는 관능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문구들 속에서 나 자신을 구현한다. 문구들이 조용히 노크하면 거기서 침묵이 뿌옇게 솟아난다. - P31

따라서 글쓰기는 말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말은 말이 아닌 것을 낚는다. 행간에 있는 말 아닌 것이 미끼를 물면 글이 쓰인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이 잡히고 나면 안심하고 말을 내버릴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비유가 끝나는 곳이다: 말이 아닌 것, 미끼를 물기, 말에 통합되기. 그러니 당신을 구원하는 건 넋을 놓은 글쓰기다. - P31

나는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모호한 존재다. 나는 처음엔 달빛의 선명한 시야를 가졌었고, 그래서 하나의 순간이 죽은 뒤 영원히 죽은 상태로 접어들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해 그 순간을 뽑아낼 수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있는 건 관념들을 담은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 속에 숨겨져 있었던, 그간 내가 예견해 왔던 직관적인 황홀경이다. 또한 이것은 향연이기도 하다. 말들의 향연. 나는 목소리보다는 몸짓에 가까운 신호들로 글을 쓴다. 사물들의 내밀한 본질로 파고드는 것, 이 모든 건 그림을 그리면서 익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을 새로 만들기 위해 그림 그리는 걸 그만둘 때가 되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을 새로 만든다. 내겐 목소리가 있다. 그림의선線 속으로 뛰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이 글쓰기 역시 내게는 계획 없는 삶이 펼치는 활동에 속한다.  - P35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이렇게 실재하고 또기필코 사라져 버릴 순간에 자그맣고 틀에 갇힌 내 자유가 나를 세상의 자유에 연결시킨다직각으로 짜인틀에 담긴 인상, 그게 아니라면 창문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거칠게 살아 있다. 죽음이 말한다. 자신은 떠난다고. 나를 데려간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나는죽음과 함께 가야 하기에 헐떡거리며 몸서리친다. 나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 존재 안에 자리 잡는다 -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죽음은 관능적이다. 나는 죽은 사람처럼 키 큰 풀들을 헤치며 푸르스름한 풀빛 속을 걷는다: 나는 금으로 빚어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이며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수북이 쌓인 뼈들뿐이다. 나는 느낌들로 이루어진 지층 맨 밑바닥에 살고있다: 나는 가까스로 살아 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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