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프랑스에게 공격 개시일을 앞당기기로 약속했지만 그 일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막바지에 이르자 즉흥적인 대응이 불가피했다. "전방동원"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이것은 며칠 정도 시간을 벌기 위해 사전 준비단계 일부를 생략하는 방법이었다. 파리로부터 쉴새 없이 밀려와 팔레오로그의 유창한 언변을 통해전달되는 일련의 전보들도 압박을 가중시켰다. 8월 6일 러시아군 총참모부가 발령한 명령에는 "프랑스군의 위급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가능한 이른 시기에 독일에 대해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나 이를 위해서는 물론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져야만 한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자 "충분한 전력"이라는 단서는 빠져버렸다. 그 날자 명령은 "독일이 프랑스를 상대로 획책하는 엄청난 도발에 대하여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우리의 지원은 독일이 동프러시아에 남겨둔 병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가능한가장 신속하게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되어있었다. 제1군과 제2군은 M-14(8월 13일)에 진격할 수 있는 "위치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보급품은 M-20(8월 19일) 까지 완전하게준비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보급 지원도 없이 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P427

동프러시아에 울려 퍼진 "코삭이 밀려온다! (Kosaken kommen!)"는외침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이 지역을 막아 보겠다는 독일의 결심을 흔들었다. 4와 2분의 1개 군단, 1개 기병사단,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새 수비대 그리고 몇몇의 지방 여단으로 구성된 프러시아의 제8군은 수적으로 2개 러시아군 중 하나와 대략 비슷했다. 이들이 몰트케로부터 받은 명령은 동서프러시아를 방어하되 우세한 적에게 패배하거나 쾨니히스베르크 요새로 쫓겨 갇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압도적인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면 그들은 동프러시아를 적에게 내어주고 비스툴라 후방으로 후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 P434

무엇이 OHL로 하여금 공격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 전선이 약화됨에도 불구하고 3개 군단씩이나 빼내도록 설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연실색한 그는 타펜에게 동부전선에서병력 증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라도 이미 시작된전투에 맞추어 오기는 너무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타펜은 그들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써도 좋다고 말했다.
이 중대한 결정의 발단은 러시아군이 독일군의 예상대로 동원 후 6주가 아니라 2주 만에 공격을 시작하자 OHL에 야기된 공포였다. 타펜이지원병력을 보내줄 수 있다고 언급하게 된 주 요인은 프랑스 국경에서 - P466

거둔 "위대한 승리"였는데, 이로 인해 "OHL 내에는 이미 서부전선에서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 배경에서 8월 25일 몰트케는 "자신에게 쏟아진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으로부터 동프러시아를 구하기 위한 지원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 P467

리에쥬보다 더 큰 이두 번째 승리에도 불구하고 루덴도르프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렌넨캄프 군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 내게 가해진 긴장감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서부전선으로부터 몰트케가 보내 준 새로운 2개 군단과 합세하여 렌넨캄프와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승리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는데, 비록 그 이유는 틀렸지만 시종일관 정확하게 렌넨캄프가 추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제8군을 이동시켜 삼소노프와 맞서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명령을 준비한 호프만, 루덴도르프의 명령을 거부하며 삼소노프의 좌익을 확실하게 포위한 프랑수와, 결정적인 순간에 루덴도르프의 불안감을 덜어 준 - P486

힌덴부르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했던 것은 치밀하기로 소문난 독일군의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인 없었던 러시아군의 무전이었다. 루덴도르프는 참모들이 낮 동안 정기적으로 수집하여 해석 또는 번역한 다음 매일 밤 11시 자신에게 보내준 감청 보고에 의존하게 되었다. 만일 어쩌다가 그 보고가 늦어지면 그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직접 암호 해독실에 나타나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을것이다. 호프만도 감청이야말로 탄넨베르그 승리의 진정한 요인임을 인정했다. "우리에게는 우군이 있었는데, 바로 적이었다. 우리는 적군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 P487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궤멸시켜야만 하는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정부는 - P508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그 이후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목표는 독일군국주의와 그 황실의 패망이라고 선언하면 할수록, 독일도 더욱 완강하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관된 맹세를 다짐했다. 윌슨 대통령의 중재안에 대한 답신에서 베트만홀베그는런던조약이 독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독일도 강화를전제로 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양측은 전쟁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 P509

