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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평점 :
십수년 전, 학교 앞 남도서점에서 '뿌리에게'를 사 들던 그 날, 나는 '사랑은 투쟁이다'는 말에 감동받는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장미화병을 갈며 싱싱하게 피어오른 장미꽃과 그 아래서 썩어들어가는 물을 보며 자본주의를 떠올리던 그 세심하고도 강인한 목소리에 반해서 '나희덕'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이름을 이토록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즐겨읽던 무수한 시인들의 시들을 나는 이제 더 이상 즐겨 읽지 않는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탓이기도 하겠고, 누구의 말처럼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 탓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까닭은 아마 내 삶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를 만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의 시에는 늘 내 삶이 있었다. 누룽지를 긁으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내는 그 속에서 나는 뼈아픈 후회와 상처에 허덕이던 내 젊음을 쓰다듬을 용기를 얻었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배불리 먹을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며 삼십대를 맞았다.
그리고 '사라진 손바닥'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났다.
절벽위에서 서로를 견디며 분뇨 위에서 뒹굴고 싸우고 구애하는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지상의 집들 또한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힘은 파도 위에 북극성처럼 빛나는 저 분뇨자국이다. / '북극성처럼 빛나는' 부분
이제는 적과의 투쟁이 아니라 분뇨자국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는 것. 시가 얘기하는 그 진실을 나도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행복하다. 나희덕 같은 이가 아직도 이렇게 열심히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내가 그 시 속에서 내 삶을 여전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