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


한시절 붉고노란 단풍으로
내마음 끝없이 일렁이게 하더니
끝없이 일렁여 솔미치광이버섯처럼
내가 네속을 헤매며
네가 내속을 할퀴며 피
흘리게 하더니
이제 산은 겨울산이다
너는 먼빛으로도 겨울산이다

어느결에 소스라치게 단풍들어
네 피에 내가 취해 가을이 가고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
이제 우린 겨울산이다
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
추운 애인아
누더기라도 벗어주랴
목도리라도 둘러주랴

쌀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김태정[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중에서


다시, 김태정이다
마음이 시리면 김태정이다
역시, 김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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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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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이시가키 린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다.
밥을
푸성귀를
고기를
공기를
빛을
물을
부모를
형제를
스승을
돈도 마음도
안 먹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입을 닦으면
주방에 널려 있는
당근 꼬리
닭 뼈다귀
아버지 창자
마흔 살 해질녘
내 눈에 처음으로 넘치는 짐승의 눈물.


서경식의 책 [시의 힘]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
그는 또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 P155

묵직하지만 역시 서경식..좋네
다 읽고 혼자 뿌듯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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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0일.

엄청 힘든 유월이었다.

장마라는데 비는 오지 않아 마르고 칙칙한 개울 청소하러 내려갔다가 무리지어 핀 망초꽃에 마음이 흔들렸다.

백만년전 어디쯤에 단편을 하나 썼는데 제목이 "개망초꽃" 이었다.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안도현의 시 "개망초꽃"을 인용한 기억은 오롯하다.

그래서였을까?

안 하던 짓, 꽃을 한아름 꽂아두고

오래 비워둔 서재에 카스에 숨겨둔 글 하나 옮겨 본다.

칠월엔 이 슬럼프가 극복되려나?

드디어 비가 오신다.

후덥지근, 더운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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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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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김사인시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 덕분에 혹독한 여름을 견딜 수 있었다. 산다는 건 `중과부적`의 무게로 `선운사 풍천장어집`의 김씨처럼 누가 알아 주든 아니든 제 자리를 지키고 제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일 아니겠는가.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을 그리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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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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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구월입니다.

가을입니다.

가을이면 시인의 ‘가을 드들강’이 읽고 싶어지고

읽다보니 이 가을, 구월에 4주기가 되는 시인의 생애가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물푸레나무처럼 스며듭니다.

어느 시인은 가장 죄를 덜 지은 시인을 꼽는다면 ‘김태정’일 거라고 했지요.

녹록치 않은 신산한 삶에서도

아무런 죄 짓지 않고 쉰이 되기도 전에 달랑 시집 한 권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시인의

시편들이 잔잔하게, 찬찬히 가을 저녁 간장색 어둠으로 몸을 담가줍니다.

오래~ 먹먹합니다. 

달랑 시집 한 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의 집에 시인의 온 생애가 담겨있군요.

땅 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가고 싶은 구월의 저녁입니다.

혹 그곳에 가시거든 거기,

있는 듯 없는 듯 나무 곁에 있을 시인께 가볍게 목례를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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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9-11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태정 시인은 얘기만 듣고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사서 읽어야겠어요. 미황사 가본 지도 너무 오래 됐네요. 다시 가고픈 절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