몽과 샤를루와 전투가 끝나자 시체로 뒤덮인 전장에서 장기전이라는 피할수 없는 사실이 그 실체를 드러내며, 연합국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장기전이 되면 그들은 미국에게 식량, 무기 그리고 자금을 (이때까지는 누구도 병력은 생각하지 않았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독일에 대해서는 이 같은 지원이 차단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며 거대한 중립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점차 필수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상충하는 일이 되었다. 중립국과 독일 간의교역에 새로운 제약이 추가될 때마다 공해상의 자유에 대한 미 국무부 - P528

의 또 다른 정당한 항변이 제기되면서 거북하게도 영국은 결국 두 가지목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당장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영국인의 천성적인 거부감을 가진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암초를 피해가는 조타수처럼 큰 원칙을 피하면서 또한 어느 한쪽이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 당할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에까지 논의가 비화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매 사안마다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목표는 자신의 말대로 사안이 제기될 때마다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강제할수 있는 최대한의 해상봉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 P529

카이저는다시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전함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북해함대 사령관의 지휘권은 더욱 제한될 것이며, 황제의 사전 허락없이는 대규모 기동을 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후로 영국 해군이 독일을 에워싸는 봉쇄의 벽을 쌓는 동안 독일해군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사슬에 얽매여 힘을 잃은 불행한 티르피츠는 9월 중순에 "우리가 전투에 성공할 수 있었던 제일 좋은 기회는 선전포고 후 2주에서 3주 사이였다"고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 - P535

공의 기회가 커지기는커녕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그는 예견했다. "실재하는 함대‘가 가지는 최대 효과 즉, 중립국들에 대한 과도하게 가중된압력, 독일의 해상 교역에 대한 완벽한 파괴, 실행 가능한 최대한의 봉쇄를 거둔 쪽은 영국 함대였다. - P536

8월 28일 전방 지역이 확장되어 파리와 그 양쪽으로 세느에 이르는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면서 파리시 정부는 군정장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전 10시 갈리에니는자신의 군사 및 민간 내각을 소집하여 수도방위위원회를 개최했는데 모두 기립한 채로 진행된 위원회는 10시 15분에 끝났다. 위원들은 파리를방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적의 출현으로 인해 "비상 사태"에 관한 법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순히 인증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법적 근거를 제공할 서류는 이미 만들어져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갈리에니는 한 사람씩 불러 서명하게 하고 곧바로 폐회를 선언했다. 그것은 그가 주재한 처음이자 마지막 위원회였다. - P586

그날 밤 클룩의 선회를 다시 한번 검토한 다음 파리쪽으로 노출된 측면이 불안해진 몰트케는 새로운 일반명령을 내렸다. 좌익에 대한 문제처럼 그것은 확신이 없었던 그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1군과 제2군에게 "프랑스군을 파리로부터 멀리 남동쪽으로 밀어붙이라"고 명령 - P625

함으로써 클룩의 선회를 재가했다. 그와 동시에 클룩 군에게 "제2군의후방에서 제형(echelon, 梯形)으로 뒤따르며 "군의 측면을 엄호하는 책임을 맡으라고 명령함으로써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 하였다.
제형으로! 클룩에게 그것은 일전에 OHL이 자신을 뷜로브의 지휘 하에 두었던 것보다 더 심한 모욕이었다. 한 손에는 소총, 다른 손에는 권총을 들고 우익을 이끌고 있던 사나운 모습의 아틸라는 그 누구에게도뒤쳐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1군에게 "프랑스군을 남동쪽으로 몰기위해 내일도[9월 3일] 마른을 넘어 진격을 계속하라"는 독자적인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파리쪽으로 노출되는 측면에 대한 방어는 가장 약한두 부대 즉, 브뤼셀에 1개 여단을 남기고 온 제4 예비군단과 9월 1일 영국군과 벌인 전투에서 심하게 피해를 입은 제4기병사단을 후방에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P626

