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에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모든 국제관계는 단일한 세계체제의 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
는 확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유럽 정치와 주변부를 개념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전부터 내려오는) 주장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여러 장소—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중국,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심지어 1902-1903년 겨울에는 베네수엘라 —— 에서 부딪쳐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국의 충돌은 모두 해결될 수 있었거나 그영향이 충분히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이 불문율인 ‘놀이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놀이규칙‘ 이란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야심이 좌절되었을 때 그 국가가 다른 지역에서 ‘보상‘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용인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충돌과 대립은 유럽 각국 사이에 항구적인 불신감을낳았지만 어떤 충돌도 유럽에 주는 영향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촉발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 P1291

중요한 해외 이익의 균형은 모두가 예외 없이 쌍방의 협조하에 실현되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집단행동은 오직 한 차례뿐이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의화단에게 포위된 공사관 구역을 포위망을 뚫고 구조했다. 연합군 군대 가운데서 일본과 미국 군대가 주도작용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참여는 이 제국의 역사에서최초의 가장 야심찬 외교행동이었다.24)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의 제국주의는 개별 제국주의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5대 강국이 대륙을 초월한 강국이 아니라 유럽의 강국으로서 등장했을 때 유럽의 국제체제는 5대 강국 사이에서 작동했다. 이 체제는 ‘국제정치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 - P1292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제국주의 확장은 정치질서가 혼란한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간단하게 유럽과 ‘기타지역‘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유럽 내부에도 준(準)식민지 형태의 종속관계가 존재했다. 전통 외교사는 유럽의 약소국이라 불리던 나라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고강대국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약소국의 행동공간에 대해서는 거의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P1293

먼로 대통령의 "아메리카는 아메리카인에게!"란 선언은 하나의 주의가 되었고 1867넌 프랑스가 멕시코에게 패배한 이후 수십 년 동안에 그 영향이 정점에 이르렀다. 1895-96년의 베네수엘라 위기에서 미국은 전쟁의 위협을 통해 처음으로 파나마 지협 이남 지역에서 영국을 대체하고 패권적 지위를 확립했다. 1904년, 시어도어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먼로주의를 한층 더 강화한새로운 원칙을 선포했다. 그는 미국이 전체 남아메리카에서 "문명화를 위한 개입의 권리를 보유한다고 주장했다. 먼로의 원래 입장이여기서 뒤바뀌었다. 먼로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루스벨트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억압하려 했다. 먼로주의는 남아메리카 각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반대했으나 루스벨트는 북아메리카의 군사적 우위에 의존했다. - P1299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뿌리 깊은 ‘중화세계질서‘ (Chinese world order)의 사유방식은 이른바 ‘서방의 충격’으로 하룻밤 사이에사라질 수는 없었다. 예를 들자면, 근대 초기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조선은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틀 안에서 대응했다. 생사존망이 걸린최후의 순간에도 조선의 실권파는 청나라 조정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겠다고 선포하기직전까지도 —1895년부터 조선은 중국에 대한 조공을 중단했고, 현대 사조는 중국을 ‘문명세계의 변두리에 있는 야만국‘으로 취급하 시작했는데도 조선은 중국의 종주권 이외에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 없었다. 러일전쟁은 "국제정세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왔고 그 영향이 유럽의 중심지역에까지 미쳤다. 이 전쟁은 중화세계질서를 완벽하게종결시켰다. 중화세계질서가 종결된 뒤 40여 년 동안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공간을 만들려 시도했다. 일본은 2차 대전 시기에 이런 구상에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연속성을 고려할 때 1차 대전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에서 역사의 중요 분기점은1905년과 1945년이었다. - P1306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는 지휘구조의 집중화 기민화 체계화였다. 프로이센이 다시 일어서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여기에 있었다. 1807-1813년에 실시한 전면적인 군사개혁이 프로이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지휘관과 병사 사이의 전통적인 지시-복종 관계를 보다 이성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국가였다. 국왕이 프로이센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고 그 아래에 군사기술과 지식 전시 동원을 담당하는 모든 참모부서가 집중 배치되었다. - P1309

19세기 중반부터 각국이 갖춘 무기의 수적인 차이가 전쟁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비경쟁은 이제 국제관계의 영속적인 표지가 되었다. - P1311

상대가 백인이었을 때는 식민전쟁의 목적은 정복이 아니라 어떤 지역의 이탈을 막거나 이미 이탈한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었으며 인종주의적 이념은 적용되지 않았다. - P1315

