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발견 (양장)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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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것이 됨으로써 동시성을 관통한다.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성姓, 우리의 외로움과 우리의 사회, 대담한 야망과 맹목적인 희망, 보답 받지 못한 사랑과 부분적으로나마 보답 받은 사랑이다. 수평과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삶은 비선형적인 방식으로만 파악되며 "전기"라는 직선의 그래프가 아닌 여러 측면과 여러 빛을 지닌 그림으로 나타난다. 삶이란 다른 삶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 P15~16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어느 한 시기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하물며 몇 권의 저서로도 그 사람을 다 파악할 수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 숨은 뜻이 많다면 더 파악하기 어렵다. 설사 그 이야기에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그의 개인적인 관계를 다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표면에 드러난 층으로 일부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결코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책은 ‘앞서 나간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의 주변 관계는 어떠했는지, 그가 무엇을 남기고자 했는지 충실히 담아냈다 . 


다양한 분야만큼이나 여러 인물을 담아내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문학가 쪽보다는 비문학, 과학자 쪽 계열의 이야기가 더 친숙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에밀리 디킨슨을 제외하고는 요하네스 케플러, 허먼 멜빌, 찰스 다윈, 레이철 카슨의 이름만 알 뿐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마리아 미첼, 메리 서머빌, 윌리어미나 플레밍이라는 여성 과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에밀리 디킨슨, 레이철 카슨의 삶을 더 깊숙이 알게 된 것도 좋았다. 그래도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마거릿 풀러가 아닐까 싶다. 


마거릿 풀러는 여성 해방 운동의 기초가 되는 책을 쓰고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문학, 예술 비평을 썼으며 뉴욕에서 가장 큰 신문사인 뉴욕트리븐에서 최초의 여성 편집자로 일했다. 또 교도소의 개혁을 주장하고 흑인 선거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일찍부터 근시가 왔고 등이 굽어 스스로 추하다고 생각했다 한다. 풀러는 <19세기 여성>을 통해서 성별의 이원성을 비판했고 ‘대화’라는 모임을 통해 20세기 페미니즘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그녀는 나중에 로마에 가서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 진행 과정을 목도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해서인지 마거릿 풀러는 책의 다른 인물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언급된다. 


인상적이어서 더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마리아 미첼, 메리 서머빌, 에밀리 디킨슨, 레이철 카슨이 있다. 


마리아 미첼은 수학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여성 최초로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망원경으로 관측할 수 있는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녀는 배움의 기회를 가진 이들을 위해 학교를 스스로 열어 운영하고 낸터킷 애서니엄 관장으로 일하면서 대중 강연회를 열었으며 해군에 들어가 계산자로 일하기도 했다. 우주에 대한 소명을 가지면서도 사회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틀릴 수 있고 틀려진 것이 밝혀지면 밝힐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과학자란 직업인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소명이자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메리 서머빌은 스코틀랜드 과학자이자 네 아이의 엄마로 자외선의 자성을 연구한 과학 논문을 썼을 정도로 타고난 재능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대중에게 소개하고 <천계의 구조>를 써서 마리아 미첼에게 칭찬의 편지를 받을 정도였다. <물리적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통해서 천문학, 수학, 물리학, 지질학, 화학을 하나로 묶어내는 작업을 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성실함을 지니지 않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미션이라 생각한다. 특히 과학은 남자의 분야(man of science)라고 일컬어지던 때 일구어낸 일이었기에 한 비평가에 의해서 그녀에게 과학자라는 용어가 주어지기도 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써서 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사실 그동안 그녀의 시를 몇 차례 읽었으나 무슨 의미가 담긴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마치 눈뜬 장님 같은 느낌이었달까. 이 책을 통해서 그녀 곁에 어떤 이들이 있었는지 알게 되니 조금이나마 그 의문이 해소가 되었던 것 같다. 중심 인물은 수전 길버트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디킨슨에게 영향을 주었다. 디킨슨의 시는 찬양과 비탄을 이중적으로 담는 애가의 형식으로 그녀만의 리듬과 운율을 지녔다. 특히 다양한 물질에 대한 상징성을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 대상에는 식물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으나 일식 같은 자연 현상도 있었다. 그녀는 죽기 전 30여년 간 거의 밖을 나오지 않고 은둔한 채 작품에만 매달렸다 한다. 수전과 더이상 함께 지낼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이런 의도적인 제약이 오히려 창의성을 이끌어내는데는 돌파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디킨슨 사후 수전의 존재는 지워지고 만다. 그래도 메이블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디킨슨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은 다행인 것 같다.


