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열정과 냉정 사이 구름카페문고 3
최민자 지음 / 문학관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절판되어 구할 길이 막막했던 《꼬리를 꿈꾸다》와 《흰 꽃 향기》의 일부, 그리고 수필 몇 편을 작가가 직접 골라냈다기에 냉큼 읽었다. 최민자의 비유는 읽는 내내 무릎을 때리며 읽게 만드는 어떤 근사함을 지녔다. 옮겨 적고 자주 꺼내 볼 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열정과 냉정 사이 구름카페문고 3
최민자 지음 / 문학관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손님을 배웅하러 엘리베이터 앞에 나왔다가 실수로 현관문이 닫혀버렸던 적이 있다. 빈손 맨발 차림이었던 나는 외출했던 딸애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문 밖에서 서성거려야 하였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내 영역 안에 발 들이지 못하는 아이러니. 그때 알았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만이 구속이며 부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자유란 물리적 공간의 문제가 아닌 심리적 수용의 문제라는 것을. 마음 가는 데 몸이 가지 못할 때 삶은 감옥이 된다는 것을.

p.46

몸을 여기에 데려다 놓은 것은 마음일 터이지만 정작 휴식이 필요한 쪽은 몸보다는 오히려 마음일는지 모른다. 몸이 원하는 것을 마음이 챙겨주고 마음이 내키는 곳에 몸이 나서 주는 것, 그런 심신의 의기투합 상태를 행복이라 일컫는 것 아닐까.

p.47

사각형이나 육각형 형제들은 담 하나를 공유하며 사이좋게 붙어 지내기도 하고, 저희 몸을 밀착시켜 최대한 틈새를 좁힐 줄도 안다. 둥근 것들은 못 그런다. 부드럽고 유연해보여도 친화력이 없고 협심할 줄을 모르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쌤통들이다. 스스로를 최고의 미녀라 여기는 두 여인처럼, 마주쳐도 흘끗 스치고 돌아설 뿐, 진득하게 동행하는 법이 없다.

p.49

작은 방 서랍 안에서 얼차려 중이던 손톱깎이가 거실 탁자 위에서 뒹굴고, 부엌장 안의 차 숟가락도 열이 되었다 열둘이 되었다 한다. 며칠 전 그리도 찾아 헤매던 귀이개는 프린터 밑바닥에 얌전하게 엎드려 있었다. 숨바꼭질이 끝난 줄도 모르고 헛간 깊숙이 잠들어버린 어린 날의 친구처럼. … 숨는 일에는 이골이 난 이 일상의 잡동사니들은 시시때때 차출하여 호시탐탐 부려먹는 오만한 인간들을 적당히 놀리고 골탕 먹일 줄을 안다. … 녀석의 잦은 숨바꼭질은 저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의 허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숨는다는 것은 때로 존재감을 극명하게 확인받을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일 수 있을 테니까.

p.78 ~ 80

해가 설핏 구름 밖을 벗어난다. 거리가 금세 환해지면서 은행나무 잎이 금빛으로 빛난다. 시간이 디자인하는 공간. 도시는 잠깐 사이 빛으로 치환된다.

p.84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강한 법. 생명을 일깨우고 씨앗을 부풀리는 위대한 빛은 한여름 땡볕이 아닌 초봄의 햇살이다.

p.96

삼십 년도 넘는 간극이 윤색시켜 둔 시간의 켜를 뒤적거려보는 일은 거치기간이 긴 적금을 타먹는 것처럼 이자가 수월찮이 불어 있기 마련이다.

p.111

삼복염천을 비웃듯 피고 지던 능소화도 때가 되면 돌연 모든 것을 접는다.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추하게 매달려 목숨에 연연하는 법이 없다. 고조된 설움의 극한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 버리는 동백처럼, 기다림의 끈을 탁, 놓아버리고 어느 순간 툭, 고개를 꺾고 만다.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제 서슬에 제 목을 꺾는, 눈부시도록 처연한 낙화. 능소화는 그렇게 슬픈 숨을 놓는다.

p.131

똑같이 두 개의 손을 갖고 태어나도 부자와 가난뱅이, 남자와 여자, 정치가와 노동자의 손이 누리는 분복은 다르다. 악수하고 도장이나 찍는 손이 있는가 하면, 곡식을 거두고 연장을 다루는 손도 있다. 재주 없는 주인을 따라 설거지통이나 들락거리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느라 야밤에도 쉬지 못하는 투박한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사대육신 중에 주인의 팔자를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주는 것이 그 사람의 손인 성싶은 것이다.

