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기 라시드 앗 딘의 집사 2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시드 앗 딘의 집사 시리즈 중 2편과 3편의 내용에 호기심이 있었다. 한반도의 역사와 더 연관 있는 것은 3권이겠지만(무신 정변, 몽골과의 항쟁 등) 2권은 테무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칸의 자리에 오르는지 확인할 수 있다.


칭기스 칸은 1155년에 출생하여 1227년 73세에 사망했다. 1155년 그 해는 금나라가 세워지고 1126년 정강의 변이 있은지도 거의 30여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다. 칭기스 칸은 1115년 적대 관계였던 타타르 종족에 대한 원정을 나갔다가 어머니인 우엘룬 에케가 그를 임신하였다고 한다. 


그는 손에 마치 간처럼 생긴 복사뼈만한 응혈을 움켜잡고 있었고, 그의 이마에는 세계 정복자의 징표가 분명히 보였으며, 행운과 번영의 빛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바로 얼마 전에 이수게이 바하두르가 타타르와 그 군주인 테무진 우게에게 승리를 거두고 적을 눌렀기 때문에, 그것을 상서로운 징표라고 생각하여 그 타타르 군주의 이름을 따서 영광스런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P126)


일단 어느 영웅의 평전을 읽는 것처럼 일화 등을 미화시켰음을 감안하면서 읽어야 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테무진의 이름에 대한 유래다. 승리한 전투를 기념하여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좋은 기운을 아들에게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버지 이수게이 바하두르는 자신의 형과 아우들 및 친족들의 지도자로 있는 동안 다른 종족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이수게이가 13년 만에 사망했을 때 테무진과 형제들은 어렸고 자신의 종족을 보호하는데 최우선을 두어야 했다. 게다가 테무진이 칸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형제들과 벌인 싸움은 오죽하겠는가. 이 과정을 겪고 최종 승리자가 된 테무진은 어쨌든 남다른 점이 있었음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이수게이 바하두르의 아들은 테무진 말고도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 벨구테이 노얀이 있었다. 초반에는 그의 친족과 사촌들, 부형들이 그가 있던 목초지와 가까이 있어 그들을 처리하는 데 30여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나서 테무진이 칭기즈 칸에 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두 번의 단계가 있었다. 일단 케레이트의 군주인 옹 칸을 패배시키면서 ‘칭기지’(‘위대한 군주’라는 뜻)가 된 것이 첫 번째, 그 뒤 나이만의 군주인 타양 칸을 죽이고 스스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칭호를 ‘칭기스 칸’으로 한 것이 두 번째다. 


칭기스 칸이 옹 칸의 군대를 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패주시키자, 케레이트 종족들은 그에게 복속했고, 그는 그 나라와 울루스를 장악했다. 1203년에 해당한다. 그가 이처럼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군주의 대업이 그에게 확정되었고, 주변에서 종족들이 그에게 귀순해 들어왔다. 거대한 회의를 열고 크나큰 은총에 감사하면서 준엄하고 자비로운 법령들을 선포하고, 상서롭게 칸의 자리에 앉았다. (P226)


1206년 초봄에 칭기스 칸은 9개의 다리를 지닌 흰 깃발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장엄하게 쿠릴타이를 열어, 축복을 받으며 보좌에 앉았다. 이 칭호를 정한 사람은 콩코탄 종족 출신인 뭉릭 에치게의 아들 쿠케추-텝 텡그리라고도 부른다-였다. ‘칭’의 뜻은 ‘강하고 단단하다’는 것이며, ‘칭기스’는 그 복수형이다. (P252)



