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관: 고려와 조선 초기에 있었던 지방제도의 한 형태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대읍 혹은 그 곳의 수령을 지칭.

몽수: 고려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

최치원: 고려에 적극 동참
최승우: 후백제에 적극 동참
최언위: 최언위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유학자이고 문신 겸 향가 작가이자 한시 시인이며 서예가. 고려 초기 행정 개혁에 도움
최승로: 시무28조의 주인공. 고려 초기 행정 개혁에 도움
최은함: 최승로의 아들. 고려 초기 행정 개혁에 도움

허균은 ‘호민론‘ (豪民論)에서, 호민은 난세에 세상 돌아가는꼴을 엿보고 있다가 기회가 왔다고 판단되면 무리를 모아 변혁을 위해 떨쳐 일어난다고 하였다. 왕건이 바로 우리 역사에나타난 호민의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 P29

왕건은 궁예를 대신하여 연이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특히 세력 확충의 요지이자 교두보였던 후백제 지역의 나주공략에 여러 차례 나선 일은 그의 세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 P30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주를 자기 세력권으로 만들고 그곳을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왕건은 많은 전공을 올려913년 시중(侍中)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궁예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겼다. - P31

처음왕위에 올랐을 때 왕건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일렀다.
여러 길목의 도둑들이 짐이 즉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혹시틈을 타서 변방의 근심을 만들까 염려하였도다. 그래서 사자를 나누어 보내 예물을 후하게 건네주고 언사를 겸손하게낮추어 호의를 보였다. 과연 귀화하거나 투항하는 자들이많았는데 오직 진훤만이 교빙(交聘)하지 않았다. (『고려사』세가 권1)여기에서 말하는 도둑들은 각기 세력을 이루어 곳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농민봉기 집단일 것이다. 이와 같이 왕건은농민봉기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신경을 쓰는 한편, 일정한 토지를 확보하고 지방 권력을 쥐고 있는 성주(城主)나 장군으로이루어진 호족세력에 특히 주목하였다. 그는 호족을 무마하고 끌어들이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 P36

왕건의 25명의 아들 중 왕이 되었거나 승려가 된 자를 제외하고 11명은 태자로 불리었으며, 나머지 7명은 군(君)으로 불렸다.
태자는 왕위 계승자임을 의미하므로 11명 모두 왕위 계승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호족의 외손들이 왕위 계승자가 될 수있었다는 것은 정략적인 성공을 뜻한다. 일반 왕자들에게 붙여졌던 태자라는 호칭은 965년 왕건의 손자인 경종)가 광종의 유일한 태자로 책봉된 뒤 사라지고, 그뒤부터는 왕위계승권자 한 명에게만 적용되었다. - P43

고려 초기의 토성분정과 본관제도는 우리나라 성씨제도의근본이 되었다. 귀족들은 성과 본관을 하사받아 문벌가로 행세하였으며, 가문을 빛내기 위해 조상을 잘 알 수도 없는 중국의 성씨에 혈통을 끌어내기도 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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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 어떻게 위대한 정복자가 우리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었는가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몽골이 벌인 정복전쟁의 참상은 여러 책과 영화에서 잘 다루어졌으나, 법률 제정가인 칭기스칸의 역할은 대체로 보아 별로 탐구되지 않은 상태다. 생애 만년에 그는 온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을 자신의 야영지로 불러들였다. 이는 서로 반목하는 종교들 사이에 지속적인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는데, 사실 여러 종교 사이의 호전적인 적대감이 인류를 크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영적 정수를 찾기 위해 종교에 귀를 기울였으나 이것이 결국에는 사회 내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탐구과정으로 확대되었다. - P23


잭 웨더포드의 책을 처음 읽었다. 일 때문에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내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였고 책이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주말에 다 읽지 못한 것을 후회할 만큼 재미나게 읽었다. 저자의 글 솜씨인지(아니면 번역자의 공?) 이 책의 글이 재미난 것인지는 판단을 보류해야겠으나(다른 책을 이제 곧 집어들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풀어서 참 재미나게 썼다고 여긴다. 마치 소설 같은 아름다운 묘사로 장면을 상상하며 읽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도서관에 갔다가 읽을 책이 안 보여서 시큰둥하다가 발견한 책 치곤 마치 바다에서 대왕 오징어을 건진 기분이었다. 물론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이거 심상치 않다 싶어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보긴 했지 아니나 다를까 괜찮을 것 같다 여기고 바로 대출을 했다. 