레이철 카슨은 문학적 재능을 가진 과학자로 그야말로 두 문화의 경계를 허문 인물이 아닌가 싶다. 사실 카슨의 문학적 재능을 잘 알지는 못했는데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꾸었고 여러 매거진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가 실릴 정도로 탁월한 글쓰기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히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글을 써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생물학자이자 과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그녀를 그야말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독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특히 문학을 좋아해 여러 문학가의 글을 섭렵했다 한다. 카슨은 대학 2학년 때 생물학 수업을 듣고 과학계의 길에 들어선 뒤 인간의 관점이 아닌 바다, 생물의 환경에 관한 다양한 저서를 펴내 큰 반향을 일으킨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 <바다의 가장자리>, <침묵의 봄>에 이르기까지. 특히 <침묵의 봄>은 출간하면서 주변의 공격을 예상했다 한다. 카슨은 과학이 아니라 비과학적 태도를 비판하며 과학을 올바르게 적용하는 일에 대해서 윤리적인 물음을 던졌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신비와 현실에 우리가 좀 더 분명하게 주의를 기울일수록 파괴를 향한 인류의 성향이 약화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자본에 의해 환경은 끊임없이 공격받아 파괴되고 있다. 불과 며칠 전 있었던 네팔의 안타까운 사건을 보면서 여전히 그녀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묵직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한 사람을 설명하면서도 그의 주변 관계를 끌어오고 당시의 문헌이나 사건을 끊임없이 가져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 미첼이 혜성을 발견하기 몇 달 전 랠프 왈도 에머슨은 처음 출간한 시집에서 이런 시를 썼다는 식으로 설명한다든가 열두 살 소녀였던 마리아 미첼이 일식을 관찰하고 별을 향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 지 몇 달 후, 21세의 마거릿 풀러는 초월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특별한 별”에 도달했다(P164)는 식이다. 하나의 이야기만 파고들고 싶은 이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벅찰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이야기를 서로 얽어 한 시대를 정리하고 싶은 이라면 꽤나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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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매체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는 일이 쉬워질수록 우리는 그 안에 담길 내용을 점점 더 선별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일상에 - P396

서 마주하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전달한다. 단지 종이를 채우는 데(혹은 글을 입력하는 데, 영상을 올리는 데, 다음에 등장할 매체가 무엇이든 그 매체를 이용하는데) 거의 수고가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점심으로 무얼 먹었는지를쓴 편지는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점심 사진으로 대체되고 이 사진에 우리는빛과 그림자, 구도의 예술적 효과를 대체한다고 주장하는 기성품화된 필터를 적용한다. 사진 예술 또한 그 편리함 탓에 죽임을 당하고 있다. - P397

천문대 계산자로 합류한 지 10년 만에 플레밍은 자신이 직접 분류한 1만 개별의 분포를 기록한 400쪽에 이르는 일람표를 발표했다. 플레밍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의 고향에 은판 사진술을 최초로 도입한 남자였다. 다른계산자인 헨리에타 스완 레빗 Henrietta Swan Leavitt은 업무 능력이 특히 뛰어나다른 계산자들의 평균 급료보다 시간 당 5센트 많은 30센트를 받으며 일을했다. 그녀의 계산 결과는 훗날 우주가 팽창한다는 에드윈 허블 Edwin Hubble의 법칙을 증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 P400