클룩 안쪽으로 선회한 것을 알아챘음에도 죠프르와 GQG에 있는그 참모들은 이때까지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예상치 않았던 절호의 기회를 보지 못했다. 9월 2일 클룩 영국군을 추격하기 위해 방향을틀자 그들은 혹시 그가 다시 파리를 향해 방향을 돌리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어쨌든 그들의 마음은 파리가 아니라 세느를 따라 펼쳐질 전면전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확고한 전선이 재구축되기 전에 이 전투를 감행할 수는 없었다. GQG에서 계속된 속타는 협의 끝에 죠르는 군대가멈추게 될 지점까지 후방으로 며칠간 더" 퇴각을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이 기간 동안 우익으로부터 증원군을 데려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모젤 방어선이 약해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1군과 2군으로부터 각각 1개 군단씩 차출하기로 결정했다. - P639

그날 밤 입안되고 다음날 이른 아침 발령되어 전 군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은 우익의 실패, 벨기에의 중립마저 희생시켰던 승리를 위한 독일의 기도가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벨기에 침략만 한 달째인 9월 4일자로 된 그 명령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담고 있었다. "적은 제1군과 제2군의 포위공격을 빠져나갔으며 그 병력의일부는 파리 방위군과 합류했다"고 언급했다. 적 부대는 모젤 전선으로 - P653

부터 철수하여 "십중팔구 파리 지역에 우세한 전력을 집결시켜 독일군의 우측을 위협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이동 중에 있다. 따라서 "제1군과제2군은 파리의 동쪽 전선을 마주한 채 그 지역으로부터 가해진 적의어떠한 작전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대기해야만 한다." 제3군은 세느를향해 계속해서 남쪽으로 진격하고 나머지 군들은 이미 하달된 9월 2일자 명령에 따르도록 하였다. - P654

이미 정해진결정을 재확인하기 위해 작전실로 들어선 죠르는 그곳에 모여 있던 - P673

장교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진격나팔이 울려 퍼질 때 전 장병들에게 낭독될 명령에 서명했다. 대개 프랑스어는 특히 대중에게 공표될 경우 그것이려하게 들리도록 정성을 들이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거의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요지는 강하고 단호했다. "이제 전투가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은 적을 공격하여물리치는 데 기울여져야 합니다.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한 부대는 어떤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하며 뒤로 밀리기보다는 차라리그 자리에서 전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 P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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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프랑스군 수송 선단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궤벤과 그동료 전함이 1912년 진수 후에 지중해를 순항하도록 파견된 한 가지 이유였다. 마지막 순간 독일은 그들이 해야 할 보다 중요한 역할을 발견했다. 8월 3일 독일군이 머뭇거리는 터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가능한 모든 압력을 가할 필요를 느꼈을 때, 티르피츠 제독은 수숀 제독에게콘스탄티노플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 P249

한동안의 격렬한 논쟁이 거듭된 끝에 한 장관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독일이 이 전함들을 우리에게 팔 수는 없을까요? 그들의 도착을 계약에 의한 인도로 간주할 수는 없을까요?"
모두들 이 딜레마를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척의 터키 전함을 압류한 영국의 독선적인 정의에도 대항할 수 있는 이 훌륭한 생각에 기뻐했다. 독일이 합의하자 이 매매는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공표되었고 이어서 바로 야우스(Jawus)와 미딜리(Midilli)로 명칭이 바뀐 궤벤과 브레슬라우는 승무원들이 터키식 모자를 쓰고 터키 국기를 게양한 채 군중들의 열광 속에서 술탄의 사열을 받았다. 마치 자신들이 도둑 맞은 두 척군함을 대신하여 귀신이 보내 준 것 같은 갑작스러운 독일 전함의현은 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독일에 대한 인기를 치솟게해 주었다. - P274

