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의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이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과학자를 뛰어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 P551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19세기에는 질병의 보다 용이한 전파와 질병에 대한 보다 성공적인 대응이라는 긴장관계가 발전했다. 한편으로는 교류와 이주의 증가가 전염병의 전 지구적 전파의 편리한 통로가 되었다. - P558

19세기에는 의학적 구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좌절과 난관이 있어도 진보란 이름은 부정될 수 없다. 이 과도기는 세 방면, 혹은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하자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 제너가 발명한 백신 접종술이 지구상에서 천연두 발병률을 대폭 낮추어 놓았고, 신코나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가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효과를 극적으로 높여놓았다. 두 번째 단계. 파스퇴르와 코흐로 대표되는 실험의학의 탄생. 실험 의학은 이 시대의 중요한 발명이었으며, 19세기 70년대에 처음 위력을 드러냈고 10년 이내에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했다. - P589

세 번째 단계. 제너와 파스퇴르가 세운 의학사의 두 가지 새로운 이정표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기가 세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승리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 P590

한편으로 많은 중요한 의학적 발견이 식민지에서 탄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배척당하던 의료와 약물 시험이 식민지에서 완성되었다. 식민지에서 의료와 위생 관련 직업의 첫 번째 목표는 식민자의 생존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많은 식민지에서 사람들은 의학적 수단의 도움을 받아 피식민자의 노동 능력을 높임으로써 식민통치의 합법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유럽이 발원지가 아니지만 지구 전체를 감염시킬 수 있는 질병에 맞섰다는 것은 전통적인 봉쇄와 격리 전략의 한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이었다. 19세기에 질병에 맞서는 싸움은 국제적인 임무로 인식되었다. - P592

발달된 공업사회와 비교할 때 현대 이전 사회는 문명의 정도에 관계없이 모두가 빈궁한 사회였다. 그러나 경제의 현대화가 빈곤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이것이 인류가 ‘현대성’의 성취를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 21세기에 진입한 뒤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여전히 기근이 존재하고 기근 때문에 수시로 폭동이 발생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인류 가운데서 여섯에 하나는 상시적인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세기의 생산력 증가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물질적 생존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바꾸어 놓지 못했다. - P632

근대 초기의 전 지구적 식물 이동현상의 대상은 소수의 희귀 사치식물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농업경제와 조경업 경제를 바꾸어놓았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생산성과 소비행태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 P649

전 지구적 시각에서 19세기를 살펴보면 인류 대부분의 삶의 물질적 조건이 의심의 여지 없이 개선된 시대였다. 계몽시대 이후 대서양 양안 세계의 문화의 기본 이념인 진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말하자면, 이런 막연한 판단은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좀더 깊이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모든 변화의 추세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변화의 추세가 상호 모순적인 경우가 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8세기를 1840년대까지 이어지는 ‘긴’ 18세기로 본다면 유럽의 18세기는 여전히 기아의 세기였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분명한 기아의 ‘탈지역화’ 현상이 나타났다. - P674

그러나 경제발전 수준이 낮은 식량생산 지역의 입장에서는 식량 유통범위의 확대는 오히려 재난의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발전의 피해자는 혁신에서 ‘뒤쳐진’ 나라나 혁신이 비켜간 나라만이 아니었다. 쉼없는 ‘현대화’의 침입도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 P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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