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모든 사람들이 단원의 모습을 이처럼 아름답게 증언한 것을 들으면서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단원의 모습은 그의 <군도> 뒤쪽에 나오는
‘핸섬‘한 청년이 혹 그의 자화상적 이미지가 아닐까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나는 1997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단원의 <게> 그림과 인물도를 조사해볼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 이 인물도를 보는 순간 "이것은 단원의 <자화상>이다"라는 소리를 나도 모르게 지르고 말았다.
이 작품은 품위 있고 가지런하게 정리된 방 가운데 한 인물이 정좌하고있는 그림으로 인물의 옷주름을 품신하게 잡은 솜씨는 의심의 여지없는 단원의 필치이고, 청수한 얼굴과 꼿꼿한 자태에는 앞시대 사람들이 말한 단원의 얼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감투에 눌린 상투 끝의 섬세한 처리나 방 한가운데 매달린 등잔의 멋스러움 모두에서 깔끔하기 그지없었다는 단원의 분위기를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인물의 나이로 보나 필치로 보나 30대 후반의 단원이다. 단원은 정녕 이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 P215

어느 것 하나 명작 아닌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단원의 멋과 격조가 살아나지 않은 것이 없다. 단원의 작품에 가짜는 있어도 태작은 없다는 말이있을 정도로 그는 자기 작품에 책임을 졌다. 이동주 선생은 단원의 작품에서는 도서 낙관까지가 하나의 화면 구성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했다.
50대 후반 단구 시절 단원 화풍의 특색은 50대 전반기부터 보여준 압축된 묘사, 빠른 필선, 유연한 번지기가 더욱 스스럼없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작품의 소재보다도 필법 그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옛 사람들은 이럴 경우 손과 마음이 서로를 잊고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그 원숙한 필치가살아 있을 때 우리는 바로 "이것이 바로 단원이다", "이래야 단원이지"라는감탄을 절로 발하게 된다.
이 시절 단원의 작품은 산수·화조 · 인물 · 속화라는 장르를 거의 구분할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 화폭에 녹아들어 있다. 까치를 그렸어도 산수화의그윽한 맛이 있고, 소를 타고 가는 목동을 그렸어도 문인화 같은 고상함이있다. 사생이 아닌 관념풍의 산수를 그렸어도 우리 산천 어드멘가 있음직한진경이 느껴지고, 들녘에 나는 새를 사생한 그림을 그렸어도 화본 같은 정형이 느껴진다.
이 점은 그의 선화라고 불러도 좋을 불교 소재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재의 내용을 보면 불교적 내용의 한 토막이지만 어느새 성속(聖俗)이 하나가 된 인간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 P296

<남해관음도>도판35도 관세음보살상이라기보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결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미인과도 같고, <달마좌수도해도>는 달마대사상이아니라 낮잠이 주제로 부상되고 있다. <남해관음도>에서 관음보살 등 뒤에수줍은 듯 몸을 감춘 선재동자의 모습이나 <달마좌수도해도>에서 웅크리고 잠자는 자세는 속화의 한 장면 같다.
단원은 이래저래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용주사 탱화를 그렸고,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고, 연풍 상암사에 시주하여 만득자를 얻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이 점점 더 깊이 불교 쪽으로 빨려들었는지도 모른다. - P298

그러한 단원이 어쩌면 죽음을 의식하며 극락왕생을 그린 듯한 <염불서승도>도관 56는 그의 선화 중에서도 백미라 할 명작 중 명작이다. 연꽃 대좌에앉아 구름을 타고 두광을 발하며 꼿꼿이 가부좌한 채로 서쪽으로 향한 노승의 뒷모습에서는 거의 성불(成佛)한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아름답고 명상적이며 종교적인 그림이지만 그 필치를 뜯어보면 옷을 표현한것은 거친 먹이고, 연꽃을 표현한 것은 아무렇게나 뒤엉킨 선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정녕 손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스스럼없는 경지가 아니고서는불가능한 것이다. - P299

단원은 나이 30세가 못되어 벌써 "근대의 명수"로 이름을 얻어 세 차례나어용화사가 되었으며, 궁중의 그 많은 화사(事)를 모두 맡아냈다. 그는 신선 · 기록 · 기념 · 속화 · 판화 · 불화 · 산수·인물·화조 · 초충. 도석 등 전장르에 걸쳐 ‘무소불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당대 문인걸사의 취미를 반영하고 아래로는 신흥 부호에서 일반 백성이 함께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다.
환쟁이 신분으로 찰방과 현감을 지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때로는명사들과 교류하며 아취 있는 삶을 영위하기도 하고, 말년엔 가난과 고독속에서 넉 달을 보냈으나 어떤 처지에서도 그는 진실로 인간적인 분이었다.
그에게는 탁월한 그림 솜씨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대상을 정확 - P314