‘종족’이란 요인 하나만으로는 식민전쟁의 잔혹함을 설명할 수 없다. 1812-1813년의 발칸전쟁 과정에서 백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의 잔혹한 정도는 같은 시기의 식민전쟁에 뒤지지 않았다. 전쟁포로는 전혀 보호받지 못했고 종족의 동질화를 위해 체계적인 테러가 자행되었다. - P1316

어떤 군대든 폭력을 통해 약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격대와 에릭 홉스봄이 ‘사회적 반란자’라고 명명한 집단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로빈 후드 유형의 사회적 반란자에 대한 정의는 그들의 목표와 지지자에 의해 결정된다. ‘소규모 매복전’, 신출귀몰한 기습이 이들의 행동 방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 P1318

19세기는 전면전 요소가 형성된 시기였으며, 1914년 이전에는 전면전의 영향이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 P1321

1866년, 중국은 해외로부터 함선을 사들이기 시작하는 한편 국영 조선소를 세워 현대적인 함대를 보유하려 시도했다. 1891년까지 중국은 95척의 현대화된 함선을 취역시켰고 많은 해군장교가 외국 교관으로부터 훈련받았다. 이렇게 하여중국은 지역의 강자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서방의 관찰자들은 함대 건설에 역점을 둔 중국의 군사 현대화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 해군함대는 온갖 유형의 함선을 끌어 모아 구성된 데다 4개의 독립함대로 나뉘어서 연해지역 성의 총독 관할 아래 예속되었다. 함대를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관할 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휘 협조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함대가 출동했다. 1896년 중국 함대는 일본에 패했고 그 뒤로 반세기 동안 중국은 해군을 갖지 못했다. - P1324

원대한 안목을 갖추었던 중국의 일부 총독들처럼 일본 정치엘리트 계층의 지도적 인물들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이미 강대한 해군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868년 이후로, 특히1880년대 중반부터 해군 건설계획은 국가의 첫 번째 중요 목표가 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군비확장 경쟁의 자극도 받아 일본은 해군 증강 힘을 쏟았다. 해군 확장 ——늘 언급되는 공업화만이 아니라 은일본이 강국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비결이었다. - P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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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주문해 월요일 도착한 책들
그러나 오늘 또 주문해서 이번주 중 추가로 온다ㅠㅜ



주문한 책들이 모두 한 번씩 더 고민하고 주문한 것인데 잘 고른 것 같다.
물론 읽어봐야 더 판단할 수 있겠지만.

오른쪽은 굿즈로 노트광인 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보다 이뻐서 더 만족!
그리고 사진엔 없지만 알라딘 이달의 커피까지.



빅터 프랭클은 몇몇 페이퍼에서 보고

그의 삶이 궁금해져서였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과연 어떤 생각을 희망을 갖고 또 절망을 딛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궁금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보내는 메시지가 어떨지.
















숭배 애도 적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키워드를 갖고 있다.

유독 자살이 많은 한국.죽어 있는 한국 정치. 

죽음으로 내몰린 영령들.

분명 읽고 씁쓸함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읽어야만 할 책이라 생각했다.




해외에 나갈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종종 보러 가는 경우가 생긴다.

그림을 볼 때마다 내가 미술을 너무 몰라 답답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하나 둘씩 이런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모르고 어렵지만 이런 친절한 안내서가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대한계년사를 읽고 있는 중이라 고종이 많이 등장한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국내에선 여전히 극과 극을 달린다.

한쪽에서는 망국의 왕,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이뤄냈다는 것.

대한제국을 바라본 저자의 시선이 궁금해진다.




거시사보다는 미시사를 좋아한다.

나는 숲보다는 나무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역사의 큰 흐름에서 놓치기 쉬운, 그리고 역사의 뒤안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찾는 것이 좋다.

미국의 역사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이름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이 책을 통해서 그 빈틈을 채워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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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일본이 감추고 싶은 비밀들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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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은 일본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게 만든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하지만 한국과 결코 뗄 수 없는 사건임에도 우리는 잊고 살거나 또는 잊고 싶거나 눈을 질끈 만들게 하는 구석이 있다.


이 책은 메이지 유신 150주년이 되던 2018년 출간된 것으로

메이지 유신에 대해 무지하거나 왜곡된 시각에서 바라보는 독자들을 위해 쓰여졌다.