호스머는 결혼이 여자가 먹고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거의 유일한 길이었던 사회에서 대안적일 뿐 아니라 거의 아무도 가지않는 길을 택했다. 주위의 동료가 모두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호스머는크로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나를 빼고 다들 결혼을 하고 있어요. ...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해도 예술가한테는 결혼할 권리가 없어요. 남자는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부부의 의무와 책임이 훨씬 더 무겁게 부과되는 여자의 경우 예술가가 결혼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이나 가정 중 하나를 방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결국 현모양처가 되지도 뛰어난 예술가가 되지도 못하게 될 겁니다. 내 야심은 후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통합의 매듭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불화를 계속해서 봉합해나갑니다. - P443

호스머의 유산은 바로 그녀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로 한 선택을 통해다른 이들에게 가능성을 넓혀주고 그들의 삶을 확장시켜 준 방식에 있다.
호스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여성 예술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타인"으로존재했던 문화 한복판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 모든 창조적인사람들, 동성애자임을 숨길 이유가 거의 없어진 문화 안에서 편안하게 커밍아웃할 수 있던 모든 퀴어 남녀들은 해리엇 호스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의 존재를 받치는 기반에는 호스머의 원형적인 유전자의 무늬가 새겨져있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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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서 : 상 - 한 역사학자의 8·15 일기 역사 앞에서
김성칠 지음, 정병준 해제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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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앞서 같은 제목으로 1945년 말부터 1951년 4월까지 일기의 내용이 실려 출간된 바 있었다. 그러다 최근 8.15 해방 직후부터 그해 11월 말까지 기록이 추가로 발견되어 작년에 한 신문사에 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다. 앞선 구판은 사실상 하권의 내용이 되며 이 책과 더불어 2권의 책으로 분간되어 나오게 되었다. 상권은 8.15 일기, 하권은 6.25 일기가 되는 것이다. 앞부분은 1945년부터 1946년 4월까지의 내용이 실려있는데 주로 해방 직후 2~3개월 내용의 분량이 많아서 해방 직후사라 할 만했다.


이 책의 내용은 해방 후 서울의 공간이 아닌 충북 제천군 봉양면이라는 지방의 공간적 관점이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 이는 저자가 그곳에서 주로 생활했고 금융조합 이사로 일했기 때문에 그렇다. 덕분에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는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벌어졌는지 그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먼저 저자의 해방 전 이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28년 대구고보 2학년 때 대구학생 비밀결사 사건으로 검거되어 10월 징역 2년 집행유예 선고를 받을 때까지 근 1년간 미결수로 복무한 이력이 있다. 그리고 1942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해 조선역사를 전공했다. 1943년 일제가 학도지원병을 강제하자 입대를 거부한 그는 1944년 징용훈련소에 수용되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경성법학전문 시절 훈련교관을 만나 퇴소할 수 있었고 그 이후 조선금융조합 연합회 제천군 봉양면 이사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제천은 원주와 경주를 잇는 기차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1941년 7월 현재의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봉양역이 생겼다. 봉양면은 제천군의 북쪽에 위치하여 원주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봉양면의 해방은 8월 17일에 느껴진다. 여러 분위기가 있는데 일반 서민들은 환호하는 반면 일제에 협력했거나 부역했던 자들은 불안해했다. 관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가다가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거나 구타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포자기로 바뀌거나 나태나 무책임의 태도로 변화하기는 하지만 초반에는 실제로 공격당해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금융조합 직원들도 그랬다. 금융조합은 곧 사라질테니 하루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 올지 모를 폭풍우를 예상하며(애써 외면하며) 몸조심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에라 모르겠다 하며 어차피 사라질 금융조합 일이니 대충 하자며 근무 태만인 자도 있었다. 하루는 그가 금융조합 내부에서 위로금을 나눠 가지기로 했다고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이는 명백한 배임죄라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한다. 

그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의 일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시스템의 구조적인 개혁보다는 개개인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친일파 강력 처벌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치안력이 확립되지 못해 주먹이 앞서는 세상을 경계했다.  


해방이 되어 하루 빨리 조선을 떠나야 했던 재조일본인들도 있었으나 자의 반 타의 반 나가 있던 조선인들은 귀환을 서둘렀다. 

1945년 8월 31일 흐리다.

제천행.

