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투겐의 죽음은 칭기스 칸 제국의 미래계획뿐만 아니라 칭기스칸의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영적 중심도위협했다. 정말로 하늘이 그를 축복하여 그런 크나큰 위업을 달성할 수있게 했다면 왜 손자의 사랑을 계속 누릴 수 있는 운명을 거부했을까?
왜 손자의 운명은 그를 바미얀의 절벽 앞에서 쓰러져 죽게 했을까?
운명은 죽음의 때를 결정했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그 운명에 맞서 자기 내면의 고통을 세상에 대한 복수로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는 손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원래 전통적으로 죽은 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무투겐의 죽음 자체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적에게 왕족의 죽음을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심지어 후대에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 연대 - P305

기 작가들마저 무투겐의 죽음이나 그 후에 벌어진 복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면 무슬림관찰자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P306

그는 이제 삶에서 마지막 행동이될새로운 영적 여정을 떠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내면의조화와 평화를 구하기 위해 철학적인 명상이나 마술 같은 의식에 기대려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당대에 가장 존경받고 저명한 영적 스승들과 현인들을 초빙해서 저 너머에 있는 세상으로 새로운 탐구를 떠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과 습관을 상세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부 신비한 비밀과 마음을 위로하는 지식을 알아내기 위해 다른 것들, 즉 좀 더 형식을 갖춘 체계화된 종교들을 연구하기시작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무엇을 발견했을 때 곧바로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 P311

칭기스칸은 몽골인들이 중국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연로한 도교 현인이 도움을주길 바랐다. 당시 그는 중국의 3분의 1만 정복한 상태로, 금의 영토는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송과의 전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인들은 중국 전역을 통제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고된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처지였다. 구처기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이미 칭기스 칸의 휘하에 들어온 영토에서 몽골의지배를 더 강화할 수 있고, 또 금과 송의 통치 지역에 사는 백성들에게도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도교 수도사들이 그를 도와 이미 정복된 백성들을 회유해주고, 나아가 아직 정복되지 않은 백성들의 마음 - P331

을 몽골 쪽으로 끌어들이길 기대했다. 외부에서온통치자로서 몽골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중국인들이 인정하는 합법성을 필요로 했다. 옛 지배층과 밀접한 동맹을 맺어온 유학자들은 그런 호의를 베풀 기색이 전혀없었지만, 불교와 도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 P332

구처기와 그의 추종자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을 의도적으로 새롭게해석했다. 그들은 전진교가 다른 모든 도교 교파를 제압하고 종국적으로는 주된 경쟁자인 불교를 타도해야 한다는 칙령으로 해석했다. 전진교는성직자들의 면세 특권을 확장했고 도교 사원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들의 사업은 면세 특권 덕분에 다른 상인들보다 우위에 서면서 빠르게확대되었다. 전진교 사원들은 이제 사실상 면세로 물건을 판매하는 창고로 변모했다."
주어진 특별한 혜택으로 전진교는 점점 그 세력이 강해졌고, 너무나강대해진 나머지 어떤 경우엔 자신들에겐 몽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여기기까지 했다. 전진교 사원들은 상업, 은행업, 제조업을 위한 면세 지역으로 운영되었고, 창고로 쓰는 공간은 점점 도교를 숭배하는 공간을밀어내며 자리를 넓혀갔다. 그들은 제국 전역을 무대로 하는 면세점 체인이 되었다. 전진교에 가입한 사람들은 몽골 지역 당국이 요구하는 군역, 고된 집단노동, 가도 건설, 관리 운송, 그 외 다른 부류의 노동을 면제받았다. 결국 전진교의 대규모 확장은 제국을 통치하고 거대한 몽골군을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가 세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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