작가는 기존의 메이지 유신 관련 서적들을 읽었지만 스스로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더 연구하게 됐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고 식민지 전쟁에 뛰어든 후 군국주의로 흘러간 이후의 역사는 오히려 익숙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배경과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공부해야지 하면서도 뒤로 미뤄져서 어느덧 이렇게 되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메이지 유신 사건 딱 그것만 설명하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부터 바쿠후(막부)와 번의 변화에 대해 긴 호흡으로 독자들을 이끌며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가톨릭을 조선보다 훨씬 일찍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본도 가톨릭에 대한 극심한 탄압의 과정이 이어진다.


일본에 가톨릭을 전한 사람은 스페인 나바라 왕국, 지금의 바스크 지방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다. 

하비에르는 포교를 위해 인도 고아에 도착했고 말라카에서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 일본땅으로 함께 가게 된다. 

이로써 일본의 가톨릭 신자 기리시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작년 말 크리스마스 때 TV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 정약종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그 때 기리시탄이라는 용어도 들었고 조선의 천주교의 유래와 가톨릭 특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그게 이 부분을 읽을 때 더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바테렌 추방령(덴쇼 15년 6월 19일)으로 예수회와 기리시탄 다이묘(영주)들은 조선 침략 선봉에 서게 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인도 고아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예수회 동인도 선교 총책임자)는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 다이묘들에게 협력을 부탁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출병한 일본 병사 중 기리시탄들이 이 때문에 많았다고 한다.

그럼 이후 일본에서 가톨릭은 순항을 했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포르투갈의 예수회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것을 시기한 스페인의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비교적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도자기와 도기공에 대한 이야기다.

임진왜란 이후 도기공들이 많이 끌려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많이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이후 그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정착했는지 그 끝은 어떠했는지 다루고 있다.

그들의 노고로 일본 도자기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도자기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 정세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누르하치가 명을 무너뜨리고 청을 세우는 동안 이어진 혼란으로 청나라는 1656년과 1661년 사이 해외 무역을 금지시킴으로써 자국의 도자기 수출이 중단되었다.

이 때 네덜란드는 중국 도자기로 이득을 보고 있었는데 그 대안으로 일본의 아리타에 주문을 하게 된 것이다.

중국으로 갈 수 없는 정성공도 나가사키로 가 도자기를 사들였다.


정성공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상무역을 하던 정지룡의 아들로 타이완에서는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이 때의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역사는 이전에 읽었던 '도해 타이완사'를 통해서 읽은 것이 도움이 되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메이지 유신이 발생하는 1800년대 이후의 역사다.

메이지 유신은 조슈, 사쓰마, 사가 이 세 개의 번에 의해 달성되었다.

바쿠후(막부) 말기 번이 270여 개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 중 세 개의 번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었나?

세 개의 번은 임진왜란 때 조선 출병에 가장 앞섰고 도쿠가와 바쿠후(막부)와 맞섰던 세력이며 영국 무기상과 밀착 관계를 가지며 무기를 사들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군대가 있었고 막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대를 움직일 무기가 있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책에서는 세 번에 대해서 챕터를 따로 두어 다루고 있어 도움이 된다.

이를 통해 각 번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단점도 눈에 들어왔다.


물론 역사에서 빈 부분은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추측이 많다보니 주장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곳이 있었다.


남은 기록이 숨겨졌거나 지워졌을 뿐이지 

작가가 말한 추측은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고 그대로 신뢰하기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독자에게 머릿 속으로 상상해보는 묘미는 줄 수 있겠지만

역사는 팩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별 세 개를 준 이유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장점이 더 많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니 직접 읽고 판단하기 바란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든 읽기 전이든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연구해오신 이 분의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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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7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구 남성에게 정신은 자연, 외적 요소, 선택된 적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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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7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정리 좋아요. 옛날에는 많이 했는데 지금의 저는 도통 안하네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1-17 07:29   좋아요 0 | URL
읽다 보니 정리가 안 되어서 이렇게 쓰면서 하니 역시 더 낫더라구요^^
 

조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안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이었다. 1543년 이래, 그들은 히라도에 무역항을 두고 있었고, 대마도 쓰시마를 가로지른 북서쪽에 그들이 ‘코라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 표착했을 당시 박연은 조선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거의 없었다. 박연이 일본, 류큐, 베트남 등지를 여러 차례 다니면서 얻은 견식이 상당하였던 점에 비추어 볼 때, 17세기 이전까지 조선의 존재는 서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 역시 서양에 대한 이해 정도가 매우 낮았으며, 박연을 통해 비로소 서양 세계에 대해 진전된 인식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박연은 조선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조선을 서양 세계에 알리지는 못했다.

