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5?)는 내남이 모두 알고 있듯이 우리역사상 매우 뛰어난 화가 중 한 분이다. 어쩌면 단군 갑자 이래 최고의 화가라고 일컬어질 만한 위인으로 최소한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원 김홍도라 하면 대개 뛰어난 풍속화가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김홍도가 이룩한 예술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단원 김홍도가 육십 평생 ㅡ그 시대, 그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예술적 소명에따라 ㅡ그려낸 작업량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김홍도는 조선 왕조의 문예 부흥기라 일컬어지는 정조시대에 활약했던 화가였다. 정조시대의 문화적 생산과 소비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난숙했다. 이 시대가 요청하는 미술적 생산은 전에 없이 다양했고, 그것은종래의 상투적 화법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새로운현실, 새로운 내용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김홍도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조금도 모자람 없이, 오히려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능숙하게 수행했다. - P169

거기에다 단원은 앞시대 화가들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를 남김없이 이어받았다. 겸재의 진경산수, 공재와 관아재의 속화, 현재와 능호관의 문인화를모두 소화하여 끊임없는 연찬과 수련 속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냈다. 그리하여 그를 일컬어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예술적 성취 속에는 그 자신의 예술의지가 작용했든 시대적 요청에 의해 촉발된 것이든, 어느 것이나 인문정신의 표상이었다. 정조시대 문예 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 P169

인물. 산수·신선 ·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品)에 해당되어 옛 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것이 없으니 옛적에도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書本)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 - P174

그리하여 표암은 단원을 지칭하여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신필神筆)" "근대의 명수"라 하고, 「단원기 또 한 본」에서는 우리나라 4백 년역사상 파천황적 솜씨"라고 극찬하기에 이르렀다.
단원과 표암의 관계는 표암이 세상을 떠나는 1791년, 단원 나이 47세까지 계속된다. 단원이 어린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으로 들어간 것도 표암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훗날 단원이 어진 제작 이후 관직을 얻어 사포서(司圃署)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마침 표암도 그곳의 별제(別提)로 제수받아 직장의 상하 관계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도 표암은 지위를 무시하고 망년지우(忘年之友)로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원의 이름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단원의그림을 받아와서 당신에게 글을 써달라고 하면 더욱 감회로웠다며 표암은단원과의 만남과 교류를 다음과 같이 감격적으로 말하였다.

내가 단원과 사귄 것은 전후하여 모두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단원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림 그리는 법(畫訣)을 - P174

가르치기도 했다. 중간에는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知己) 다운 느낌을 가졌다.

표암의 말을 요약하면, 처음에는 사제 관계로 만났고, 중간에는 직장의상하 관계로 만났고, 나중에는 대학로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나이를 반으로 꺾는 ‘절년이하지(나이를 잊고 지내는 벗之)하면서으로 지냈다는 것이다. 단원에게는 그런 스승이 있었고, 표암에게는 그런 제자가 있었다.

표암과 단원이 예술로서 만나는 아름다운 관계는 표암의 평이 들어 있는 단원의 여러 그림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단원의 34세 때 그림인 <서원아집도(西圖雅集圖)> 6곡병, 선면(扇面) <서원아집도>에 부친 제찬(題讚),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8곡병에 부친 제시(題詩), 그리고 단원 40대의 여러 <신선도>에 부친 표암의 화평(畵評) 등은 이 불세출의 화가에 대한 찬사로 가득하다.
그 중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장과(張果)를 그린 단원의 <과노도果老圖>에 부친 표암의 평을 보면 그 찬사가 극에 달해 있다. - P175

장과 노인이 종이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 한 권을 손에 들었는데 눈빛이 책장을 뚫을 듯이 쏘아보고 있다. 이것은 단원의 최고 가는 득의작得意作)으로 중국에서도 이런 그림은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이런 만남이 더욱 아름답게 나타난 것은 표암· 단원의 합작 <송호도(松虎圖)>이다. 소나무 밑에서 돌아나오는 호랑이를 그린 이그림에서 소나무는 표암이 그렸고 호랑이는 단원이 그렸다. 단원이 사능(士能)이라 낙관한 것과 화풍으로 미루어 30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단원 중년의 명작이다(근래에 소나무 그림을 이인문이 그렸다는 주장도 있는데 나는 표암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다). - P175

표암이 그린 소나무는 노송의 줄기와 여린 잔가지가 문인화풍으로 운치있게 표현되어 있다. 60대 노필의 선비화가다운 품격이 살아 있다. 이에 반해 30대 패기 있는 화원 단원이 그린 호랑이 그림은 사실감이 충만하고 필치가 치밀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것이 노년과 장년의 차이이다.
호랑이는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듯 꼬리를 바짝 치켜올리고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데 등을 한껏 굽어올리고 앞발에 힘을 모으고 있는 자세가 금방이라도 이쪽을 향해 치달릴 것만 같다. 호랑이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포착함에 있어 힘차게 치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동작을 예견케 하는 내공의 힘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이 그림에서 놀라운 것은 호랑이 몸에 있는 털의 표현이다. 얼핏 보기에 호랑이 몸의 줄무늬를 검정과 갈색으로 번갈아 칠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터럭 하나하나를 일일이 헤아리듯 그렸다. 그 붓질이 몇 만 번일지 몇 십만 번일지 모르는 끔찍스런 정성과 섬세함이 배어 있다. 바로 이런 치밀함 때문에 이 호랑이는 더욱 사실감과 생동감을 얻게 된 것이니, 이 그림을 위해 단원이 지불한 공력과 참을성은 가히 영웅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 P176

표암에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배운 단원이 당당히 도화서화원이 되어 그 이름을 문헌상에 처음 나타내는 것은 그의 나이 21세 때인 1765년이다. 이 해는 영조가 1세 되는 때로 나이가 망팔에 이르고 또 재위 40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리고 잔치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폭의 계병(械屛)을 그렸다. 이것이 <경현당수작도계병(景賢堂受爵圖械屛>이다. 지금 이 그림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력을 기록한 두 폭의 글씨 부분만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데 그 끝에 "글은 좌의정 김상복이 짓고 그림은 화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단원이 얼마나 일찍이 화가로서 출세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이 21세면 기껏해야 화원으로 입문하는 시기인데 이때 벌써 대폭의병풍 그림, 그것도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이니 보통의 능력이 아니고, 보통의 영광이 아닌 것이다.
20대 초에 단원은 벌써 이렇게 능력 있는 회원으로서 도화서에 봉직하고있었다. 그가 회원으로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28세 때인 1772년 복헌(復)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이 단원을 위해 <금강전도> 한 폭을 그려준 것이 전해지고 있다. 이 사실은 그가 화원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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