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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ㅣ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간만에 눈에 번쩍 뜨이게 멋진 책을 만났다. 그것도 우리 고전문학을 주제로 삼은 책이다. 나 자신이 국문학도였으나 대학 4년 동안 우리는 고전문학을 '제 3외국어'라고 불렀다. 그만큼 우리 고전은 '먼 나라의 문학'이었다. 그런데 열하일기가 이토록 재미있고 멋드러진 책이었다니... 정말 그저 '어져, 놀라울 따람이니라...' 이 책을 연암이 다시 살아서 본다면 무어라 했을까? 연암 특유의 '사이'의 철학으로 이렇게 평하지 않았을까 싶다.
'21세기 아웃사이더, 고미숙이 열하일기를 새로이 해석해 내니,이 책은 너무 무겁지도 않은 것이, 그렇다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거니와, 옛 것만을 들먹이지도 않고, 지금의 것만을 들이밀지도 않는다. 게다가 세상을 한없이 조롱하는 듯도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고, 한없이 비관하는 듯도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고, 나 연암의 사상만을 풀어놓은 것도 아니고, 삶만을 따라잡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 그 오묘한 이치가 하늘을 놀래키며, 그 종횡무진한 표현이 뭇 사람을 감동시키는도다.'
써 놓고 보니 연암을 모욕한 것 같아 죄송하기 그지 없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서 만난 연암은 이렇게 조잡한 표현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않을 사람인데... 어쩌랴, 내가 필부에 불과한 것을. 나는 예전부터 풍자와 해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지혜라고 믿어왔다. 이 책을 통해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조선후기, 대의명분이라는 허상을 붙들고 민중들을 좀먹는 주자학의 맹신도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천재는 참 고달팠을 것이다. 그가 직접화법으로 그들과 싸웠더라면 목숨을 부지 하기 어려웠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거니와, 그 전에 아마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토록 예리한 통찰력과 삶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서도 유연한 물줄기처럼 시대를 타고 흐르는 그 대범함에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올 뿐이다.
더구나, 지금의 시대에도 시대의 문체와 정면도전하는 지식인을 만나기 힘든데, 조선 후기에 그처럼 대담한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니 믿기 힘들 지경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연암 뿐만이 아니라 그의 벗들과, 정조, 그리고 다산이라는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내 사고와 삶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책 부록에 실린 연암과 다산의 초상을 덧붙여놓은 작가의 혜안에 감탄과 감사를 덧붙인다.
역시 사람의 얼굴과 풍모에서 그 삶을 속일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둘을 '평행선의 운명이라 칭하며 더불어 살펴본 작가 덕에 또 다른 지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그대, 시대를 비관한 천재라면, 그대, 직접화법에 지쳐있는 젊은 청춘이라면, 그대, 고전문학이 지긋지긋하다는 기억밖에 없는 조선의 후예라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