하고 실감나게 그려내는 묘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림은 결코 손재주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단원은 사물을 형상적으로 인식하는 감성적 인지 능력이 뛰어났고, 그것을 작가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재창조하는 구성력이 탁월했다.
화가로서 그의 회화적 역량은 어느 한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르에 따라, 관객의 신분적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함으로써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예술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 만하다.
의궤, 반차 등 궁중의 기록화를 그릴 때는 공식적이고 도상이 엄격한 종래의 화풍에 현장감을 주어 궁중의 권위를 더욱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켰고, 속화에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에서 포착하는수준을 넘어 서민의 심성에 다가서는 충만된 리얼리티를 표출해냈으며, 사대부 사회의 감상화를 제작함에는 산수화에서 실경의 박진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실경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남종문인화의 철학적 분위기로 승화시키거나 말할 수 없이 아늑한 조선적인 시정어린 세계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런 화가는 정말로 "근고(近古)에 없었다." - P316

그리하여 김홍도의 예술은 조선 4백 년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모든 예술적 업적을 한 몸으로 끌어안아 하나의 전형을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냇물이 호수로 모여들고 그 호수에서 발원한 냇물이 다시 여러 갈래로 흘러가는 모습이니, 앞시대의 예술은 단원이라는 호수속에서 종합되고 이후의 화가들은 단원이라는 호수로부터 흘러나와 너나없이 단원을 본받는 형상이 되었다.
단원이 동시대와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루 열거할 수 없다. 산수에서 이인문. 김석신. 김양기, 속화에서는 신윤복· 김득신 · 김후신, 화조에서는 장한종. 유숙 등 그 모두가 단원이라는 호수 속에서 흘러나간 지류들이다.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나는 필자 미상의 <화조도>참고도판13한 폭을 제시할 수 있다. 만약 이 그림에 단원의 낙관이 있다면 누구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구도와 필치와 서정이 서려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단원의 작품이 아니라 화면 왼쪽에 단원의 필치를 본받았다며 "방단원필의 (倣 - P316

檀園筆意)"라 적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조선의 화가들이 중국의 대가를 본받아 ‘방심석전(倣沈石田)‘ ‘방미원장(倣米元章)‘ ‘방동기창(倣董其昌)‘을 그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 조선의 화가들은 그런 대가의 하나로 단원을 가슴속에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조선의 화가를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단원의 역량과 영광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단원이라는 화가를배출해낸 정조시대 문화의 역량이자 영광이었다.
나는 여기서 단원의 남다른 천재성을 생각해본다. 흔히 예술가들의 천재성이란 남들은 도저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경지를 저 혼자만이 도달하는기량을 의미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단원은 그런 유의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남들과 나누어 쓸 수 있는 폭 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보통 예술적 천재들이 지닌 부정적 측면, 괴팍하고 고집 - P317

세고 이기적이고 방자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는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을 남들과 분유(有)하고 공유(公有)할수 있는 양식을 창출하는 데 발휘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미켈란젤로나모차르트 또는 추사 김정희 같은 천재와는 전연 다른 성격의 천재였고, 성품 또한 그들처럼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았다.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상이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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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5?)는 내남이 모두 알고 있듯이 우리역사상 매우 뛰어난 화가 중 한 분이다. 어쩌면 단군 갑자 이래 최고의 화가라고 일컬어질 만한 위인으로 최소한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원 김홍도라 하면 대개 뛰어난 풍속화가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김홍도가 이룩한 예술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단원 김홍도가 육십 평생 ㅡ그 시대, 그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예술적 소명에따라 ㅡ그려낸 작업량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김홍도는 조선 왕조의 문예 부흥기라 일컬어지는 정조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였다. 정조시대의 문화적 생산과 소비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난숙했다. 이 시대가 요청하는 미술적 생산은 전에 없이 다양했고, 그것은종래의 상투적 화법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새로운현실, 새로운 내용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김홍도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조금도 모자람 없이, 오히려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능숙하게 수행했다. - P169

