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이루어다오, 내 두 손이 해내는 하루의 일과여
내가 완성하는 드높은 행복을!
나를, 오 부디 지치게 하지 말아다오!
아니다 빈 꿈이 아니다
지금은 줄기일 뿐이어도, 이 나무
언젠가 열매 맺고 그늘 드리우리라.


대시인 괴테의 희망이, 더도 덜도 아니고, 그날 하루의 일과를 무사히 마치는 것이었다니!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참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침 없이 만나야 하는것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 P49

열림이란 무엇보다, 다름의 인정이고 다양성의 수용니다.


바다는 늘 물을 가득 담고 있다
땅은 결코 물을 담아두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이토록 자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가 물더러 흘러가지 말라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온갖 ‘다름‘을 인정하며 열린 가슴은 그렇기 때문에 날아오름의 준비일 수 있습니다.


멀리 저 밖으로 나가기를 그리워하면서 그대
민첩한 비상을 준비하고 있구나
자신에게 충실하라, 또 남들에게 충실하라
그러면 이 협소한 곳이 충분히 넓다. - P66

세상은 험하고, 때로 잔인합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습니다. 그 어떤 호도도 없습니다. 적확한데, 때로 혹독하도록 적나라합니다. 나 자신이어디서 어떻게 앉고 설지, 들고 날지, 걸어갈지 멈출지는내가 정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정확한 인식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바른 인식은 상황을 견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험함, 어려움에대해서야 굳이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살다보면 다 알게 됩니다. 알 수밖에 없습니다. - P78

자서전 『시와 진실」은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라고 한 이의 행보의 기록이고, 거기엔 훗날의 큰 인물의 기초를 놓는 젊은이의 모습이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82세까지 오래오래 살았지요. 작은 공국이지만 현직 4부 장관으로 평생 군주를 그의 죽음까지 보필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괴테를 붙들어두려고 여덟 살 아래인 군주는 처음에는 이 집을 사주고, 나중에는 좀더 큰 집을 주고 그의 능력에 걸맞은 직책을 주었습니다.)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평민이었던 청년 괴테는 우선 귀족들이 모인 작은 바이마르 궁정에서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 큰 사람이 그 작은 사람들, 그러나 하나같이 귀하신 분들 한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요. 자존심이 없었을 리 없으니, 저 작은 책상에서 쓰인 글들은, 거기 담긴 성찰은, 아마도 자신을 더욱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겠지요.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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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혼자서는 처음 나섰을 먼 길을 오며 이 작은소년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어느 순간에는 방향을 잃어혼란스럽고, 혹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올 곳이 있었고, 그곳에 닿기 위해서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방황할 일도 없겠지만, 새로운 경험으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 또한 없겠지요. 예전에야 그 나이에 공부를 하러 아주 집을 떠나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동화 같기만 한 이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의 인생 여정처럼 느껴져서, 가만히 곱씹어 생각하며 한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 P13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의식하고 있다." 이 부연의 문장에서는 비문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저 나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선함이 있을 수 있고,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어도 그 선의 알맹이가 있기에 그에게는 바른 길의 의식도선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해하라, 용서하자가 아닙니다. 이 비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참으로 큰 포용의 메시지입니다. 이 얼마나 잊히지 않는 커다란 껴안음인지요. - P17

사람은 늘 무엇인가에 추동되어 살아갑니다. 꿈이든, 이상이든, 사랑이든, 야심이든, 그 어떤 욕망이든 말입니다. 추동력은 좋은 동기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과해지면 스스로 시달리고 실족도 하고, 민폐도 끼치고, 악행도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회의식이나 윤리나 교육, 종교 등은 모두 궁극적으로, 이 과잉 부분을 개인이 조금 조절하게 하여 충돌이 적은 공동의 삶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규제 장치의 개발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과잉되어도 자신이나 남에게 해가 없거나 적은것은 세상에 없을까요.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이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를 - P24

테면 주는 사랑 같은 것. 그러나 바라는 것 없이 주기만하는 사랑처럼 그렇게 성스럽고 비범하지만은 않은, 현실적인 무엇이 없을까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알고 싶은 마음. 아마도 주는 사랑 다음으로 그런 것에 가까운 것 아닐까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온갖 것을 만져보고,
먹어보고, 해보며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심지어 꽃도 꺾어보고 쥐어뜯어보고, 곤충도 해체해볼 때조차도 스스로 세상을 알아가고,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도 행복합니다. - P25