역에 내리니 "귀환 병정, 응징사 환영, 강원도 영월군"이라는 깃발이 보이고  그외에 평창, 정선 등 군도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폰으로 "강원도 영월 사람으로 병정이나 징용 갔던 분은 이리 오시오" 하고 외치고 있었다. 이 더위에 갖는 고생을 겪고 가까스로 여기까지 돌아와서 다시 몇백리 산길을 어떻게 톺아 갈까 하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저 깃발을 보고 저 목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쁠까. 동포애에 눈물겹고 새 결심이 용솟음칠 것이다.

근래에 보던 중 가장 유쾌한 광경의 하나이다.

저자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었다. 강제동원당한 뒤 조선에 돌아오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궁금했는데 이 일기로 그 광경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해방 후 이렇게 한 달도 안 되어서 돌아올 수 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여러 이유들의 사정으로 아예 돌아오지 못하거나 귀환이 늦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11월의 일기에서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사정이 나쁘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내 분위기가 악화되었고 이것이 조선인의 귀환에 발목을 잡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이 원해서 나간 것이 아니었는데 돌아오는 것도 뜻대로 안되는 이 상황은 정말이지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는 전재 귀환 동포를 위한 구휼 사업을 금융조합 내부에 건의하여 시작했다. 기다림 끝에 돌아오는 동포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여 전해주면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따뜻한 조선 입성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 같다. 


9월이 되자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졌고, 이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진다. 심지어는 대학도 미군이 점거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어느 날에는 미군 접대를 위한 환영 연회가 열리는데 그는 미군들을 위해 애쓰는 꼴이 우습다고 넋두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무렵 초기 대한민국을 지도할 만한 교육 행정 책임자가 마땅히 없어 순수 학문을 연구하던 학자들을 끌고 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그는 연구에 매진해야 할 사람들이 행정에 가담해야 하는 현실에 통탄하며 대한민국교육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당시 통화가 시중에 대량으로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도 급등한다. 그런데 받는 급료는 그대로이니 직원들의 불만은 커졌고 이때를 틈타 회계 장부에 손을 대는 직원도 생겨났다. 

그는 총독부와 군정청을 매한가지라고 생각했다. 일부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여기기도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미군은 해방군이 결코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은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의 정치는 무능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 세태를 비판하며 '그만큼의 질서도 기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복잡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굴러가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던걸까. 시니컬함이 엿보이기도 하다.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그의 운명의 고삐는 자꾸만 엇나가려 하고 있다.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버티고 버티고 했으나 운명의 작희는 끝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를 하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슬픔과 애달픔을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켜버린다. 그는 꿈에도 술에 숨으려 하지 않고 아편에 도망하려 하지 않는다. 하늘님이 영 그를 버리시기 전엔 그는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하리라. ... 낙천주의여. 허허 하고 웃는 그의 웃음 뒤에 만겹 시름이 첩첩이 쌓이고 쌓이었음을 그 누가 알랴. - P146~147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과 조선인의 운명은 가혹하였으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낙천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빗대어 말하였다. 가까운 친구는 그를 안온적이고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며 좌익으로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내심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노선을 끝내 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복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그는 학문에 대한 태도를 구기를 배우는 태도에서 나아가 상업으로까지 연결시킨다. 여기에는 정공법, 속여서 얻기, 정공으로 시작했으나 이익으로 나아가는 세 가지의 모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문제를 풀기 위함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찾아 그 길을 똑바로 지켜나갈 수 있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부는 유한 계급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이자 자기 성장의 유일한 길이기에 나이, 환경 등을 따지는 것은 핑계라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일기에 여러 차례 한글의 우수성과 위대함에 대해 피력한다. 한글만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과학적인 문자가 없다고 말이다. 그는 문화적인 독립을 위해서라도 한문을 전폐하고 한글을 사용해야 함을 계속 일기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다양한 책을 번역했는데 그중 강용흘의 자전소설인 Grass Roof를 '초당'으로 내었다는 이력이 눈에 띄었다. 그뿐 아니라 펄벅의 대지도 그 목록에 있다. 1945년 12월에는 <조선역사>를 쓰고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당시 출판계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12월 초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국으로 입국했다는 신문이 지방에도 보도되었다. 얼마 후 임시정부 요인의 개선 환영식이 있었으나 이와중에도 인민공화국과 한국민주당으로 파가 나뉘어 극도의 혼란한 모습을 보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가 발표되자 이 분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금융조합 지회에 몸담고 있었던 만큼 자문을 하러 오는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았으나 가능하면 이를 회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1946년 1월에는 <조선역사>를 기고 및 탈고하는 데만 매진했다. 이를 통해 향후에는 학문 연구, 기고에만 집중하겠다는 생각을 점차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융조합 연합회에 사의를 표명하는데 이는 갈수록 금융조합이 우익편향이 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한몫을 했다. 물론 그는 공산당의 독단과 사대주의를 경계했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배울 점이 있으나 공산당의 방향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드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과연 개개인이 각자의 일에 매진하는 것과 투쟁을 포함한 사회를 개혁하는 것 중 해방 후의 미래를 위해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과정이었나 하는 생각 말이다. 저자는 앞선 관점을 고집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의문이 남았다. 해방 초기 잠깐은 친일에 부역하던 이들이 몸을 사리고 눈치를 보았지만 이후에는 그러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군정이 들어온 뒤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국가의 모습이 달라 난맥상이 벌어지지 않나. 개인적으로 당시의 상황에서 구조적인 개혁 없는 미래는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책의 전작을 사두고 아직 읽지를 못했는데 개정판이 나오는 바람에 스텝이 꼬였다. 뒷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구판을 먼저 읽을지 아니면 개정판을 읽고 다시 구판을 읽을지 고민을 좀 해보려 한다.


