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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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라틴어 수업은 저자가 서강대학교에서 2010년부터 근 6년간 강의했던 수업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라틴어는 지금 쓰이지 않는데다 공부하기도 어려운 언어(단, 복수, 인칭에 따른 변화 등이 복잡함)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생활 속에서 라틴어를 많이 만날 수 있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는 읺는다. (예를 들면 유비쿼터스, 아우디, 스텔라, 에쿠스 등)


저자는 라틴어를 꼭 배워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문법에 얽매여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수업 내용들도 라틴어 문장이나 명구를 제시하고 이와 얽힌 경험이나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였디. 물론 라틴어 단어와 문법을 간단히 소개해놓아서 라틴어 도입 지식은 익힐 수가 있다. 


무엇이든 관심이 있으면 더 빨리 배울 수 있다고 하던가. 나의 경우도 관심이 있어야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진단이었다. 우리는 수능이라는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하며 상대 평가에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유럽 대학은 절대 평가로 이루어지며 성적을 매기는 표현도 부정적인 단어가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교육은 경쟁에 너무 매몰되어 있고 성적에 연연한다는 생각이 든다. 


[75] 유럽 대학의 평가 방식은 대부분 절대평가로 이루어집니다. 라틴어로 성적을 매기는 표현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적평가에 쓰이는 표현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umma cum laude 최우등

Magna cum laude 마냐/마그냐 쿰 라우데 우수

Cum laude 쿰 라우데 우등

Bene 베네 좋음/잘했음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대학 진학율이 높은데도 만족율은 높지 않으며 졸업을 한다고 해도 더 이상 좋은 취업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정말 대학 교육의 목표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중세에는 3과와 4과의 학문을 공부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키웠다는데 오히려 지금 대한민국 교육은 너무 후퇴한 게 아닌가 싶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처럼 고전을 읽고 지력을 키우고 나눔과 토론을 통해 여러 생각을 듣고 나눌 수 있는 것이 교육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29]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도 학문을 하는 것도 레퍼런스를 위한 인덱스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에 가면 카테고리별로 장서를 분류해 꽂아놓는 것처럼 우리의 지식도 각자의 책장에 칸별로 분류를 하는 작업이라고 느낀다. 어디에 있는지 알면 책은 나중에라도 또 보고 들여다볼 수 있다.


책의 말미에는 제자들이 수업을 듣고 난 후의 소감들이 실려 있다. 많은 학생들이 수업을 인상적으로 들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수업이든 백 퍼센트 만족은 어려울 것이고 학생이 수업을 통해 어떤 배움이라도 얻어가는 게 있다면 그 수업은 가치가 있는 수업일 것이다.


딱딱하지 않으면서 따뜻한 인생의 교훈까지 얻을 수 있는 좋은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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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17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논술문제집? 이름 중 하나가 숨마쿰라우데 더군요 ㅎㅎ 저도 이 책 좋아서 단어들 적어 놓고 그랬어요 *^^* 잘 읽었습니다 거리의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1-12-17 17:03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런가요? 논술문제집 풀어본지가 오래되가지고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네요^^; 역시나 최우등을 선택했군요. 좋은 책은 다 알아보는 법인 것 같아요. 따뜻한 댓글 감사드려요.
 
신조협려 1~8 세트 - 전8권
김용 지음, 이덕옥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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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조협려는 김용 삼부작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부작의 시작점으로 알려진 사조영웅전을 2017년에 드라마로 접하고 김용의 무협에 빠져들었다.

바보 같은 곽정이 짜증이 나고 답답하면서도 황용을 만나 사랑을 하고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습과 호쾌한 무술을 보는 매력도 있어 좋아했다.

그런데 사조영웅전이 최고라 생각했었던 내가 2014년 신조협려 드라마를 보고 빠져들었다.

주인공의 비주얼로 논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CG가 많이 어색한 걸 제외하곤 스토리가 재밌어서 금방 빠져들었다.

재밌어서 2~3번을 연달아 봤던 것 같다.

그리고는 신조협려가 왜 김용 3부작 중 더 많은 사랑을 받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주제로 담고 있어서 감정 이입이 많이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특히 캐릭터가 선과 악으로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 점이 좋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선과 악의 감정을 다 가지고 있고 둘 중 어느 것이 좀 더 표출되느냐에 따라 달라질텐데 신조협려 캐릭터들이 어느 것 하나 치우친 면이 덜해서다.

완벽하지 않고 조금씩 흠결이 있어서 정감이 간다고 해야 할까.

악인으로 분류되는 캐릭터도 어느 한 구석은 장점을 보여주는 식이다.


인상적인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기억에 남는 인물부터 정리하면 이막수, 황약사, 주백통, 곽부만 이야기해보겠다.