그리하여 우리는 대단한 한 생애를 거쳐 다시 원점의물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로 말입니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어마어마한 방황 앞에서 나의 보잘것없는 방황쯤은 충분히 용서할 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도도한 서구 문명 3000년을 누빈 듯한 느낌과 함께 방황하는 저자신도, 방황하는 많은 다른 이들도 껴안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흉내야 못 내지만 시늉이라도 해보려고, 저 역시 오랫동안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생각해왔고 그 끝에 여백서원도 지은 것 같습니다.

사실, 첫머리에 이야기한 소년의 아버지가 저의 옛 제 - P28

자입니다. 소년이 돌쯤 되어 첫발을 땅에 디디던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서원 뜰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소년은 오래된 자기 연고지를 찾아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를 위해 심은 밤나무 묘목을 붙들고사진을 찍었던 그의 첫돌 맞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데미안을 손에 들고, 온갖 질문을 품고, 혼자서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년 하나가세상에 대한 신뢰를 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너무나도 어지러운, 때로는 참혹한 뉴스들이 횡행해서 갈수록 TV 화면을 쳐다보기도 겁이 나는데, 그렇게 손에 책을 들고 나타난 소년은 정말이지 맑은 샘물같이 귀했습니다. 다음번에는 자고 가겠다고 했기에, 소년을 위해서 다락방을 잘치워두었습니다. - P29

"그대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가?"
나의 화살은 고운 깃 달고 날아갔다오.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테지요.


좋은 뜻으로 시작했건만 일은 자주 꼬이고, 좋게 만났건만 준 것도 많건만 인간관계는 가끔 험하게 틀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알면서도 수긍에 시간이걸립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숨긴 것처럼 작은 시판들이놓여 있는 서원의 오솔길, ‘괴테 길‘에서는, 가운데 있는높은 전망대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첫 시비에서 돌연한물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대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 - P30

가?"
화살 하나, 고운 것이 달린 화살 하나의 은유가 눈부셔서 시어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 짧은 시입니다. 시와 지혜의 어울림이 부드럽고도 참 힘있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물음으로 시는 시작됩니다.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가?" 제아무리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제아무리 마음을 비운다 해도 범인인 이상, 뭔가 좋은 일을 하고 난 사람의 마음 바닥 어딘가에는 남아 있게 되는 보상심리의 잔재를 이 물음은 정조준합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풀어냅니다. 그 열림과 너그러움이 읽는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남습니다. 영롱한 오색 깃털을 단화살이 방금 눈앞을 날아가는 걸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은유의 힘이 참으로 큽니다. - P31

은유Metapher의 힘. 만인이 아는 구절들을 떠올려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의 양형인 것처럼 들리는이 오래된 함무라비 법전의 경구가 실은 똑같이 보복해주라는 것이 아니라 응징이 도를 넘으면 안 된다는 경계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여도, 좀 무섭습니다. 차용된 이미지가 무서울 만큼 무자비하게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래 인류의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할 것 - P31

입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성서의 사랑의 복음도 온유함과 겸손을 설파하고 있지만 역시 강합니다. 손‘이라는 구체적 이미지의 동원으로, 전하려는뜻이 무서울 만큼 강렬합니다. 전하려는 강한 뜻 자체가절대적으로 선명하고, 그것이 은유의 힘을 빌려 더더욱강해졌습니다. 두 구절 다 시적 은유의 힘이 두드러져 보이는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시는 어떤가요. 역시 은유에 힘입고 있는데구나 온유는 이 한 장의 그림은 시의 요체지요- 우리의시는 어떤가요. 어떤 폭력도 없습니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습니다. 아무런 강요가 없습니다. 참 고운 깃 달고 날아갔다니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거라니.
그 무한한 열림과 너그러움이 그냥 아름답게 마음에 남습니다. - P32