p.137

아무도 없는 모래언덕보다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풍경이, 일망무제의 바다보다는 돛단배 한 척이 가물거리는 수평선이, 이상하게 더 외로워 보인다.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 하나가 가을밤을 더 고요하게 하고, 마음 속 어른거리는 그림자 하나가 사람을 늦도록 뒤척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라는 존재가 일으키는 울림과 파장은 그 어떤 복수(複數)보다 더 크고 쓸쓸하다.

p.146

딸아이의 손전화는 이즈음 벨소리가 두 가지로 구분되어 울린다. 남자 친구의 전화는 <녹턴>, 다른 전화는 <소나티네>다. 세상은 당분간 딸아이에게 ‘그’와 ‘그’ 아닌 것, 두 가지로만 나뉠 모양이다. 딸에게 있어 ‘그’라는 하나는 나머지 전부와 맞먹는다. 아니, 어쩌면 나머지 전부보다 더 힘센 무엇이다. ‘그’와 관련되지 않은 세상 모든 것들이 지금의 그 아이에게는 ‘기타 등등’인 셈이다.

p.147

새벽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뿌려지는 함박눈 같은 것이 아니다. 새벽은 새벽잠을 반납한 사람에게만 온다. 충직한 자명종에게 꿀맛 같은 아침잠을 서너 차례쯤 물어뜯기고 나서야 새벽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불 속의 5분은 어찌 그리 달콤한 것인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궁싯거릴 수야 없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황금마차를 타고 부릅뜬 눈으로 달려나오기 전까지, 서둘러 하루채비를 마쳐야만 한다.

p.151

이름난 관광지를 찾고, 비싼 공연티켓을 사고, 유명 인사와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자기가 뿌듯하고 대견해서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루어 놓은 업적 옆에다 살짝 나를 끼워 넣어봄으로 그의 영광을 조금쯤 나누어 가져보는 것, 속물다운 기쁨이다.

p.168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나머지 세상에 대해서이다. 사랑을 하면 관심의 초점이 그 또는 그녀에게 집중되는 까닭에 나머지 것들은 빛을 잃고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앉고 만다. 사는 일의 의미를 존재 하나에 응축시키고, 그와의 관계를 삶 전체로 확장시키는, 사랑은 고성능의 광학렌즈다.

p.168

졸업과 입학, 승진과 결혼,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도 꽃다발이 바쳐진다.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의 차갑고 단호한 경계선 위에 사람들이 꽃을 심고 바치는 것은 낯선 두 세계의 충돌에서 오는 긴장감을 아름답게 눙쳐두려는 시도일 것이다.

p.173

나는 콜타르처럼 응어리진 영혼의 한 귀퉁이가 빙하처럼 천천히 녹아내리는 상상을 한다. 액화된 질료가 경동맥을 따라 외줄기로 가늘게 흘러내린다. 이어 그것은 팔뚝과 손목을 거쳐 엄지와 검지 사이의 여울목을 휘돌아 펜 속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그렇게 응축되어 나온 진액이 삼삼오오 스크럼을 짜고 종이라는 경작지 위에 모를 심듯 정연하게 꽂혀지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연결되고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닿는다. 하나의 행성과 다른 행성이 교감하고 소통한다.

p.195

볼펜 속 검은 액체는 단순한 수성잉크가 아닐지도 모른다. 육신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영혼을 추출하여 분출시키는 수상한 촉매나 전해질일지 모른다.

p.196

미려한 손바느질과도 같이, 작가가 세상을 향해 방사해 놓은 외가닥 길을 따라 소요하는 여정은 언제나 내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한다. 섬세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문장, 칼날의 번뜩임과 현의 떨림을 함께 품어 안은 문장들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차고 맑은 계곡물로 세수를 할 때처럼 정신이 번쩍 나곤 한다. 이완의 시간 속에서 맞닥뜨리는 긴장과 전율. 달콤하다. 그리고 짜릿하다. 구두점 위에 앉아 한눈을 팔고 이랑 사이를 서성이다 엉뚱한 길로 빠져보기도 하는 동안 내 무딘 감수성도 예리하게 벼려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쇄골과 어깨뼈가 날렵하게 드러나고 불필요한 살들이 제거된 아름다운 근육질의 문장으로 나 또한 세상 귀퉁이에 길을 낼 수 있다면.