기존에 칭기스 칸을 다룬 책이나 매체들은 몽골의 전쟁사나 개인의 영웅담 같은 이야기에만 주목하여 비슷한 내용들이 많았다. '왜 그런 주제에만 천착하지?' 하는 생각을 했고 다른 내용은 없나 궁금해하던 찰나였다. 그리고 이 책은 몽골이 왜 제국을 그리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 방점을 종교에서 가져온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몽골의 통치자들은 그 넓은 영토를 유지하는데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려야하는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무자비한 탄압만으로 그 넓은 영토와 사람들을 다스리기에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만한 것으로 어쩌면 믿음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칭기스 칸이 여러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며 제국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전쟁사는 핵심만 담고 종교를 통한 사회 통합 과정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칭기스 칸이 처음부터 종교를 적극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몽골인들은 샤먼에 기반한 전통 믿음 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즉각 수용하기에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몽골의 환경은 이런 믿음 체계를 가질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산간의 숲 지대인 캉가이는 풍성한 생명의 어머니였지만, 수목의 생장 한계선 위의 높은 산간 지대는 커다란 암석과 험준한 절벽이 영원한 눈과 얼음을 헤치고 비죽 튀어나와 있는,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땅이었다. 이런 남성적 요소가 대지에 딱딱한 뼈를 제공했다. 여성적 숲과 남성적 암벽은 함께 모든 존재의 기원을 형성했다. 그것들은 남성, 여성, 불멸이라는 3대 영혼으로 구성된 우주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은 두 개의 필멸하는 영혼과 하나의 불멸하는 영혼을 갖게 되었다. 몽골의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뼈에 남성적영혼을 살과 피에 여성적 영혼을, 그리고 마음과 심장에 불멸의 영혼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 P61


칭기스 칸은 처음에는 정주 문명의 종교 기관들을 매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대한 사원, 엄청난 부, 화려한 의식 행렬 등을 자랑하는 대규모 종교들은 가짜에 불과하다고 의심했다. 그렇지만 이 이상한 기관들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은 듣고 싶어 했다. 많은 저술을 남긴 13세기의 학자 겸 연대기 작가 바르 헤브라이우스Bar Hebraeus는 이렇게 썼다. 칭기스칸은 ‘고매한 현자들‘을 소환하여 여러 언어로 된 그들의 성스러운 경전을 읽어달라고 했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종교를 저마다 설명하고 토론하게 했다. 수도자, 신부, 점성술사, 마법사, 예언자, 연금술사, 점쟁이, 현자, 점술가, 허풍선이 들은 몇 달에 걸쳐넓은 강을 건너고 높은 산을 지나 먼 곳의 국경을 통과하여 마침내 그의 유목 캠프에 도착했다. - P40


테무진과 두 아들인 톨루이와 오고데이는 기독교도 아내를 받아들였고 모든 몽골 칸은 기독교 어머니 소생이거나 기독교인 아내를 두었다. 칭기스 칸이 거쳐간 세계는 많은 부족들 중 위구르족은 공식 종교로 마니교를 썼다. 위구르 제국이 붕괴된 후에는 몽골 스텝 부족들 상당수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는데 테무진은 평생 기독교와 중요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카라키타이를 정복함으로써 테무진은 무슬림,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칭기스칸은 새로 해방된 땅의 각 도시와 마을에 전령들을 보내, 자신의 법률을 널리 전파하여 모든 사람이 그 내용을 들어서 알도록 했다. 그는 "각자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그 신조를 따라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그때 이후 그가 추진한 정복에서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신하들을 위해 이 원칙을 지켰다. 기존의 믿음 체계를 파괴하지 않고 각자의 종교를 지키게 했던 원칙을 세운 일은 칭기스 칸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하였다.


