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모든 사람들이 단원의 모습을 이처럼 아름답게 증언한 것을 들으면서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단원의 모습은 그의 <군도> 뒤쪽에 나오는 ‘핸섬‘한 청년이 혹 그의 자화상적 이미지가 아닐까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나는 1997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단원의 <게> 그림과 인물도를 조사해볼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 이 인물도를 보는 순간 "이것은 단원의 <자화상>이다"라는 소리를 나도 모르게 지르고 말았다. 이 작품은 품위 있고 가지런하게 정리된 방 가운데 한 인물이 정좌하고있는 그림으로 인물의 옷주름을 품신하게 잡은 솜씨는 의심의 여지없는 단원의 필치이고, 청수한 얼굴과 꼿꼿한 자태에는 앞시대 사람들이 말한 단원의 얼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감투에 눌린 상투 끝의 섬세한 처리나 방 한가운데 매달린 등잔의 멋스러움 모두에서 깔끔하기 그지없었다는 단원의 분위기를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인물의 나이로 보나 필치로 보나 30대 후반의 단원이다. 단원은 정녕 이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 P215
어느 것 하나 명작 아닌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단원의 멋과 격조가 살아나지 않은 것이 없다. 단원의 작품에 가짜는 있어도 태작은 없다는 말이있을 정도로 그는 자기 작품에 책임을 졌다. 이동주 선생은 단원의 작품에서는 도서 낙관까지가 하나의 화면 구성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했다. 50대 후반 단구 시절 단원 화풍의 특색은 50대 전반기부터 보여준 압축된 묘사, 빠른 필선, 유연한 번지기가 더욱 스스럼없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작품의 소재보다도 필법 그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옛 사람들은 이럴 경우 손과 마음이 서로를 잊고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그 원숙한 필치가살아 있을 때 우리는 바로 "이것이 바로 단원이다", "이래야 단원이지"라는감탄을 절로 발하게 된다. 이 시절 단원의 작품은 산수·화조 · 인물 · 속화라는 장르를 거의 구분할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 화폭에 녹아들어 있다. 까치를 그렸어도 산수화의그윽한 맛이 있고, 소를 타고 가는 목동을 그렸어도 문인화 같은 고상함이있다. 사생이 아닌 관념풍의 산수를 그렸어도 우리 산천 어드멘가 있음직한진경이 느껴지고, 들녘에 나는 새를 사생한 그림을 그렸어도 화본 같은 정형이 느껴진다. 이 점은 그의 선화라고 불러도 좋을 불교 소재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재의 내용을 보면 불교적 내용의 한 토막이지만 어느새 성속(聖俗)이 하나가 된 인간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 P296
<남해관음도>도판35도 관세음보살상이라기보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결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미인과도 같고, <달마좌수도해도>는 달마대사상이아니라 낮잠이 주제로 부상되고 있다. <남해관음도>에서 관음보살 등 뒤에수줍은 듯 몸을 감춘 선재동자의 모습이나 <달마좌수도해도>에서 웅크리고 잠자는 자세는 속화의 한 장면 같다. 단원은 이래저래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용주사 탱화를 그렸고,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고, 연풍 상암사에 시주하여 만득자를 얻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이 점점 더 깊이 불교 쪽으로 빨려들었는지도 모른다. - P298
그러한 단원이 어쩌면 죽음을 의식하며 극락왕생을 그린 듯한 <염불서승도>도관 56는 그의 선화 중에서도 백미라 할 명작 중 명작이다. 연꽃 대좌에앉아 구름을 타고 두광을 발하며 꼿꼿이 가부좌한 채로 서쪽으로 향한 노승의 뒷모습에서는 거의 성불(成佛)한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아름답고 명상적이며 종교적인 그림이지만 그 필치를 뜯어보면 옷을 표현한것은 거친 먹이고, 연꽃을 표현한 것은 아무렇게나 뒤엉킨 선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정녕 손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스스럼없는 경지가 아니고서는불가능한 것이다. - P299
단원은 나이 30세가 못되어 벌써 "근대의 명수"로 이름을 얻어 세 차례나어용화사가 되었으며, 궁중의 그 많은 화사(事)를 모두 맡아냈다. 그는 신선 · 기록 · 기념 · 속화 · 판화 · 불화 · 산수·인물·화조 · 초충. 도석 등 전장르에 걸쳐 ‘무소불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당대 문인걸사의 취미를 반영하고 아래로는 신흥 부호에서 일반 백성이 함께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다. 환쟁이 신분으로 찰방과 현감을 지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때로는명사들과 교류하며 아취 있는 삶을 영위하기도 하고, 말년엔 가난과 고독속에서 넉 달을 보냈으나 어떤 처지에서도 그는 진실로 인간적인 분이었다. 그에게는 탁월한 그림 솜씨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대상을 정확 - P314
