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나의 집
금희 지음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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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회색지대들, 그 지대마다 완전히 그 지대에 속하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완전수 사이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무수한 소수들처럼. (P.21)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제목에서 늬앙스를 짐작할 수 있듯 집을 구하는 이야기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가 전세사기, 결국 부동산의 문제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결코 남일 같지 않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소재였다.
강사들의 처우 문제도 나온다. 이것도 우리의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은 문제다. 강사들은 불평등한 대우를 당하지만 행여 잘릴까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어 자기 발언이 쉽지 않다.
또 마라탕에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예전에 상해에 갔을 때 마라탕(백탕, 홍탕 나눠서)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마라 하면 충칭이라고 하는데 충칭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 충칭에서는 맵기 강도가 보통이라도 무척 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넌, 니 집이 있잖아.
아줌마가 쟁반에 우리의 마라탕을 내왔다. 사천 촉국의 독특하고 자극적인 향신료 냄새가 나와 닝 사이에서 만연히 부유했다. 닝은 나무젓가락을 들고 딱! 소리 나게 갈라뜨리고는 자기 국그릇 붉은 국물 속에 잠복해 있는 당면 사리와 야채들을 노려보았다.
-너도 이제 생겼잖아, 니 집.
나는 나의 붉은 국물을 들여다보았다. 닝의 것 같은 투명한 당면 대신 나는 언제나 쫄깃한 밀냉면 사리를 주문하곤 했다.
-내 집이랑 니 집이 같니? 니 건, 완-전 니 거잖어.
(P.12)

<봉인된 노래>는 사회에 부적응한 사람이 등장한다. 외국 연수도 못하게 되고 좋은 혼처 자리를 찾는 것도 실패했고 들어가는 회사마다 적응하지 못한 채 사직을 하고 나오는 사람. 그러다 결국 도박에 빠져 집안에 그늘을 지게 하는 사람이다.
집안 분위기를 보면 마치 옛날 TV드라마 아들과 딸처럼 아들에게는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이 있고 딸은 순종적이고 모범적이고 절대적 선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그런 환경이 보인다. 그래서 답답함이 밀려오기는 했는데 다른 배경이 있다면 그가 모택동이 죽었을 때 태어났다는 것, 그래서 이름도 李念 이라는 것이다.

강하고 오래된 독선의 남용과 습관적이며 자발적인 무정체성의 순종, 그것은 어린 내가 본능적으로 깨달은 어떤 아이러니, 말하자면 일종의 부조리였다. (P.48)

<월광무>와 <돌도끼>는 중국의 성장 과정을 느끼게 한다. 계획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의 이행. 도시도, 농촌도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농촌의 빈 집은 늘어가고 도시로 하나 둘 떠난다. 남은 사람들의 갈증은 커져간다.
한국의 70, 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만한 것들이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파트가 하나 둘 생기고 이웃 간의 유대는 끊어졌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캐치 프레이즈는 각자 도생으로 가게 했고 개인주의를 횡행하게 만들었다.

개발업자의 포클레인이 으르릉거리며 동네의 집과 창고들을 허물 때 끝까지 남아 동네를 지킨 사람은 마씨네 형제들이었다. 사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부터, 그러니까 시장이 자유로워지며 국경 또한 느슨해질 때부터 동네 사람들의 새로운 이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오던 당시처럼 또다시 더 살기 좋다는 곳으로 떠나가는 것이었다. 청도, 북경, 천진, 상해 그리고 한국, 일본 혹은 캐나다나 미국으로. (P.118)

나는 그 매끌매끌하게 갈린 차가운 돌도끼를 손안에 넣고 감싸 쥐어보았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겪었을 당시 사람들의 절박함과 함께 예상외의 부드러운 촉감도 전해졌다. 문뜩, 그 사람들의 피곤 속에 사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것들이 더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사람들은 우리가 누리지 못한 다른 풍성한 것들로 인해, 우리가 추측하는 험한 상황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과자 없이 즐겁던 내 어린 시절과, '법' 없이 모이던 우리 동네의 시초를 생각하면 말이다.

<쓰레기 통의 쥐>는 '계급'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어떤 배경의 환경에서 태어난다. 그 때부터 가도는 달라진다. 학교를 갈 나이가 되면 학교 안에서도 차별이 행해진다. 부모는 행여나 학교에서 전화가 올 까봐 불안해한다(대부분 좋은 것으로 전화 올리가 없으니까). 사람을 가려 가면서 대하는 태도는 좌절감을 안긴다. 문명화(!)된 도시에서 쓰레기통은 더럽고 냄새나는 취급을 받는 것처럼 마치 내가 그런 취급을 받는 듯한 상황.

