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 : 상 - 한 역사학자의 8·15 일기 역사 앞에서
김성칠 지음, 정병준 해제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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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앞서 같은 제목으로 1945년 말부터 1951년 4월까지 일기의 내용이 실려 출간된 바 있었다. 그러다 최근 8.15 해방 직후부터 그해 11월 말까지 기록이 추가로 발견되어 작년에 한 신문사에 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다. 앞선 구판은 사실상 하권의 내용이 되며 이 책과 더불어 2권의 책으로 분간되어 나오게 되었다. 상권은 8.15 일기, 하권은 6.25 일기가 되는 것이다. 앞부분은 1945년부터 1946년 4월까지의 내용이 실려있는데 주로 해방 직후 2~3개월 내용의 분량이 많아서 해방 직후사라 할 만했다.


이 책의 내용은 해방 후 서울의 공간이 아닌 충북 제천군 봉양면이라는 지방의 공간적 관점이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 이는 저자가 그곳에서 주로 생활했고 금융조합 이사로 일했기 때문에 그렇다. 덕분에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는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벌어졌는지 그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먼저 저자의 해방 전 이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28년 대구고보 2학년 때 대구학생 비밀결사 사건으로 검거되어 10월 징역 2년 집행유예 선고를 받을 때까지 근 1년간 미결수로 복무한 이력이 있다. 그리고 1942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해 조선역사를 전공했다. 1943년 일제가 학도지원병을 강제하자 입대를 거부한 그는 1944년 징용훈련소에 수용되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경성법학전문 시절 훈련교관을 만나 퇴소할 수 있었고 그 이후 조선금융조합 연합회 제천군 봉양면 이사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제천은 원주와 경주를 잇는 기차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1941년 7월 현재의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봉양역이 생겼다. 봉양면은 제천군의 북쪽에 위치하여 원주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봉양면의 해방은 8월 17일에 느껴진다. 여러 분위기가 있는데 일반 서민들은 환호하는 반면 일제에 협력했거나 부역했던 자들은 불안해했다. 관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가다가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거나 구타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포자기로 바뀌거나 나태나 무책임의 태도로 변화하기는 하지만 초반에는 실제로 공격당해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금융조합 직원들도 그랬다. 금융조합은 곧 사라질테니 하루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 올지 모를 폭풍우를 예상하며(애써 외면하며) 몸조심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에라 모르겠다 하며 어차피 사라질 금융조합 일이니 대충 하자며 근무 태만인 자도 있었다. 하루는 그가 금융조합 내부에서 위로금을 나눠 가지기로 했다고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이는 명백한 배임죄라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한다. 

그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의 일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시스템의 구조적인 개혁보다는 개개인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친일파 강력 처벌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치안력이 확립되지 못해 주먹이 앞서는 세상을 경계했다.  


해방이 되어 하루 빨리 조선을 떠나야 했던 재조일본인들도 있었으나 자의 반 타의 반 나가 있던 조선인들은 귀환을 서둘렀다. 

1945년 8월 31일 흐리다.

제천행.

역에 내리니 "귀환 병정, 응징사 환영, 강원도 영월군"이라는 깃발이 보이고  그외에 평창, 정선 등 군도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폰으로 "강원도 영월 사람으로 병정이나 징용 갔던 분은 이리 오시오" 하고 외치고 있었다. 이 더위에 갖는 고생을 겪고 가까스로 여기까지 돌아와서 다시 몇백리 산길을 어떻게 톺아 갈까 하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저 깃발을 보고 저 목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쁠까. 동포애에 눈물겹고 새 결심이 용솟음칠 것이다.

근래에 보던 중 가장 유쾌한 광경의 하나이다.

저자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었다. 강제동원당한 뒤 조선에 돌아오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궁금했는데 이 일기로 그 광경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해방 후 이렇게 한 달도 안 되어서 돌아올 수 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여러 이유들의 사정으로 아예 돌아오지 못하거나 귀환이 늦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11월의 일기에서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사정이 나쁘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내 분위기가 악화되었고 이것이 조선인의 귀환에 발목을 잡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이 원해서 나간 것이 아니었는데 돌아오는 것도 뜻대로 안되는 이 상황은 정말이지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는 전재 귀환 동포를 위한 구휼 사업을 금융조합 내부에 건의하여 시작했다. 기다림 끝에 돌아오는 동포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여 전해주면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따뜻한 조선 입성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 같다. 


