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컨대 지금부터 외현(外縣)에 사는 죄인은 5일에 한 번 구금하고 방면하는 숫자를 갖추어 주(州)에 보고하고 주옥(州獄)에는 별도로 장부를 두고 장리(長吏)가 검사하고 살펴서 3일이고 5일에 한 번씩 이끌어다가 심리하고 매월 형부(刑部)에서 열람하도록 갖추어 올리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구금한 사람이 많은 곳에는 조관(朝官)에게 명령하여 말을 달려가서 결정하여 보내도록 하십시오. 만약에 사건이 억울하고 무고한 것에 연관되어 지체되었다면 그 본주의 관리를 강등시키거나 내쫓으십시오. 혹은 한 해가 끝나서 감옥에 억울하게 지체되는 사람이 없다면 형부에서는 첩지(牒紙)를 발급하여 대체할 날짜를 얻게 하여 그 결과를 비교하여 이를 장려하고 상 주십시오."
장제현은 부지런하게 백성들을 피폐하는 것을 구휼하고 힘써 관대하게 처리하여 순행하는 부서에서 호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혹은 전사(傳舍)로 불러서 도착하면 탑전(榻前, 걸상)에서 더불어 말하여 대부분 그 진실과 거짓을 찾아내니 강남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를 생각하였다.

이달에 요주는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침(南侵)하여서 만성(滿城)에서 싸웠는데, 패전한 것이 쌓이고 수태위(守太尉)인 희달리(希達里, 奚底里)가 떠도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통군사(統軍使)인 야율선포(耶律善布, 善補)는 복병에게 포위되었는데, 추밀사인 야율색진(耶律色珍, 斜軫, ?~999)이 이를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요주는 야율선포가 대비하는 일에 실패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곤장을 때렸다.

임자일(24일)에 요주(遼主)가 초산(焦山)에 이르렀다가 행재(行在)에서 죽었는데 나이는 35세였다. 시호를 효성황제(孝成皇帝)로 하고 묘호를 경종(景宗)으로 하였다. 한덕양과 야율색진(耶律色珍)이 유조(遺詔)를 이어받아서 장자인 양왕(梁王) 야율융서(耶律隆緖, 972~1031)로 자리를 잇게 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12세여서 황후가 칭제하고 국정을 결정하였다. 황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어미는 과부이고 아들은 어린데 친족의 무리들은 크고 장대하며 변방은 아직 편안하지 아니한데 어찌할꼬?"
한덕양과 야율색진이 나아가서 말하였다.
"신(臣)들을 신임하시면 어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덕양이 숙위(宿衛)하는 일을 총괄하니 황후는 더욱 그를 총애하며 일을 맡겼다.

계축일(25일)에 권지고려국왕(權知高麗國王)인 왕치(王治, 960~997)가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방물(方物)을 진공(進貢)하였으며, 또한 그의 형인 왕주(王?, 955~981)가 죽었으니 자리를 세습하기를 요구하니 얼마 안 있다가 이를 허락하였다.

황제는 일찍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매번 《노자(老子)》를 읽다가 ‘가병(佳兵)이라는 것은 상서롭지 않은 기물(器物)이어서 성인은 부득이 하여야 이를 사용한다.’
라는 곳에 이르게 되면 일찍이 재삼 중복하여 규범(規範)과 경계(儆戒)로 삼지 않은 일이 없다. 제왕(帝王)이라는 사람은 비록 무공(武功)을 가지고 평정을 하지만 끝내는 반드시 문덕(文德)을 사용하여 치세(治世)에 이른다. 짐은 매번 조회에서 물러나서는 책 보기를 그만 두지 아니하며 속으로 전 시대의 성공과 실패를 짐작(斟酌)해 보고 이를 시행하며 덜어내고 덧붙이기를 다한다."

