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 정조시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북, 1712~1786?)은 당대의기인(奇人) 중에 기인이었다. 그의 전기를 쓴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주객(酒客)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화사(畫史)라 했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 [狂生)라 했다"고 한다.
최북은 스스로 호를 지어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다. 즉 붓으로 먹고 사는사람이라 했으니 이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어찌 보면 낭만적이고 어찌 보면 겸손함이 어린 대단히 멋있는 호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 속사정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먹고살 것이 넉넉한 문인화가가 이런 호를 썼다면 멋이라 하겠지만 천한 신분에 빈한하기 짝이 없었던 최북이고 보면, 호생관이란 "나는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쩔 테냐"
라는 저항적 냉소가 서려 있는 것이다. - P129

그는 실제로 그림을 그려 그것을 팔아 먹고살았던 화가였다. 어쩌면 그 이외에 생계를 꾸려갈 다른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엿한 양반이아니라 반대로 미천한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화서 화원이라도 되어 녹봉을 받아 살아갈 수 있었겠건만, 어디에도 구속될 수 없는 그 오만한 성품과 스스로의 자만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화원도 못되고, 한묵의 선비화가는 더 더욱 못 되고, 영낙없는 품팔이 환쟁이가되어 미술 시장이라고 해봤자 겨우 물물 교환 수준을 갓 넘은 상태에서 그것을 내다 팔아 먹고 살아야 했으니, 그 불 같은 성미에 겪었을 고통과 한숨을 알 만도 하다.
그래도 그는 할 수 없이 참고서 그림을 그렸다. 호생관이라는 이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댔다. 남공철의 말에 의하면 "용돈이 궁하면 평양과동래에까지 가서 그림을 팔았다" 고 한다 - P129

최북은 스스로 ‘호생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결국 호생관으로 일생을 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서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현하면서 그림으로 영상과 얘기할 때는 명작을 낳았다. 그러나 그저
‘호생관‘이라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는 호생관이라는 것이 한낱 노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호생관 최북,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량 있는 인물이었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기걸 찬 성품이 화면 속에 녹아들었을 때는 심사정이나 이인상 못지 않은 높은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기절한 작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었다. 칠칠이로서는 천분(天分)을 다하지 못하는 그 분풀이를 세상에 퍼부으며 살았다.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창조적 원동력이될 수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는 그런 기개의 소산이다. 그러나 최북의 기개라는 것이 세상도, 대중도, 역사적평가도 의식하는 일없이 자포자기의 폭력에 빠질 때면 그것은 대책 없는 오만이었고 그는 한낱 기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인 것이었다.
호생관 최북과 거의 동시대를 살며 진경산수나 속화가 아니라 문인화풍으로 일관한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과 비교해보면 이들 3인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현재는 몰락한 양반이었고, 능호관은 서출이었고, 호생관은 중인 출신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두 문인화풍을지향한 문사 기질의 화인이었다. - P163

이들이 진경산수와 속화보다 문인화풍의 관념산수에 더욱 천착한 것은 어찌 보면 모순 같고,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진경산수와 속화는현실을 보는 긍정적 시각이 있거나 현실 속에 기꺼이 개입할 마음 자세가있어야 다룰 수 있는 장르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로서는 차라리 관념의 세계가 자신의 처지를 담아내는 데 맞았던 것이다.
같은 관념성을 지향하면서도 현재는 정서의 심화를 추구하였다. 그의 그림에 서려 있는 깊이가 바로 그것이다. 능호관은 관념산수를 통하여 높은 도덕과 정신적 고양을 추구했다. 그의 그림에 감도는 삼엄한 기상이 그것이다.
이에 반하여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낭만적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흔히 예리한감성은 이성의 힘을 능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호생관에겐 그런 호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감성이란 이성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는 사실상 객기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낭만적 반항의 허점이다. 호생관에게는 그런 허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 더욱 몰랐다.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