들장미


보았네 소년이 작은 장미
들에 핀 장미
갓 피어 아침처럼 고왔네
얼른 달려갔네. 소년은 가까이서 보려고
큰 기쁨으로 바라보았네
장미, 장미, 장미, 붉어라
들에 핀 장미

소년이 말했네 널 꺾을 테야
들에 핀 장미
장미도 말했네 널 찌를 테야
네가 영원히 날 생각하도록
그리고 참고만 있지는 않겠어.
장미, 장미, 장미, 붉어라
들에 핀 장미

그 거친 소년이 꺾었네
들에 핀 장미
장미는 거부하며 찔렀네 - P33

‘앗‘도 ‘아얏‘도 소용없었네
참을 수밖에 없었네
장미, 장미, 장미, 붉어라
들에 핀 장미

참으로 소박하고 평범해 보입니다. 짧은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그리고 발라드입니다. 발라드, 독일어로 발라데 Ballade는 서정적, 서사적, 극적 요소가 짧은 시에 집약되어 있는 형식입니다. (괴테는 이를 장래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어떤 원초적인 알 같은 것, 원란이라고 불렀습니다.) - P34

시는 메타포를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는 것이 있지요. 사람의 마음속을 오가는 것, 시인은 그얽힘, 착종을 들여다보고 헤아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젊은, 그러나 깊어진 눈길로 더 자신을 들여다보던 즈음의 어느 밤, 어스름한 달빛 속을 거닐며 시인은 씁니다.


달에게

너 다시 수풀과 골짜기를 채우는구나
고요히 안개의 광휘로
너 마침내 다시 한번
나의 영혼마저 모두 풀어놓는구나 - P38

너 나의 벌판 위로 펼치는구나
어루만지며 네 눈길을
친구의 눈처럼 온화하게
내 운명 위로

기쁨의 시간이며 슬펐던 시간
그 모든 여운을 나의 마음은 느낀다
나는 거닌다 기쁨과 고통 사이
고독 속을.

흘러 흘러라, 강물아!
결코 나 즐거워지지 않으리니
그렇게 장난도 입맞춤도 사라진다
사랑의 맹세 또한 그러하리.

하지만 나 한 번 소유하였더라
그토록 값진 것을!
고통 속에서도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을!

철철 흘러라, 강아, 골짜기를 따라 - P39

그침도 멈춤도 없이
철철 흘러라. 내 노래에다
선율을 넣어다오

네가 겨울 저녁
성난 듯 넘치거나
봄의 찬란함 에워싸고
어린 꽃봉오리 솟거든.
행복하여라. 세상 앞에서
증오 없이 자신을 닫는 이
한 친구를 가슴에 안은 이
더불어 즐기는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해도
혹은 유의하지 못해도
가슴의 미로를 지나며
어둠 속에서 오가는 것
그것을 더불어 즐기는 이. - P40

청년 괴테가 이 시를 쓴 건 가닿을 길이라곤 없는 사람을 막막히 사랑하던 시절이었고, 또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그 집 앞 작은 강에다 몸을 던진 한 젊은 여성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난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시인은 거닙니다. 그저 강가가 아니라 "기쁨과 고통 사이를" "고독 속‘을 거닙니다. 외로움이 하나의 장소 같습니다. 그가 거닐며 살아갈 강가, 삶의 터 같습니다.
그렇게 운명을 생각하며, 젊은 시인은 작은 강가 작은 집에다 고요히 자신의 거처를 짓습니다. 시를 씁니다. 자신의 세계를 짓고, 고요히 들여다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운명을, 그 얽힘, 착종을 예리한 눈길로 들여다봅니다. 예리한 눈길이지만, 깊고 그윽합니다.
그런 눈길로써 진정한 시작詩作은, 진정한 글쓰기는 제대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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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심장이 멎은 뒤에도
두근대며 흘러갈 그 시간을
친구가 눈감던 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

시인


그대에게 가닿고 싶네
그리움 없이는 시도 없느니
시인아,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아라