그렇다면 당시 몽골은 동아시아에 있는 부족들의 이름을 어떻게 불렀을까. 아무래도 우리와 연관이 깊은 동네니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데 (부록에 있는) 지도를 보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몽골인들은 그 지방들을 ‘자우쿠트’라고 부르고, 키타이 주민들의 용어로는 키타이를 ‘한지(漢地)’라고 부른다. 그 지방과 마친과의 경계는 카라무렌 건너편에서부터 바다에까지 이어진다. 키타이 사람들은 마친을 ‘만지(蠻子)’라고 부른다. [키타이 지방의] 또 다른 경계는 주르체 지방과 접하고 있다. 주르체라는 말은 몽골인들의 표현이고, 키타이 언어로는 그것을 ‘누지(女眞)’라고 부른다. 또 다른 경계는 카라키타이 지방과 평원과 접해 있다. 그[곳의] 종족들은 모두 유목민이다. 그들은 유목민들과 접해 있으며, 언어와 외모와 풍습도 비슷하다. 키타이 언어로는 [카라]키타이의 주민들을 ‘치단야르(契丹)’라고 부른다. 또 다른 경계는 거듭 칭기스칸에게 복속했던 지방들과 접해 있는데, 각자 독자적인 명칭과 군주를 갖고 있다. 그들의 외모와 풍습은 키타이와 힌두와 비슷하며, 다양한 종교를 갖고 있다. 상술한 지방들 가운데 일부는 티베트 지방에, 또 일부는 카라장 지방과 접해 있다. 키타이 사람들은 카라장을 ‘다이류’라고 부르는데, ‘커다란 지방’이라는 뜻이다. (P273~274)


칭기스 칸의 몽골은 동아시아 뿐 아니라 지금의 키르기즈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의 중앙아시아, 더 넘어 이란(이라키 아잠),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이라크(이라키 아랍)의 서아시아까지 진출했다. 특히 1211년에는 키타이, 카라키타이, 주르체 등의 지방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했다. 


몽골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즉시 키타이와 카라키타이와 주르체의 군대를 격파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그 부근의 평원이 온통 악취로 진동할 정도였다. (P278)

간략하게 적었지만 이런 모습은 책에서 거의 매 전투마다 나온다. 너무 끔찍하고 잔혹해서 입에 담기도 불편한 장면들이었다. 


칭기스 칸은 탕구트 지방을 정복하고 난 뒤 돌아와 아들들과 있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 1년이나 걸리는 거리인 광대한 왕국을 너희 자식들을 위해 정복하여 완성시켰노라. 이제 나의 遺志는 너희들이 적을 물리치고 친구를 치켜세워 주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편안하고 풍요롭게 인생을 보내고 왕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우구데이 카안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이렇게 충고했다. “너희들은 각자의 왕국과 울루스로 가라.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 법령을 바꾸지 말라.” 

칭기스 칸이 사망한 1227년은 무신 집권 시기였고 집권자는 최우였다. 불과 4년 뒤 1231년 고려와 몽골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이전 일이라 해도 감정 이입이 안 될수는 없는 것 같다. 어쨌든 몽골 전쟁 당시 칸의 일대기는 3권을 읽으면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참고로 책에서는 몽골의 역사를 앞에서 설명하고 뒤에는 동시대의 키타이와 카라키타이와 주르체, 투르키스탄, 서아시아에 있던 이란, 시리아, 이집트의 칼리프와 술탄의 연대기를 다루지만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는 기록이 소략하고 뒤쪽 비중이 자세하다. 아무래도 이는 저자가 이란 출신이기 때문에 자국의 역사에 대한 접근(자료 등)이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연대기 동안 벌어진 사건들과 일화들(성경 말씀 같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자신의 내면을 깨끗이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왕국에서 악을 없앨 수 있다.” 이런 것들…)도 흥미로운 것이 많았다. 사건은 대부분 자연 재해의 기록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도 보면 ‘지진’이나 ‘가뭄’ 등의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백성들에게도 피해였으나 지배층에게는 하늘의 경고처럼 받아들여졌음을 느끼게 한다. 