악취가 심하게 나는 쓰레기통은 깔끔하고 문명스러운 도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더럽다. 뚜껑이 부서져 온갖 쓰레기가 배를 갈려 드러난 짐승의 내장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상한 것은, 다 부서져 간들간들 겨우 한조각 붙어 있는 그 뚜껑 위에 자그마한 쥐 한마리가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었다. 발레라도 추듯이 뒷발 하나를 추켜든 채 장난감처럼 꼼짝 않고 있었지만, 뱃가죽이 불었다 줄었다 하며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진짜 살아 있는 쥐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류장을 지나쳐가고 쓰레기통 곁을 지나가면서도 아무도 그 이상한 쥐는 보지 않았다. (P.172)

<노마드>는 표제작을 제외하고서는 다음으로 인상적인 단편이었다. 지금 창춘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나 할까. 주인공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또 다시 중국으로 온 사람이다. 고향을 떠나서 한 몫 잡겠다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는 조선족이라는 편견에 시달렸고 4년만에 고향에 오니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에 혼란스러워한다. 친구들 중에서는 고깃배를 타고 나갔다 온 사람도 있고 일본 등지로 떠난 이도 있다.
이 글을 읽으며 한국에서 일하는 많은 조선족 사람들의 대우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나부터 그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것인지 사실은 정리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노마드'라는 단어처럼 정착하고 싶어도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들이다.

그 텁텁하고 씁쓰레한 것 같으면서도 약간 누린 것 같기도 한 중국 냄새, 정확히 어떤 냄새였는지 기억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 박철이는 어둑한 저녁녘에 우리를 찾아 들어가는 닭이나 양처럼 지금 그 냄새가 그리워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거무튀튀해서 밝지는 않지만 부담이 가지 않는 중국 사람들의 색깔, 언어도 다르고 교양 있는 말투도 아니지만 약간 부잡스럽고 무식한 듯하면서도 아직 순진함이 남아 있는 표정과 억양이 박철이 자신과 닮아 있어서 중국 사람들은 대하기가 한결 편했다. (P.203)
그의 온몸 각 기관들은 무의식중에 이미 전국민 모두 '절대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에 깊숙이 물들었는바, 머리는 죽은 것 같은데 입이 살아 있어서, 입을 겨우 죽였는데 눈이 살아 있어서, 눈까지 죽였다고 방심하고 있을 때는 주제넘게 손가락이 불쑥 살아날 때도 있어 박철이는 봉급도 챙기지 못하고 자주 잘려나가곤 했다. (P.204)

어느 누구의 용기가 가상하지 않았으랴! 수미와 자신은 생계를 위하여, 이 여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선아는 생존을 위하여 떠나가고 또 떠나오는 것이다.
"허, 참 사람 사는 거 보면... 그러네요. 우리는 좀더 잘살아보자고 그쪽 나라로 떠나가고, 그쪽은 더 잘살아보자고 이쪽 나라로 떠나오고..."
"그래요. 그렇게 따지고 보니까 결국 우리는 다 같은 노마드일 뿐이네요." (P.259)


작가님의 나이를 보니 나와 비슷해서 마음이 갔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읽은 책에 나오는 조선족, 탈북민 이야기들을 읽어서인지 이입이 쉬웠던 것 같다. 게다가 주제들이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우리와 가까운 주제들이기 때문에 읽는데 거부감이 드는 것도 거의 없다. 

중국어 문장들을 보며 따라하고 있는 나를 볼 때 미소가 지어졌다. "덩-후이루(잠깐만요)!" 또, 창춘의 계림로라는 곳이 있다는데 한국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곳에 가보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무심한 듯, 슬며시 마음을 파고드는 그런 따뜻함을 안기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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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07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문학같은 중국문학이군요. 신기해서 책 소개를 찾아봤습니다 ㅋ 중국이나 우리나 사람 사는건 별반 차이가 없는거 같아요~!!
역시 중국어 천재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3-05-08 09:2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소개글 찾아보셨군요^^ 사실 의도한 바도 있었어요ㅎㅎㅎ 사람 사는 것은 똑같은데도 이주자, 이민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새파랑님 감사해요^^*

