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고군분투

충칭과 마찬가지로 옌안은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이상이 되었고 두 도시는 점령지구와 대비되었다. 충칭은 정부와 사회의 새로운합의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새로운 중국에서 정부는 국가적인 파멸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대중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할 수 있으며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에 헌신하는 만큼 보상받기를 기대했다. 옌안의 합의 또한 본질적으로 충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중심에는 개혁보다 혁명이 한층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917 년의 러시아 혁명 역시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어났다. 하지만 마오의 공산당이 추구한 방식은 하향식이었던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과는 전혀 달랐다. 마오는 항일 통일전선에 힘을 결집시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계급투쟁은 적어도 당분간 두 번째라고 강조했다. 그대신 공산당은 진정한 대중 동원의 기법을 발전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 모든 사람이 전시 중국에서 날로 커지는 공산당의 세력을 유쾌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장제스는 그들의 속셈을 깊이 불신했다. 그의 협력자이자 경쟁자였던 왕징웨이도 마찬가지였다. - P235

193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우포하이는 국민정부 선전부의 부부장(우리의 차관에 해당 옮긴이)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몇 주, 몇 달 동안 저우포하이는 (승리에 대한) 회의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소위 "저조구락부低調俱樂部"라고일컫는 정치인,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이들은 일본과의 평화 협상 가능성을조심스레 열어두기를 원하는 집단이었다. 이 그룹에는 전직 교수로 왕징웨이의 친구이자 지금은 정부의 몇몇 중요한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타오시성도 있었다. 저우포하이가 왕징웨이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저조구락부"를 통해서였다. 평화 협상을 향한 행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은 외교부 아시아 국장 가오쭝우였다. 나이는 젊었지만(전쟁 발발 당시 겨우 서른 살이었다) 가오쭝우는 난징에서의 10년 동안 고도의 파벌 정치 속에서 노련한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었다. 또한 일본 규슈제국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가 쓴 중일 관계에 관한 저술은 왕징웨이와 외교부의 관심을 끌었다.
1935년에 왕징웨이가 잠시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가오쭝우는 여전히 자신의 지위를 지켰다. - P244

1939년 마지막 몇주 동안 협상을 통해 일본의 이중성을 절감했던 가오쭝우와 타오시성 두 사람은 일본과의 협력이 진정한 동반자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착취당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두 변절자는 폭력배 두목이었던 두웨성("큰귀 두"라고 불리는)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를 탈출했다. 그리고 충칭에 다시 나타나 국민정부의 기념비적인 선전공작에 기여했다. 이들은 일본의 요구사항이 얼마나가혹한지 만천하에 폭로했다. 또한 왕징웨이를 향해서는 협상을 중단할 것과 "말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게 막아 달라"라고 호소했다. 그 뒤가오쭝우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허락받았다. 타오시성은 다시 장제스의 측근중 한 사람으로 복귀하여 그의 가장 뛰어난 선전 나팔수가 되었다(두 사람 모두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 - P263

장제스는 일본군과 공산당 양쪽 모두를 동시에 상대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산군을 억지로 창장강 이북으로 쫓아내려는계획을 포기했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다시는 그러한 시도는 없었다. 반면, 홍군은 더 이상 장제스를 신경쓸 필요 없이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샹잉이 퇴각에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마오의 우유부단함도 일부 책임이있었다. 따라서 마오는 충돌이 빚어진 책임을 확실히 짊어졌어야 마땅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싸움의 승자는 공산당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마오였다. 샹잉은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마오의 경쟁자였다. 이제 그의 패배와 죽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옌안의 마오에게 더욱속박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앙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과마오쩌둥의 행운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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