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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브젝시옹이라 불렀던 주관성의 한계라는 열광적인 상태와 이야기가 충돌하는 경우, 이야기는 공포와 고통의 비명이라는 주제 앞에서 굴복하고 만다. 왜냐하면 공포와 고통에 사로잡힌 주제는 이야기의재현 안쪽의 아브젝시옹 상태에 대한 최후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젝시옹의 가장자리로 조금 더 다가서려 할 때는 더 이상 이야기도 주제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저 시의 폭력과 침묵만이 존재하는 통사와 어휘의 끊임없는 수정만을 발견할 따름이다. - P214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은 오로지 갈고 닦는 것이다. 스스로를 방어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선험적인 것이 아닌 신비로운 단축이다. 셀린은 신비적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로라의 육체로의 여행은 "신비로운 해부학의 모험이다" "그들(우리가 두려워하는 인간들의 행동은 당신을 약하게 만들고, 시간을 빼앗았던 그 더럽고 신비스러운 매력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의 신비함과 더러운 인간들의 신비함은 어떤 내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각각 그 역할을 판단하고 결국하나의 아브젝시옹으로 귀결되는 그러한 것이다. 한편은 지상적인것으로 나를 붙들고 또 내가 붙드는 타자의 담화, 즉 자연 · 육체·내부라면, 다른 한편은 정신적인 것으로 타인이나 외양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진실은 지상적인 낮은 것에 있다. 벌거벗겨진 면, 그럴 듯함이 제거된 가식 없는 오염되고 죽은, 불편함과 질병·공포에 있는 것이다. - P217

셀린의 세계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측은히 여기는 조롱 속에서 간헐성과 지속성을 통해 밖의 존재를 담지한다.
결국 그 자신을 위해 셀린이 선택한 길은 공포 속에 침잠하는 것과그에게 가장 필수적인 혐오의 마음 자체로부터 극소의, 동시에 무한함을 지닌, 말하자면 아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구별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표면적으로 그의 글쓰기는 성욕이나 그것의 등가물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은 어린이를 위한 숭고한 사랑인 글쓰기의승화로 열린다.
그 가장자리에 여성들이 있다. - P219

이야기의 저편에서 현기증은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다. 그것은 어머니와 죽음의 목소리가 웅크리고 있는 상상적인 라 - P221

이벌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숨결 같고 문장의 리듬 같은음악이다. - P222

그곳에서 내밀한‘ 고통은 육체적이고 동시에 정신적이어서 성적인 넘쳐남과 만난다. 이같은 본능의 벌거벗은 장면 속에 흥분시키거나 매료시키는 그 어떤 외설성도 없다. - P224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알고 있지만, 셀린이 그리는 전쟁세계는 전쟁의 기록 자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셀린이 몰아내고 추적하고 펼쳐 보이는 것은 시체 앞에서의 도취와 기질 속에깃든 사랑과 죽음인데, 이것은 내가 존재하고 다가설 수 있는 바와는 다른 것이며, 이 공포와 또 이 공포 속에 사는 관능성인 또다른 성(性)과 나는 더 이상 의사 소통조차 할 수 없다. 다만 나의동일성이 형언할 수 없음 속에서 전복되는 지점에서 내가 보유하고 나를 넘쳐나고 내 속에 사는 것이다. - P227

셀린의 글쓰기는 고통이 극대화된 장소인 죽음에서 죽음이 촉발하는 공격성에, 결국은 공격성으로 야기되는 전쟁 속에서 그의 밤과 최후의 지지를 길어 올린다. 아브젝시옹은 살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살해를 멈추게 하는 힘은 아브젝시옹이다.
******************************** - P228