바깥 세상에서 보기에 리에쥬를 공격 중인 독일군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타임』지 종군기자의 말처럼 "아주 깨끗하게 박살 난 것" 같았다. 그 당시 잠깐 동안은 이 말이 거의 맞았다. "잠자는 양을 아주 손쉽게 제압할 것으로 기대하며 허풍을 떨었던 독일군은 요새를 강습 점령하는 것에 실패했다. 8월 9일 이후 독일군은 공격을 멈추고, 비록 병력은 아니었지만 지원군을 기다리게 되었다. 공성용 대포를 기다렸던 것이다. - P304

리에쥬의 의원인 셀레스탱 뎀블롱은 그때 쌩 피에르(St. Pierre) 광장에 있다가 공성용 대포가 광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포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너무 거대하여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괴물은두 부분으로 나뉘어 다가왔으며 36마리의 말들이 끌었다. 포장된 도로가 들썩거렸다. 군중들은 이 엄청난 기계장치의 출현에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천천히 쌩 랑베르(St. Lambert) 광장을 지나 테아트르(Théâtre) 광장으로 들어간 다음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을 끌어 모으면서 소브니에르(Sauveniere) 대로와 아브루아(Avroy) 대로를 따라 느릿느릿 무겁게 지나갔다. 한니발의 코끼리들도 로마인들을 이보다 더놀라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과 동행하는 병사들은 거의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절도있게 행진했다. 그 대포들은 악마였다..…그것은 아브루아 공원에 조심스럽게 설치된 다음 정밀하게 조준되었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는데, 군중들은 뒤로 나가떨어졌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가까운 곳의 창문은 모두 박살이 났다." - P321

영국해군의 막중한 임무를 미리 예견하고 지중해 함대에 대해 궤벤을도모하면서도 "우세한 적과의 교전을 피하라고 명령했던 처칠처럼 키치너는 자신이 만들어야 할 백만 대군을 내다보며 BEF에 대해 상호 조화되기 어려운 정책과 임무를 부여하였다.

프랑스군의공격 위주 전략에 대해 비난을 반영하고 있는 키치너의 명령은 만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동원되지 않은 채 영국군이 "적의 공격에 과도하게노출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공격 작전"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받는다면존 경은 우선 본국 정부와 협의해야 하며, "경의 지휘권은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며, 경은 어떠한 경우라도 동맹국 장군의 명령에 어떤 의미로도 통제 받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P338

8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총공격에 임하게 된다. 허작은 상브르에 도착했으며 영국군도 그와 이웃한 위치에 있었다. 그동안 우왕좌왕하던 존 프렌치 경도 마침내 죠프르에게 다음날이면 작전에 임할 수 있 - P374

도록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로렌에서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루프레흐트의 반격이 엄청난 위력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카스텔노의 제2군은 죠르가 일부 군단을 벨기에 전선으로 이동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후퇴 중이며, 듀바이도 혹독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알자스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독일군을 상대로 포장군이 물루즈와 그 주변 지역을 전부 재탈환했지만 이제 허작 군이 상브르로 이동하면서 중앙공격에 투입될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어 포의 군대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야만 했다. 죠프르의 어쩔 수 없는 입장 때문에 포의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알자스마저 가장 큰제물로써 플랜17의 제단에 바쳐지게 된 것이다. - P375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체 서부전선 중 네 군데였으나, 역사는 이들을 묶어 국경의 전투(the Battle of the Frontiers)라부른다. 8월 14일부터 우측의 로렌에서 이미 시작된 각각의 전투 결과가전 전선에 알려지게 되면서 로렌의 소식이 아르덴느에, 아르덴느는 다시 샤를루와 전투로 불리는 상브르와 뫼즈에, 그리고 샤를루와는 몽에영향을 미치게 된다. - P377

8월 24일 독일군은 거대한 자신감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패퇴한 적만 보였고 슐리펜의 천재성이 입증되었으며, 결정적인 승리가 독일군의 손 안에 잡힌 듯 보였다. 프랑스에서 프앙카레 대통령이 일기를 적었다. "아군은 후퇴하고 적이 침입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난 2주간의 환상은 그토록 컸던 것이다. 이제 프랑스의 미래는 국가적인 저항 능력에 달려 있다."
생의 약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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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다른 도심으로 놀러왔다. 생일이라 겸사 겸사^^

인천과 가까운 곳이라 가끔 떠오르는 비행기를 보기도 했다. 조만간 여권 사진 찍고 갱신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명동에 신세계 등 유명 백화점에 화려한 루미나리에가 설치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만큼은 아니어도 크리스마스 트리 등 조형물들을 보며 미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기도 했다.