마침 감찰어사인 이광원(李匡源)을 파견하여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선이경을 부사(副使)로 삼았더니 선이경이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으로 사양하여 마침내 국자박사인 옹구(雍丘, 河南省 杞縣) 사람 공유(孔維)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고려왕인 왕치(王治, 성종)가 공유에게 예(禮)에 관하여 묻자 공유는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도리와 오르고 내리는 등 위엄 있는 순서를 가지고 대답하니 왕치는 기뻐하며 말하였다.
"오늘에 다시 중국의 부자(夫子)를 보게 되었구나!"

임오일(25일)에 요에서는 탁주(?州, 河北省 保定市)자사인 안길(安吉)이 송(宋)에서 황하 북쪽에 성을 쌓았다고 상주하자 유수인 유열(裕悅, 관직명) 야율휴격에게 이를 어지럽히어 공사를 성취할 수 없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갑오일(10일)에 요주(遼主)는 여러 신하를 인솔하고 태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려서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로 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은 요주에게 존호를 올려서 천보황제(天輔皇帝)로 하였는데, 크게 사면하고, 기원을 고쳐서 통화(統和)로 하였다. 국호(國號)를 바꾸어 대거란(大契丹)으로 하였다. 정미일(23일)에 요(遼)에서는 백관들에게 각기 작위를 1급씩 올리고 추밀부사(樞密副使)인 야율색진(耶律色珍)을 수사도(守司徒)로 하였다.

을묘일(2일)에는 요주(遼主)가 친히 죄수들을 심리하였다. 태후는 기민한 꾀를 가지고 있어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잘 어거하였다. 이보다 먼저 요인(遼人)이 한인을 구타하여 죽인 사람이 있으면 소나 말로 배상하였으며 한인(漢人)의 경우에는 그를 목 베고 이어서 그 친속들을 노비(奴婢)로 삼았다. 태후는 일률적으로 한인의 법으로 판결하니 연(燕)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백성들이 수재나 한재가 있었던 것을 호소하면 바로 사실을 조사하는데 즉각 파견하여 길을 나서게 하되 오히려 시간에 뒤쳐질까 걱정하라. 자못 듣기로는 사자가 〔간혹〕 미적거리며 출발하지 않는다 하니, 주현에서는 부세를 거두는 것에서 기한을 어길 것을 염려하여 날로 채찍질하게 되고, 백성들 역시 사실을 검사하여 다시 씨 뿌릴 것을 기다린다. 만약에 이처럼 머물고 늦어지게 된다면 이 어찌 짐이 부지런히 정치를 하면서 백성들을 구휼하려는 뜻이겠는가! 지금부터 사자를 파견하여 재한(災旱)을 사실대로 조사하는 데는 그 지역의 멀고 가까운 것과 업무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기한을 정하여 이를 파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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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어제 쓰려고 했던 글이었는데 글을 쓰다가 일에 붙잡혀 타이밍을 놓쳤다. 


주말에는 읽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고 이후에는 쌓아두었던 학술지를 읽었다.


역사문제연구 52호는 이전과 출판사가 달라진 탓인지 알라딘에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이전 호들은 그래도 나왔는데 이제는 아쉽지만 글로만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냉전사 중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반란전에 대해서 다루었다.


대반란전은 냉전 시기 미국에서 저개발국가의 정부가 전복되지 않도록 한 다양한 조치와 작전을 일컫는다. 


냉전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은 제3세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공산군의 게릴라전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1954년 미국의 사회학자인 밀리칸과 로스토우는 CIA 국장 덜레스(Allen Dulles)에게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단기적으로 필요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개발과 협력이 궁극적인 대응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근대화론이다. 대반란전은 앞선 군사작전과 개발에 의한 ‘재건’ 프레임을 결합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케네디 정부는 제3세계에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대외정책으로 삼고, 베트남에서는 대게릴라 작전을 전투에 적용하였다.