1권의 리뷰에서도 적은 것 같지만 집사 시리즈를 읽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일단 이름들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페이지를 반복적으로 뒤적뒤적해야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름은 '이즈 앗 딘 마수드 이븐 누르 앗 딘 아르슬란샤 이븐 이즈 앗 딘 마수드 이븐 쿠틉 앗 딘 마우두드 이븐 이마드 앗 딘 젱기 이븐 악크 송코르' -> 이러했다. 어느 지방의 영주 이름이고 물론 단 한 번의 출연이지만 이리 길다니 당시 사람들은 이를 외우기나 했을런지 모르겠다. 아무튼 읽었던 이름을 잊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에 나오는 이름을 옆에 적고 뒤에 나오는 이름들을 확인하면서 관계도를 그리는 것을 추천한다. 

부록으로 칭기스 칸과 조상들의 족보들을 싣고 있는데 『집사』 버전과 『몽골비사』 버전을 함께 넣어서 비교하며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정리 차원에서 보거나 추후에 계보를 확인할 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항인데 부록에 있는 지도를 반드시 활용해야 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지형(강, 산맥 등)과 도시명을 짚어가면서 공부해야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장 선사시대 여성을 향한 몽상적인 시각

선사시대 여성들은 비어 있는 살림터에서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며 사냥꾼들이 돌아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으로 대부분 그려진다. 다큐 픽션이나 다큐멘터리는고고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해야 하지만,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작품이 선사시대의 사냥채집 사회에서남성의 경제적, 사회적 우세를 강조하는데, 인류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에 여성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 P25

초기 선사학자들이 접근했던 방식과 여기에서 파생된 선사시대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두 가지 편견과 연결되어있다. 첫 번째 편견은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고, 두 번째 편견은 인류 역사가 단일한 경로를 따라 진화하고 발달했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억지스러운 가설은 수십 년에 걸쳐서 만들어졌고, 전문가들의 연구와 대중의 상상력에 영향 - P26

을 주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19세기 중반부터 선사시대 인류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선사시대 사람들은 대형 유인원, 고릴라, 침팬지와 비슷하게행동하고, 원시적이라 인식된 ‘열등한 종족‘의 행동과 가깝다고 여겨졌다. 초기 연구자들은 선사시대의 도구에 몽둥이,
곤봉, 손가락 관절에 끼우는 쇳조각, 단검처럼 무기류의 명칭을 붙였지만, 사실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분석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에 열린 만국박람회와 초기의 박물관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데 한몫했다. - P27

여성 납치는 1865년 발간된 <원시적 결혼>에 처음으로등장한다. 선사시대 남성은 유아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했으며, 강간과 납치를 자행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전리품이된 여성은 ‘상품‘이 되어 교환되거나 사들여졌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여성의 ‘상품 가치‘가 농경, 목축, 결혼(일부일처제)"과 함께 나타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적어도 30만 년 이전부터 선사 인류는 복잡한 사회적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여성을 납치하는 것만으로 혈통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와 민족학자가 교환 이론"을 선호한 뒤로는 이 이론이 거부되고 있다. - P34

그러나 교환 이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는전혀 없다. 증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러한 관습이 만약 구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남성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일까 아니면 상호 협의한 것이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귀중품‘이 교환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선사사회에서교환품인 여성의 가치가 높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있다. 특히 출산으로 후손을 얻게 해주기 때문에, 즉 집단의영속을 보존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11-10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상당히 분개하며 읽게될 듯한 책이네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3-11-10 10:35   좋아요 1 | URL
선사고고학을 젠더학 관점에서 쓴 책이더군요. 인류학과도 맥락이 닿아있을 듯합니다^^
 

며칠 동안 그들에 대한 공격을계속하니, 마침내 성채에 있던 사람들이 궁지에 몰렸다. 성채의 해자는생물·무생물들로 땅과 같이 평평해졌고, 부하라 징용대의 시체]로 말미암아 높아졌다. 성을 장악하고 성채에 불을 질렀다. 자신의 발을 흙에 묻히지도 않던 지체 높은 당대의 칸들과 귀족들, 술탄을 위해 일하던사람들은 비참한 포로가 되어 소멸의 바다에 익사했다. 캉클리인들 가운데 채찍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3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포로로 끌려 갔다. 반항자들이 시내에서 일소되자 성벽을 부수어] 지표면과 같이 만들고, 도시민 모두를 벌판의 기도장(namáz-gah)으로 내몰아 젊은이들을 징용대로 선발해 사마르칸트와 다부시야로 끌고 갔다. - P340

