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의 결말은 작은 돌덩어리로 남겨졌다. 거기 새겨진 얼굴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의 압축이다. 그 압축을 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잔잔한 응시로 잠시 시선을 주면 된다. 그러면 바람결이 와 속삭인다. 광야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들의 합창은 그렇게 슬며시 찾아왔다. 곡조는 구슬프지 않다. 무미건조하고 감정이 배제된 게 대부분이다. 누굴 울리려는 소리가 아니다. 망자들과 눈을 맞추며 깨달은 내 해석이 맞다면 그들은 기억되고 싶을 뿐이다. - P15
1937년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다. 이미 고향을 한 번 떠나온 사람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착해온 삶의 뿌리가 또 다시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이는 설움이자 애환이 되었을 것이다. 사진가인 작가는 전작인 두 권의 작업에서 세계 곳곳에 흩어진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헤맸고 현재 존재하는 형태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냈다. 전작들을 이미 읽은 바 있었기에 신작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반가웠다.
이번 주제가 담긴 장소는 중앙아시아다. 공교롭게도 불과 이틀 전 신문에서 중앙아시아(타지키스탄)로 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과거의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당시 37세, 자신과 같은 나이였다고 한다. 광복 81주년을 맞아 무어라도 읽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읽고 싶은 신간이 나와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현장을 채우고 있는 건 지독한 외로움의 냄새'라는 문장이 시선을 끌었다. 때때로 카메라의 렌즈에 담긴 피사체는 말을 건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진가의 사진이 정말 그랬다. 그 결과물이 결코 쉽게 얻어질 리 없다. 휴대폰 카메라로 얼마든지 일상의 순간을 '찰칵!'하고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피사체에 온전히 공을 들여 사진을 찍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촬영 일정이 길면 좋겠으나 부족한 자금, 한정된 시간이기에 최선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분투할 수밖에 없었을 작가의 고충이 느껴졌다. 작가가 전해주는 이야기도 좋았다.
그렇다면 1937년 한인들은 어떻게 하여 중앙아시아로 가게 되었나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중반 소련에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정책의 기조는 민족 자결주의에서 소비에트 애국주의로 바뀌며 한인 포함 외국인에 대한 경계, 탄압으로 변화한다. 게다가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견제할 필요가 있던 소련은 중국의 국민당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내부 단속 강화를 위해 대숙청을 시작한다. 이로 인해 일본 첩자, 반혁명 분자라는 오명을 떠안고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한인 강제 이주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한인들은 영문도 모른채 부랴부랴 짐을 싸야 했다. 짐도 30kg로 제한되어 있어 현재 가진 살림 살이를 모두 포기한채 말이다. 전체 한인 중 55%는 카자흐스탄, 45%는 우즈베키스탄으로 3차에 걸쳐 강제 이주가 진행되었다(소규모지만 부근의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도 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소련 정부는 한인 가구당 370루블, 1인당 150루블을 주고 가옥과 토지를 담보로 수령증을 발급한 이후 수령증을 기반으로 토지, 가옥의 무상 지급을 약속했으나 지켜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한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한 뒤 첫 도착지였던 곳이다. 몇날 며칠을 열악한 기차를 타고 지나온 끝에 그들이 닿은 곳이었다. 바슈토베 언덕은 초기 경작지였다. 한인들은 연해주에서 이미 땅을 옥토로 바꾼 경험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랬다. 이곳 땅은 주변 호수의 영향으로 염분기가 많아 그것을 제거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고. 안타깝게도 현재 바슈토베 언덕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불과 6년 전에 작가가 찾아왔을 때만 해도 그러진 않았다. 2019년 기념광장 포장, 울타리배수로 설치, 고려인 추모비 건립, 2021년 한-카 우호기념비 건립, 조형물 설치, 나무 식재, 2022년 8월 고려인 항일 독립운동가 추모벽이 만들어졌다. 추모비에 기념한 재단 문구 등이 새겨지고 흙을 쌓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등 의도적으로 연출되면서 기존의 모습이 사라졌다. 작가의 안타까움과 한숨이 내게도 전해졌다. 다른 건 그렇다치고 이곳에 독립운동가 시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추모비와 추모벽이 만들어지는 건 장소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홍범도가 수위로 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미 유명해진 고려 극장의 전신 역사가 흥미로웠다. 최초 1932년 원동 변강 조선극장이 출범할 때만 해도 이동 극장의 형태였다. 해삼시 고려극단으로 개명한 뒤 고려음악드라마극장이 되었다가 지금의 고려극장이 되었다. 강제 이주 때문에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극장을 이동해야 했다. 1968년 알마티로 이전해 국립극장으로 승격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태장춘은 극작가이자 배우로 홍범도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 사람이면서 그에게 고려 극장 수위 일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연극 '의병들'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것은 홍범도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미화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물과 사건을 표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태장춘이기에 작가는 그의 무덤을 찾아내고자 애를 썼고 2024년 마침내 찾아냈다고. 덕분에 나도 이제 태장춘 세 글자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헬렌 선교사님도 그렇다. 그녀는 한인 강제 이주 역사 복원 알리기에 헌신하고 계시는 분이다. 우슈토베 임마뉴엘 교회 선교사님으로 고려인 역사 단지를 조성하고 고려인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에 앞장서셨다. 그런데 고려인 기념관을 본 작가가 기존 전시 자료에 오류가 많고 내부 건물도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음을 발견하고 재건립을 건의하여 2025년 재탄생했다고 한다. 그 앞에 태장춘 묘지 비석도 제작되었다니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 이주 1세대인 지순옥 할머니를 작가가 배웅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사진을 찍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고. 책에 실리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연이기에 참 값지다는 생각을 한다.