저자의 일기 자체로도 좋지만 정병준 선생님의 해제를 함께 읽으면 배경을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어 도움이 된다. 하권도 하루 빨리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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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광야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중앙아시아 편 뭉우리돌 3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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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의 결말은 작은 돌덩어리로 남겨졌다. 거기 새겨진 얼굴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의 압축이다. 그 압축을 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잔잔한 응시로 잠시 시선을 주면 된다. 그러면 바람결이 와 속삭인다. 광야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들의 합창은 그렇게 슬며시 찾아왔다. 곡조는 구슬프지 않다. 무미건조하고 감정이 배제된 게 대부분이다. 누굴 울리려는 소리가 아니다. 망자들과 눈을 맞추며 깨달은 내 해석이 맞다면 그들은 기억되고 싶을 뿐이다. - P15


1937년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다. 이미 고향을 한 번 떠나온 사람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착해온 삶의 뿌리가 또 다시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이는 설움이자 애환이 되었을 것이다. 사진가인 작가는 전작인 두 권의 작업에서 세계 곳곳에 흩어진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헤맸고 현재 존재하는 형태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냈다. 전작들을 이미 읽은 바 있었기에 신작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반가웠다.


이번 주제가 담긴 장소는 중앙아시아다. 공교롭게도 불과 이틀 전 신문에서 중앙아시아(타지키스탄)로 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과거의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당시 37세, 자신과 같은 나이였다고 한다. 광복 81주년을 맞아 무어라도 읽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읽고 싶은 신간이 나와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현장을 채우고 있는 건 지독한 외로움의 냄새'라는 문장이 시선을 끌었다. 때때로 카메라의 렌즈에 담긴 피사체는 말을 건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진가의 사진이 정말 그랬다. 그 결과물이 결코 쉽게 얻어질 리 없다. 휴대폰 카메라로 얼마든지 일상의 순간을 '찰칵!'하고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피사체에 온전히 공을 들여 사진을 찍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촬영 일정이 길면 좋겠으나 부족한 자금, 한정된 시간이기에 최선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분투할 수밖에 없었을 작가의 고충이 느껴졌다. 작가가 전해주는 이야기도 좋았다. 