도시와 성채를 폐허나 마찬가지로 만들고 수많은 아미르와 병사들을죽인 뒤, 다음날 [108r] 79v」남은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그 무리들가운데 3만 명을 職人이라는 명목으로 정하여 아들. 카툰아미르들에게나누어 주었고, 그와 같은 숫자를 징용대로 정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생명을 건진 대가로 20만 디나르가 지정 - P343

되었다. 사마르칸트에서 관직을 지닌 고관들 가운데 씨카트 알 물크(Thiqat al-Mulk)와 아미르 아미드 부주르그(Amir ‘Amid Buzurg)를 지명해 그것을 징수하도록 하고, 하나를 임명했다. 징용대 가운데 일부는 후라산으로 데리고 가고, 일부는 아들들과 함께 호라즘 쪽으로 보냈다. 그 뒤 몇 차례 더 징용대를 요구했다. 그 징용대들 가운데 목숨을 보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런 까닭으로 그 지방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칭기스칸은 그해 여름과 가을을 사마르칸트 주변에서 보냈다. - P344

"아미르들과 대인들과 많은 백성들은 위대한 신께서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지상의 모든 곳을 내게 주었다는 것은 알라! 누구라도복속하면 그 자신과 처자식들과 권속들에게는 자비가 있을 것이나, 누구라도 속하지 않고 적대와 저항을 앞세운다면 그는 처자식들과 권속들과 함께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이런 내용의 서한을 주고 진군했다.
50)제베는 주베인 (Juvain) 길을 따라갔고, 수베테이는 ‘제왕의 길‘
(shâh-rah)을 따라 잠(Jam)을 거쳐 투스로 갔다. 복속하는 곳이면 어디든 살려 두었고, 반항하는 사람은 누구나 없애 버렸다. - P349

사신이 도착하여 칙령을 전달하자 톨루이 칸은 명령에 따라 출정했다. 그는 수완과 지모를 발휘하여 매일 형제들을 한 사람씩 찾아가 친절을 베풀며 아양을 부렸고, 훌륭한 지략을통해 그들 사이를 화해시켰다. 또한 그는 임무에 적합한 사무 처리를 통해 군무를 정비하고 법령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exa그렇게 한 뒤 병사들을 모두 전투에 투입시켰고, [몽골군은) 그날로깃발을 보루 위에 꽂고 시내로 진입했다. 나프타가 담긴 병에 불을 붙여[시내의] 동리들에 던졌다. 도시 주민들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고, 골목길과 동리에서는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인들은 격렬하게 싸워 동리를하나씩, 또 건물을 하나씩 장악하고 무너뜨리고 태웠으며, 이런 식으로해서 일주일 만에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 - P358

그곳에 도착한 칭기스칸은 사신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복속하고 성벽과 성채를 허물라고 요구했다. 그곳 주민들은 성벽의 반이 아무다리아에 접해 있는 성채의 견고함에 의지하여, 또한 자신들의 용맹과 위세를 자신하여 복속하기를 거부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몽골군은] 11일째 되던 날 도시의 성문을 힘으로 열고 사람들을 모두 벌판으로 내몰아, 일정한 수를 병사들에게 분배한 뒤 모두를 죽여 버렸다. 어떤 노파는 [병사들에게] "나를 죽이지 않으면 진주를 주겠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하자 "삼켜 버렸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즉시 그녀의 배를 갈라서 그 진주를 꺼냈고, 이런 까닭으로 죽은 사람들 모두의 배를 갈랐다. - P360

믿을 만한 역사서에 따르면, 술탄은 [113v] 「85r」 〔적과]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먼저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과 비빈들이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재물들도 물에 던져버린 뒤 물에 뛰어들어 건너갔다고 한다. 술탄의 병사들은 모두 죽음을당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의 다른 아들들은 젖먹이에 이르기까지모두 살해되었고, 후궁에 있던 어린 여자들도 약탈해 갔다고 한다. 술탄의 재물들은 대부분 금과 은과 보석들이었기 때문에 술탄은] 그 모두를인더스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했었다. 그 뒤 칭기스칸은 잠수부들에게 명령하여 강으로 들어가서 가능한 것들을 모두 건져 올리라고 했다.
그들은 전리품을 모은 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진영을 쳤다. - P371

