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을 배웅하러 엘리베이터 앞에 나왔다가 실수로 현관문이 닫혀버렸던 적이 있다. 빈손 맨발 차림이었던 나는 외출했던 딸애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문 밖에서 서성거려야 하였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내 영역 안에 발 들이지 못하는 아이러니. 그때 알았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만이 구속이며 부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자유란 물리적 공간의 문제가 아닌 심리적 수용의 문제라는 것을. 마음 가는 데 몸이 가지 못할 때 삶은 감옥이 된다는 것을.
p.46
몸을 여기에 데려다 놓은 것은 마음일 터이지만 정작 휴식이 필요한 쪽은 몸보다는 오히려 마음일는지 모른다. 몸이 원하는 것을 마음이 챙겨주고 마음이 내키는 곳에 몸이 나서 주는 것, 그런 심신의 의기투합 상태를 행복이라 일컫는 것 아닐까.
p.47
사각형이나 육각형 형제들은 담 하나를 공유하며 사이좋게 붙어 지내기도 하고, 저희 몸을 밀착시켜 최대한 틈새를 좁힐 줄도 안다. 둥근 것들은 못 그런다. 부드럽고 유연해보여도 친화력이 없고 협심할 줄을 모르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쌤통들이다. 스스로를 최고의 미녀라 여기는 두 여인처럼, 마주쳐도 흘끗 스치고 돌아설 뿐, 진득하게 동행하는 법이 없다.
p.49
작은 방 서랍 안에서 얼차려 중이던 손톱깎이가 거실 탁자 위에서 뒹굴고, 부엌장 안의 차 숟가락도 열이 되었다 열둘이 되었다 한다. 며칠 전 그리도 찾아 헤매던 귀이개는 프린터 밑바닥에 얌전하게 엎드려 있었다. 숨바꼭질이 끝난 줄도 모르고 헛간 깊숙이 잠들어버린 어린 날의 친구처럼. … 숨는 일에는 이골이 난 이 일상의 잡동사니들은 시시때때 차출하여 호시탐탐 부려먹는 오만한 인간들을 적당히 놀리고 골탕 먹일 줄을 안다. … 녀석의 잦은 숨바꼭질은 저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의 허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숨는다는 것은 때로 존재감을 극명하게 확인받을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일 수 있을 테니까.
p.78 ~ 80
해가 설핏 구름 밖을 벗어난다. 거리가 금세 환해지면서 은행나무 잎이 금빛으로 빛난다. 시간이 디자인하는 공간. 도시는 잠깐 사이 빛으로 치환된다.
p.84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강한 법. 생명을 일깨우고 씨앗을 부풀리는 위대한 빛은 한여름 땡볕이 아닌 초봄의 햇살이다.
p.96
삼십 년도 넘는 간극이 윤색시켜 둔 시간의 켜를 뒤적거려보는 일은 거치기간이 긴 적금을 타먹는 것처럼 이자가 수월찮이 불어 있기 마련이다.
p.111
삼복염천을 비웃듯 피고 지던 능소화도 때가 되면 돌연 모든 것을 접는다.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추하게 매달려 목숨에 연연하는 법이 없다. 고조된 설움의 극한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 버리는 동백처럼, 기다림의 끈을 탁, 놓아버리고 어느 순간 툭, 고개를 꺾고 만다.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제 서슬에 제 목을 꺾는, 눈부시도록 처연한 낙화. 능소화는 그렇게 슬픈 숨을 놓는다.
p.131
똑같이 두 개의 손을 갖고 태어나도 부자와 가난뱅이, 남자와 여자, 정치가와 노동자의 손이 누리는 분복은 다르다. 악수하고 도장이나 찍는 손이 있는가 하면, 곡식을 거두고 연장을 다루는 손도 있다. 재주 없는 주인을 따라 설거지통이나 들락거리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느라 야밤에도 쉬지 못하는 투박한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사대육신 중에 주인의 팔자를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주는 것이 그 사람의 손인 성싶은 것이다.
p.137
아무도 없는 모래언덕보다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풍경이, 일망무제의 바다보다는 돛단배 한 척이 가물거리는 수평선이, 이상하게 더 외로워 보인다.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 하나가 가을밤을 더 고요하게 하고, 마음 속 어른거리는 그림자 하나가 사람을 늦도록 뒤척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라는 존재가 일으키는 울림과 파장은 그 어떤 복수(複數)보다 더 크고 쓸쓸하다.