어느덧 칭기스 칸의 제국 궁정은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인 회합의 자리가 된다. 종교인은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는 데에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칭기스 칸의 궁정은 마법의 돌을 가진 몽골 샤먼, 도교 연금술사, 독경하는 불교 승려와 점성술가, 기도하는 물라, 노래하는 기독교인, 유교의 궁정 의례 담당관, 티베트의 점술가, 다양한 종류의 독립적인 심령술사와 강신술사, 영혼을 불러온다고 소문이 났거나 마법의 술수를 부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독심술사 등 다양한 영적 위력을 지닌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칭기스칸의 캠프는 유목민의 대학과 같은 특성을 지녔으며, 다양한 언어, 문화, 종교를 지닌 학자들로 이루어진 정신적 동물원의 종합판과 같았다. 그 캠프는 밝은 노란색, 하얀색, 반짝이는 오렌지색, 핏빛 적색, 아주 진한 검은색으로 된 제의祭衣가 넘쳐났다. 하루가 염주, 북, 공, 호루라기, 나무 종 같은 종교적인 소리로 시작하여, 신들린 채 모닥불 옆에서 깃털 장식을 달고 춤을 추는 샤먼, 불태운 양의 어깨뼈에 생긴 금을 읽는 주술사,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점성술사, 지골을 던져서 운수를 알아보는 병사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끝났다. - P243~244


무엇보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구처기와 야율초재에 대한 것이었다. 구처기는 중국 도교 중 하나인 전진교의 추앙 받는 지도자였고 야율초재는 요 왕실의 후예로 스텝 부족인 거란 부족의 일원이었다. 야율초재는 요 왕조가 여진족에 의해 무너졌을 때 칭기스 칸을 모시기로 결정하고 이후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뿌리는 유목 민족이었으나 중국에서 오래 생활을 한 덕분에 중국의 사상(특히 유교)과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구처기는 칭기스 칸의 요청에 따라 몽골 궁중으로 와서 그를 만난다. 그러나 야율초재는 구처기에게 불호에 가까운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화를 시작하며 시를 주고받을 때, 나는 솔직히 어느 정도 그를 인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구면이 되면서 나는 그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했다. 그 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를 비웃었다." 야율초재는 구처기를 가짜라고 생각했다. 반면 구처기를 따라 나섰던 이지상은 스승을 두둔하는 입장의 글을 남겼다.  


칭기스 칸은 마지막으로 탕구트 원정에 나섰다가 사고로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졌고 이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한다. 많은 종교인들과 만나고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려 노력했으나 마지막에는 몽골인으로 죽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몽골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피하여 그 대신에 완곡하게 ‘신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하여 1227년 여름에 칭기스칸은 신이 되었다. 예수이 카툰은 칭기스칸의 시신을 펠트로 감싸는 작업을 감독했으며 친위대는 황제를 고향으로 데려가 매장할 준비를 했다. 칭기스칸은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도교, 그 외의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몽골인으로 죽었다. - P378


칭기스 칸 사후 제국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이어지는 동시에 형제들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어지러운 궁정 상황을 마무리하고 몽케 칸이 즉위하는데 그는 앞선 칭기스 칸과는 달리 몽골 전통 종교에 집착하는 쪽이었다. 특히나 이 때 도교는 몽골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 기관이 되었다. 이지상의 지도에 따라 도교는 오고데이의 가문과 밀접하게 지내며 그들 편을 들었고 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몽케는 도교의 위상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불교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소림사는 육식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몽골인들에게 거부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승려들의 전투 실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을 하면서 지금의 소림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잭 웨더포드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책 <칭기스 칸과 근대 세계의 형성>을 집필하면서 기번의 논평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의 종교 관련 법률과 로크 씨 사이에서 독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호기심을 따라간 저자가 얻은 결론은 독자도 놀라게 할 만한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칭기스 칸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과연 그의 법률에 담은 내용도 칭기스 칸의 종교적 사회 통합을 염두에 둔 것일까. 이 책을 읽어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반영했다고 여겨진다.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널리 퍼진 중국 관련 주제에 관심을 공유한 많은 지식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771년 8월 3일에 처남 로버트 스킵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칭기스칸을 다룬 머피와 볼테르의 연극에는신경 쓰지 말고 당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던 원극의 대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제퍼슨은 칭기스칸을 다룬 페티스 드 라 크루아의 전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제퍼슨 역시 모든 종교에는 일부 좋은 면이있지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그는 프랑스어로 된 칭기스 칸 전기를 여러 부 구입했다. 그중 일부는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는 자기 딸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 P469