의병장 민긍호의 후손들 이야기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직계후손인 민 알렉산드리아는 코로나 때 사망했고 고손자인 데니스 텐은 괴한의 칼에 찔려 2024년 사망했다고 한다. 아니 이 무슨 당황스럽고 처참한 상황인지.
인민배우 김진은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맡은 최초의 배우라고 한다. 손녀인 한다나는 알마티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 김진의 무덤 형태가 너무나 특별했다. 사각형 돌 무덤인데 춘향전의 한 소절인 '내가 간들 아주가며 아주간들 잊을소냐' 글자들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돌마다 새겨 넣은 것이다. 대체 무덤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본인의 유언일까. 그렇다면 이몽룡 역을 맡았던 만큼 죽어서도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서 그리 한 것일까.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무덤의 형태였다.
최봉설은 철혈광복단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인공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 부인인 김신희 여사(역시 독립운동가)와 함께 쉼켄트에 묻혀 있다. 따님인 최 알렉산드라 여사로부터 15만원 사건 현장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15만원 사건의 주인공들은 최봉설 이외에는 다 붙잡혔다. 그는 경관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오른쪽 등뒤 날갯죽지에 총탄을 맞았다. 최계립이란 가명을 짓고 74세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김준은 철혈광복단 15만원 사건을 소설화하여 펴낸 작가다. 그는 언론인으로 일하며 작가로도 활동했다. <십오만원 사건>은 소비에트 문학에서 처음 조선말로 쓰인 조선작가의 작품이었다 한다.
계봉우는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최봉설과도 지인이었다. 소련 수교 이후에나 그의 독립운동 이력이 알려졌다. 상해, 북간도, 연해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다. 1937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한 이후에는 공개 정치 활동을 삼가고 국어 문법, 국어, 국사 강습, 역사 저술 활동에만 집중했다. 그의 유해는 2010년 서울 현충원에 옮겨 안장됐다.
참고로 크즐오르다는 한인들이 벼농사를 성공시킨 땅이자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던 곳, 강제 이주 초기에 한인 극단, 방송국, 교육 기관, 신문사 등이 있던 곳이다.
한편 한인들은 벼농사에 매진했다. 관련해서 여러 인물들을 책에 거론하고 있다. 최창학은 제3인터내셔널 콜호스(집단농장)을 운영했다(현재 그가 쓴 사무실과 무덤 등을 가볼 수 있다). 김만삼은 1942년 벼농사꾼의 어버이이자 전설로 기록적인 수확량을 올렸던 인물이어서 이곳에 도착한 한인들이 그의 영농법을 너도 나도 배우려고 했다 한다. 그는 추후 레닌 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벼농사에는 그늘도 존재한다. 벼농사를 위해 만들어진 관개수로 때문에 아랄해는 기존의 1/10 크기로 축소되었고 기후 변화까지 생겼다 한다.