바람 부는 날


송정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선생은 차창 너머로 내다보며
바닷물이 정말 짜냐고 그러신다
젊은 시인 하나가 신발 벗고 달려가
숫된 아침 파도 한움큼을 모셔온다
놀랍지만 누구에게나 신성한 의식 같은
첫 경험이라는 게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고운 사람 하나 숨겨두고 싶을 만큼
작고 예쁜 어촌 마을을 더듬어 돌아나온다
일행 중 누군가가 탄식하듯 바람에 눕는
을숙도 갈대숲이 보고 싶단다
생각느니 바람처럼 살아온 나날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새들이 깃들인
아직 처녀인 갈대숲을 눕혀본 일이 없다

곰삭은 젓갈 같은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수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내린
시나 한수 지었으면

근황
2009년12월15일의 기록


암 수술 받고 병원 문을 나서다보니
골목 한켠으로 영안실이 눈에 들어오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내일을 위해
인쇄소는 새해 달력을 찍느라 분주하다
생각느니, 죽음과 삶의 경계는 무엇인가
후미진 세월 모퉁이에서 몰래 만나
입 맞추듯 서로 피를 빠는 이 황홀경!

시가 어디 아픈지


시가 어디 아픈지
이마에 열이 나서
백담사나 어디
마음 서늘해질
계곡물 소리로 식혀볼까 하고

무릇, 시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의 숨소리같이

생각하며 길을 나서서
시는 쓰다 말고
원고지는 그냥 놔둔 채
차가운 바위에 손을 얹어보고
눈시울 붉어지도록 뺨도 대보고

바람의 노래


한라산 꼭대기에 올라
귀 기울여보라 제주에서는
바람도 파도 소리를 낼 줄 안다
여기는 천상에 속한 나라
누구든 이곳에 오려거든
무기를 버리고 오라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바람이 노래하는 이 장엄!
하늘이 바다고 바다가 하늘이다

표절


사랑은 길들지 않은 말과 같아서
고린도전서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 그 앞에 있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표절이 되지요

나의 아코디언


이것은 가슴을 여는 소리
설레는 내 마음 들었느냐
오직 너만을 그리워하는
골 깊은 이 가슴 보았느냐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너도밤나무가 있는가 하면 나도밤나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바람꽃은 종류도 많아서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변산바람꽃 남방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칼바람꽃뿐만 아니라 매화바람꽃 국화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회리바람꽃 가래바람꽃 쌍둥이바람꽃 외대바람꽃 세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종류도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꽃이 아름답다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

그리운 나무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여름은 가고


가을은 허공이 깊어가는 계절
철 지난 바닷가에서 고개 숙인 채
모래를 차며 걷고 있는
저이도 잃어서는 안될 무얼 잃은 걸까
오래 지니고 있던 뜨거운 것들을
잃어버린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오오 지나온 일들을 생각느니
서쪽 허공을 헤아릴 수나 있겠는가
젖은 수평선이 그렁그렁
눈시울에 와 굽이칠 뿐

봉화산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울고 있습니다
아아 천둥 번개 비바람 지난 뒤에도
당신 떠난 빈자리에
사람들은 숲이 되어 서 있습니다

유목민


아마도 사랑에는
유목민의 인자가 들어있는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랑 끝에
다시 그대를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나는 배가 고프고
사랑에는 죄가 없네
님이여 그대 평생 일군 초원으로
나는 내 어린 짐승들을 몰고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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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편지
강은교


엄마, 여긴 추워요
엄마, 여긴 진흙이 너무 많아요
진흙이 내 팔을 휘감고 있어요
진흙이 내 입술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어요

엄마, 오빠의 차가운 팔이 나를 움켜잡고 있어요
오빠의 가슴 위로 진흙이 달려와요

아, 나를 진흙이 먹고 있어요
숨을 쉴 수가 없네요

진흙이 내 머리칼을 딱딱하게 해요
엄마가 황홀히 쓰다듬으며 땋아주던 머리칼
‘참 탐스럽기도 하지‘
엄마의 웃음소리 검은 물 위로 떠가요

버려진 심장 가득한 바다의 저 방 - P13

어둠의 보따리들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피톨들
물의 검은 터널 속, 터널의 검은 입속
허우적이는, 미처 눈 못 감은 피톨들

어른들은 기다리래요
어른들은 춤추면서, 우리들의 바다를 밟아대면서
기다리래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래요

