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법 가을 느낌이 난다. 오전에 운동을 하러 다녀왔는데 공기가 서늘해졌음을 느꼈다. 불과 2주 전 습하고 찌는 듯한 더위를 생각하면 놀랍다. 


이것은 오늘 아침 사진 나가다 찍은 사진인데 어느덧 하늘이 높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구름이 마치 새의 모양처럼 보인다. 



지난 주말에는 책들을 한아름 주문했다. 적립금만 털어버리면 되었는데 그보다 더 책을 사버린… 뒤돌아서면 후회하는데 참 어쩔 수가 없다. 손가락을 원망해야 하나?


일단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룬 책부터 언급하기로 한다. 



최근에 <모두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보았다. 민주주의 한국사 시리즈 3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란다. 민주주의에 한국사가 키워드라니 일단 호기심이 갔다. 게다가 3부라면 1, 2부가 있다는 말? 어떤 책인지 알아는 봐야 하니까 정보를 보았다. 책을 쓴 저자와 목차를 보아하니 구입할 만한 책이라 여겼다. 여전히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시스템이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나 의문이 들지만 그럼에도 앞선 시기 민주주의를 위해 수없이 분투한 행위들이 없었다면  그나마도 현재가 있을까. 앞선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3권의 책을 통해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한 권은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이다. 사실 구입하려던 목적은 이 책이었다. 지난 달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을 읽으니 자연스레 다음 시리즈인 이 책에 호기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에서 정치, 경제 전문가의 정책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구상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면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은 경제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여진다.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이 누구이고 이들은 과연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어떤 경제 정책을 구상했고 설계해나갔는지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도 샀다. 아마도 이 책은 몇 달전 칼럼을 읽다가 담아둔 책일 것이다. 2017년에 나온 책으로 조금 된 책이지만 한국학 관련하여 많은 시선을 던져주는 다카하시 데쓰야가 해설에 참여했다. 이 책은 중일전쟁이 시작하는 해인 1937년 일본의 문부성이 ‘국체의 본의’라는 책을 펴낸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일본 정신과 그들이 말하는 ‘국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뜬금 없을 수도 있는데 <악부시선>을 샀다. ‘악부시선’은 한나라부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 이후까지 민가에 불리던 시가들을 송나라 때 곽무천이 100권의 책으로 펴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얼마 전 <사조영웅전>의 인물 중 동사(황약사)와 서독(구양봉)을 각색한 드라마인 <사조영웅전: 동사서독>을 보았다. <사조영웅전>은 곽정과 황용을 주인공으로 송나라 말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드라마는 동사와 서독의 앞선 역사를 프리퀄 형식으로 다루었다. 8부작인데 재밌어서 뒷 내용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황약사의 사랑과 구양봉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악부’가 사조영웅전에서는 ‘매초풍’ 같은 악한 여인을 뜻하기 때문에 나쁜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악부’라는 글자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의미다). 




 


작년에도 계속 바빴는데 올해도 그렇다. 여름 쯤에는 좀 일이 줄어드나 했는데 하나의 일이 정리될 만하면 두 개의 일이 들어오고 있다. 사람을 더 뽑아주면 낫겠으나 작은 회사다보니 인원은 고정되어 있다. 사람을 더 뽑아달라고 했더니 말만 알았다고 해놓고 계속 그 상태라 요즘은 일이 들어오면 일정이 더 걸린다고 못박고 있다. 


그래도 지금의 회사를 다니며 좋은 것은 몇 년째 점심을 먹고 나가서 산책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눈이 너무 많이 오거나 비가 비친 듯 퍼붓지 않는다면 나가서 걷는 것이 습관화가 되었다. 가을 초입이라 여전히 나무의 푸릇함이 남아 있다. 



이렇게 흐린 것도 운치 있지만 역시 볕을 쪼여서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잎을 보는 것이 정말 좋다. 내 눈마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한 달쯤 지나면 울긋불긋한 잎들을 볼 수 있으려나?


더워서 한동안 필라테스 센터에서만 운동을 했다. 그러다 지난 주말에는 날이 그리 덥진 않길래 결혼식이 끝나고 집에 와서 동네 공원을 걸었다. 역시 센터에서 런닝머신을 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 있었다. 동네도 구경하고 사람들도 관찰하고 나무며 꽃들을 보고 하늘도 볼 수 있으니까. 



이제 제법 해가 짧아져서 퇴근길 무렵에는 이런 노을진 풍경을 볼 수 있다. 이 날은 구름이 거의 없었나보다. 