셀린이 보기에, 나약한 문화에서 거의 전능에 가까운 위력을 지닌 고통과 살해라는 면모는 인간 종족의 진실인 것이다. 즉 작가에게 있어 의미의 실마리와도 같은 글쓰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셀린의 관점이 묵시록적인 것이어서 불가능한의미(선이나 권리에 대한)의 진리로서 그 신비적인 강조점을 악에고정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만약 묵시록이 인식론적인 하나의 세계관을 의미한다면, 철학적 진리 (aletheia)와는 반대되는미로 그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 모두 세계적인 붕괴의명 속에서 벌벌 떨거나 화염 속에서 터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사실과 누구나 부족한, 홈이 팬 실추한 묵시록적 존재라는 사실을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P233

해산이란 삶과 살육의 극치이자 머뭇거림(안/밖, 나/타자, 삶/죽음), 공포와 아름다움, 성욕과 성적인 것을거칠게 부인하는 것들이 함께 타오르는 순간이다.

여성의 입구나 아브젝시옹의 입구에서 우리는셀린과 더불어 파시즘의 ‘충동적 기반‘이 가장 대담하게 투시된 사건 속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파시즘과 나치즘의 가장 중요한 리비도적인 형태는 공포와 고통의 체제이고, 그 체제가 가장 합리화되고 가동된 형태가 나치즘과 파시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론적인이념이나 가벼운 형태의 예술이 아닌 욕망과 쾌락의 일시성이 지배하는 이같은 체제는 아브젝시옹을 포착할 수 없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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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4] The Arrival of the Norsemen

프랑스 땅으로 Norsemen(North-men)이라는 전사들이 침입해 들어온다. Norsemen은 북해의 스카디나비아 반도의 왕국(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에서 왔다. 그들 대부분은 농부였는데 더 이상 그곳에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하자 새로운 집을 구할 목적으로 배를 건조했다. 바이킹의 배는 길고 날렵한 앞뒤와 좁은 모양을 지녀서 얕은 바다나 모래도 지나갈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Charlemagne가 죽고 나서 프랑크 왕국은 3명의 아들 사이에 분열이 나는 바람에 바이킹의 침입에 대처하지 못하고 서쪽 지역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이 지역을 지금 Normandy(노르망디)라고 부른다. Norsemen은 Normandy에 정착하여 바이킹의 생활 방식이 아닌 프랑스 방식에 맞춰 생활하면서 Normans가 되었다.

바이킹인 Thorvald는 싸우다 사람을 죽였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성미를 닮았고 성장할수록 붉은 머리에 넓은 어깨를 가진 난폭한 사람이 되어갔다. 친구들은 그를 Eric the Red라고 불렀다. 어느 날 Eric the Red는 이웃과 시비가 붙었다가 이웃들 중 2명이 죽고 만다. Eric the Red 가족은 다른 바이킹들의 떠나라는 명령으로 고향을 등지고 항해를 하다 Greenland(그린란드)를 발견한다. 그 땅은 거대한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단지 소규모의 아주 작은 풀이나 나무만 있을 뿐이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그린란드 거주민들은 북극곰 퍼, 순록 뿔 등을 방문객들의 곡물과 교환하며 생활하게 되었다. (영양 부족 때문인지)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키도 작았다고 한다. Eric the Red는 Leif Ericsson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더 나은 거주지를 찾기 위해 떠나 Vineland를 발견한다. 그곳은 많은 나무들이 존재했고 께끗한 물이 바다로부터 유입되는 양질의 땅이었다. Vine은 알다시피 포도다. Vineland는 오늘날의 North America를 의미하고 콜럼버스가 이 땅을 발견하기 수백년 전에 바이킹들은 이 땅에 들어온 것이었다. 

바이킹들은 많은 신을 믿었다. Asgard라고 불리는 하늘 위 땅에 신들은 살았고 Asgard는 무지개 다리로 땅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들만 그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바이킹들은 신들의 왕인 Odin을 믿었고 그는 Valhalla에 살았다. 수많은 전투 후 Odin은 죽은 무지개 다리 아래 Valkyries로 보내진다. 천둥의 신 Thor는 전투력이 최강인 신이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Thor를 무너뜨린 자가 있었으니 the Great King이다.