p.198

쓴다는 것은 시간과 짝을 지어 떠내려가는 것들,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건져 올리는 행위이다. 음습하고 눅눅하게 시들어가는 영혼을 몸 밖으로 불러내어 위무하고 소통시키는 일이다. 꽃 진자리마다 열매를 매다는 푸나무만도 못한 인간의 영혼, 그 쓸쓸함을 편드는 일이다.

p.203

죽은 물고기만이 물과 함께 떠내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하긴 물고기들이 다 물살을 따라 바다로 바다로 떠내려갔다가는 세상의 강물마다 물고기의 씨가 진즉 말라붙고 말았을 것이다. 거슬러 오르기. 그것이 한갓 부질없는 반항의 몸짓일 뿐이어도, 살아 있는 것들은 거슬러 오른다. 봄풀은 중력을 거슬러 허공에 꽃대를 밀어 올리고, 바람은 수면을 거슬러 바다 위에 파도를 일으켜 세운다. 신세대는 구세대를 거스르고 진보는 보수를 거스르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거스른다. 살기를 포기한 물고기만이 허옇게 배를 뒤집고 물살 위로 편안하게 떠내려간다.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 사회는 우리가 잘살건 못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모두 사람으로서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p.26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p.31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기혼 여성은 친족이 없는 kinless 존재라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조선 시대에 기혼 여성에게 적용되었던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자들이 혼인과 동시에 부계 친족 집단에서 영구히 성원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출가한 여자는 부모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친정 일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출가외인이라는 표현은 여자가 친정 일에 개입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친정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친정에 대해서 `외인外人,` 즉 아웃사이더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남편의 친족 집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시집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지도 않고, 제사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두 집단 중 어느 쪽에서도 성원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집살이가 종살이와 비슷하게 체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37

노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사회 바깥에 있다. 그래서 비록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사회 안에 들어와 있더라도 노예는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현상하지 않는다.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리사 크론 지음, 문지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신경과학과 이야기를 조합시킨 면에서 석영중 작가의 <뇌를 훔친 소설가>가 떠오른다. 물론 저자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지라 과학적 접근은 본론에 올려진 고명 정도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이토록 친절한 시나리오 작법서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책이 생겨 기분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에 그는 수분 작용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 가운데는 암컷의 성기와 비슷한 입술 모양의 꽃잎이 있는 작은 난초가 곤충의 수컷을 유혹하는 얘기가 나온다. 과학도로서 플렛은 그 현상이 모호하고 혼란스럽다고 여겼다. 특히 흥분한 수컷이 말없는 꽃잎 가장자리에서 교미하는 몸짓을 한다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다. 또한, 비록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해도, 그는 자기 집에 살고 있는 열한 살 난 데이지 굿윌의 존재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애가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대담한 몸짓이라든가 여름옷 사이로 드러난 팔뚝, 그리고 최근에 어둡게 만들어놓은 그 애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시트 밑으로 드러난 아름다운 몸매의 굴곡을 보고 자신이 느꼈던 비정상적인 갈망이 그랬다.

p.104

아직 어린 데이지 굿윌에 대한 기묘하고 혼란스러운 성적 욕망을 수컷 곤충을 유혹하는 난초에 비유하고 있다.

그가 무엇보다 감동한 것은(그가 생각하기로는) 순전히 그녀의 육체 그 자체였다. 물결치듯 풍부한 살집과, 문에 잘못된 점을 지적할 때 뽀얗게 드러난 팔뚝에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작게 부풀린 듯 머리 위에 얹힌 머리 다발하며 통통한 얼굴, 불룩한 옷깃이며 어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필사적으로 보호해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천진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 안쪽에 입을 대고 싶었다. 비단결같이 부드러우면서 우아하게 불록 튀어나와 있는 눈 밑의 살결을 손끝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p.56

그의 음성은 듣기 좋다. 마치 고운 나뭇결과도 같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노란색이 약간 섞인 밤색 같다. 어조와 흐름과 울림에 있어서 그 음성은 전형적인 남성의 음성이지만, 참나무 교탁에 바른 니스칠보다 투명한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약간 섞여 있다. 그 사투리 덕분에 그의 음성은 마냥 무르기만 하지 않고 어느 정도 단단함을 느끼게 한다. 그는 곧장, 줄줄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도중에 잠깐씩 말을 멈춤으로써 청중은 가까스로 황홀감에서 빠져나오곤 하는데, 이러한 기교는 자연스럽게 일종의 감각적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p.73