이막수는 악인이지만 악함 뒤에 숨겨진 배경이 공감이 많이 되었다.

이막수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배신당했을 때의 슬픔과 처절함을 경험해본 사람은 공감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이후 곽양을 만나서 모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결국 절정곡의 정화숲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을 때는 안타까움이 컸다. 


황약사와 주백통은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어른들이다. 

둘 다 자유로운 영혼들이며 속박과 구속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스승과 제자가 사랑한다고 했을 때 무림인들은 모두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욕한다. 

이 때가 송나라가 배경인데 주자가 나오고 주자학이 성립되었던 시기인 만큼 규율과 예법, 도리 등이 무척 강조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둘의 사랑이 무슨 문제냐며 축복해주는 두 사람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곽부에 대한 소회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싫은 캐릭터가 그녀였다. 왜 저러나 싶은 장면이 계속 나와서 힘들었다. 

어미인 황용이 이뻐하며 너무 받아주고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이 없는데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거나 수틀리면 그냥 내지르고 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잘못을 하고도 사과를 안 하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라는 반응을 보인다. 

혼날 것이 두려워서 피하고 다칠까 무서워 도망가려하는 모습과 엄마의 치마 폭에 쌓여서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여러 악인들이 등장하는데 악인들보다도 그녀가 더 싫었다. 

왜 그러는지 생각해보면 역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부분들을 다 가지고 있어서인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너무 많지만 몇 개만 꼽아보겠다. 

여러 차례 주변 사람의 멸시와 오해 속에 만남과 이별을 오가는 양과와 소용녀는 서로에 대한 끈끈한 사랑을 보여준다. 

한 사람을 흔들림 없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운명보다는 의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을 유지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홍칠공과 구양봉이 화산에서 무술 대결을 펼치며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꼽고 싶다. 

둘은 오랜 악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서로에 대한 원한을 털어버리고 평안하게 눈을 감는다. 

이상하게 이 장면은 책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너무 인상적이었고 뭉클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의연하게 맞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마지막으로 양과와 곽부가 화해하는 장면이다. 

남편이 양양성 전투에서 위험한 상황에 빠지자 곽부는 양과에게 그동안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며 손을 내민다. 

곽부가 그동안 양과에게 했던 행동을 돌아보며 자신의 마음이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시간이 훌쩍 지나 서로 짝을 찾아 안정을 찾았으니 다행이고 뒤늦게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양과에게 용서를 구해서 진정한 해피엔딩이 된 것 같다.


무협물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적 구조가 잘 짜여져 있고 캐릭터도 생생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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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말~12월 담아둔 책을 구매했다. 장바구니는 금방 차는데 읽는 속도는 느리다.
배송 상태 때문에 양장은 늘 교보문고를 이용해서 구매 내역 정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지만 책이 찍혀서 오거나 찢어져서 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

1.
근대서지는 꾸준히 주기적으로 구입 중이다. 이전 회차들도 시간이 걸릴 뿐 배송이 되기 때문에 다행이고 이런 양질의 잡지들이 더욱 꾸준히 생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와 근대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관심을 가져도 좋을 잡지다.

2.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 상을 구입한 건 1년 전인데 하는 이제야 구입을 하게 됐다. 읽는 책들이 여러 개라 참 이럴 땐 민망해진다. 연구재단에서 만든 책이기 때문에 믿고 구입할 만하다.

3.
역사의 원전. 최근 들어 가장 눈에 띤 책이다. 내용부터 관심이 갔는데 김기협 선생님께서 역자로 참여하셨다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어서 읽어야지.

4.
그리고 장바구니에 이미 들어있던 책들.
페미니즘 관련 책은 어느새 야금야금 읽고 쌓여가고 있다. 요즘 답답한 세태를 보고 있자면 더욱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하며 실천해야한다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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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의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이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과학자를 뛰어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 P551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19세기에는 질병의 보다 용이한 전파와 질병에 대한 보다 성공적인 대응이라는 긴장관계가 발전했다. 한편으로는 교류와 이주의 증가가 전염병의 전 지구적 전파의 편리한 통로가 되었다. - P558

19세기에는 의학적 구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좌절과 난관이 있어도 진보란 이름은 부정될 수 없다. 이 과도기는 세 방면, 혹은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하자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 제너가 발명한 백신 접종술이 지구상에서 천연두 발병률을 대폭 낮추어 놓았고, 신코나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가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효과를 극적으로 높여놓았다. 두 번째 단계. 파스퇴르와 코흐로 대표되는 실험의학의 탄생. 실험 의학은 이 시대의 중요한 발명이었으며, 19세기 70년대에 처음 위력을 드러냈고 10년 이내에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했다. - P589