점심을 부페 식당에서 거하게 먹고 호텔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 나니 이것도 또 다른 휴가가 되는 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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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15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라다이스 시티 가셨군요! 화가님 생일
축하드려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

(화가님이랑 저랑 생일이 비슷한가 봅니다 ^^!)

거리의화가 2023-12-16 21:55   좋아요 1 | URL
네. 금요일이지만 날씨도 궂고 해서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많아서 깜짝 놀랐다는!ㅎㅎ 잘 놀다 왔습니다^^

2023-12-16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3-12-15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생일 축하해요.
알라딘 서재에서 가장 금슬 좋은 부부로 인정하겠습니다.
저를 제외하고요 ㅋㅋ

단발머리 2023-12-16 09:44   좋아요 1 | URL
저를 제외하구요 ㅋㅋㅋㅋㅋㅋ
화가님 의문의 1패네요! 부럽습니다, 페넬로페님 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12-16 21:56   좋아요 1 | URL
ㅋㅋㅋ 금슬 좋은 부부라고 해주시니 다행이네요. 남편이 잘 챙겨줘서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페넬로페님도 남편 분과 친구처럼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저를 제외하고’ 인정합니다!ㅎㅎㅎ

새파랑 2023-12-16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유명한 파라다이스 시티 인가요? ㅋㅋ 추운 겨울에 태어나셨군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스테이크 맛있어 보이네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3-12-16 21:59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처음 가본 데다가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 유명한 곳이었군요?ㅎㅎ 뷔페는 저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예약해둔 게 아니었다면 그냥 단일 메뉴 먹는 곳으로 갔을 거예요. 많이 먹지 못하기 때문에 뷔페 가면 돈이 아깝습니다ㅎㅎㅎ

단발머리 2023-12-16 0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생일 축하드려요! 사진만 봐도 마음이 들뜨네요!!

거리의화가 2023-12-16 22: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잘 놀다 왔어요^^ 오랜만에 사람 많은 곳으로 가니 살짝 어질하긴 했습니다만 재미난 경험이었습니다.

희선 2023-12-17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지났지만 태어난 날 축하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셨겠지요 성탄절 분위기 많이 나는군요 이번주 주말은 무척 춥네요 주말 편안하게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2-17 16:30   좋아요 0 | URL
집 근처에는 딱히 성탄절 분위기를 즐길 수 없었는데 나오니까 확실히 그런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워서 집콕하고 있어요^^ 희선님도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책읽는나무 2023-12-17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3-12-17 16:31   좋아요 0 | URL
나무님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eBook] 박시백의 고려사 1 - 천하 통일과 고려의 개막 박시백의 고려사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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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세트를 집에 갖고 있다. 대중들에게도 아마 충분히 친숙한 책일 것 같은데 전집은 아니어도 한 두권쯤은 읽어보지 않았을까. 도서관에 가서 확인해 보면 그 책은 항상 대출중이거나 꽂혀 있더라도 사람들의 손때가 제법 묻어 너덜너덜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방송 매체에서도 자료 화면으로 다루어질 정도니 대중 역사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저자가 후속으로 고려사를 다룬다고 하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보지는 않고 어느 정도 쌓이면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밀리의 서재에 몇 권이 올라왔길래 읽기 시작했다.


일단 이리 다양한 인물들의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렸을까 생각했다. 