이젠 안 돼요,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래요

어른들은 나를 두고 가버렸어요
이제 나는 떠나가요
나는 지금 어둠 속에 눈 꼭 감고 있어요
파도에 결박되어

평화란 이런 것인가 봐요, 아무도 없는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진흙들만 살아서 나를 먹어버리는 것, 진흙의 거품이 되는 것 - P14

나는 어른들이 평화를 접시 위에 놓고 맛있게 입맛 다시는 것을
평화의 쌈을 싸는 것을 보고 있어요
그래요, 엄마, 난 어젯밤엔 배추가 되는 꿈을 꿨어요
배추가 되어 엄마의 손길에 쓰다듬어지는 
꿈을
방방곡곡 맛있게 적시는 꿈을
엄마의 향기 피어오르는 평화의 소금간이 되는 꿈을

그래요, 엄마, 나는 노오란 꽃잎 배추가 되어 엄마의 뜰에 누울 거예요
노오란 꽃잎 배추가 되어 엄마의 부드러운 주름에 누울거예요
소금간이 되어 엄마의 혀끝에 앉을 거예요

노오란 종이배들이 떠와요 - P15

파도 가득 노오란 리본들이 달려와요
나는 그 종이배를 타려 하지만
나는 그 노오란 리본들을 잡으려 하지만
선생님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호야, 저 노오란 리본, 잊지 마, 잊지 마, 저 노오란 너희들의 날개를‘
선생님은 지금도 뱃머리에서 소리치고 계시지만

아, 이 진흙을 치워주세요
저 노오란 종이배를 타고 싶어요
엄마의 뜰 송이송이 노오란 리본의 나무 아래 서고 싶어요
저 ‘노오란 리본의 정원‘ 거닐고 싶어요

엄마, 빛의 젖꼭지를 주세요
엄마, 평화의 눈을 주세요
엄마, 천국의 뺨을 주세요

엄마, 나를 꼭 껴안아주세요 - P16

저 배의 날개 일어설 때까지

안녕
안녕 - P17

반도의 자화상
곽재구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
천마리
만마리
.
.
.
끝없이
걸어가고 있다

한 손에 국화꽃을 들고
옷깃에 노란 리본을 꽂고
낑낑대며
끙끙거리며 - P30

눈물 콧물 범벅 속 쭈그리고 앉아
세상 어디 떠날 곳도 기약할 곳도 없는
노란 절망의 종이배를 접고 있다

생각하면두 발로 꼿꼿이 서서
자유와 정의와 노동의 참해방을 부르짖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의 시절이 
있었다

오천만 마리의 개가 아닌
오천만의 따뜻한 피를 지닌 인간으로 서서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절규하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 P31

퍼렇게 멍든 몸뚱이로
수배당한 대학생이 물 위에 떠오르고
스무 살의 풋풋한 아들이 욕조의 물고문에 숨을 거둘 때해도
스무 살의 아름다운 딸이 코스모스 씨앗을 뿌려달라며 분신하던
그 암울한 시절에도 우리에게 불같은 희망은 있었다
페퍼포그와 지랄탄의 향연 속에서 우리들은 매일매일
우리의 아들딸에게 물려줄 꽃 같은 대한민국을 꿈꾸었다

개의 이름으로 묻노니
언제부터 당신은 개가 되었는가?
50층 펜트하우스에 살며 연봉을 수십 억 받는다고 해서 개가 아닌가?
눈과 코와 귀를 지폐로 쑤셔 막고
바닷가재 식사를 하고 로열 발레를 보고 나스닥 시세를 점검하고 - P32

먼 나라 섬의 은행에 이름 없는 통장을 개설하고
그림 같은 이국에 별장 몇 채를 지녔다고 해서 개가 아닌가?
이 뉴스를 싣지 마세요, 라고 사장이 말하면 살살 꼬리를 흔들고
최저임금이며 비정규직이며 전세금을 날린 이웃들의 절망과 슬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내 땅값 내 아파트값 한푼 더 준다는 노인 연금에 매달리는
당신은 어느 나라의 잡종견인가?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절 다 지났다고 하하 웃는
당신의 공화국은 당신의 어린 자식에게 물려줄 고향이 되었는가?