하고 실감나게 그려내는 묘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림은 결코 손재주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단원은 사물을 형상적으로 인식하는 감성적 인지 능력이 뛰어났고, 그것을 작가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재창조하는 구성력이 탁월했다. 화가로서 그의 회화적 역량은 어느 한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르에 따라, 관객의 신분적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함으로써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예술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 만하다. 의궤, 반차 등 궁중의 기록화를 그릴 때는 공식적이고 도상이 엄격한 종래의 화풍에 현장감을 주어 궁중의 권위를 더욱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켰고, 속화에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에서 포착하는수준을 넘어 서민의 심성에 다가서는 충만된 리얼리티를 표출해냈으며, 사대부 사회의 감상화를 제작함에는 산수화에서 실경의 박진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실경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남종문인화의 철학적 분위기로 승화시키거나 말할 수 없이 아늑한 조선적인 시정어린 세계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런 화가는 정말로 "근고(近古)에 없었다." - P316
그리하여 김홍도의 예술은 조선 4백 년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모든 예술적 업적을 한 몸으로 끌어안아 하나의 전형을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냇물이 호수로 모여들고 그 호수에서 발원한 냇물이 다시 여러 갈래로 흘러가는 모습이니, 앞시대의 예술은 단원이라는 호수속에서 종합되고 이후의 화가들은 단원이라는 호수로부터 흘러나와 너나없이 단원을 본받는 형상이 되었다. 단원이 동시대와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루 열거할 수 없다. 산수에서 이인문. 김석신. 김양기, 속화에서는 신윤복· 김득신 · 김후신, 화조에서는 장한종. 유숙 등 그 모두가 단원이라는 호수 속에서 흘러나간 지류들이다.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나는 필자 미상의 <화조도>참고도판13한 폭을 제시할 수 있다. 만약 이 그림에 단원의 낙관이 있다면 누구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구도와 필치와 서정이 서려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단원의 작품이 아니라 화면 왼쪽에 단원의 필치를 본받았다며 "방단원필의 (倣 - P316
檀園筆意)"라 적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조선의 화가들이 중국의 대가를 본받아 ‘방심석전(倣沈石田)‘ ‘방미원장(倣米元章)‘ ‘방동기창(倣董其昌)‘을 그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 조선의 화가들은 그런 대가의 하나로 단원을 가슴속에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조선의 화가를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단원의 역량과 영광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단원이라는 화가를배출해낸 정조시대 문화의 역량이자 영광이었다. 나는 여기서 단원의 남다른 천재성을 생각해본다. 흔히 예술가들의 천재성이란 남들은 도저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경지를 저 혼자만이 도달하는기량을 의미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단원은 그런 유의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남들과 나누어 쓸 수 있는 폭 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보통 예술적 천재들이 지닌 부정적 측면, 괴팍하고 고집 - P317
세고 이기적이고 방자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는 천재가 아니라 자신의 천재성을 남들과 분유(有)하고 공유(公有)할수 있는 양식을 창출하는 데 발휘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미켈란젤로나모차르트 또는 추사 김정희 같은 천재와는 전연 다른 성격의 천재였고, 성품 또한 그들처럼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았다.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상이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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