1961년 4월의 쿠바 침공은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CIA는 1400명의 망명 쿠바인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켰지만, 그들은 과테말라에서와는 달리 성공하지 못했다. 카스트로는 이미 쿠바군을 전면적으로 재건했고, 10만 명의 반정부 인사를 미리 구금했다. 게다가 기대했던 민중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사흘 만에 비참하게 항복했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입지를 강화했다. 여러 남미 국가에서는 쿠바 혁명을 본받아 혁명 투사들이 게릴라 투쟁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대게릴라 작전 전문가에게 배우고 미국의 군사 지원금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한 경찰과 군부대들이 게릴라들을 패퇴시켰다.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가 몰락한 후 그것을 대신해 제국주의 세계열강이 되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945 이후 - P81 ]


대반란전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박정희는 1.21사태(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후 북한에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군사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 요청은 들어주지 않고 대신 간첩 작전을 진행할 조직을 지원했다. 그 결과 특전사와 전투경찰대 등의 대간첩작전 부대들이 전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북의 남한 공격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나서 이 부대는 시위 진압 부대로 변모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부대를 지원함으로써 오히려 정부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잡아들이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앞서 읽었던 역사비평 145호에서는 새로운 냉전사의 유형의 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미국의 기독교들인이 냉전을 이용해 국가를 강력하게 결집시키면서 지금의 기독교 보수주의적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들은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도 했다. 


얼마 전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과 의과대학 정원 증원 발표 이후 의료계가 반발하며 들고 일어섰다. 사실 필수의료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는데 의대 정원 규모의 문제가 더 부각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51306000179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22715511158723


과거 1971년에도 인턴과 레지던트의 파업 사태가 있었다. 당시 파업은 의료인력을 ‘해외여행 제한’으로 강력히 묶어두려는 국가의 통제에 대한 인력들의 전면적인 반발로 전국적인 연대 파업을 야기했다. 정부는 국가 인력 유출을 걱정했던 것이다. 해방 후 의학교육의 급진적인 변화와 졸업 후 교육 제도의 정착은 단기간에 이루어졌지만 양성된 전문 인력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는 파업의 이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잘 정리되어야할텐데… 걱정이 크다. 


오늘 아침에는 '한국형 귀신고래'에 대한 기사를 보고 불과 이틀 전 읽은 내용이었음을 확인했다. 오래 전이었다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아니어서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귀신고래는 우리 학명이 붙은 전 세계 유일한 고래다. 1977년 한반도 바다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졌는데 여전히 이 고래를 수소문해서 찾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611130004818


100여 년 전에 고래를 한반도에서 발견하고 전신뼈를 미국에 가져간 이가 있다.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MNH) 소속 보조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였던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 1884~1960)다. 그는 1912년 1월 한국의 울산 장생포에 있는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포경기지를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 7주 간 머물며 캘리포니아 연안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회색고래가 있는지 조사했다. 앤드류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1914년에 “캘리포니아 회색고래(THECALIFORNIA GRAY WHALE)”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 해역의 회색고래가 캘리포니아 회색고래와 같은 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문상에는 '한국계 귀신고래'와 직접 연결될만한 표현이나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1년 5월에 울산 남구청은 장생포에 앤드류스 흉상을 설치한다. 비문에는 그가 회색고래를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Stock of gray whales)’라 명명하고 그 존재를 전 세계로 알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때 반갑다.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 여기에서 어떤 단서들을 발견할 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이 후속 공부로 이어진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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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28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신고래라는 말을 보니 예전에 나온 우표가 생각났습니다 두 가지나 나왔군요 두번째는 기억나는데 첫번째는 예전에 썼는지 안 썼는지 생각나지 않네요 위에 건 전지고 밑에 건 낱장으로 된 거예요


희선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61028160612315.jpg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20112094507252.gif

https://img.khan.co.kr/newsmaker/961/20110906_961_46a.jpg

거리의화가 2024-02-28 08:5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예전에 우표 모으신다고 했던 것 기억합니다. 올려주신 이미지를 확인해보니 굉장하네요! 우표 3가지 디자인이 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덕분에 더 잘 기억할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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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품절