열한 살이었던 쿠빌라이 카안과 아홉 살이었 - P379

던 훌레구 칸이 마중 나왔다. 마침 그때 나이만 지방 변경의 아이만 후이(Aîmân Hî)-일리(Hila)‘15) 강 건너편에 있는 이밀 쿠친(imil Qúchin)근처이며 위구르 지방에 가까웠다에서 쿠빌라이 카안은 토끼를 잡고훌레구 칸은 영양을 잡았다. 몽골인들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으면 그의 엄지손가락에 살코기와 비계를 발라 주는 것,
즉 ‘자미시‘ (jamishi)116)를 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칭기스칸은 몸소 자미시‘를 해주었는데, 쿠빌라이 카안은 칭기스칸의 엄지손가락을 아주 부드럽게 잡았고 훌레구 칸은 강하게 잡았다. 칭기스칸은 "이놈(gatar)이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겠네!"라고 말했다. - P380

[칭기스칸은]노카이 일‘, 즉 개해-623 1126)년에 해당초봄에옹군 달란 쿠둑(Ongún129) Tâlân Qudaq)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상황에대해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왕자들 가운데 주치 카사르의 아들인 이게30)가있었는데, 그에게 "내 아들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는 멀리에 있는가가까이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자기 軍陣(jerge-i lashkar) 안에 있었다. [이숭게는] "2~3파르상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칭기스칸은 즉시 사람을 보내 그들을 찾아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 식사를 할 때 그는 아미르들과 임석한 사람들에게 "내 아들들과 상의하고 밀담을 나누어야 할 것이 있어, 잠시 조용히 [아들들과]비밀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그 문제에 관해 논의했으면 좋겠다. 우리가따로 있을 수 있도록 자네들은 잠시 물러나 주겠는가?"라고 말했다. - P383

"오, 아들들이여! 내가 세상을 하직하고 마지막 여행을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알라! 나는 창조주의 힘과 하늘의 도움으로, 그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 1년이나 걸리는 거리인 광대한 왕국을 너희 자식들을위해 정복하여 완성시켰노라. 이제 나의 遺志는 너희들이 적을 물리치고 친구를 치켜세워 주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편안하고 풍요롭게 인생을 보내고 왕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우구데이 카안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유촉을 모두 마친 뒤, 이렇게 충고했다.
"너희들은 각자의 왕국과 울루스로 가라. 왜냐하면 왕국이 소홀히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으며, 나의 명성과 영예를 위해 저승으로] 가겠노라.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 법령(yásáq)를 바꾸지 말라." - P384

돼지해가을 가운뎃달 보름-624년 라마단(1227년 8~9월에 해당ㅡ에 그는보좌와 왕국을 명망 높은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덧없는 세상을 떠났다. 아미르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이 사실을 은폐했다가 그 종족이밖으로 나오자 그들 모두를 죽인 뒤, 그의 관을 모시고 귀환했다. 그것을오르두들에 운반할 때까지 도중에 마주치는 모든 피조물들을 죽였다.
부근에 있던 왕자들과 카툰들과 아미르들이 모두 모여 장례를 치렀다. - P386

[한번은 칭기스칸이 사냥을 갔는데, 이 지방의 어떤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아래 멈추었는데, 그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찼다. 그는
"이곳은 내가 묻힐 만한 곳이다. 이를 잘 표시해 두어라!"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를 때 다시 [일화를 말하자, 왕 - P387

자들과 아미르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그곳을 선정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를 묻은 바로 그해에 그 평원에서 수많은 나무와 풀이 자라나, 지금은 울창한 숲이 되어 그 안을 지나갈 수도 없으며, 처음의 그 나무와그가 묻힌 곳을 다시는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오래된 禁區지기(gorigchi)들조차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 P388