그렇다면 1937년 한인들은 어떻게 하여 중앙아시아로 가게 되었나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중반 소련에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정책의 기조는 민족 자결주의에서 소비에트 애국주의로 바뀌며 한인 포함 외국인에 대한 경계, 탄압으로 변화한다. 게다가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견제할 필요가 있던 소련은 중국의 국민당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내부 단속 강화를 위해 대숙청을 시작한다. 이로 인해 일본 첩자, 반혁명 분자라는 오명을 떠안고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한인 강제 이주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한인들은 영문도 모른채 부랴부랴 짐을 싸야 했다. 짐도 30kg로 제한되어 있어 현재 가진 살림 살이를 모두 포기한채 말이다. 전체 한인 중 55%는 카자흐스탄, 45%는 우즈베키스탄으로 3차에 걸쳐 강제 이주가 진행되었다(소규모지만 부근의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도 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소련 정부는 한인 가구당 370루블, 1인당 150루블을 주고 가옥과 토지를 담보로 수령증을 발급한 이후 수령증을 기반으로 토지, 가옥의 무상 지급을 약속했으나 지켜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한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한 뒤 첫 도착지였던 곳이다. 몇날 며칠을 열악한 기차를 타고 지나온 끝에 그들이 닿은 곳이었다. 바슈토베 언덕은 초기 경작지였다. 한인들은 연해주에서 이미 땅을 옥토로 바꾼 경험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랬다. 이곳 땅은 주변 호수의 영향으로 염분기가 많아 그것을 제거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고. 안타깝게도 현재 바슈토베 언덕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불과 6년 전에 작가가 찾아왔을 때만 해도 그러진 않았다. 2019년 기념광장 포장, 울타리배수로 설치, 고려인 추모비 건립, 2021년 한-카 우호기념비 건립, 조형물 설치, 나무 식재, 2022년 8월 고려인 항일 독립운동가 추모벽이 만들어졌다. 추모비에 기념한 재단 문구 등이 새겨지고 흙을 쌓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등 의도적으로 연출되면서 기존의 모습이 사라졌다. 작가의 안타까움과 한숨이 내게도 전해졌다. 다른 건 그렇다치고 이곳에 독립운동가 시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추모비와 추모벽이 만들어지는 건 장소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홍범도가 수위로 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미 유명해진 고려 극장의 전신 역사가 흥미로웠다. 최초 1932년 원동 변강 조선극장이 출범할 때만 해도 이동 극장의 형태였다. 해삼시 고려극단으로 개명한 뒤 고려음악드라마극장이 되었다가 지금의 고려극장이 되었다. 강제 이주 때문에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극장을 이동해야 했다. 1968년 알마티로 이전해 국립극장으로 승격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태장춘은 극작가이자 배우로 홍범도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 사람이면서 그에게 고려 극장 수위 일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연극 '의병들'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것은 홍범도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미화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물과 사건을 표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태장춘이기에 작가는 그의 무덤을 찾아내고자 애를 썼고 2024년 마침내 찾아냈다고. 덕분에 나도 이제 태장춘 세 글자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헬렌 선교사님도 그렇다. 그녀는 한인 강제 이주 역사 복원 알리기에 헌신하고 계시는 분이다. 우슈토베 임마뉴엘 교회 선교사님으로 고려인 역사 단지를 조성하고 고려인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에 앞장서셨다. 그런데 고려인 기념관을 본 작가가 기존 전시 자료에 오류가 많고 내부 건물도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음을 발견하고 재건립을 건의하여 2025년 재탄생했다고 한다. 그 앞에 태장춘 묘지 비석도 제작되었다니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 이주 1세대인 지순옥 할머니를 작가가 배웅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사진을 찍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고. 책에 실리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연이기에 참 값지다는 생각을 한다. 


의병장 민긍호의 후손들 이야기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직계후손인 민 알렉산드리아는 코로나 때 사망했고 고손자인 데니스 텐은 괴한의 칼에 찔려 2024년 사망했다고 한다. 아니 이 무슨 당황스럽고 처참한 상황인지.