세 번째 단계. 제너와 파스퇴르가 세운 의학사의 두 가지 새로운 이정표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기가 세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승리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 P590

한편으로 많은 중요한 의학적 발견이 식민지에서 탄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배척당하던 의료와 약물 시험이 식민지에서 완성되었다. 식민지에서 의료와 위생 관련 직업의 첫 번째 목표는 식민자의 생존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많은 식민지에서 사람들은 의학적 수단의 도움을 받아 피식민자의 노동 능력을 높임으로써 식민통치의 합법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유럽이 발원지가 아니지만 지구 전체를 감염시킬 수 있는 질병에 맞섰다는 것은 전통적인 봉쇄와 격리 전략의 한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이었다. 19세기에 질병에 맞서는 싸움은 국제적인 임무로 인식되었다. - P592

발달된 공업사회와 비교할 때 현대 이전 사회는 문명의 정도에 관계없이 모두가 빈궁한 사회였다. 그러나 경제의 현대화가 빈곤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이것이 인류가 ‘현대성’의 성취를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 21세기에 진입한 뒤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여전히 기근이 존재하고 기근 때문에 수시로 폭동이 발생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인류 가운데서 여섯에 하나는 상시적인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세기의 생산력 증가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물질적 생존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바꾸어 놓지 못했다. - P632

근대 초기의 전 지구적 식물 이동현상의 대상은 소수의 희귀 사치식물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농업경제와 조경업 경제를 바꾸어놓았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생산성과 소비행태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 P649

전 지구적 시각에서 19세기를 살펴보면 인류 대부분의 삶의 물질적 조건이 의심의 여지 없이 개선된 시대였다. 계몽시대 이후 대서양 양안 세계의 문화의 기본 이념인 진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말하자면, 이런 막연한 판단은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좀더 깊이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모든 변화의 추세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변화의 추세가 상호 모순적인 경우가 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8세기를 1840년대까지 이어지는 ‘긴’ 18세기로 본다면 유럽의 18세기는 여전히 기아의 세기였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분명한 기아의 ‘탈지역화’ 현상이 나타났다. - P674

그러나 경제발전 수준이 낮은 식량생산 지역의 입장에서는 식량 유통범위의 확대는 오히려 재난의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발전의 피해자는 혁신에서 ‘뒤쳐진’ 나라나 혁신이 비켜간 나라만이 아니었다. 쉼없는 ‘현대화’의 침입도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 P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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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획정은 크게는 광범위한 지역의 정치적 재편(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부터 작게는 철도건설을 위한 지역계획과 농촌 토지소유권 문제를 둘러싼 미세한 조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에서 진행되었다. 공유지(Allmende)의 해체와 사유화 과정은 때로는 정부의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다른 경우에는 정부의 엄격한 지도와 계획 아래서 진행되었다. 국가가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세금을 징수하자 누가 무엇을 부담해야하는지, 토지 소유자와 점유자 중에서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 ——촌락공동체는 더 이상 과세대상이 아니었다 — 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 P352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이것은 정부활동이 지방에까지 확산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이후 복잡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하여 합리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세기 혹은20세기에 시행된 거의 모든 토지개혁은 이런 부분에 대한 대비책을소홀히 하지 않았다. 토지의 계획적인 운용은 현대사회의 기본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소련, 동유럽, 중국의 대규모 집단화였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기울이지 않았다. 하나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토지등기제도와토지의 자유로운 처분권이 없는 국가는 ‘현대‘ 국가라고 할 수 없다. - P353

상이한 국경 관념이 충돌하는 곳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국경을 획정하는 현장이었다. 마지막 승자는 대부분 현지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쪽이었다. - P362

국경은 부분적으로는 영토로서의 깊은 뿌리가 없는 행정구획이었고, 부분적으로는 (특히 ‘간접통치‘ 상황일 때) 식민지가 되기 전 통치구역의확인 표지였다. 제국 사이의 국경은 온전한 연속선으로 표시되는 기우는 드물었고, 유럽의 국경처럼 면밀하게 지키기도 어려웠다.
모든 제국에는 열려져 있는 측면이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그것은알제리 사하라였고, 영국의 경우는 인도 서북 국경이었고, 제정러시아의 경우는 카프카스였다. 그러므로 국가적 경계의 역사적 순간은식민지가 해체되고 새로운 주권국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1945년이후 시기에 찾아왔다. 이때 ‘철의 장막과 함께 유럽과 한국이 분단되었다. 국경은 유사 이래 최고도로 군사화 되었다. 국경의 불가침성을 확인하기 위해 핵무기와 철조망이 동원되었다. 국경에 대한 19세 기적 강박관념이 20세기 60년대에 극치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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