이번 달은 아직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스스로 불만인데 그나마 읽은 책들이 만족스러워서 다행이다. 남은 2주 정도는 독서 모임 용인 시마즈 히마미쓰’에 관한 책과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를 읽을 예정이다. 시간이 더 있다면 한 권 정도 더 읽을 수 있으려나? 아무튼 읽을 시간도 부족하고 쓸 시간은 더 없고 그런 요즘이다. 모쪼록 남은 9월을 알차게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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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9-1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할 곳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복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참 좋더라고요. 그리고 실내에서 운동하는 것보다 바깥에 나가서 운동하는 걸 저도 더 좋아하긴 합니다. 저는 일단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지금도 나와 있습니다. 하핫.
한국 이제 가을 날씨로군요. 저는 오늘도 너무 더웠답니다? 하핫.

거리의화가 2025-09-14 15:2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회사 다니며 가장 좋은 것이 그 점인 것 같아요^^ 걷다보면 스트레스가 좀 완화되더라구요. 그리고 운동은 바깥 공기 마시며 하는 것이 훨씬 좋고요. 땀은 좀 나지만 실내 공기보다는 실외 공기가 더 좋잖아요ㅋㅋ
ㅎㅎ 역시 나와 계시는군요. 낮에는 이곳도 아직 덥습니다. 일교차가 클뿐!ㅋㅋ 다락방 님 어느덧 그곳 생활도 잘 적응해가고 계신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남은 하루 행복하게 보내시고 그곳 생활도 계속 화이팅입니다!

자목련 2025-09-15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이 올려주신 사진 덕분에 가을의 기분을 느낍니다.
남은 9월 더 높고 맑은 하늘을 마주하는 산책과 독서로 채우시길 바라요!

거리의화가 2025-09-16 13:01   좋아요 0 | URL
어제, 오늘은 습기가 많아서 낯에는 특히나 실제 기온보다 더 덥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렇지만 하늘은 분명 가을이라는 느낌을 주죠? 이 달에는 좀 더 하늘을 많이 보고 잠깐이라도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5-09-15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책을 얼마 못읽었다고 하면 슬퍼지는 사람 많아요. 김규식과 그의 시대도 읽으셧잖아요. 벽돌책 3권!!!
바람이 달라진다 싶더니 오늘은 습도가 너무 높아서 땀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다시 여름인가? 했다죠. 여전히 낮기온은 30도입니다.

거리의화가 2025-09-16 13: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김규식과 그의 시대는 지난 달에 읽은 거라서요^^; 예전에 비하면 책 읽는 속도가 많이 줄었습니다. 저녁에 가면 책을 오래 볼 수가 없더라구요. 집중력도 그렇고~ㅎㅎ
어제, 오늘 습도가 높네요. 일교차가 커졌을 뿐 낮은 여전히 좀 덥지만 그래도 뭐 이 달 지나면 낮에도 시원해지지 않을까요?
 
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모노그래프시리즈 11
도미엔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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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베트남의 역사일텐데 이는 우리와도 깊은 관계를 가진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인 도미엔은 베트남 전쟁기 한반도와 베트남 관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이 책은 그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결과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기에 관한 책은 있지만 주로 미국 등 서방의 사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박태균의 베트남사가 있을 것이다. 또 10여년 정도 전에 나온 유인선의 베트남사는 현대사에 집중된 책은 아니지만 이웃인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베트남의 전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도 두 저자의 책은 자주 언급되곤 하지만 아무래도 읽다 보면 한계가 느껴진다. 이 책은 미국, 소련, 중국 뿐 아니라 베트남 등 다국적 사료를 바탕으로 교차 분석하여 다양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아무래도 베트남과 남한, 미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분석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미 남한과 남베트남의 관계는 어느 정도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으나 상대적으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알려져 있는 지식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


시대적으로는 1950년대부터 1975년 베트남 종전의 해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1950년 양국 간 수교를 맺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북한에 적극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양국 간 다리를 놓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베트남은 군대를 파병했는데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이는 북베트남의 권유로 한국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던데다 중국을 통해 베트남군이 북한으로 이동했고 북한과 북베트남도 이 일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군은 전쟁 중 중공군에게서 땅굴 전술을 익혔는데 이는 향후 베트남 전쟁에 쓰이게 된다. 1951년에는 베트남 인민 대표단이 북한에 입국한 일이 있었다. 호찌민 주석의 지시로 이루어진 이 방문은 북베트남-중국, 북한-북베트남 관계를 강화하는데 역할을 했다. 이들은 귀국 후 1952년 보고회를 열고 출판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대 사회주의 연대에서 출발하여 반미, 반제국주의 의식에 대한 교감을 바탕으로 문화, 경제, 과학 교류를 열었다. 북한은 천리마 운동을 바탕으로 놀라운 경제 성과를 이룬다. 베트남은 북한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 친선 운동을 벌였다. 