조선사의 등장 인물들은 캐릭터를 보고 ‘특징을 잘 잡아 그렸다.’라는 느낌을 바로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려사는 사실 캐릭터를 봐도 감이 오지는 않았다. 궁예 같이 아주 특징적인 인물이야 그리기 수월했겠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캐릭터를 묘사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거란 짐작을 한다. 

또한 고려사는 기록이 적어서 책의 분량 자체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후삼국 시대는 그나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제법 자료가 나와 있겠지만 2대 왕부터 성종 이전까지 초기 시기는 그 기록이 특히 적어서 단순한 한 줄만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 했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고 추측하며 그렸을 작가의 노고가 느껴졌다. 


읽으면서 느꼈던 소회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견훤은 왜 서라벌을 점령하고도 신라 왕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대신 경순왕을 세웠을까? 

쳔년의 왕국 신라를 간단히 보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라면 이전 경애왕과 왕족들에게는 왜 그리 흉포하게 대했을까? 어쨌든 이는 신라 왕족의 분노와 반감, 나아가서는 신라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난세에 용장이 힘을 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폭압과 공포정치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백성들을 껴안고 보듬는 정책을 펼쳤다면 왕건과 견훤의 대결이 더 오래 지속되거나 아니면 후백제와 고려가 각각 존속하면서 유지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견훤의 성정상 고려와 나란히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지만.


고려 태조 시대 명장, 유금필 장군의 활약이 돋보였다. 육지전 뿐 아니라 해전에서도 후백제 군대를 거침없이 몰아붙이니 태조에게는 참으로 귀인이 아닐 수 없었을 듯하다. 박시백 작가는 그를 '태조의 짱가'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유금필이 유금필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역시 후자의 표현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거란과의 첫 외교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만부교 사건은 이후 거란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호족 관리를 위해 위해 호족들의 딸과 연을 맺고 나아가 왕씨 성까지 하사한 것은 그들의 마음을 달래면서 당장의 불을 끌 수는 있었겠으나 후환을 남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왕씨 성을 받기 위한 호족들 간의 암투도 있지 않았을까? 결정적으로 후계자 문제의 불씨를 남겼다. 29명의 부인 아래에서 출생한 태조의 계보는 8대 임금 현종이 등극할 때까지도 이어지니 말이다. 


'장수로서는 지혜롭고 용맹했으며 일국의 왕으로서 부드럽고 온화한 가운데 단호히 결단할 줄 알았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과 누구든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다.' 태조에 대한 평가다. 다른 무엇보다 넉넉함을 가졌다는 것에는 동감한다. 


<훈요10조>가 고려사에 실리게 된 경위가 흥미로웠다. <훈요10조>는 태조가 죽기 전 이후 고려를 위해 내린 지침서인데 요나라(거란)와의 전쟁 중에 분실되었다가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한다. 최항이 이 문서를 보관하게 된 경위는 여러 설들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유야 어쨌든 거란에 이 문서가 넘어가거나 불에 타거나 하여 없어지지 않고 고려 내에 보관된 일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혜종의 탄생 비화 관련 왕건과 둘째 부인 사이의 만남은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 놀랍기 짝이 없었다(망측하다는 표현이 적절!). 혜종의 탄생 비화도 그렇고 얼굴에 주름이 졌다는 등의 말을 고려사에 기어코 집어넣은 것은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 집안의 힘이 그만큼 미약했고 나아가 혜종의 힘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혜종은 몇 번이나 시해의 위기의 순간을 넘긴다. 일명 왕규의 난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런데 혜종은 그 일을 덮고 넘어갔다. 왜 그랬을까? 왕규는 당시 최고의 재상이었는데 반역을 시도하면서까지 손자를 왕위에 올리려 했던 것일까. 다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기록에는 이 일을 왕규가 주도했다 보았지만 추측일 뿐이다. 작가도 혜종의 동생인 요(후에 3대 임금인 정종)나 소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한다. 왕자 요와 소는 태조의 3번째 왕비의 소생들이다. 


