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쫓겨나, 수중에 지닌 현금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채, 어느 나라에서든 보호받지 못하는 백계 러시아인들의 "유일의 안주지"이고 "낙원"이자 "백계로서아인의 계집들"로 표상되는 "에로와 구로"의 도시라는 경멸 섞인 시선을 받기도 한 것이다." 특히1935년 3월, 소련이 동청철도를 만주국에 넘기고 철수한 이후의 하얼빈기행문에는, 하얼빈의 ‘정조‘인 ‘애수‘가 많이 등장한다. 무국적 백계러시아인들의 불안, 고향에 대한 그리움, 무기력과 무력감은 하얼빈 애수로 피어났다. - P290
20세기 기생 연구에서 고려해야 할 문제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면서 새로 생겨난 많은 제도 가운데하나가 기생이라는 점이다. ‘기생‘과 ‘창기‘를 구분하는 단속령이나 ‘예기‘와 ‘창기‘를 구분한 규칙 등은, 근대가 보여주는 제도적 억압의 또 다른 면이다. 19세기 기생이 기부(기둥서방)가 거느린 창부였다면, 20세기 기생은국가가 공인한 기업이 거느린 창부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9세기까지 "액례가 기녀를 솔휵)하는 것은 본래 금령"이었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기업이 기생을 거느리고 합법적인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서는국가가 기생의 착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식민지에서는 국가가 기생의 착취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 P341
1910년 이후, 일본은 자국의 식민지 여행을 장려했고, 이는 일본인들의 해외여행의 유행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식민지여행의 유행은 여행안내서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에는 한반도전역의 지역 안내서 만들어졌고 공공 및 민간 기관에서도 다양한 목적으로안내서를 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지역별 관광협회가 설립되고여행안내서와 더불어 여행안내소가 설립된 시기이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에는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한 기선이 도착하는 부산, 경부선의 종착역 - P353
인 경성역 등이 중심이 되어 관광산업이 발전했다. 즉, 부산, 경성 등은 접근성이 뛰어난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으로 인해 관광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경성은 조선의 유신과 일본의 근대라는 시공간의 관광자원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관광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34년 조선보감』이 제작되었다. 당시 발행된 여행안내서는 협회에서 제작된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보감』의 경우는 개인 요릿집에서 제작 발행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선보감』에는 경성을 소개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기본적으로 식도원을 홍보하기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기에 전체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식도원의 시설과요리에 대한 소개로 채워져 있다. - P354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방문하는 관광단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생이었다. 당시 ‘조선색 농후한 전통적 미를 가진 기생‘을 볼 수 있는 곳은 평양 기생학교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평양 기생학교는 1930년대 본래명칭이 ‘평양 기성권번 기생 양성소‘인데 3년제 학제로 운영되었다. 대동강 부근에 있었고 그 부근 일대에 산재해 있는 10여 군데의 대규모요릿집을 대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평양은 남조선에서 맛보지 못하는3천 년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로 제시되었는데 여행자가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각계통의 전문가들과 평양의 주류집단인 일본인들이었다. 단 하나 여행자가 만날 수 있는 주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이 있는데이는 평양기생이다. 이들은 평양 혹은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남성에게 있어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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