1950년대 후반 시작된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은 1960년대 초까지 유지되었다. 소련의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중소 갈등이 벌어졌을 때 초기에 북한과 북베트남은 이념적으로 소련보다 중국의 노선을 지지했다. 중국도 북한과 북베트남의 협력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기에 양국에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남베트남 내전으로 폭동과 내전이 벌어지자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남민전)이 만들어졌다. 1960년대 베트남에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시작되자 이들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북베트남은 남민전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무기 등을 지원했다. 미국이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능했고 부패했으며 인민들의 인권을 여러 모로 탄압했다. 남민전 혁명 세력은 조국을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남베트남에서 혁명투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 비슷한 시기 남한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으니 북한 정부로서는 남민전의 활동에 주목할 이유가 충분했다. 1963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은 북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남베트남 투쟁에 대한 북한 지지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대남정책을 전환하여 예전의 평화공세는 접어두고 남한에서 혁명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방침으로 ‘남조선혁명론’을 선언했다. ‘남조선혁명론’은 말 그대로 남한에서 우선 혁명을 승리한 후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남민전이 만들어지고 게릴라전이 늘자 이를 경계하였다. 결국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베트남에 전쟁이 본격화한다.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에 따라 1964년 김일성은 비밀리에 북베트남에 방문 후 회담을 했고 1965년에는 북베트남의 당 총비서인 레주언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회담을 하는 등 끈끈한 유대 관계를 과시했다. 

그러나 소련의 코시긴이 1965년 하노이를 방문하면서 소련, 중국, 북한, 북베트남의 관계는 변화한다. 소련은 베트남을 지원하면서 베트남과의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무렵 남민전이 미 공군 막사를 공격해 미군을 사살하고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미국은 보복 차 북베트남 폭격을 감행했다. 소련은 이 행위가 평화공존에 반하는 행위라며 미국에 대한 비난 공세를 벌였다. 소련은 중국 정부에 비밀서한을 보내 베트남 원조 회담을 제안한다. 소련은 소련군이 중국을 통과하고 소련 공군기가 중국 남서부에 비행장을 사용하며 소련 공군기가 중국 영공을 통과할 수 있기를 중국에 요구했다. 중국은 당연히 소련의 요구가 과도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미국은 중국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염려했던데다 소련과 북베트남의 관계가 개선되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남한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군대를 파병하고 북베트남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에 따른 갈등이 일자 북한은 베트남전에 물자를 무상 지원하고 공군 및 선전 심리 전문가를 파견했다. 이는 베트남에서 미국이 패배할 경우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보았고 반대로 미국이 베트남에서 고전할수록 남한 내 미국의 기반이 약화되는 동시에 조선 혁명의 가능성이 커지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 지도부는 이처럼 조선 혁명과 베트남 혁명을 연결시켜 인민들의 애국심과 국제적 연대성을 바탕으로 김일성 유일 체제를 공고화하고자 했다.


북베트남은 구정 공세를 통해 반전 기회를 만들어 베트남의 통일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자국군에 피해만 가중되는 등 역효과만 불러왔다. 이때 김일성은 성명서를 통해 “세계 도처에서 미제침략자들의 각을 뜨자”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체게바라 기일에는 자신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대혁명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북베트남의 심기를 거스른다(북베트남 정치가들은 김일성의 발언을 ‘민족주의 경연’이라고 비판했다고). 북한은 국제적 의무로 북베트남에 공군을 파견하였음을 강조하였으나 실제로는 조종사 20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만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1969년 이후 북한은 북베트남에 대한 경제 지원을 줄였고 북한과 북베트남의 통일 방식에도 이견이 생기며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중국은 베트남과 한반도 통일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적 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렇게 북한과 중국은 북베트남과 관계가 악화된 반면 북한은 중국과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은 한반도에서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하며 주한미군이 철수되어야 함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표방하였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은 겉으로는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실제로는 소극적으로 호응했다. 양면 전략이었다. 

북한은 1970년대 초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한편으로는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단독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자 했다. 베트남의 평화협상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의 북한이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협상을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이 내 생각 이상으로 더 시기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이 군사적이든 외교적이든 습득한 것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겠다. 북한은 김정일로의 승계 구도를 본격화하면서 사회를 단결하고 인민을 동원하며 주체 사회를 강화하는 흐름을 이어나간다. 