[CH15] The First King of England

866년 바이킹 대군이 영국 땅에 상륙한다. 리더는 형제로 Halfdan, Ivar the Boneless 이다. Ivar the Boneless는 아일랜드로 가고 Halfdan은 영국으로 향했다. Halfdan은 영국 남부에 있던 the kingdom of Wessex(웨식스 왕국)까지 진군한다. 바이킹의 군 지휘자인 Guthorm은 금을 내놓지 않으면 침략하겠다 선언하고 871년 웨식스 왕국은 이에 맞설 강력한 군주인 Alfred을 임명한다. Guthorm은 기습 공격을 하려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영국군 상당수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결국 영국인들 상당수가 프랑스로 향하고 Alfred는 Guthorm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며 어느 집에 피해 숨는다. 그는 봄까지 기다렸다가 군대를 모아 바이킹 군대와 전투를 벌인 끝에 바이킹 군은 항복하고 물러간다. Alfred 사후 유해가 웨식스의 성에 묻혔다가 Hyde Abbey 교회로 옮겨졌는데 교회가 불타는 바람에 찾을 길이 없었는데 1999년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은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구나!

Alfred의 아들 Edward는 바이킹으로부터 영국 북부의 일부를 빼앗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200년이 지난 1013년 영국 왕인 Ethelred는 바이킹 왕인 Sweyn Fork-beard(very long and bush beard which he wore in two braied, like a form)에게 패했다. Sweyn은 영국 왕으로 등극하고 바이킹의 후손들은 영국인들과 인종, 문화가 결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Edward the Confessor 대에 와서 자식이 없어 Harold를 다음 왕위로 점찍어 둔 상태였다. 그러나 Edward의 사촌인 William이 Harold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William은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영국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했다. 1066년 Edward the Confessor 사후 Harold는 왕을 선언하고 귀족들의 추대를 받는다. 이때 76년마다 한 번씩 나타난다는 핼리 혜성이 사람들의 눈에 보였다고. William이 공격을 명령하면서 헤이스팅 전투가 시작되었다. Harold는 죽고 영국은 항복했다. Harold는 묘비에 "Harold the Unfortunate"라고 새겨졌지만 William은 "Willam the Conqueror."로 새겨졌다. 그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영국인 왕으로 등극했다.


[CH16] 

Norman 사람들은 영국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바꾸었지만 언어만큼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는 7가지의 언어가 섞인 것이라고 한다. 최초 영어는 앵글로 색슨이 썼던 언어였는데 그 후에 켈틱, 라틴, 그리스,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언어가 mix되면서 지금의 영어가 된 것이다. 

봉건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농노는 귀족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귀족은 땅을 준다. 귀족은 기사에게 땅을 주고 기사는 귀족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귀족은 왕에게 군대를 제공하고 세금을 지불하고 왕은 기사에게 땅과 성을 제공한다. 이렇게 서로 간 상부상조하는 관계이지만 사실상 농노는 자기 땅도 가지지 못하는 비루한 삶이 되는… 봉건제는 실은 Norman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저자는 귀족이 되는 상상을 해보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농노에 가까운 삶일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귀족이 되면 나는 농노들을 착취할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본래는 자기 땅을 가졌었던 영국 농부들이 봉건제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다. 자기 땅을 가졌던 사람이 뺏기면 당연히 열이 받을 만할 것이다. 노르만 사람들은 이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돌성(석성)을 짓기 시작한다. 나선형 계단과 좁은 창문, 우리가 중세 성하면 생각나는 그런 전형적인 모습!