거기에다 단원은 앞시대 화가들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를 남김없이 이어받았다. 겸재의 진경산수, 공재와 관아재의 속화, 현재와 능호관의 문인화를모두 소화하여 끊임없는 연찬과 수련 속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냈다. 그리하여 그를 일컬어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예술적 성취 속에는 그 자신의 예술의지가 작용했든 시대적 요청에 의해 촉발된 것이든, 어느 것이나 인문정신의 표상이었다. 정조시대 문예 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 P169

인물. 산수·신선 ·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品)에 해당되어 옛 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것이 없으니 옛적에도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書本)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 - P174

그리하여 표암은 단원을 지칭하여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신필神筆)" "근대의 명수"라 하고, 「단원기 또 한 본」에서는 우리나라 4백 년역사상 파천황적 솜씨"라고 극찬하기에 이르렀다.
단원과 표암의 관계는 표암이 세상을 떠나는 1791년, 단원 나이 47세까지 계속된다. 단원이 어린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으로 들어간 것도 표암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훗날 단원이 어진 제작 이후 관직을 얻어 사포서(司圃署)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마침 표암도 그곳의 별제(別提)로 제수받아 직장의 상하 관계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도 표암은 지위를 무시하고 망년지우(忘年之友)로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원의 이름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단원의그림을 받아와서 당신에게 글을 써달라고 하면 더욱 감회로웠다며 표암은단원과의 만남과 교류를 다음과 같이 감격적으로 말하였다.

내가 단원과 사귄 것은 전후하여 모두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단원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림 그리는 법(畫訣)을 - P174

가르치기도 했다. 중간에는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知己) 다운 느낌을 가졌다.

표암의 말을 요약하면, 처음에는 사제 관계로 만났고, 중간에는 직장의상하 관계로 만났고, 나중에는 대학로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나이를 반으로 꺾는 ‘절년이하지(나이를 잊고 지내는 벗之)하면서으로 지냈다는 것이다. 단원에게는 그런 스승이 있었고, 표암에게는 그런 제자가 있었다.

표암과 단원이 예술로서 만나는 아름다운 관계는 표암의 평이 들어 있는 단원의 여러 그림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단원의 34세 때 그림인 <서원아집도(西圖雅集圖)> 6곡병, 선면(扇面) <서원아집도>에 부친 제찬(題讚),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8곡병에 부친 제시(題詩), 그리고 단원 40대의 여러 <신선도>에 부친 표암의 화평(畵評) 등은 이 불세출의 화가에 대한 찬사로 가득하다.
그 중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장과(張果)를 그린 단원의 <과노도果老圖>에 부친 표암의 평을 보면 그 찬사가 극에 달해 있다. - P175

장과 노인이 종이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 한 권을 손에 들었는데 눈빛이 책장을 뚫을 듯이 쏘아보고 있다. 이것은 단원의 최고 가는 득의작得意作)으로 중국에서도 이런 그림은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이런 만남이 더욱 아름답게 나타난 것은 표암· 단원의 합작 <송호도(松虎圖)>이다. 소나무 밑에서 돌아나오는 호랑이를 그린 이그림에서 소나무는 표암이 그렸고 호랑이는 단원이 그렸다. 단원이 사능(士能)이라 낙관한 것과 화풍으로 미루어 30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단원 중년의 명작이다(근래에 소나무 그림을 이인문이 그렸다는 주장도 있는데 나는 표암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다). - P175

표암이 그린 소나무는 노송의 줄기와 여린 잔가지가 문인화풍으로 운치있게 표현되어 있다. 60대 노필의 선비화가다운 품격이 살아 있다. 이에 반해 30대 패기 있는 화원 단원이 그린 호랑이 그림은 사실감이 충만하고 필치가 치밀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것이 노년과 장년의 차이이다.
호랑이는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듯 꼬리를 바짝 치켜올리고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데 등을 한껏 굽어올리고 앞발에 힘을 모으고 있는 자세가 금방이라도 이쪽을 향해 치달릴 것만 같다. 호랑이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포착함에 있어 힘차게 치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동작을 예견케 하는 내공의 힘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이 그림에서 놀라운 것은 호랑이 몸에 있는 털의 표현이다. 얼핏 보기에 호랑이 몸의 줄무늬를 검정과 갈색으로 번갈아 칠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터럭 하나하나를 일일이 헤아리듯 그렸다. 그 붓질이 몇 만 번일지 몇 십만 번일지 모르는 끔찍스런 정성과 섬세함이 배어 있다. 바로 이런 치밀함 때문에 이 호랑이는 더욱 사실감과 생동감을 얻게 된 것이니, 이 그림을 위해 단원이 지불한 공력과 참을성은 가히 영웅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 P176