드립백을 열자마자 후르츠(?) 향이 너무 강해서 깜짝 놀랐지만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훌륭하다는 느낌이었다. 제조 날짜도 최신이라 그런지 좀 더 신선해서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도 진하게 먹는 편이라 레시피대로 내려 마셨는데 괜찮았다. 앞으로 드립백도 이 정도로 농도감 있게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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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제군(諸軍) 가운데서 용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검무(劍舞)를 가르쳤는데 모두 공중에 칼을 던질 줄 알았고 그 몸을 솟구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이어받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거란이 사자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는데, 편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어서 검사(劍士)들을 나오게 하여 이를 보여 주었다. 수백 명이 웃통을 벗고 북을 치며 시끄럽게 하면서 칼을 휘두르며 들어오면서 뛰고 던지는 것이 이어졌는데 그 미묘함이 다 표출되니 사자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성을 순시하면서 반드시 검사들로 하여금 춤을 추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는데, 각기 그 기량을 드러내자 성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바라보면서 간담이 깨졌다.

갑신일(6일) 새벽에 유계원(劉繼元, ? ~992)이 그의 평장사(平章事)인 이운(李?) 등을 인솔하고 흰 옷에 사모(紗帽)를 쓰고 대(臺) 아래에서 죄받기를 기다렸는데, 조서를 내려서 그를 풀어주고 불러서 대(臺)에 오르게 하고 위문하였다. 유계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은 거가가 친히 왕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몸을 묶어 명령에 귀의하려고 하였는데, 대개 망명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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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죽을까 두려워하며 신에게 겁을 주어 항복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황제는 망명한 사람들을 적어 오게 하여 모두 그들을 목 베었다. 회해국왕(淮海國王) 전숙(錢?)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경은 한 지역을 보존하여 나에게 귀부할 수 있었고,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깊이 아름답다 할 것이요."

유계원이 항복하자 사람들마다 상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황제는 장차 끝내는 요(遼)를 치고 유·계(幽·?, 幽州와 ?州)를 빼앗고자 하였다.
제장들도 모두 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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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인 최한(崔翰, 928~992)만이 홀도 상주하여 말하였다.
"이 한 번의 일은 다시 거병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번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타고서 이를 빼앗는 것이 아주 쉬우며 시기란 잃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황제는 기뻐하여 바로 추밀사(樞密使)인 조빈(曹彬)에게 명령하여 둔병(屯兵)을 움직여 발동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요(遼)의 남경권유수(南京權留守)인 한덕양(韓德讓, 941~1011)은 두려움이 심하였지만 지삼사사(知三司事)인 유홍(劉弘)과 더불어 성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수어(守禦)하였으나 성 밖에서는 항복하라고 부르고 협박하는 것이 아주 급하자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었다. 마침 적리도(迪里都, 鐵林都)도지휘사인 이찰륵찬(李?勒燦, 盧存)이 나와서 항복하니 성 안에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
요(遼)의 어잔랑군(御盞?君)인 야율학고(耶律學古)가 남경이 포위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를 구하였는데, 포위한 군사가 바야흐로 엄하여 마침내 땅에 굴을 파고 나아가서 한덕양 등과 함께 기계를 가지런히 하고 불안한 것을 안정시키며 적당하게 대비하고 막으니 투지(鬪志)가 조금도 해이되지 아니하였다.

"경 등은 정찰하는 일을 엄히 하지 않았고, 군사를 사용하는 것이 법도가 없어서 적(敵)을 만나자 바로 패배 하였으니 어찌 장수라 하겠는가!"
특리곤(特里袞, ?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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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 ? ~998)은 일이 급한 것을 알고 스스로 가서 원조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요주는 마침내 야율휴격으로 야율희달(耶律希達)을 대신하게 하고 오원(五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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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란히 출발하게 하였다.