[CH17] Knights and Samurai

영국의 기사도는 왕이 아닌 신에 대한 충성을 기반으로 했다. 그들은 교권에 대한 위협이 되는 일에 싸움을 한 것이다. 기사가 되는 일은 복잡하다. 7살부터 시작이라니... 갑옷을 입으면 다 똑같을 것 같지만 symbol이 있어 구별이 된다고 한다. 기사들이 입는 갑옷은 딱딱한 철갑인데 그것을 입고 무거워서 어떻게 싸움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기사가 되면 마상창 시합 장면도 인상적이다.

영국과 일본은 같은 섬이지만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지형적으로, 자연 환경이 다른 곳이다. 일본은 두 지형판이 충돌하는 곳이라 화산이 잦을 수밖에 없다. 왕은 신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접촉하기 어려웠다. 다이묘(영주)들도 백성에 신경안쓰는 것은 마찬가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다고. 다이묘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무라이(무사)를 고용한다. 사무라이는 영주를 보호하고 땅을 받고 사무라이는 그 땅을 농노에게 주어 경작하게 한다. 무사의 갑옷은 기사의 철갑과는 다르게 실크와 가죽 등을 끈으로 묶고 래커칠을 하여(장식을 더하기도) 유연한 것이 특징이다. 일본의 성은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지었다. 무사는 비겁한 것을 용납하지 않아 할복자살을 하기도 한다. 반면 자연의 미를 노래하는 하이쿠 등 시를 쓰고 정원을 가꾸는 취미가 있기도 했다고. 춤도 인기였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춤꾼이었다고 한다(?).


* chivary: 기사도


[CH18] The Age of Crusades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도, 기독교에도 성소였던 곳이다. 무슬림들은 기독교와 유대교 순례자들을 납치하고 그곳에서 쫓아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많은 기독교를 믿는 국가의 왕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 라틴어로 cross를 crux라고 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공격을 crusaders라고 하며 이슬람 왕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려는 시도를 Crusades라고 한다. 무슬림들은 기도 전에 목욕을 하는데 반해 영국인들은 1년에 한두번밖에 목욕을 하지 않아서 무슬림들이 집에 씻으러 갔다는 말에 웃음이!ㅋㅋ Crusades에 참가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농부나 농노였던 사람들이 끌려온 경우가 많았다. 진짜 기사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 crusader 군대에 맞서 사라센인들이 성벽을 내주지 않자 chusaders는 기아에 시달렸다. 항구에 음식을 가져온 로마 상인들이 crusaders 배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돌아갈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기사들은 성벽을 기어올랐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배고픔과 분노에 악에 바친 그들은 수천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죽인다. 그들 대부분은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고. 왕국은 두개로 쪼개지면서 무슬림과 crusader 간에 분쟁의 씨앗이 남았다. crusaders는 예루살렘 근처 Edessa를 공격해 빼앗는다. 이 소식이 기독교 국에 퍼지자 새 군대가 2차 crusaders 부대가 만들어졌지만 실패했다. 스페인에서는 무슬림 계를 쫓아내려는 기독교의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를 Reconquest(레콩키스타)라고 한다. 무슬림 왕은 Al-Andalus로 겨우 12살이라 별 생각이 없었고 그의 스승인 Al-Mansur가 978년 왕의 부지휘관이자 장관 노릇을 했다. Al-Mansur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 더 높은 세금을 매기자 이들은 한데 뭉쳐 이슬람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Alfonso 왕은 El Cid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길 요청하고 Valencia에 있던 이슬람 군대는 El Cid보다 숫자는 많았으나 좁은 산악 지형을 잘 이용한 El Cid 군대가 승리한다. 결국 스페인에 Granada(그라나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독교도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 pilgrim: 순례자

* siege: (성) 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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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22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
1권 보다만 저.
갑자기 찔립니다.