칭기스칸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의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는 자식들, 형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동생들, 부인을 신뢰하지 않는 남편, 남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부인,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 시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 며느리,
어린애들을 보호(asrâmishi)하지 않는 어른들, 연장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연소자, 종들의 마음을 멀리하는 대인들, 외부인을 맞아 주지않는 사람, 나라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강화시켜 주지 않고 법령과 규범과 현명한 방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반목으로말미암아 도둑과 사기꾼과 반도와 불법자들이 창궐하고 그들은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그들의 말과 가축은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전쟁시] 선봉에 세워 타고 다니던 말들이 안식을 얻지 못해, 마침내 그 말들은 버려지고 쇠약해져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종족은 혼란되고 우둔하다." - P426

"군대의 지휘관이 될 만한 사람은 스스로 배고픔과 갈증을 체험했기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행군할 때는 보조를 맞추어서 병사들이 배고픔이나 갈증을 느끼거나 가축들이 피로해지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희들 가운데가장 약한 사람의 행보에 맞추어 행군하라!"는 속담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 P431

" [술은] 어떤 지식을 갖고 있고, 또 어떤 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것들을 빼앗아 버리고, 그가 가는 길이나 하는 일을 가로막아 버린다. [지식과 기술] 이 두 가지를 잃어버리는 것은 마치 음식과 산해진미 (shilan)를 불에 집어 넣고 물에 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 - P4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군대를 정비하여 상술한 해 가을에 상서로움으로 키타이, 카라키타이, 주르체 등의 지방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했다.
몽골인들은 그 지방들을 ‘자우쿠트‘라고 부르고, [95r] 「66v」 키타이주민들의 용어로는 키타이를 ‘한지‘ (Khânzhi)라고 부른다. 그 지방과마친과의 경계는 카라무렌 건너편에서부터 바다에까지 이어진다. 키타이 사람들은 마친을 ‘만지‘ (Manzi)라고 부른다. [키타이 지방의] 또 다른 경계는 주르체지방과 접하고 있다. 주르체라는 말은 몽골인들의 표현이고, 키타이 언어로는 그것을 ‘누지‘ (Nuzi)"라고 부른다. 또 다른 경계는 카라키타이 지방과 평원과 접해 있다. 그곳의] 종족들은 모두 유목민이다. 그들은 유목민들과 접해 있으며, 언어와 외모와 풍습도 비슷하다. 키타이 언어로는 [카라]키타이의 주민들을 ‘치단야르‘ (Chidanyâr)" - P273

라고 부른다. 또 다른 경계는 거듭 칭기스칸에게 복속했던 지방들과 접해 있는데, 각자 독자적인 명칭과 군주를 갖고 있다. 그들의 외모와 풍습은 키타이나 힌두와 비슷하며, 다양한 종교를 갖고 있다. - P274

칭기스칸은 무칼리에게 ‘구양 (guyang)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그 이Mus유는 이에 앞서 그를 주르체 지방의 변경으로 보냈을 때 주르체 종족들이 그를 ‘구양‘ - ‘한 지역의 군주‘라는 뜻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를 다시 한번 그 지방으로 보내며 "이 칭호는 상서로운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에게 이 칭호를 정해 주고 웅구트의 1만 군대를 주었다. 그리고쿠시쿨(Qúshiqúl)124 1개 천호(hazara), 우루우트 종족의 4개 천호, 보투쿠레겐을 수령으로 하는 이키레스의 2개 천호, 쿠일다르의 아들 뭉케 칼자‘를 수령으로 하는 망쿠트의 1개 천호, 알치 노얀을 수령으로 하는쿵크라트의 3개 천호, 무칼리 구양의 형제인 다이순을 수령으로 하는라이즈의 2개 천호가 있었다. 몽골 외에도 카라키타이와 주르체의 군대가 있었는데, 그들의 수령은 우야르 왕샤이(Dyar Wangshaî)와 투간왕샤이(Tugan Wangshai) 였고, [칭기스칸은 모인 사람들을 그들에게 맡겼으며, 또 그들이 성심으로 힘을 다 바쳤기 때문에 각각을 만호장으로 임명했었다. - P2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칭기스칸이 옹 칸의 군대를 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패주시키자, 케레이트 종족들은 그에게 복속했고, 그는 그 나라와 울루스를 장악했다.
그해, 즉 ‘통쿠즈 일‘ -회력 599/1203)년에 해당한다―겨울에 테멘케헤레(Temân Kehere)180)라는 곳에서 사냥하고, 승전을 올리고 귀환하며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축복받은 자신의 오르두들에 도착했다. 그가 이처럼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군주의 대업이 그에게 확정되었고, 주변에서 종족들이 그에게 귀순해 들어왔다. 거대한 회의를 열고 크나큰 은총에 감사하면서 준엄하고 자비로운 법령들(yâsâqhâ)을 선포하고, 상서롭게 칸의 자리에 앉았다. - P226

