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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그림, 르네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실제 파이프와 똑같이 생긴 그림이라고 해도 그것은 실제 파이프가 될 수 없다. 그 그림은 평면이기 때문에 담배를 피울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단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 단순히 파이프를 닮은 이미지일 뿐이다. 결국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명제에는 오류가 없다.
우연에 의해 메일 파트너가 된 에미와 레오. 그들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서로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시각, 섬세하고 자극적인 언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밀고 당김, 그 사이에서 싹튼 ‘사랑’의 감정은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끝없는 갈망처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간다. 그 욕망은 에미와 레오의 현실을 위협할 만큼 강렬해진다.
사실 모든 ‘사랑’은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데아의 세계가 아닌 이상, 모든 것은 이데아의 속성을 닮고 있을 뿐 완벽한 이데아는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의 사랑 역시 사랑의 이데아의 속성을 지닌 이미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현실’이라는 전제에서 생각해보면, 에미와 레오의 ‘현실’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것은 거짓된 것이며 허구의 세계이다.
분명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그것이 거짓이라니, 분명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 아니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것이 거짓이라니, 서로를 미치도록 원하는 두 남녀에게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이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서로의 이미지는 현실을 은폐하고 변질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서로를 현실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 한 채, 영원히 ‘바깥 세상’에 둘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서로의 사랑을 지킬 수 있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비록 그것이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바깥 세상’에서만 가능할지라도 말이다.
“우린 미몽에서 깨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밞아야 해요. 우리가 쓰는 글이 우리의 실제 모습, 실제 삶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며 그렸던 많은 이미지들을 우리의 실제 모습이 대신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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