거리의화가 2024-01-23 10:53   좋아요 0 | URL
저도 읽다만 책 은근히 있어요ㅋㅋ 너무 오래 묵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6장

셀린이 야기하는 효과는 그것들과 너무나 다르다. 그는 우리 속에서 방어 기제나 습득 언어 같은 것을 피하게 만들거나 아니면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는 무엇인가를 불러낸다. 나체·유기 · 지긋지긋한 불쾌함 · 실추 · 출혈 등 아무도 고백하지 않지만모두가 알고 있는 것, 즉 비천하고도 대중적이며 인류학적인 모든 허위 속에 자리잡은 비밀의 장소, 셀린은 바로 그같은 것들이 진실이며, 유일하게 진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믿게끔 한다. - P204

그곳, 그가 우리와 관계를 맺는 자리는 그의 글쓰기에서이다. 희극 배우인가, 순교자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고, 동시에 둘 다일 수도 있다. 마치 자신의 술책을 믿는 진정한 작가처럼 말이다.

길들여진 당신의 아브젝시옹조차 《인형 악단》의 문체가 되어 《미래의 몽환극》은 계속될 것이다. 문학적으로 순수한 문체 속에서, 내부로부터 포착된 초월성과 감각들, 동사의 희열을 위해 문학을 또 한 번 뚫고 나가야 한다……… - P205

의미의 흡인과흡수·삼킴·소화 그리곤 파기, 그곳에는 말의 위력과 죄악만이 존 - P206

재한다. 셀린 교향악의 다중 의미 속에 내재한 음악·흔적·정치함…… 이외에는 신도 유일자도 없다. 아브젝시옹의 현기증은 가장중요하고도 확실한 희열을 보장하는 가장 오래 되고도 가장 한정적인, 물론 증오의 대상을 지니는 권력의 조건 아래서 지탱되고씌어진다. - P207

셀린의 유대인 배격주의는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참여와 마찬가지로 사실 모든 정치적 참여와도 마찬가지로사회적으로 정당화된 환상 속에 주체를 위치시키는 한 그것은 하나의 난간이다. 착각, 그 속에서 우리는 원한다면 사회 현상의 전개와 다양한 합리화를 알게 된다. 즉 문학적으로 말하건대, 착각은미쳐 가는 것을 막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학이라는 것, 즉 동일화 과정의 횡단을 위협하는 미쳐 버린 심연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 P207

지고한 것과 비루한 것, 숭고한 것과 아브젝트를 접합할 줄 아는카니발의 의미론적인 양가성에 셀린은 묵시록의 가차없는 파괴력을 덧붙인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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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11 - 왕망 3 -

王莽은 府庫의 부유함을 믿고 匈奴에게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마침내 孫建등을 보내어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함께 출격하게 하였다. 이에 嚴尤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匈奴가 中國의 폐해가 된 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上古時代에 반드시 정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후세에 세 나라인 周나라·秦나라 ·漢나라가 정벌하였으나 上策을 얻은 자가 있지 않았고, 周나라는 中策을얻었고 漢나라는 下策을 얻었으며 秦나라는 無策이었습니다.
周나라 宣王 때에 匈奴가 국내로 침입하여 陽에 이르자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해서 국경까지 내쫓고 돌아왔으니, 匈奴의 침략을 보기를 비유하면 모기와 등에처럼 여겨서 몰아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英明하다고 칭하였으니 이는 中策이 됩니다.
漢나라장군을 선발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가벼운 軍裝과 양식을휴대하고 깊숙이 쳐들어가고 멀리 수자리를 시켜 비록 적을 이기고 사로잡은공이 있으나 오랑캐들이 번번이 보복하였습니다. 戰亂과가 끊이지 않고이어진 지 30여 년에 中國이 피폐해지고또한 징계되고 두려워하여 천하가 무제라고 일컬으니 이는 下策이 됩니다.
秦나라 始皇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찮게 여겨 만리장성을 쌓으니 길이가 만 리에 뻗쳤습니다. 물자를 수송하는 행렬이 바닷가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경은 이미 온전하였으나 중국은 안으로 고갈되어서 社稷을 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無策이 됩니다.
지금 천하가 해마다 기근이 들었는데 북쪽 변경이 더욱 심하니 백성의 힘을 크게 쓰더라도 功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신은 삼가 이를 걱정합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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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권력>을 읽기 시작한 지 이제 열흘 쯤 지났고 5장까지 어찌저찌 읽었다. 어떤 때는 글자만 읽을 때도 있으나 이해와는 별개로 조금씩 들어오는 문장들이 보일 때 그래도 좀 나아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브젝시옹의 개념을 더 이해하고자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을 병행하며 읽었다.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의 저자의 약력을 보면 종교철학과 출신으로 종교 철학, 프로이트와 관련된 정신분석학 관련하여 연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핵심을 담은 1장과 4, 5장(성서에 대한 내용)에서 적게나마 도움을 받았다. 한국 소설이나 시의 사례를 넣기도 하고 예시(예를 들면...) 등이 중간에 삽입되어서 이해가 상대적으로 더 편했다.