슬픈 눈동자의 개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끝없이 반도의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다 - P33

흰 국화꽃 한 송이를 들었다고 해서
갈 곳 없는 노란 종이배를 하나 접었다고 해서 우리가 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진짜 개는
주인과 함께 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온갖 탐욕과 부조리와 헛된 명예를 거부하며
농장 안의 염소와 토끼
어린 닭들과
새로 피어날 아침의 나팔꽃을 위해
피침 흘리는 멧돼지와 싸우다 죽는다. - P34

적폐가 아니라 지폐
김사인

꼴좋다 나여 아큐여
으스대던 그 잘난 나라여
반만년이라더냐 조상의 빛난 얼이라더냐
오냐 민족중흥이겠구나
오냐 나라여 오냐 나여

세월은 잘 간다
가는 세월 원통하구나
제가 떠난 것이냐 누가 떠민 것이냐
세월은 가고 세월만 가고
더럽게 남았구나 나는 비겁하게도 남았구나 주머니 속 지전 몇 장에 팔려 세월 가는 줄 
몰랐구나
세월인지 네월인지 안중에 없었구나
더러운 거러지로구나
싸구려 허풍쟁이 똥걸레로구나
백주 대낮에눈 뜬 채 코를 잃었으니 - P41

모가지를 털렸으니
이 우스꽝스러운 피칠갑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겠구나
세상은 낄낄 웃겠구나
손톱 젖혀지고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할퀴어 잡으며 세월가는 동안
공포와 비명으로 흘러가는 동안
물에 젖은 오만 원짜리 석장이여
꼴좋다 나 죽지도 살지도 못한 나여
아직도 꼭 쥐고 있구나

국민소득이 어쨌다고? 집값이 어쨌다고?
똥개야 조느니 차라리 나라도 물어라
이 따위를 시랍시고 적는 내 손목을 물어라
종이나 울려라 개 떼처럼 왕왕왕
입춘대길 만사형통때
늦은 입춘방이나 하나 그려
이마빡에 여덟 팔자로 붙여주마 - P42

오냐 나여 그래도 잠은 또 오겠구나
배는 또 고파지겠구나 버러지처럼 - P43

이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선우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는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하라, 지시를 기다리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무능과 오만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 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 P44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됨과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돌아올 때까지 너희의 이름을 부르겠다.
살아 있으라, 제발 살아 있으라. - P45

화인(火印)
도종환

비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드득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 P67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아 있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 P68

백일홍
박성우

박새가 이팝나무 아래 우체통에 둥지를 틀었다
하얀 이팝나무꽃이 고봉으로 퍼질 무렵, 박새는 알을 낳았다

희망촛불에서 받아 온 ‘희망 씨앗‘을 심는다
벽화동우회 ‘새봄‘ 식구들이
정읍우체국 앞에서 나눠주던 씨앗, 박새네 집 옆에 심는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눈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아슬아슬 맺혀 있었다 가까스로
서 있는 유가족의 다리는 위태로워 보였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은 입은 차라리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다

앙다문 입을 가린 흰 마스크가
흘러내리는 물을 빨아들였다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분명 피눈물이었으나,
핏기 없는 낯빛에서 나오는 물이기에 탁할 수조차 없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안쪽, - P75

깜장 치마에 깜장 양말 깜장 구두 신고 조문 온
앞줄의 여자아이가 울었다 엄마 아빠 손잡고 울었다
사내아이의 거침없는 울음소리도 두어 줄 뒤쪽에서 보태졌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갔다

부디 백일 천일 살아 있으라
여러 꽃씨 중 고심 끝에 골라보던 백일홍,
우체국 앞에서 받아 온 씨앗을 우체통 옆에 심는다
아이들아 분홍 하양 노랑 주훙 피어나렴,
안산에 조문 갔을 때 따라온 ‘노란 나비‘가
이팝나무 아래 빨간 우체통에 매달려 꽃을 기다린다

