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
시정곤·정주리·장영준·박영준·최경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여기 썩어가는 강이 있다. 온갖 오염물질들로 가득한 이 강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혹시 민족주의자가 아닌지 의심받는다. 그리고 이 강물 마시고 자란 사람들이 이 강물에선 더 이상 이윤창출이 어려우니 강을 메우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바로 '말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말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단순한 대화 소통의 도구인지, 문화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경제적 삶을 향유하기 위한 자본인지... 사람들 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본질이 다르듯이 이 물음에 대한 답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어도- 말의 본질이 우리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말의 진실이 아닌가 싶다.

말은 추억이나 향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인식되고 있는 우리 삶, 그 자체이고, 말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일 것이다. 무지개 색을 일곱빛깔로 나누는 말과 인식이 존재할 때, 무지개는 우리에게 일곱빛깔의 꿈으로 추억되듯이, 우리의 삶을 표현하고 인식하는 한국어 속에서만 우리 삶은 기억되고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창 복거일씨를 시작으로 하는 영어공용화론이 이야기될 때, 모고등학교 국어교사인 후배녀석이 그 말에 상당히 공감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도대체 우리 교육은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어 낸 것인지,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복거일과 그 동조자들의 논리는 절대로 반민족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던 그 친구에게 그럼, 그 반대자들은 골수 민족주의자로 보였던가? 그럴 듯해보이고 논리정연해 보이던 논쟁들이 실상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었단 것을 이 책의 작가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론 재미있고 시원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 씁쓸함이 내내 배어나왔다.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산다는 게 너무도 낯 뜨거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래서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만치.

책을 덮으면서 이 책의 이야기들이 가상이 아니라 어쩌면 멀지 않은 현실이 아닐까 두려워지는 것은 '영어공용화론'이 밑도 끝도 없이 불거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된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회구성원들의 목표가 고르게 행복해지는 삶이 아니라 끝도 없이 가져서 잉여욕망을 채우는 삶이고 싶다면 그 과정이 한국어를 내팽개치는 것쯤이야 어디 대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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