제퍼슨은 1777년에 종교적 자유에 관한 법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1786년 1월 16일 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알맞은단어를 찾는 데 고심했고 이 작업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의 제안은 치열한 논쟁·편집·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 확정된 핵심적인 단어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유사했다. 제퍼슨의 새로운법은 이렇게 규정했다. "그 누구도 종교적 의견이나 신앙으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장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전해졌고, 몽골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다시 터키어, 프랑스어를 거쳐 마침내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문헌들에는 칭기스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칭기스칸의 정신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 P470~471


이 책은 재밌게 읽기도 했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오별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절판이라니... 진심으로 재판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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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을 떠날 무렵, 칭기스칸은 종교인들이 자신의 광대한 제국의 통치에서 제한적인 역할만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유용한 기술을 지녔지만, 말만 많고 거의 행동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은상식을 추구한 반면에 그들은 깨우침을 추구했다. 몽골 궁정으로 데려온사제, 수도사, 율법학자, 샤먼 들은 칭기스칸에게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강론과 가르침을 내세웠다. 그들 말대로 모든 문제가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연구,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칭기스칸은 당면한 문제가 산적한 수백만 인구의 제국을 통치해야했고, 그러려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즉각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 P357

몽골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피하여 그 대신에 완곡하게 ‘신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하여 1227년 여름에 칭기스칸은 신이 되었다. 예수이 카툰은 칭기스칸의 시신을 펠트로 감싸는 작업을 감독했으며 친위대는 황제를 고향으로 데려가 매장할 준비를 했다. 칭기스칸은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도교, 그 외의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몽골인으로 죽었다. - P378

이제 외국 땅에 진출한 많은 몽골인은 칭기스 칸이 알아볼 수 있는부류의 몽골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시인이 되어 있었다. 제국의 중심은 먼 도시로 이동했다. 훌레구는 바그다드와 타브리즈를 중시했고, 쿠빌라이는 새로운 수도 연경(오늘날의 베이징)으로 중심을 옮겼다. 몽골인들은 스텝을 버렸다. 카라코룸은 목초지로 전락했다. 한때 사절들이 칸 앞에 와서 몸을 떨고 포도주가 거대한 은빛 분수에서 흘러내리던 곳은 이제 염소와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곳으로 변했다. 카라코룸의 사원, 모스크, 교회는 산산이 부서져 폐허가 되어 땅속으로 사라졌으며, 새로 자란 풀로 만들어진 카펫 밑에 묻혔다. 승려들의 염불 외는 소리, 무예진의 기도 시간 알리는 소리, 기독교인들이 찬송가 부르는 소리는 가뭇없이 사라져 울부짖는 바람 소리로 대체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기도 소리는 때때로 샤먼들이 찾아와 북을 두드리고, 밤에 빛나는 별 아래 모닥불옆에서 춤추며 노래 부를 때 나는 소리뿐이었다. - P439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널리 퍼진 중국 관련 주제에 관심을 공유한 많은 지식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771년 8월 3일에 처남 로버트 스킵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칭기스칸을 다룬 머피와 볼테르의 연극에는신경 쓰지 말고 당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던 원극의 대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제퍼슨은 칭기스칸을 다룬 페티스 드 라 크루아의 전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제퍼슨 역시 모든 종교에는 일부 좋은 면이있지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그는 프랑스어로 된 칭기스 칸 전기를 여러 부 구입했다. 그중 일부는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는 자기 딸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 P469

제퍼슨은 1777년에 종교적 자유에 관한 법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1786년 1월 16일 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알맞은단어를 찾는 데 고심했고 이 작업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의 제안은 치열한 논쟁·편집·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 확정된 핵심적인 단어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유사했다. 제퍼슨의 새로운법은 이렇게 규정했다. "그 누구도 종교적 의견이나 신앙으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장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전해졌 - P470