거름 한 줌 보태고 일어서는 나와 눈 마주친 어미 박새,
까만 눈조차 끔쩍이지 않고 알을 품는다 - P76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송경동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평형수를 덜어냈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규적 일자리를 덜어내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성을 주입했다
그렇게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노동자 세월호에 태워진 이들이 900만 명이다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할 곳들을 덜어내고
그곳에 ‘무한 이윤‘이라는 탐욕을 채워 넣었다 이런 자본의 재해 속에서
오늘도 하루 일곱 명씩 산재라는 이름으로
착실히 침몰하고 있다
생계 비관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이 알아서 좌초해가야 했다 - P89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지하 선실에 가두어진
이 참혹한 세월의 너른 갑판 위에서
자본만이 무한히 안전하고 배부른 세상이었다
그들의 안전만을 위한 구조 변경은
언제나 법으로 보장되었다
무한한 자본의 안전을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가 법제화되었다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안전의 업무가
평화의 업무가 평등의 업무가 외주화되었다 경영상의 위기 시 선장인 자본가들의 탈출은 언제나 합법이었고
함께 살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구조 신호는 외면당했고
불법으로 매도되고 탄압당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자본의 이동은 언제나 자유로운 합법이었고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만 전가되었다
그런 자본의 무한한 축적을 위해 - P90

세상 전체가 기울고 있고 침몰해가고 있다
그 잔혹한 생존의 난바다 속에서
사람들의 생목숨이 수장당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돌려 말하지 마라
이 구조 전체가 단죄받아야 한다
사회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 처참한 세월호에서 다시 그들만 탈출하려는
이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위험한 세월호의
선장으로 기관장으로 갑판원으로 조타수로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평형수로 에어포켓으로다이빙벨로 긴급히 나서야 한다
이 세월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이 자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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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날 좋다 햇빛 알갱이 다 보이네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놓은 듯
볕 바랜 이불호청해 냄새 난다
꺄르르 가시나들 웃음소리에
울밑에 봉선화도 발돋움하겠네

희망공부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희망공부‘라는 제목과 노랫말의 첫행은 백낙청 선생의 글에서 따왔고, ‘희망함이 적다‘는 표현은 전태일 열사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여자


돈도
남편도 없지
자식만 둘 있는

가진 게 너무나 많은
그 여자

슬픔 때문에
허리띠가 남아도는




*어느 젊은 시인의 시에서 보았다는, 이진명 시인의 시구를 다시 인용함.

허수아비


참새가 참새인 것은
제가 참새인 줄 모르기 때문

허수아비가 허수아비인 것은
제 머리에 새가 앉아도 가만 있기 때문

허수아비 주인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것은
허수아비가 참새를 쫓아줄 거라 믿기 때문

이 땅의 농부가 농부인 것은
그런 줄 알면서도 벼 익는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우여어 우여어 허공에 헛손질하기 때문

태백산행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홀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이 좋은 봄날에


봄이 오면 대지가 입덧을 한다고
어떤 시인은 노래하는데
이 좋은 봄날에
미국이 기어이 전쟁을 하려나봐요
바그다드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와요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지요
다리 다친 봄의 신음소리에
우리나라 산수유나무 새싹도 망가지겠어요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태백 하늘에 떠도는 눈발처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사북 지나 고한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選炭場)
석탄더미에 내리는 눈발처럼
차라리 탄압이나 받았으면
어느 시인 말마따나
바람부리에 몰려다니는 눈발처럼
반짝이며 글썽이는 눈발처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제가 울고 싶으니까 나더러
웃어봐!

새로운 세기의 노래


지나간 세기의 끝은 2000년
이제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지요
수수만년 쌓아올린 인류의 꿈은
지금 어느 별에 닿았는가요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며
땀 흘려 일하고
시인들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랑노래 하는데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는 대지 위에
야만의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네요
지나간 세기의 끝은 2000년
이제 세상도 새롭게 바뀌어야지요

시인의 말


세상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누구의 말이던가.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나는 병이 없는데도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세상이 병들지 않았다면 내가 혼자 아픈 것이다.
스스로 세상 밖에 나앉았다고 생각했으나진실로 세상일을 잊은 적이 없다.
세상을 잊다니! 세상이 먼저 나를 잊겠지.
일탈을 꿈꾸지만 나는 늘 제자리걸음이다.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는 이 막막함이란 ‘거울나라의 엘리스‘만 겪는 고통이 아닐 것이다.
2008년 여름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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