희선 2023-05-08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름 보고 김금희 작가 생각하기도 했는데, 진짜 이름은 김금희였군요 김금희 작가가 있어서 금희라 했나 하는 생각을...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으로 한국 사람은 다른 나라고 가기도 하겠네요 지금은 예전보다 적을지, 아니 여전할지도 모르겠네요 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을 듯합니다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할지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3-05-08 09:25   좋아요 1 | URL
저 김금희 작가님 좋아해요. 아마 김연수 작가님 말고 유일하게 제가 관심을 갖는 분일겁니다. 다만 작품은 많이 못 읽어봤어요ㅠㅠ
조선족 하면 갖는 편견들이 많잖아요.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많은 분들이 건너오는데 차별에 고통받다가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많은 듯합니다. 우리 안의 편견을 줄이는 작업이 필요할것 같아요. 희선님 감사합니다.
 

제3부 고군분투

충칭과 마찬가지로 옌안은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이상이 되었고 두 도시는 점령지구와 대비되었다. 충칭은 정부와 사회의 새로운합의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새로운 중국에서 정부는 국가적인 파멸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대중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할 수 있으며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에 헌신하는 만큼 보상받기를 기대했다. 옌안의 합의 또한 본질적으로 충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중심에는 개혁보다 혁명이 한층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917 년의 러시아 혁명 역시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어났다. 하지만 마오의 공산당이 추구한 방식은 하향식이었던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과는 전혀 달랐다. 마오는 항일 통일전선에 힘을 결집시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계급투쟁은 적어도 당분간 두 번째라고 강조했다. 그대신 공산당은 진정한 대중 동원의 기법을 발전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 모든 사람이 전시 중국에서 날로 커지는 공산당의 세력을 유쾌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장제스는 그들의 속셈을 깊이 불신했다. 그의 협력자이자 경쟁자였던 왕징웨이도 마찬가지였다. - P235

193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우포하이는 국민정부 선전부의 부부장(우리의 차관에 해당 옮긴이)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몇 주, 몇 달 동안 저우포하이는 (승리에 대한) 회의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소위 "저조구락부低調俱樂部"라고일컫는 정치인,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이들은 일본과의 평화 협상 가능성을조심스레 열어두기를 원하는 집단이었다. 이 그룹에는 전직 교수로 왕징웨이의 친구이자 지금은 정부의 몇몇 중요한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타오시성도 있었다. 저우포하이가 왕징웨이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저조구락부"를 통해서였다. 평화 협상을 향한 행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은 외교부 아시아 국장 가오쭝우였다. 나이는 젊었지만(전쟁 발발 당시 겨우 서른 살이었다) 가오쭝우는 난징에서의 10년 동안 고도의 파벌 정치 속에서 노련한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었다. 또한 일본 규슈제국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가 쓴 중일 관계에 관한 저술은 왕징웨이와 외교부의 관심을 끌었다.
1935년에 왕징웨이가 잠시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가오쭝우는 여전히 자신의 지위를 지켰다. - P244

1939년 마지막 몇주 동안 협상을 통해 일본의 이중성을 절감했던 가오쭝우와 타오시성 두 사람은 일본과의 협력이 진정한 동반자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착취당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두 변절자는 폭력배 두목이었던 두웨성("큰귀 두"라고 불리는)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를 탈출했다. 그리고 충칭에 다시 나타나 국민정부의 기념비적인 선전공작에 기여했다. 이들은 일본의 요구사항이 얼마나가혹한지 만천하에 폭로했다. 또한 왕징웨이를 향해서는 협상을 중단할 것과 "말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게 막아 달라"라고 호소했다. 그 뒤가오쭝우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허락받았다. 타오시성은 다시 장제스의 측근중 한 사람으로 복귀하여 그의 가장 뛰어난 선전 나팔수가 되었다(두 사람 모두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 - P263

장제스는 일본군과 공산당 양쪽 모두를 동시에 상대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산군을 억지로 창장강 이북으로 쫓아내려는계획을 포기했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다시는 그러한 시도는 없었다. 반면, 홍군은 더 이상 장제스를 신경쓸 필요 없이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샹잉이 퇴각에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마오의 우유부단함도 일부 책임이있었다. 따라서 마오는 충돌이 빚어진 책임을 확실히 짊어졌어야 마땅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싸움의 승자는 공산당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마오였다. 샹잉은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마오의 경쟁자였다. 이제 그의 패배와 죽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옌안의 마오에게 더욱속박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앙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과마오쩌둥의 행운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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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상과 재구성