인민배우 김진은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맡은 최초의 배우라고 한다. 손녀인 한다나는 알마티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 김진의 무덤 형태가 너무나 특별했다. 사각형 돌 무덤인데 춘향전의 한 소절인 '내가 간들 아주가며 아주간들 잊을소냐' 글자들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돌마다 새겨 넣은 것이다. 대체 무덤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본인의 유언일까. 그렇다면 이몽룡 역을 맡았던 만큼 죽어서도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서 그리 한 것일까.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무덤의 형태였다.


최봉설은 철혈광복단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인공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 부인인 김신희 여사(역시 독립운동가)와 함께 쉼켄트에 묻혀 있다. 따님인 최 알렉산드라 여사로부터 15만원 사건 현장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15만원 사건의 주인공들은 최봉설 이외에는 다 붙잡혔다. 그는 경관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오른쪽 등뒤 날갯죽지에 총탄을 맞았다. 최계립이란 가명을 짓고 74세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김준은 철혈광복단 15만원 사건을 소설화하여 펴낸 작가다. 그는 언론인으로 일하며 작가로도 활동했다. <십오만원 사건>은 소비에트 문학에서 처음 조선말로 쓰인 조선작가의 작품이었다 한다. 

계봉우는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최봉설과도 지인이었다. 소련 수교 이후에나 그의 독립운동 이력이 알려졌다. 상해, 북간도, 연해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다. 1937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한 이후에는 공개 정치 활동을 삼가고 국어 문법, 국어, 국사 강습, 역사 저술 활동에만 집중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서울 현충원에 옮겨 안장됐다.

참고로 크즐오르다는 한인들이 벼농사를 성공시킨 땅이자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던 곳, 강제 이주 초기에 한인 극단, 방송국, 교육 기관, 신문사 등이 있던 곳이다.


한편 한인들은 벼농사에 매진했다. 관련해서 여러 인물들을 책에 거론하고 있다. 최창학은 제3인터내셔널 콜호스(집단농장)을 운영했다(현재 그가 쓴 사무실과 무덤 등을 가볼 수 있다). 김만삼은 1942년 벼농사꾼의 어버이이자 전설로 기록적인 수확량을 올렸던 인물이어서 이곳에 도착한 한인들이 그의 영농법을 너도 나도 배우려고 했다 한다. 그는 추후 레닌 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벼농사에는 그늘도 존재한다. 벼농사를 위해 만들어진 관개수로 때문에 아랄해는 기존의 1/10 크기로 축소되었고 기후 변화까지 생겼다 한다.


카를락 박물관과 스파스크 국제 추모단지는 강제 노동으로 끌려온 많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이 그곳에 가장 먼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김경천은 바로 이곳 카를락 강제 노동수용소의 수용자로 지냈다. 그는 카를락에 있다가 나중에 코미 자치 공화국, 이후에는 코틀리스 북부철도 수용소(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배경이 된 곳)에 있다 1942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안타깝게도 아직 발굴되지 못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최재형과 허위 가문으로 기억될 수 있는 곳이다. 

최재형의 둘째부인이었던 최 엘레나 무덤이 2017년 비슈케크 세베르니 공동묘지에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최재형의 가짜 후손 행세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러시아 해체 후 진짜 후손이 따로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싶다. 그리고 2023년 최재형의 묘는 현충원에 조성되었다. 현재 카라콜에는 최재형의 손녀와 딸이 살고 있다. 최재형이 죽고 나자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들이 소련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역사가 낳은 비극이 아닌가 싶다.


허위 가문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허위의 손녀인 허 로자는 살아생전 독립운동가 후손을 지원해 달라며 대한민국 대사관 문을 여러 번 두드렸으나 매번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다 2006년 당시 한명숙 총리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팔십 평생 만에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한다. 2007년에는 귀화 신청을 했으나 서류에 아버지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는 이유로 법무부에서 거부하여 45일 간 여관방 생활을 하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다(대한민국 국적은 2011년에야 주어졌다). 2021년 서울에서 별세했을 때 빈소와 장례 비용도 없었는데 한 국회의원과 기업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현재 비슈케크 외곽에는 허위의 넷째 아들인 허국의 가족묘가 자리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한인들의 눈물이 어린 땅이다. 더불어 우즈베키스탄에도 5.18 광주 사건과 비슷한 안디잔 학살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 더 친숙해졌다. 