9월이 되자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졌고, 이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진다. 심지어는 대학도 미군이 점거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어느 날에는 미군 접대를 위한 환영 연회가 열리는데 그는 미군들을 위해 애쓰는 꼴이 우습다고 넋두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무렵 초기 대한민국을 지도할 만한 교육 행정 책임자가 마땅히 없어 순수 학문을 연구하던 학자들을 끌고 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그는 연구에 매진해야 할 사람들이 행정에 가담해야 하는 현실에 통탄하며 대한민국교육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당시 통화가 시중에 대량으로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도 급등한다. 그런데 받는 급료는 그대로이니 직원들의 불만은 커졌고 이때를 틈타 회계 장부에 손을 대는 직원도 생겨났다. 

그는 총독부와 군정청을 매한가지라고 생각했다. 일부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여기기도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미군은 해방군이 결코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은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의 정치는 무능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 세태를 비판하며 '그만큼의 질서도 기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복잡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굴러가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던걸까. 시니컬함이 엿보이기도 하다.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그의 운명의 고삐는 자꾸만 엇나가려 하고 있다.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버티고 버티고 했으나 운명의 작희는 끝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를 하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슬픔과 애달픔을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켜버린다. 그는 꿈에도 술에 숨으려 하지 않고 아편에 도망하려 하지 않는다. 하늘님이 영 그를 버리시기 전엔 그는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하리라. ... 낙천주의여. 허허 하고 웃는 그의 웃음 뒤에 만겹 시름이 첩첩이 쌓이고 쌓이었음을 그 누가 알랴. - P146~147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과 조선인의 운명은 가혹하였으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낙천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빗대어 말하였다. 가까운 친구는 그를 안온적이고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며 좌익으로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내심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노선을 끝내 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복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그는 학문에 대한 태도를 구기를 배우는 태도에서 나아가 상업으로까지 연결시킨다. 여기에는 정공법, 속여서 얻기, 정공으로 시작했으나 이익으로 나아가는 세 가지의 모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문제를 풀기 위함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찾아 그 길을 똑바로 지켜나갈 수 있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부는 유한 계급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이자 자기 성장의 유일한 길이기에 나이, 환경 등을 따지는 것은 핑계라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일기에 여러 차례 한글의 우수성과 위대함에 대해 피력한다. 한글만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과학적인 문자가 없다고 말이다. 그는 문화적인 독립을 위해서라도 한문을 전폐하고 한글을 사용해야 함을 계속 일기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다양한 책을 번역했는데 그중 강용흘의 자전소설인 Grass Roof를 '초당'으로 내었다는 이력이 눈에 띄었다. 그뿐 아니라 펄벅의 대지도 그 목록에 있다. 1945년 12월에는 <조선역사>를 쓰고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당시 출판계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12월 초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국으로 입국했다는 신문이 지방에도 보도되었다. 얼마 후 임시정부 요인의 개선 환영식이 있었으나 이와중에도 인민공화국과 한국민주당으로 파가 나뉘어 극도의 혼란한 모습을 보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가 발표되자 이 분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금융조합 지회에 몸담고 있었던 만큼 자문을 하러 오는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았으나 가능하면 이를 회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1946년 1월에는 <조선역사>를 기고 및 탈고하는 데만 매진했다. 이를 통해 향후에는 학문 연구, 기고에만 집중하겠다는 생각을 점차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융조합 연합회에 사의를 표명하는데 이는 갈수록 금융조합이 우익편향이 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한몫을 했다. 물론 그는 공산당의 독단과 사대주의를 경계했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배울 점이 있으나 공산당의 방향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드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과연 개개인이 각자의 일에 매진하는 것과 투쟁을 포함한 사회를 개혁하는 것 중 해방 후의 미래를 위해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과정이었나 하는 생각 말이다. 저자는 앞선 관점을 고집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의문이 남았다. 해방 초기 잠깐은 친일에 부역하던 이들이 몸을 사리고 눈치를 보았지만 이후에는 그러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군정이 들어온 뒤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국가의 모습이 달라 난맥상이 벌어지지 않나. 개인적으로 당시의 상황에서 구조적인 개혁 없는 미래는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책의 전작을 사두고 아직 읽지를 못했는데 개정판이 나오는 바람에 스텝이 꼬였다. 뒷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구판을 먼저 읽을지 아니면 개정판을 읽고 다시 구판을 읽을지 고민을 좀 해보려 한다.


저자의 일기 자체로도 좋지만 정병준 선생님의 해제를 함께 읽으면 배경을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어 도움이 된다. 하권도 하루 빨리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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