<공포의 권력>은 시작부터 어려운 개념이 계속 나열되어서 처음 읽었을 때 놀란 나머지 책을 내려놓았었다. <아브젝시옹...>의 1장 시작은 이렇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있었다."


한강의 단편 소설 『작별』은 이렇게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낮에 꾸는 백일몽 같은 것이려니 하고 읽어내려가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였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여러 경계선에 대한 진실을 특유의 감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은 폭력처럼 그어져 있는 경계선을 위태롭게 살아나다가 미리 준비된 듯 사라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단순화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작가는 사라짐을 아름다운 슬픔으로 승화시키고 마침내 자신도 그렇게 불꽃처럼 연소되기를 소망하는 듯하다. 


한강의 이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설명을 통해서 '경계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것은 종교든 철학이든 그곳에서 관심 대상이 된다. 인간이라면 어디로/어떻게/왜 사라지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변해버린 카프카 <변신>의 주인공과 같이 우리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변한다는 사실에 근본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autre)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인 고통을 지탱한다. 육중하고도 갑작스런 이질성이 출현한다. 전에는 나의 불투명하고 잊혀졌던 삶 속에 친근하게 존재했던 그 이질성은,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내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아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 이다. 그 알 수 없는 의미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무와 환각, 그리고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현실을 인식하려 하면 나는 전멸된다.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곳에 존재한다. 

- P22 <공포의 권력>


<공포의 권력>을 통해서도 아브젝시옹이란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만 나는 경계선에 있다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더러움, 오염 등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경계이기 때문에 넘나들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그래서 나쁜 쪽으로도 좋은 쪽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


아브젝시옹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대해 크리스테바가 만든 개념이다. 그런데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이 최초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숙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할 때 그 고향은 기술 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이었지만, 크리스테바에게 고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형이다. 


이 문장을 통해서 이후에 어머니와 모성에 대한 개념이 많이 나오겠구나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아브젝시옹'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위해 프로이트, 라캉,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이 등장한다. 참고로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를 잇는 정신분석학자라고 한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부정'(거부) 관점을 가져와 '아브젝시옹'을 발전시켰다. 라캉은 유아가 거울에 맺힌 자신의 상을 보고 어머니와 분리되었음을 인지한다고 말한 반면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초기 이미 유아와 어머니는 분리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정'은 표상이 판단으로 만들어질 때 개입하는 심적 현상이다. 주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속성판단은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를 결정하는 존재판단과 비대칭을 이룬다. 이것은 본능 충동과 판단 작용이 충돌한 결과이다. 

'부정성'은 최초 사유하는 자아의 정립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가 본능의 만족에 붙들려 있는 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통해 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생의 초기에 유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배척하는가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무런 경계 없이 태어나는 유아는 생후 초기부터 자신의 일부라고 여긴 것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나의 밖으로 거부되고 배제되는 대상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ab-jet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똥, 상한 음식, 오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라캉의 거울 단계 이전부터 유아는 자기 몸의 내부에 있어야 할 것들과 밖으로 추방해야 할 것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몸은 유아가 스스로 분리해야 할 최초의 대상이다.