표암에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배운 단원이 당당히 도화서화원이 되어 그 이름을 문헌상에 처음 나타내는 것은 그의 나이 21세 때인 1765년이다. 이 해는 영조가 1세 되는 때로 나이가 망팔에 이르고 또 재위 40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리고 잔치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폭의 계병(械屛)을 그렸다. 이것이 <경현당수작도계병(景賢堂受爵圖械屛>이다. 지금 이 그림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력을 기록한 두 폭의 글씨 부분만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데 그 끝에 "글은 좌의정 김상복이 짓고 그림은 화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단원이 얼마나 일찍이 화가로서 출세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이 21세면 기껏해야 화원으로 입문하는 시기인데 이때 벌써 대폭의병풍 그림, 그것도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이니 보통의 능력이 아니고, 보통의 영광이 아닌 것이다.
20대 초에 단원은 벌써 이렇게 능력 있는 회원으로서 도화서에 봉직하고있었다. 그가 회원으로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28세 때인 1772년 복헌(復)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이 단원을 위해 <금강전도> 한 폭을 그려준 것이 전해지고 있다. 이 사실은 그가 화원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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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 정조시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북, 1712~1786?)은 당대의기인(奇人) 중에 기인이었다. 그의 전기를 쓴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주객(酒客)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화사(畫史)라 했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 [狂生)라 했다"고 한다.
최북은 스스로 호를 지어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다. 즉 붓으로 먹고 사는사람이라 했으니 이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어찌 보면 낭만적이고 어찌 보면 겸손함이 어린 대단히 멋있는 호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 속사정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먹고살 것이 넉넉한 문인화가가 이런 호를 썼다면 멋이라 하겠지만 천한 신분에 빈한하기 짝이 없었던 최북이고 보면, 호생관이란 "나는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쩔 테냐"
라는 저항적 냉소가 서려 있는 것이다. - P129

그는 실제로 그림을 그려 그것을 팔아 먹고살았던 화가였다. 어쩌면 그 이외에 생계를 꾸려갈 다른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엿한 양반이아니라 반대로 미천한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화서 화원이라도 되어 녹봉을 받아 살아갈 수 있었겠건만, 어디에도 구속될 수 없는 그 오만한 성품과 스스로의 자만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화원도 못되고, 한묵의 선비화가는 더 더욱 못 되고, 영낙없는 품팔이 환쟁이가되어 미술 시장이라고 해봤자 겨우 물물 교환 수준을 갓 넘은 상태에서 그것을 내다 팔아 먹고 살아야 했으니, 그 불 같은 성미에 겪었을 고통과 한숨을 알 만도 하다.
그래도 그는 할 수 없이 참고서 그림을 그렸다. 호생관이라는 이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댔다. 남공철의 말에 의하면 "용돈이 궁하면 평양과동래에까지 가서 그림을 팔았다" 고 한다 - P129

최북은 스스로 ‘호생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결국 호생관으로 일생을 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서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현하면서 그림으로 영상과 얘기할 때는 명작을 낳았다. 그러나 그저
‘호생관‘이라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는 호생관이라는 것이 한낱 노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호생관 최북,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량 있는 인물이었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기걸 찬 성품이 화면 속에 녹아들었을 때는 심사정이나 이인상 못지 않은 높은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기절한 작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었다. 칠칠이로서는 천분(天分)을 다하지 못하는 그 분풀이를 세상에 퍼부으며 살았다.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창조적 원동력이될 수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는 그런 기개의 소산이다. 그러나 최북의 기개라는 것이 세상도, 대중도, 역사적평가도 의식하는 일없이 자포자기의 폭력에 빠질 때면 그것은 대책 없는 오만이었고 그는 한낱 기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인 것이었다.
호생관 최북과 거의 동시대를 살며 진경산수나 속화가 아니라 문인화풍으로 일관한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과 비교해보면 이들 3인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현재는 몰락한 양반이었고, 능호관은 서출이었고, 호생관은 중인 출신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두 문인화풍을지향한 문사 기질의 화인이었다. - P163