‘쿨루카나 일‘, 즉 쥐해-600년 주마다 알 아히르(/1204년 2~3월에 시작의 시작부터 ‘모린 일‘,
즉 말해-606년 샤반(/1210년 1~2월에 시작-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7년 동안, 칭기스 칸의 역사.
그 마지막 해에 칭기스칸은 56살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타양 칸과 전쟁을 했고 그를 죽였다. 9개의 하얀 발을가진 깃발을 세웠고, 그에게 ‘칭기스칸‘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여러 차례 탕구트로 출정했고, 메르키트의 군주인 톡타이, 타양 칸의 아들인 쿠쉴룩과의 전쟁에 몰두했으며, 위구르의 군주를 귀순하라고 소환했다. - P245

칭기스칸은 주치 카사르에게 "너는 ‘콜‘ (qôl), 즉 중군을 지휘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군대를 정열(yásámishi)시켰다. 자무카 세첸이 멀리서 칭기스 칸의 列을 보고는 누케르들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하기를,
"[나의] 의형제, 즉 칭기스칸의 대형과 전열은 남다르다. 나이만 종족은 송아지의 껍질조차 다른 사람에게 남겨 주지 않으니, 누가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겠는가?"라고 하면서, [타양 칸의 군대에서 떨어져 밖으로나가 전투에서 도망쳤다. - P248

코리 수바추는 아미르들에게 "만일 그에게 조금만이라도 인내심이 있다면 몸을움직이거나 대답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는 것을 우리가 보기전에, 우리가 죽는 것을 그가 보도록 나가서 전투를 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산기슭에서 내려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모두] 죽음을 당했다. 칭기스칸은 그들을 산 채로 손에 넣고자 했지만, 그들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죽음을 당했다. 이에 칭기스칸은 놀라며 그 단호함과 충성심에 탄복하면서 "저런 누케르들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밤이 되었을 때 타양 칸의 군대는 패배했고 칭기스칸은 그들을 추격했다. 패배한 사람들은 극도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험한 산지로 들어갔다. 나쿠 쿤(Naqu Qun)이라는 가파르고 거친산에서 밤중에 수많은 나이만 병사들이 미끄러지고 굴러떨어져 죽었다. - P249

상서로움과 축복으로 ‘파르스 일‘, 즉 호랑이해 - 회력 602년 라잡[/1206년 2~3월)에 시작가 찾아왔다. 초봄에 칭기스칸은 [91r]「62v」 9개의 다리를 지닌 흰 깃발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장엄하게 쿠릴타이를 열어, 축복을 받으며 보좌에 앉았다. 이 칭호를 정한 사람은 콩코탄 종족 출신인 뭉릭 에치게의 아들 쿠케추(Kôkechú)-텝 텡그리(Tep Tengri)라고도 부른다―였다. ‘칭‘의 뜻은 ‘강하고 단단하다‘는것이며, ‘칭기스‘는 그 복수형이다. 카라키타이 대군주들의 칭호인 구르칸이 강하고 위대하다‘는 뜻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 P2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