제3장 동양 체류와 동양에 관한 학문 : 어휘서술과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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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장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거대한 투쟁에서 중국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미국, 소련, 영국이 전쟁의 주역을 차지한 것에 비해 중국은 고작 이류 선수나 단역 배우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은 1937년 추축국의 맹공격에 직면한 첫 번째 국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2년 뒤, 미국은 4년이 지난 뒤에야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의 목표 중하나는 "중국으로 하여금 그 전쟁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수많은일본군을 중국 본토에 묶어놓음으로써 중국은 전반적인 동맹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은 다른 동맹국들에 비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었다. 이 전쟁은 그러나 중국이 제국 식민주의 피해자에서 벗어나지만, 폭넓은 지역적 ·세계적 책임을 지닌 잠정적인 패권 국가로 도약하게 될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 P12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뒤 이 유약한 시대에 장제스가 태어났다. 장제스의생애는 측근들에게조차 수많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는 완고하고, 사람들을 잘 다루는 냉정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반제국주의 혁명에 헌신했던경전을 숙독한 유학자였으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확고한 신념을 지녔다.
장제스는 젊은 시절부터 중국이 다시 통일되어야 하고, 중국에서 제국주의세력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군사적·정치적 삶을 바쳤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전술은 종종 자신을 복잡한 기만술로 이끌었다. 장제스는 동료 경쟁자들을 속이는 데 달인이었다. 1930년대에 한 영국 기자는 "장제스는 친구들을 가까이했다. 하지만 자신의 적은더 가까이했다"고 언급했다. - P33

마오쩌둥은 일생 동안 보수적인 부농 아버지와 극심한 불화를 겪었다. 이른 시기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충돌은 결국 마오쩌둥이 집을 나가서 정치 신문사일을 시작하도록 했다. 또한 수호전』 『삼국지연의』같은 전통적인 중국 고전은 마오쩌둥에게 영웅들에 대한 낭만적인 사고를 형성케 했다. 마오쩌둥은 항상 강대국의 꿈을 갖고 있었지만, 장제스와 달리 철저한 ‘천지개벽‘을 원했다. - P49

중국 외교관들은 국제연맹에 끊임없이 분노에 찬 제소를 했다. 1931년9월 23일 장제스는 "만약 국제연맹이 정의를 수호하지 않는다면, 국민정부는 이미 자위전쟁을 준비할 최후의 결심을 세웠다. (…) 필요하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전선으로 가서 애국 전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것이다" 라고 공표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적어도, 당장은 이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전 일본 제국군은 물론, 관동군에 맞설 역량도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P68

왕징웨이는 대부분의 중국 민족주의자처럼 모든 외세 제국주의를 적대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중국 영토에 식민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이나 미국과의 동맹이 일본과 손을 잡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최소한 일본은 중국과 문화적인 유대감은 있었다.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지해야 하는(어쨌든 정부 방침이었다) 불행한 위치에 있었고 대중이 보기에 그는 비할 바 없는 친일파였다. 이로 인해 미움 받는 대상이 되었다. - P74

장제스 납치 사건은 중국의 모든 시선을 집중시켰다. 장쉐량이 국공간의담판이 사실상 합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장제스를 납치하지않았을 것이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 사이에서 진행된 비밀 협상과 때때로 모순적이었던 전략 노선의희생양이었다. 결국 저우언라이가 장제스의 석방 협상을 타결시켰다. 장제스는 각 당파의 항일통일전선을 이끌겠다고 약속했다. 대중에게는 마치 장제스가 항일 동맹을 강요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합의 조건들은 장제스 납치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 이뤄진 비밀 합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 P81