계주(桂州)관찰사인 조한(曹翰)·조주(?州, 甘肅省 臨潭縣)관찰사인 미신(米信, 926~992)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이 땅을 굴착하다가 해(蟹, 게)를 얻자, 조한이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게란 물에 사는 물건인데 육지에 살다니 그 사는 곳을 잃은 것이다. 또한 발이 많으니 적(敵)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상(象, 상징)이다. 또 해(蟹)라는 것은 해(解, 해산)라고 풀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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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군사를 돌릴 것이다."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요(遼)에서는 황제의 아들인 야율융서(耶律隆緖, 972~1031)를 책봉하여 양왕(梁王)으로 하고 야율융경(耶律隆慶, 973~1016)을 항왕(恒王)으로 하였다. 야율융서는 어려서부터 서한(書翰)을 좋아하여 10세에는 시(詩)를 지을 수 있었으니 요주(遼主)는 위촉(委囑)하려는 뜻을 품었다.

겨울, 10월 초하루 신미일에 요주는 무사(巫師)에게 명령하여 천지(天地)와 병신(兵神)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신사일(11일)에 곧 남침(南侵)하려고 하여 기고(旗鼓)에 제사를 지냈다. 계미일(13일)에 요주가 남경(南京, 북경)에 다다랐다.

황제가 장차 북변을 순행하려고 하였다. 기축일(19일)에 조서를 내렸다.
"경사(京師)에서 웅주(雄州, 河北省 雄縣)에까지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로를 닦고 장애물을 제거하라."

무신일(9일)에 남쪽의 군사들이 물의 남쪽에 진을 치고 싸우려 하자 요주는 야율휴격의 말에만 홀로 황색을 입히어 적이 알아보게 하였다가 재빨리 검은 갑옷에 흰말로 바꾸도록 명령하였다.
야율휴격이 드디어 정예의 기병을 인솔하고 물을 건너서 분발하여 치니 남쪽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고, 뒤쫓아서 막주(莫州)에 이르렀는데 가로 누운 시체가 들에 널려 있었고 산채로 몇 명의 장수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요주는 어마(御馬, 황제의 말)와 금잔(金盞, 금으로 된 술잔)을 가지고 그를 위로하고 말하였다.
"경의 용감함은 명성을 뛰어넘는데, 만약에 사람들마다 경과 같다면 어찌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요(遼)에서는 야율희곤(耶律喜袞)이 이미 갇혔는데, 병오일(10일)에 요의 상경한군(上京漢軍)이 반란을 일으켜서 겁탈하여 야율희곤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조주(祖州, 內蒙古 巴林左旗 西南 石房子村)의 성이 견고하여 들어갈 수가 없자 그 아들인 야율유례수(耶律留禮壽)를 세웠다. 상경유수인 제실(除室)이 그들을 붙잡으니 야율유례수는 돌아오자 바로 복주(伏誅)되었다. 한 해가 넘어서야 비로소 야율희곤에게 죽음을 내렸다.

가을 7월 병오일(11일)에 황제는 장차 크게 거병하여 요(遼)를 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발해왕(渤海王)에게 조서를 하사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호응하게 하면서 요(遼)를 멸망시키는 날 유·계(幽·?)의 영역은 다시 중조(中朝)로 귀납하겠지만 삭막(朔漠, 북방 사막지대) 밖의 것은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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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혼돈 -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 이산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몽골의 역사를 지나 명나라 역사를 읽으려고 자료를 찾는데 과거에 나온 책들 중 읽을 만한 책은 모두 품절되고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명나라와의 외교적 사례는 오히려 조선에서 더 사례를 구하기 쉬울 정도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 책도 과거에 보관함에 담아두기는 했지만 이미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지역 도서관에도 없어서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해 무려 열흘 만에 어렵게 책을 받았다. 이 때문에 책바다라는 서비스도 처음 이용해봤다. 