네덜란드인은 기독교 선교 활동을 부여받지 못해서 데지마에는 교회나 신부가 없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매장할 수도 없었고 그만한 공간도 없어서 사자는 해안에서 5마일 떨어진 바다에 버려져야 했다. 정박지에는 정박한 배에서 돛과 키를 일본인에게 넘겨줘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허가 없이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ㄷ. 식량 일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제공하고 일부는 일본에서 가지고 왔는데 대부분이 닭고기, 생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었다.

왜 하멜과 그 일행이 나가사키를 떠나기 위한 허가를 얻는 데 오래 걸렸을까? 하멜 일행에 대한 심문 보고서는 필요한 허가를 위해 나가사키 지방관에 의해 바쿠후에 전해졌다. 단지 이 보고서가 전달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지방 영주는 즉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멜과 그 일행의 답변을 직접 확인하길 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조선 조정과 서신 왕래를 했다. 이것이 시간을 허비했던 절차였다.

사가 번은 왜 다른 번에 앞서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역시 10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 1815~1871의 진취적인 기질, 관리 능력, 리더십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일찍부터 난학을 받아들인 것은 나가사키가 가까운 지정학적 영향으로 네덜란드 상인과 접촉한 영향이라고 봐야 하겠지만 나가사키와 인접한 지역이 사가 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직접적인 영향은 사가 번이 바쿠후의 지시로 에도시대 초기부터 나가사키 경호를 맡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나가사키는 중국과 네덜란드, 대마도는 조선, 사쓰마는 류큐, 오키나와와 동남아 일부, 마쓰마에는 북해도 아이누 민족과의 교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페리에 의한 개항 이전까지는 나가사키가 서양을 엿볼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1850년 사가 번이 일본 최초로 철제 대포 주조에 성공한 사실에 자극을 받은 시마즈 번주는 "우리 사쓰마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없다"며 사쓰마 번의 대포 주조를 번사들에게 호소했다. 에도 바쿠후 말기 근대화를 추진한 번이라고 하면, 사쓰마와 조슈 번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실은 시마즈 번주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사가 번이야 말로 ‘근대화의 선두주자’였다. 사가 시내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철제 대포 주조에 성공한 ‘쓰키지 반사로’와 바쿠후의 주문 대포를 주조한 ‘다후세 반사로’, 증기기관, 사진, 유리 등을 연구한 이화학연구소인 ‘정련방’ 등 에도 바쿠후 말기 ‘사가 번 산업혁명’ 거점이 된 곳들이 있다.

일본에서 반사로를 도입한 것은 에도시대 후기 일본 근해에 외국 선박의 출몰이 늘어나면서 해안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외국 선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밀도가 높고 비거리가 긴 서양식 대포가 필요했지만 전통적인 일본의 주조 기술로는 대형 서양 대포를 제작하기에 어림없었다.

나오마사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학자이자 신하인 고가 고쿠도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번정 개혁의 기본을 인재 등용, 근검 장려, 한시, 번에 속한 사무라이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세 가지 병의 제거에서 찾았다. 세 가지 병이란 시기질투, 우유부단, 억지를 지칭한다. 나오마사는 이처럼 번의 폐습을 없애는 동시에 번의 특산품인 쌀과 도자기로 적극적인 산업 장려 정책을 실시했다.

반사로에서 철제 대포를 제조하는 한편, 나오마사는 이화학연구소를 사가 성 밑에 출범시켰다. 정련방은 화학제품 연구와 카메라, 통신 기계, 유리 등의 제작도 진행했지만 가장 큰 과제는 증기기관 제조였다.
당시 미에쓰는 사가 번이 구입한 함선이 속속 집결해 근대 일본 해군 발상지가 되었다.
바쿠후는 해군 교습을 진행하면서 1857년 네덜란드에서 기술자를 초청해 공작 기계도 수입하고 나가사키에 본격적인 조선소를 건설했다. 이것은 후에 이와사키 미타로에게 팔려 지금도 미쓰비시중공업의 조선소로 가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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