라캉에 따르면, 생후 6~18개월 사이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최초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의 몸과 어머니의 몸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발견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이다.


생후 몇 개월간 유아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관련해서 멜라니 클라인은 이론적 가설을 세웠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일차적 대상인 어머니,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겨냥한 파괴적 충동impulse과 이어서 파괴적 환상에 대한 죄책감을 경험한다. 이것을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3~4개월 경 시작되는 ‘편집-분열적 위치’paranoid-schizoid position와 생후 6개월 경 시작되는 ‘우울증적 위치’depressive position라고 이름 붙였다. 이때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울함이 이후 다시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사실 1장의 내용만 이해해도 이 책의 핵심을 건졌다는 생각인데 기력이 떨어져 이 정도로 갈음하려고 한다. 아무튼 <공포의 권력> 본문을 2번 읽고 <아브젝시옹...>도 재차 읽었다.



4장은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을 다룬다. 


부정은 신성함과는 이질적인 악마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관점에서 터부에 대한 일종의 중화 작용(더러움에 대한 의식 고유의 것)이다. - P143 <공포의 권력>


이 중 '터부'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브젝시옹...>에서 관련 개념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개념을 '부정한'으로만 인식했는데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편으론 '숭고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부정함' 등으로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이 말은 라틴어 ‘사케르’sacer, 고대 그리스어 ‘아고스’agos 히브리어 ‘카데쉬’Kadesh로 번역 가능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의 의미는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 한편으로는 ‘신성한’heilig, ‘성별(聖別)된’geweih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unheimlich, ‘위험한’gefahrlich, ‘금지된’verboten, ‘부정한’unrein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터부를 공평하게 설명하기 위해, 『브리태니커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인용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터부에 포함되는 것은 (a) 사람 혹은 사물의 신령한(혹은 부정한) 성격, (b) 이 성격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금제, (c) 그 금제를 범할 경우에 발생하는 신성(혹은 부정)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인데, 이 말은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의 의미를 지닌다."



5장은 성서 속 '죄', 원죄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중 나는 도입 부분에 기형도의 시(『잎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20)에 주목했다.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 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 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 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 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함께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어쩐지 낯선 목사님이다. 권위로운 목사님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런 분이 있나 싶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목사님이 마을을 떠나는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결국 둘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마지막 구절에 그의 쓸쓸함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예수의 얼굴이 아닐까'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유대민족의 자기 중심성은 메시아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맞는 메시아만을 원햇다. 이것이 그들을 극렬한 분노와 폭력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한마디로 말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한복음 5:44). 가장 신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신을 죽이는 모순이 당시 유대민족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일까.


어릴 때 구약성경을 좀 본 뒤로 읽은지 한참 되었는데 내용이 꽤나 익숙해서 놀랐다. 그만큼 많이 일상이나 책 등을 통해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이 많은 것이리라.



<아브젝시옹...> 뒷 부분은 폴 리쾨르라는 학자에 대한 내용이라 앞 부분만 참고했다. 

이 책은 <공포의 권력>을 조금 보충한 정도의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공포의 권력> 핵심을 요약하고 저자의 언어로 풀어 쓴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내가 이 책에 도움을 받았던 부분은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읽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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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브젝시옹의 1장에 한강 소설이라니. 책을 다시 보니 작가가 한국인이었군요! 저는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제목만으로 외국작가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이 책 샀는데 작가가 누군지도 안보고 그냥 막 샀네요. 하핫.

5장까지면 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1장에서 문학 얘기 하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지 미치겠더라고요. 힘냅시다!!

거리의화가 2024-01-19 17:41   좋아요 1 | URL
1장에 문학 부분은 진짜 어렵던데요. 저는 프루스트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죽겠더라고요ㅋㅋ 다락방 님 남은 분량도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