이 책은 정치사가 아니라 경제사와 문화사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명대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생활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과거의 자료에서 끌고 온 몇 명의 길잡이들을 이용하여 사례를 살펴보고 저자가 의견을 종합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읽기 어렵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중심 인물은 장타오다. 그는 (상인들의 활동이 많은) 현의 지현을 지내면서 현지를 편찬했는데 점차 상업이 유행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전기->중기->후기->말기 갈수록 상업이 자리를 잡는 후반부로 갈수록 암울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만족했다.

살 집이 있고, 경작할 땅이 있었으며, 땔감을 마련할 수 있는 산이 있었고,

김을 맬 채소밭도 있었다. 과세에는 혼란이 없었고 도적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적당한 때에 혼인을 하고 여염집은 편안했다.

여자는 실을 잣거나 베를 짜고 남자는 곡식을 재배했다.

노복은 기꺼이 열심히 일하고 이웃은 서로 친하고 화목했다.


장사꾼이 이미 많아지고 전토는 중시되지 않아서

자산을 가지고 다투거늘 흥망은 예측할 수 없다.

유능한 자는 바야흐로 성공하고 머리가 둔한 자는 곧 파멸한다.

동쪽 집은 이미 부유한데 서쪽 집은 저절로 가난해졌다.

힘 있는 자와 하층민 사이의 균형이 깨져버렸으니

사소한 것을 두고도 서로 다툰다.

모두들 서로에게 빼앗으며 저마다 자기만 키운다.


상업으로 부를 이룬 사람이 많아지고

농사를 지어서 부를 얻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졌고 빈자는 더욱 가난해졌다.

흥한 자는 홀로 위세를 부리고 몰락한 자는 두려워 물러선다.

재물이 나는 곳엔 따르는 무리가 있지만

생업과 살림살이는 일정치 못하다.

교역은 부산하고 티끌만한 이익도 그러모았다.

간악한 세력가가 변란을 일으키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자가 사람들을 침탈한다.

순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부자는 백에 하나, 빈자는 열에 아홉이다.

빈자들이 부자에게 맞서지 못하니 소수가 도리어 다수를 제압한다.

금령은 하늘을 맡고 전신은 땅에 우뚝 섰다.

탐욕은 한이 없어 골육이 상잔하나 저 혼자 쓰고 누려도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서는 터럭 한올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귀역이 도사리고 있다.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고 땅은 황폐해져 있었다. 홍무제는 황폐해진 땅을 원상 복구하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며 제국을 통합하는데 치중했다. 명은 가구와 인구를 등록하도록 (이갑제) 하여 효과적인 세금 징수와 요역, 군역 등에 동원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

황제의 이상은 안정된 농경사회였다. 국가는 최소한의 세금을 받아 기본적인 역할만 했다. 농민들은 촌락에 묶여 있고 공장(工匠)들은 국가에 소속되어 일했고, 상인들은 부족한 필수품만을 거래해야 했으며 군인들은 변경에서국가를 방어했다. 행정은 아주 소수의 교육받은 계급에 맡겨졌고 이들은 스스로를 엄격하게 성찰하는 도덕군자들이었다. 홍무제의 목표는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백성은 일단한 곳에 정착하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또한 왕조의 핵심법률을 모아 편찬한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신체적 이동뿐 아니라 사회적 이동도 제한하고 있다.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 - P39~40


영락제는 홍무제의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업 부흥지로 떠오른 쑤저우가 대운하 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물류의 중심지로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물품 거래도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은납제로 바뀌고 있었지만 정부도 과세를 은납으로 대체하면서 은의 수요가 점차 늘어났다. 