카를락 박물관과 스파스크 국제 추모단지는 강제 노동으로 끌려온 많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이 그곳에 가장 먼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김경천은 바로 이곳 카를락 강제 노동수용소의 수용자로 지냈다. 그는 카를락에 있다가 나중에 코미 자치 공화국, 이후에는 코틀리스 북부철도 수용소(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배경이 된 곳)에 있다 1942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안타깝게도 아직 발굴되지 못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최재형과 허위 가문으로 기억될 수 있는 곳이다.
최재형의 둘째부인이었던 최 엘레나 무덤이 2017년 비슈케크 세베르니 공동묘지에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최재형의 가짜 후손 행세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러시아 해체 후 진짜 후손이 따로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싶다. 그리고 2023년 최재형의 묘는 현충원에 조성되었다. 현재 카라콜에는 최재형의 손녀와 딸이 살고 있다. 최재형이 죽고 나자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들이 소련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역사가 낳은 비극이 아닌가 싶다.
허위 가문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허위의 손녀인 허 로자는 살아생전 독립운동가 후손을 지원해 달라며 대한민국 대사관 문을 여러 번 두드렸으나 매번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다 2006년 당시 한명숙 총리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팔십 평생 만에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한다. 2007년에는 귀화 신청을 했으나 서류에 아버지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는 이유로 법무부에서 거부하여 45일 간 여관방 생활을 하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다(대한민국 국적은 2011년에야 주어졌다). 2021년 서울에서 별세했을 때 빈소와 장례 비용도 없었는데 한 국회의원과 기업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현재 비슈케크 외곽에는 허위의 넷째 아들인 허국의 가족묘가 자리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한인들의 눈물이 어린 땅이다. 더불어 우즈베키스탄에도 5.18 광주 사건과 비슷한 안디잔 학살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 더 친숙해졌다.
이인섭은 '망명자의 수기'라는 자서전을 통해 한인들의 강제 이주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강제 이주 당시 한인은 16000여 가구, 인원은 760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련된 주택은 250채가 다였기 때문에 열악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곳에 살지 못하고 여러 곳의 콜호스로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주로 목화만 생산되던 곳에 벼를 비롯한 채소 등을 심으며 농사가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북극성 콜호스에는 김병화가 있었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모범적 삶을 실천하며 그곳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 지도자여서 1948년, 1951년 두 차례 노동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북극성 콜호스는 나중에 김병화 콜호스가 되었고 현재는 그의 업적을 기린 김병화 박물관이 남아 있다. 어둠을 밝히는 북극성처럼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힘과 의지가 되는 지도자가 아니었나 싶다.
한인들은 이주 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이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인 전통 문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한인 문화에 러시아 문화가 침투하면서 전통 문화가 점차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그래도 당근채, 양배추 김치, 국시는 오늘날에도 그곳에서 볼 수 있는 한인 전통 음식 문화이다.
책의 사연 중 가장 놀라웠던 이야기는 작가가 한 탈북자를 만났는데 그 아내(남 타티아나)가 최재형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다(너무 놀라워서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앞서 최재형의 후손들이 소련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했는데 손녀와 며느리의 무덤이 타슈켄트에 있었다. 아는 분들의 도움으로 찾아간 무덤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가는 길이 가시밭길일 수는 있으나 무덤 상태를 보니 정말이지 한숨만 나왔다. 그곳을 지나가기도 어렵겠지만 지나친다 해도 결코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던 광경이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인물로 작가는 천도교 독립운동가인 강연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사연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2024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무덤을 발견했다며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발표한다. 그런데 막상 작가가 가보았더니 엉망진창 상태였다. 작가처럼 나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말을 말지 대체 왜?'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타슈켄트에서 우리 역사를 흑백 필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안 빅토르도 기억에 남는다. 작가는 그의 사진에 대한 태도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이 기록을 멈추면 그마저도 기록이 사라진다 생각했다는 안 빅토르,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이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 작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 책은 이야기와 사진 뿐 아니라 방문한 곳의 GPS 좌표를 제공한다. 구글맵에서 해당 좌표를 입력하면 쉽게 저장할 수 있다. 나도 몇몇 군데는 저장해놓았는데 언젠가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를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유불리로 바라보면 어떤 이익도 취할 게 없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서사일 뿐이고 거기에 자본과 시간을 투자하는 건 소모적 지출이 될 뿐이다. 하지만 역사는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고, 유대를 형성하는 에너지원이다. 그 힘은 현재 판단을 도와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된다. 희망은 "너무 비싸도 사야지"란 의지에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함께라면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위정자에게 희망을 걸기보다 이 책을 나누는 독자들이 미래다. -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