7월 7일 저녁, 일본 군대가 완핑 주변에서 총격을 가했다. 이 자체는 그리놀랄 일은 아니었다. 중국 북부에서 외국 열강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군사훈련을 할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도가 지나쳤다. 현지 일본군 지휘관은 자신의 병사 중 한 명이 실종되었다면서 완핑에 들어가 수색하겠다고 통보했다. 혐의는 명확했다. 중국인이 그를 납치했거나 죽였다는 것이다. 몇 년 동안 일본인들은 중국군에게 여러 요구를 해왔고, 대개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쑹저위안의 군대가 거부하자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사소한 충돌은 곧 끝날 것으로 보였다. 이전에도 이러한 충돌은 중국인들이 약간 양보하면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저 멀리 중국 중부 지역에 있었던 장제스는 다른 반응을 보여줄때라고 결심했다. - P87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자신의 군사적 경쟁자들을 시험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애국자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정말로 국가를 지키는 데 군대를 내놓을 것인가? 상당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광둥 군벌 쉐웨와 쓰촨군벌 류샹은 가장 적극적으로 군대를 보냈다. 그 군대는 후쭝난, 천청 등 장제스에게 직접 충성하는 중앙군 지휘관들의 휘하에 편입되었다. 이전에는자신들의 영토 밖으로 군대를 보내는 데 주저했던 군벌들은 설령 산발적이라고 해도 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전투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중국 남부와 중부에서 몰려든 20만 명이 넘는 중국군 병사들이 상하이에서 싸웠다. 좀더 평화로웠던 시기에 그토록 장제스가 움켜쥘 수 없었던 통일의 과정이오히려 전쟁을 통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한 장제스는 상하이 전투를 통해 외세 열강의 원조를 받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소련과의 동맹 덕분이었다. 시안사변에서 장제스를 구했던 소련은 이번에는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을 지키는 데 큰 흥미를 보였다. 이제 상하이는 다른 국가들에게 일본이 세계 평화를 실제로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8월 1일, 주중 소련 대사 드미트리 보고몰로프는 국민정부와 상호 불가침 조약에 합의했다. 실제로는 ‘불가침‘에 담긴 의미를 넘어서 훨씬 더 적극적인 원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 P118

그 시절 중국을 떠도는 사람들이 죄다 그토록 무력했던 것은 아니다. 그속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확실하게 찾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1935년 반일적인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던 언론인 중위안重遠)이었다. 1936년에 석방된 두중위안은 그의 기개를 높이 산 국민당에게 채용되었다. 전쟁의 발발은 두중위안에게 항일전쟁을 보도하는 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 P131

11월에서 12월로 넘어갈 때쯤, 장제스는 난징 함락을 필연적으로 만들지않으려고 최후의 시도에 나섰다. 그는 스탈린에게 전문을 띄워 군대를 보내중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지상전을 벌일 생각이 전혀없었던 스탈린은 거절했다. 장제스는 소련 및 그와 연루된 중국공산당에 대한 불신감이 한층 커졌다. 12월 6일 왕징웨이는 주중 독일 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면담하고 평화 회담에 대한 중재를 바랐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날 장제스는 자신의 승산을 계산해보았다. 일본군의 무기는 월등했고 중국군은 약했다. 게다가 도시의 사기는 이미 무너졌다. - P152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려진 많은 기록이 외국인들의 보고서에서 나왔다는 것은 난징 대학살의 특징 중 하나다. 그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장제스는 난징을 최후까지 지킬 것이라고 장담했고 중국 언론들은 도시 내의공황 상태와 사회 붕괴를 함부로 보도할 수 없었다. 12월 13일 도시가 함락되자 중국 언론도 사라졌다. 일본인 기자들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폭로할 기회가 없었다. 난징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외국인 기자들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당이 철수한 뒤 난징은 무시당한 존재가 되었다. 그곳에는 중국 정부의 관리들이 없었고 복지와 구호를 맡을 수 있는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 기관은 그림자 속에서 급조된 자치 조직으로 대체되어 지역 자선 단체들과 함께 활동했다. 범죄를 상세하게조사할 수 있는 시스템 또한 없었다. 오직 국제안전위원회의 멤버들만이 그역할을 할 수 있었다. - P169

제방 파괴의 지지자들은 그 덕분에 중국 중부와 우한에 있는 장제스의총사령부를 이후 5개월 동안 지킬 수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룽하이 철도를 따라서 우한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당했다. 홍수는 단기적으로는 국민당이 바라는 대로 되었다. 그러나 잠시 숨 돌릴 시간을 벌어주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중국군은 강력한 리더십과 조속한 개혁이 절실했다. 일부 역사학자는 장제스의 결정은 어차피 닥칠 일을잠시 늦추었을 뿐,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했다고 평가 절하한다. 화이트의 말이 옳았다. 어떠한 전략적 이익도 50만 명에 달하는 자국민의 희생을 대가로 지불할 수는 없었다. - P197

일본군이 우한만 점령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서 신속히 내륙 깊숙이 밀고들어갈지 모른다는 장제스의 속단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후난성의 성도 창사가 취약하다고 판단한 그는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않도록 도시를 초토화시켜야 한다는 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고 암시를 주었다. 현지 병사들이 불을 질렀고 도시는 이틀에 걸쳐 불바다가 되었다. 정작 일본군은 창사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80킬로미터 떨어진 둥팅호洞庭에서 멈췄다. 장제스는 참사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다. 하지만 실제로 부하들이 (그중 일부는 처형당했다)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가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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