이들이 진경산수와 속화보다 문인화풍의 관념산수에 더욱 천착한 것은 어찌 보면 모순 같고,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진경산수와 속화는현실을 보는 긍정적 시각이 있거나 현실 속에 기꺼이 개입할 마음 자세가있어야 다룰 수 있는 장르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로서는 차라리 관념의 세계가 자신의 처지를 담아내는 데 맞았던 것이다.
같은 관념성을 지향하면서도 현재는 정서의 심화를 추구하였다. 그의 그림에 서려 있는 깊이가 바로 그것이다. 능호관은 관념산수를 통하여 높은 도덕과 정신적 고양을 추구했다. 그의 그림에 감도는 삼엄한 기상이 그것이다.
이에 반하여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낭만적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흔히 예리한감성은 이성의 힘을 능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호생관에겐 그런 호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감성이란 이성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는 사실상 객기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낭만적 반항의 허점이다. 호생관에게는 그런 허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 더욱 몰랐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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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림의 세계에도 바둑처럼 급수가 있다고 할 때 조선시대 화가 중에 입신(入神)의 경지라는 9단에 오른 이는 몇이나 되며, 9단 중에서 타이틀을차지할 만한 기량을 갖고 있던 화가는 누구일까? 또 그림의 세계에도 운동경기처럼 종목이 있다고 할 때 진경산수에서 겸재 정선, 속화에서 단원 김홍도가 금메달을 차지한다면 문인화 부문은 누가 차지할 수 있을까?
나는 단연코 능호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않는다. 이는 나 개인의 의견만이 아니다.
당대의 평가도 그렇고 오늘날 미술사가 대부분의 견해도 그렇다.
이인상보다 한두 세대 후배되는 문사인 이규상(李규象, 1727~1799)은 『일몽고一夢稿)』의 「서가록(書家錄)」과 「화주록」에서 이인상의 그림과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그림은 보통 화가들의 좁은 오솔길을 훌쩍 뛰어넘어 곧바로 꼿꼿한 자태와 파리하면서도 강단 있는 정신으로 화가의 상승별품(上乘別品)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화주록」)
이인상 그림의 필획은 그윽한 맛이 있는 가운데 깎아지른 듯 삼엄하며, 화법이 독특하면서도 막힘 없이 산뜻하고 시원하여 고금 화가들의 뛰어난 경지를넘나들고 있다. 그의 전서(篆書)와 팔분(分)의 획은 비록 옛날의 명수라 하더라도 그와 대적할 만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며, 도장은 힘 주는 것이 가지런하여 천기(天)가 흐르고 있다. 따라서 전서와 팔분, 회화와 전각 모두 신품(神品)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서가록」) - P59

능호관이 서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양반 사회에 어엿이 한몫 끼어활동하는 것이 가능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당시 사회적 기류가 서얼허통(庶孼通)에 점점 관대해져 가는 추세였고 특히 그것이 노론의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가 완산 이씨라는 명문의 자손으로, 특히 백강의 후손이라는 집안 배경이 있었다. 이미 그의 증조부, 조부, 삼촌 등이 모두 백강의 음보로 현감이나 찰방을 지낸 바있다. 셋째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그의 높은 인품과 뛰어난 학식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능호관 이인상의 인품은 정말로 곧고 높았던 모양이다. 그 주변에 있던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개결(介潔)한 선비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사람됨이대단히 원칙적인 도덕 군자였고 타협을 모르는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모양이다. 동년배 친구였던 황경원은 그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곧아서 남과 마음이 잘 맞지 않았으며, 아첨해서 세상에 출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과 말할 때는 씩씩하고 굳세며 엄하고 곧아서 법도를 바로 지키니 사람들마다 경복(敬服)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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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아침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서늘하다

간밤 공방과 안채를 오가며 내가 내놓았던 발자국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눈을 뚫고 가려면 처음부터 다시 길을 내야 했다. 눈에 묻혀 자루 끝만 보이는 삽을 꺼내 털다 말고 나는 멈췄다. 살아오면서 보았던 눈송이 중 가장 커다란 것이 손등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 P185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손바닥이 연한 분홍빛으로 부푸는 동안, 내 열기를 빨아들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얼음이 되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져 나는 손을 털었다. 흠뻑 젖은 손바닥을 코트 앞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삽시간에 딱딱해진 손을 남은 손에 비볐다. 열기가 지펴지지 않았다. 몸속 온기가 손을 통해 빠져나간 듯 가슴이 떨려왔다. - P186

가물거리는 촛불의 음영 때문에, 인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인지 빛과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뿐인지 구별할 수 없다.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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