혜종이 2년 만에 사망했다는 것도 의혹을 갖게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작스런 병사를 했을리는 없고 타살이지 않을까. 3대 임금 정종은  즉위하자마자 재상 투톱(왕규와 더불어) 중 하나인 박술희를 처단한 것을 보면 혜종의 사망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왕규는 후에 유배를 당했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고 난을 일으킨 주인공이자 역적으로 역사 기록에 남고 말았다. 그가 할 말은 없을까나.


정종은 고려사에 '불교를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았으며 도참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절에 어마어마한 클라스의 시주를 한 것만 봐도 불교를 좋아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혜종도 2년 만에 죽었는데 정종은 4년 만에 죽다니 참 우연 치곤 놀랍다. 아무튼 그렇게 왕자 소는 4대 임금 광종으로 즉위했다고. 


광종은 노비안검법 시행과 과거제 시행으로 역사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기 때문에 익숙하다. 그러나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연루된 이들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역대로 공훈을 세운 신하와 경험 많은 노장들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를 땐 옛 신하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이는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의 언급에 나오는 표현 중 하나인데 이렇게 심했을까 싶지만 그만큼 숙청의 빈도가 많고 강도가 셌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광종의 첫째 아들이 5대 임금 경종으로 즉위한다. 그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전시과를 처음 시행한 것으로만 기억난다. 정치적으로는 그만큼 존재감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데 막판으로 갈수록 오락과 유희에만 집중한 끝에 사망한 것이 이유가 아닐까. 


경종에게는 2살 짜리 아들만 있었기 때문에 즉위할 수는 없었고 대신 사촌이자 처남인 개령군이 왕위를 이어받아 6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성종 하면 최승로가 생각날 정도로 성종의 개혁에 최승로의 공로가 지대함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업적을 남기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강화함으로써 사회가 이전보다 경직된 면도 있었다.


1권은 후삼국 시기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통일한 태조부터 성종 시기까지를 다룬다. 기록이 빈약한 시기라 특히나 역사적 상상력과 추측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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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2-15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어본 적 없군요 박시백, 이름은 한번 정도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책 잘 안 봐서 그렇군요 고려사도 그리게 됐나 봅니다 이 책 반긴 사람 많을 듯하네요 글로 보는 것도 괜찮지만, 그림과 함께 보면 재미있게 볼 테니...


희선

거리의화가 2023-12-16 22:02   좋아요 1 | URL
조선왕조실록도 그렇고 고려사도 그렇고 온라인에서 이제는 다 찾아보고 할 수 있지만 텍스트로만 되어 있는데다 건조한 문체기 때문에 재미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만화로 캐릭터화시키니 진입 장벽을 허무는 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yamoo 2023-12-15 0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시백 역시 통사를 중심으로 만화를 구성해서 좀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고려사는 다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문화사 측면에서의 발전은 상당한 진전이 있습니다만...가장 중요한 강역에 대한 연구는 아주 요지부동이라...
고려거란전쟁 드라마도 충실히 통사의 위치대로 청천강 유역에서 싸웠다고 나옵니다만...역사적 사실은 요하강 유역에서 싸웠다고 거의 모든 유물과 사서가 증명해주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주류 고대사학계만 연구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연구할 거리가 넘치는데요...자기들의 학문적 기반이 무너져서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우리는 우습게도 거짓된 역사를 배우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저는 그럴 가능성이 90퍼는 넘는다고 봅니다만..^^;;

거리의화가 2023-12-16 22:05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야무님^^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고려사는 변화된 사료 등을 기반으로 업데이트가 필요하고 여전히 발굴되어야 할 영역이 많은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맥락이 부족하여 읽으면서도 답답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다양한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병오 B.C.15

남창위 매복의 상서

지금 폐하께서 이미 천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또 죽임을 가하시어 천하가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니, 이는국가의 큰 병폐입니다. 지금 군주의 명령을 범하고 군주의 위엄을 빼앗아 外戚의 권세가 날로 더욱 높아지니, 폐하께서 그 형체를 보지 못하시거든 바라건대 그 그림자를 살피소서. 형세가 군주를 능멸하고 권력이 군주보다 높아진 뒤에 막는다면 또한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漢書 梅福傳≫에 나옴-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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