p.146
딸아이의 손전화는 이즈음 벨소리가 두 가지로 구분되어 울린다. 남자 친구의 전화는 <녹턴>, 다른 전화는 <소나티네>다. 세상은 당분간 딸아이에게 ‘그’와 ‘그’ 아닌 것, 두 가지로만 나뉠 모양이다. 딸에게 있어 ‘그’라는 하나는 나머지 전부와 맞먹는다. 아니, 어쩌면 나머지 전부보다 더 힘센 무엇이다. ‘그’와 관련되지 않은 세상 모든 것들이 지금의 그 아이에게는 ‘기타 등등’인 셈이다.
p.147
새벽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뿌려지는 함박눈 같은 것이 아니다. 새벽은 새벽잠을 반납한 사람에게만 온다. 충직한 자명종에게 꿀맛 같은 아침잠을 서너 차례쯤 물어뜯기고 나서야 새벽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불 속의 5분은 어찌 그리 달콤한 것인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궁싯거릴 수야 없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황금마차를 타고 부릅뜬 눈으로 달려나오기 전까지, 서둘러 하루채비를 마쳐야만 한다.
p.151
이름난 관광지를 찾고, 비싼 공연티켓을 사고, 유명 인사와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자기가 뿌듯하고 대견해서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루어 놓은 업적 옆에다 살짝 나를 끼워 넣어봄으로 그의 영광을 조금쯤 나누어 가져보는 것, 속물다운 기쁨이다.
p.168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나머지 세상에 대해서이다. 사랑을 하면 관심의 초점이 그 또는 그녀에게 집중되는 까닭에 나머지 것들은 빛을 잃고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앉고 만다. 사는 일의 의미를 존재 하나에 응축시키고, 그와의 관계를 삶 전체로 확장시키는, 사랑은 고성능의 광학렌즈다.
p.168
졸업과 입학, 승진과 결혼,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도 꽃다발이 바쳐진다.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의 차갑고 단호한 경계선 위에 사람들이 꽃을 심고 바치는 것은 낯선 두 세계의 충돌에서 오는 긴장감을 아름답게 눙쳐두려는 시도일 것이다.
p.173
나는 콜타르처럼 응어리진 영혼의 한 귀퉁이가 빙하처럼 천천히 녹아내리는 상상을 한다. 액화된 질료가 경동맥을 따라 외줄기로 가늘게 흘러내린다. 이어 그것은 팔뚝과 손목을 거쳐 엄지와 검지 사이의 여울목을 휘돌아 펜 속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그렇게 응축되어 나온 진액이 삼삼오오 스크럼을 짜고 종이라는 경작지 위에 모를 심듯 정연하게 꽂혀지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연결되고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닿는다. 하나의 행성과 다른 행성이 교감하고 소통한다.
p.195
볼펜 속 검은 액체는 단순한 수성잉크가 아닐지도 모른다. 육신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영혼을 추출하여 분출시키는 수상한 촉매나 전해질일지 모른다.
p.196
미려한 손바느질과도 같이, 작가가 세상을 향해 방사해 놓은 외가닥 길을 따라 소요하는 여정은 언제나 내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한다. 섬세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문장, 칼날의 번뜩임과 현의 떨림을 함께 품어 안은 문장들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차고 맑은 계곡물로 세수를 할 때처럼 정신이 번쩍 나곤 한다. 이완의 시간 속에서 맞닥뜨리는 긴장과 전율. 달콤하다. 그리고 짜릿하다. 구두점 위에 앉아 한눈을 팔고 이랑 사이를 서성이다 엉뚱한 길로 빠져보기도 하는 동안 내 무딘 감수성도 예리하게 벼려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쇄골과 어깨뼈가 날렵하게 드러나고 불필요한 살들이 제거된 아름다운 근육질의 문장으로 나 또한 세상 귀퉁이에 길을 낼 수 있다면.
p.198
쓴다는 것은 시간과 짝을 지어 떠내려가는 것들,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건져 올리는 행위이다. 음습하고 눅눅하게 시들어가는 영혼을 몸 밖으로 불러내어 위무하고 소통시키는 일이다. 꽃 진자리마다 열매를 매다는 푸나무만도 못한 인간의 영혼, 그 쓸쓸함을 편드는 일이다.
p.203
죽은 물고기만이 물과 함께 떠내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하긴 물고기들이 다 물살을 따라 바다로 바다로 떠내려갔다가는 세상의 강물마다 물고기의 씨가 진즉 말라붙고 말았을 것이다. 거슬러 오르기. 그것이 한갓 부질없는 반항의 몸짓일 뿐이어도, 살아 있는 것들은 거슬러 오른다. 봄풀은 중력을 거슬러 허공에 꽃대를 밀어 올리고, 바람은 수면을 거슬러 바다 위에 파도를 일으켜 세운다. 신세대는 구세대를 거스르고 진보는 보수를 거스르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거스른다. 살기를 포기한 물고기만이 허옇게 배를 뒤집고 물살 위로 편안하게 떠내려간다.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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