고, 몽골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다시 터키어, 프랑스어를 거쳐 마침내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문헌들에는 칭기스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칭기스칸의 정신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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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투겐의 죽음은 칭기스 칸 제국의 미래계획뿐만 아니라 칭기스칸의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영적 중심도위협했다. 정말로 하늘이 그를 축복하여 그런 크나큰 위업을 달성할 수있게 했다면 왜 손자의 사랑을 계속 누릴 수 있는 운명을 거부했을까?
왜 손자의 운명은 그를 바미얀의 절벽 앞에서 쓰러져 죽게 했을까?
운명은 죽음의 때를 결정했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그 운명에 맞서 자기 내면의 고통을 세상에 대한 복수로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는 손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원래 전통적으로 죽은 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무투겐의 죽음 자체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적에게 왕족의 죽음을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심지어 후대에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 연대 - P305

기 작가들마저 무투겐의 죽음이나 그 후에 벌어진 복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면 무슬림관찰자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P306

그는 이제 삶에서 마지막 행동이될새로운 영적 여정을 떠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내면의조화와 평화를 구하기 위해 철학적인 명상이나 마술 같은 의식에 기대려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당대에 가장 존경받고 저명한 영적 스승들과 현인들을 초빙해서 저 너머에 있는 세상으로 새로운 탐구를 떠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과 습관을 상세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부 신비한 비밀과 마음을 위로하는 지식을 알아내기 위해 다른 것들, 즉 좀 더 형식을 갖춘 체계화된 종교들을 연구하기시작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무엇을 발견했을 때 곧바로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 P311

칭기스칸은 몽골인들이 중국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연로한 도교 현인이 도움을주길 바랐다. 당시 그는 중국의 3분의 1만 정복한 상태로, 금의 영토는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송과의 전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인들은 중국 전역을 통제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고된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처지였다. 구처기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이미 칭기스 칸의 휘하에 들어온 영토에서 몽골의지배를 더 강화할 수 있고, 또 금과 송의 통치 지역에 사는 백성들에게도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도교 수도사들이 그를 도와 이미 정복된 백성들을 회유해주고, 나아가 아직 정복되지 않은 백성들의 마음 - P331

을 몽골 쪽으로 끌어들이길 기대했다. 외부에서온통치자로서 몽골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중국인들이 인정하는 합법성을 필요로 했다. 옛 지배층과 밀접한 동맹을 맺어온 유학자들은 그런 호의를 베풀 기색이 전혀없었지만, 불교와 도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 P332

구처기와 그의 추종자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을 의도적으로 새롭게해석했다. 그들은 전진교가 다른 모든 도교 교파를 제압하고 종국적으로는 주된 경쟁자인 불교를 타도해야 한다는 칙령으로 해석했다. 전진교는성직자들의 면세 특권을 확장했고 도교 사원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들의 사업은 면세 특권 덕분에 다른 상인들보다 우위에 서면서 빠르게확대되었다. 전진교 사원들은 이제 사실상 면세로 물건을 판매하는 창고로 변모했다."
주어진 특별한 혜택으로 전진교는 점점 그 세력이 강해졌고, 너무나강대해진 나머지 어떤 경우엔 자신들에겐 몽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여기기까지 했다. 전진교 사원들은 상업, 은행업, 제조업을 위한 면세 지역으로 운영되었고, 창고로 쓰는 공간은 점점 도교를 숭배하는 공간을밀어내며 자리를 넓혀갔다. 그들은 제국 전역을 무대로 하는 면세점 체인이 되었다. 전진교에 가입한 사람들은 몽골 지역 당국이 요구하는 군역, 고된 집단노동, 가도 건설, 관리 운송, 그 외 다른 부류의 노동을 면제받았다. 결국 전진교의 대규모 확장은 제국을 통치하고 거대한 몽골군을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가 세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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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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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선 주의와 이성애 중심의 섹스가 보편적이라고 여기던 누구라도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다양한 암컷들의 생태계를 보고 나면 인간이 더 후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전학과 진화생물학 이론을 넘어서 과학이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야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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