이인섭은 '망명자의 수기'라는 자서전을 통해 한인들의 강제 이주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강제 이주 당시 한인은 16000여 가구, 인원은 760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련된 주택은 250채가 다였기 때문에 열악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곳에 살지 못하고 여러 곳의 콜호스로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주로 목화만 생산되던 곳에 벼를 비롯한 채소 등을 심으며 농사가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북극성 콜호스에는 김병화가 있었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모범적 삶을 실천하며 그곳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 지도자여서 1948년, 1951년 두 차례 노동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북극성 콜호스는 나중에 김병화 콜호스가 되었고 현재는 그의 업적을 기린 김병화 박물관이 남아 있다. 어둠을 밝히는 북극성처럼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힘과 의지가 되는 지도자가 아니었나 싶다.

한인들은 이주 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이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인 전통 문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한인 문화에 러시아 문화가 침투하면서 전통 문화가 점차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그래도 당근채, 양배추 김치, 국시는 오늘날에도 그곳에서 볼 수 있는 한인 전통 음식 문화이다.


책의 사연 중 가장 놀라웠던 이야기는 작가가 한 탈북자를 만났는데 그 아내(남 타티아나)가 최재형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다(너무 놀라워서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앞서 최재형의 후손들이 소련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했는데 손녀와 며느리의 무덤이 타슈켄트에 있었다. 아는 분들의 도움으로 찾아간 무덤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가는 길이 가시밭길일 수는 있으나 무덤 상태를 보니 정말이지 한숨만 나왔다. 그곳을 지나가기도 어렵겠지만 지나친다 해도 결코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던 광경이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인물로 작가는 천도교 독립운동가인 강연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사연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2024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무덤을 발견했다며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발표한다. 그런데 막상 작가가 가보았더니 엉망진창 상태였다. 작가처럼 나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말을 말지 대체 왜?'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타슈켄트에서 우리 역사를 흑백 필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안 빅토르도 기억에 남는다. 작가는 그의 사진에 대한 태도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이 기록을 멈추면 그마저도 기록이 사라진다 생각했다는 안 빅토르,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이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 작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 책은 이야기와 사진 뿐 아니라 방문한 곳의 GPS 좌표를 제공한다. 구글맵에서 해당 좌표를 입력하면 쉽게 저장할 수 있다. 나도 몇몇 군데는 저장해놓았는데 언젠가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를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유불리로 바라보면 어떤 이익도 취할 게 없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서사일 뿐이고 거기에 자본과 시간을 투자하는 건 소모적 지출이 될 뿐이다. 하지만 역사는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고, 유대를 형성하는 에너지원이다. 그 힘은 현재 판단을 도와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된다. 희망은 "너무 비싸도 사야지"란 의지에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함께라면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위정자에게 희망을 걸기보다 이 책을 나누는 독자들이 미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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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ise doesn’t go away, but the most successful people I know have figured out how to live with it, to lean on the people who believe in them, and to push onward with their goals.

I was cautious. I stuck to what I knew. It’s hard to put into wards what sometimes you pick up in the ether, the quiet, cruel nuancs of not belonging-the subtle cues that tell you to not risk anything, to find your people and just stay put.

This may be the fundamental problem with caring a lot about what others think: It can put you on the established path-the my isn’t that impressive path-and keep you there for a long time. Maybe it stops you from swerving, from ever even considering a swerve, because what you risk losing in terms of other people’s high regard can feel too cos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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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8-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시작하셨군요. 영어는 읽기에 어떤가요? 저는 새로운 영어책을 펼치자니 좀 두려움이 앞서네요. 그래도 곧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8-18 09:41   좋아요 0 | URL
자서전, 에세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함께 읽었던 책 중 가장 수월하게 읽히는 것 같아요. 물론 중간중간 어려운 단어는 등장하지만. 번역서 읽고 원서 읽으시면 그래도 잘 읽히실 것 같아요. 그나저나 작가가 역시 똑똑하고 글 잘쓴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