흔히 전쟁은 항복이나 휴전이나 협정으로 종결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은 그 자체로 소진되고 더는 아무런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때, 그리고 문득 천박한 짓으로, 커다란 세계가 저지르는 무례한 짓으로 비치기 시작할 때 끝나는 것이다.

p.109

그는 남자들이(여자들도 물론이지만) 기차에서 플랫폼으로, 플랫폼에서 기차로 쉽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그들은 너무 쉽고 변덕스럽게 옮겨 다니면서 웃고 떠들고 서로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지리적 변화에도 무심하고, 멀고 낯선 타지방에 왔다는 사실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모자를 쓰지 않았고, 밝은 색채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은 들고 다니는 모양으로 보아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것들은 실제로 짚과 천으로 만든 것들로, 불과 며칠 전에 구입해서 아직 닳지도 않은 아버지의 암갈색 글래드스톤 가방을 조롱하는 듯했다.

p.130

그 하나하나는 주민들이 있고, 온갖 설비가 갖춰진 작은 세계였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이 쓰는 말투라니! 끊임없는 말들. 그들은 혀로 사는 것 같았다. 그들이 하는 말 대부분은 바보 같은 얘기였지만, 동시에 이치에 닿았다. 말은 그들로 하여금 화를 내지 않도록 해주었다. 마치 장사꾼이 현금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들은 말을 주고받았다.

p.146

모든 인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게 마련이다.

p.159

남자들은 자기 인생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덕에 독자적인 영예를 누리는 반면, 여자들은 똑같은 경우에 툭하면 무시당하고 마는 듯이 보였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 할까? 어째서 남자들은 인생사의 갖가지 모험들을 훈장처럼 가슴에 잔뜩 붙인 채 으스대며 다녀도 좋고, 여자들은 그 무게에 짓눌린 채 침울한 얼굴로 침묵해야 한단 말인가?

p.173

이제 날씨는 그의 편이었다. 길고 온화한 낮과 저녁이 이어졌고 마른 땅은 탄력 있게 밟혔다. 그는 태양만 가지고 방위를 잡았다. 고향. 북쪽을 향해 시골길을 걸어가는 그의 귀에 그 말이 콧노래처럼 울려왔다.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어느 새의 노랫소리보다도 감미롭게, 마치 버터를 듬뿍 바른 빵으로 식사를 하기라도 하듯 그에게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어느 도랑에서 그는 매끄럽게 다듬은 나무 막대기를 발견했는데, 손에 딱 맞았다. 그는 이 막대기를 가지고 먼지가 이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박자를 맞춰 땅을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하얀 구레나룻이 곱고 부드럽게 자랐다.

p.195

천장에 생긴 금에서 내가 두려워한 것은 그 지속성이었다. 그 금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마치 나와 함께 붙어 다니겠다는 것처럼, 내 일부가 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p.318

전날 아침만 해도 결핍과 운명을 느끼며 잠을 깼지만,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의지라는 폭풍에 휩싸여 잠이 드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내 눈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희고 매끄러운 들판을 향해 뜨리라. 나를 괴롭혀왔던 그 천장은 이제 한낱 추억 속의 추억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을 덮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p.320

여자들은 늘 부서지기 쉬운 법이다. 그 말은 어느 한 가지 커다란 문제로 낙담하는 것이라기보다 머리 위로 수없이 작은 낙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비는 홍수가 되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이 그 홍수에 익사한다는 것이다.

p.345

플렛 할머니의 몸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앙상한 손목을 감고 있는 흰 플라스틱으로 된 환자용 팔찌로 빛이 반사될 때마다 `데이지 굿윌`이라는 글자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냥 데이지 굿윌이었다. 사무를 담당한 누군가가 실수로 플렛이라는 성을 빠뜨렸는데, 덕분에 처녀 시절의 이름만 마치 튤립처럼 아무 장식 없이 덩그러니 적혀 있게 되었다. … 이것은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되었다. 그녀는 이 비밀을 소중히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이것을 자신의 영혼이 겉으로 드러난 표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p.4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