끊임없는 세수 확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명조는 몇 가지 과세를 은납으로 대체했다. 그 일부가 베이징으로 보내졌고 그 비율은 점점 커졌다. 은납의 시작은 금화은이 부과된 1436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명 중기의 요역 개혁도 다른 대체제도를 필요로 했다. ‘지방별 조달‘(坐辦)이 ‘연례 징수‘(歲辦)로 대체되었다. 이는 수도에 물품을 제공하는 지현은 그 비용을 자체 예산으로 부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은을 중앙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지방의 역전(驛傳)에서 필요로 하는 의무적인 복무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역은‘(驛銀)을 납부하는 일이 많아졌다. 1490년에 시작된 이런 현상은 1507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개혁과 그 밖의 개혁들이 국가 세수를 점차 현금위주로 바꿔나갔다. 16세기 말에는 실제로 이갑제를 통해 징발되던 모든 요역이 일조편법에 따라 토지에 대한 부가세로 과세되어 은납으로 대체되었다. - P125


콜럼버스의 항해 후 경쟁이 붙은 서양의 제국들은 저마다 앞다투듯 개척을 위해 길을 떠났다. 16세기 초 중국에 포르투갈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중국은 정화를 보내 해외 원정을 떠나게 한다. 

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라파엘 페레스트렐로가 지휘하는 한 척의 선박을 타고 말라카를 떠나 중국 남부에 처음 당도했다. 두 번째 대규모 원정은 1517년 광저우(廣州)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왕이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 중국 황제에게 파견한 사절단이 동행했다. 이 외교적 접근은 실패했고, 임무를 맡은 포르투갈인들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옥사했다. 하지만 은밀한 거래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고 유럽의 배들이 중국 연안에 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과 포르투갈의 계절무역이 1549년에 이르러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무역상들은 마카오 반도의 남서쪽 상촨(上川, 포르투갈인은 상주앙이라 불렀음) 섬에서 접촉했다. 포르투갈인은 그곳에서 마카오로 진출하여 1557년에 합법적인 조약항을 설치했다. 이 조약항은 아주 작았지만, 유럽과 중국 사이의 무역이 장기간 이어지게 한 최초의 발판이 되었다. - P168


자본주의는 특정한 사회 구조와 시장 경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진화는 유럽 역사에서만 보이는 유일한 것이다. 사회구조가 다를 경우에는 경제의 발전과정 역시 다르게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서 근세 유럽과 명대 중국사에 대한 해석은 갈라져야 한다. 엘리트 형성의 맥락이 서로 다르고 국가 권력의 영향도 다르다. 명대 후기의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다른 어떤 경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제는 국가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지역간 경제를 연결시킨 확대된 시장경제로서, 일부 지역에서는 농촌과 도시의 노동을 연속적인 생산과정으로 조직했다. 하지만 농촌가구가 그대로 기본 생산단위로 유지되었으며 생산과 소비의 완전한 분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소비패턴을 재편했다. 경제의 변화는 더뎠지만 확실하게 신사층 내부에 침투하여 상업에 대한 유교적 경멸을 불식시켰다. 이런 신사층의 변화는 엘리트의 이익이 청대에도 온존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럽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 P263


16세기 후반이 되면 물건을 팔아 돈을 번 부유한 상인과 기존의 지식인층 간에 거리가 무척 가까워진다. 그러나 상인은 지식인들의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여전히 노력했다. 반대로 지식인은 사-농-공-상 중 가장 낮은 대우를 받는 상인을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시대는 변했고 신사층은 시대와 함께 변하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위축감을 느끼지 않고 이익을 도모할 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질서의 주인임을 확신했고 심지어 만주에서 온 새 주인에 저항하면서조차 하나의 사회계급으로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 P330


하지만 유교적 질서에 기반한 계급 사회는 명이 무너질 때까지도 존재했다. 상업은 명을 역동적인 사회로 만들어냈지만 구조적 위계는 단단했다. 1642년 만주족이 산둥성에 들어오고 1644년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하게 되지만 명 말의 상업에 기반한 사회 구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명대는 가뭄, 메뚜기 공격 등 기후 위기와 재난이 특히 많았다. 1538년부터 10년 간 가혹한 기근이 발생하는 등 수 차례의 가뭄이 발생했다. 이런 재난도 농업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한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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