과거 베트남의 투쟁은 북한에 롤모델이 되었고 이후 베트남의 개혁, 개방이 북한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전히 양국은 붉은 혈맹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베트남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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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경험에 따른 것이다. 물론 경험이 쌓인다고 해서 그 형태가 좋고 옳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본래부터 겁이 많고 소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20대나 30대 초까지는 돈이 없었을 뿐 오히려 많은 것들에 도전했던 시기였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방송 장비를 설치해서 사람들을 상대로 온라인 방송을 하기도 했고 방송국에 어느 가수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때 나는 현실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욕심을 다 채울 수 없어서 그 헛헛함을 이것저것 다른 것을 찾아다닌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는 분명 뒤를 돌아보지 않고 경계심 없이 막 부딪쳤던 것 같다.
지금은 무엇을 하기 전 이 정도면 적당해, 타협해야지 하는 생각부터 한다. 이는 나쁘게 말하면 더 나아가거나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뜻이 되겠다.
이를 통해 안정적으로 적당한 성과를 거둘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새로운 시도를 할 기회는 줄어드는 것이 된다.

러셀도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긴 나도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애당초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혼자 결정할 수 있으면 더 편할거야 라는 오만한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지금은 결혼을 하고도 10년을 훌쩍 넘긴 것을 보면 사람 일이란 모를 일이구나 싶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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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그의 시대 3 - 열정과 냉정 사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22~1945) 김규식과 그의 시대 3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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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편까지 왔다. 3권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의 가장 긴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분량이 상당한데 그럼에도 기존에 알지 못했던 사실과 흥미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나 이 시기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선행 자료와 없거나 부족한 자료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든 행위, 자료들(문자, 구술 포함)을 엮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따른 결과이며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낸 저자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당연히 뒤에 애써주신 분들의 노력도 포함되겠다).


김규식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로서 또 한 번 부각이 되는 시기는 3권의 초반에 등장하는 1921~1923년까지의 활동들이다. 앞서 살펴보았으나 김규식은 이승만과의 갈등 끝에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김규식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고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극동민족대회에서 그는 연설을 통해 “러시아 혁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불태우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한국 문제에 대해서 3건의 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김규식은 1921년까지의 한국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놓았다. 극동민족대회의 결과로 중국은 국공합작이 도출되었으며 일본은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한국도 민족통일전선 조직 및 정당조직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레닌이 제공한 60만 루블은 한인사회당과 상해 임정을 대표한 밀사 한형권과 박진순이 취득했다. 자금의 성격은 조선의 독립운동 대표단에게 전달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이르쿠츠크파, 국민의회파가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전달된 레닌 자금의 처분을 둘러싸고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코민테른은 자금 중단을 하고 한국 대표단 외교교섭단 단장이던 김규식,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지도자들을 고려공산당 활동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린다. 


김규식은 한동안 침잠해 있다가 한중국제연대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중한호조사는 한중 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사 16인 중 한국 측 위원 중 김규식은 부이사장, 여운형은 교제과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간담회, 강연회 등 집회를 통한 한국 참상 알리기와 한국 독립 지원 활동을 요청하는 활동에 집중했다. 중한어학강습소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참여 인원 중 아내인 김순애와 모택동도 있었다고 한다. 

국민대표회의는 사분오열된 임시정부의 지도부를 개조하거나 제도를 변경 또는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자는 공감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개조파, 창조파,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참여로 시작했던 회의는 마지막에 임시정부 창조파 인원만 잔류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국민위원회를 설립했다. 김규식은 국민대표대회 대표가 아님에도 5개의 행정부서 중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민테른은 국민위원회 조직 형태에 대한 협의를 위해 김규식과 이청천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렀다. 김규식은 이르쿠츠크파 후보 당원의 자격이었으며 이청천은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대 대표로서의 자격이었다. 국민위원회는 코민테른에 한국 독립운동 중심기관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귀결은 한국독립당이라는 정당이었다. 국민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에 기초한 독립 운동을 표방했으며 무장력과 국제연대를 강령으로 선택했다. 대표로 선출된 위원들이 총회 참석에 늦어져 연기되면서 1924년에야 열릴 수 있었으나 레닌이 사망하고 독일혁명도 실패하자 소비에트의 흐름이 내부 안정화에 집중하는 흐름이 생겼다. 국민위원회는 이렇게 씁쓸한 결말을 맞았다. 


국민대표회의 후 김규식은 상해 프랑스조계 내 한인 유학생을 위한 중등 예비학교인 남화학원을 운영했고 상해 북단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했다. 독립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1927년에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유동열, 김영호 등과 함께 국민당(군벌인 풍옥상의 부대) 북벌에도 참여하여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천진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29년부터는 북양대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처럼 독립운동을 하지 않을때도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생활 유지를 할 수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한국 독립운동의 흐름은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 세력 위주였는데 김규식은 이 중 후자쪽이었다. 그는 중국 측 요청으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한중연대 조직 흐름에 참여했다. 이는 한국 5개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국 측의 민중자위동맹회가 합쳐져 만들어진 중한민중대동맹이었다. 김규식은 중한민중대동맹에서 선전, 모금 활동을 위해 미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미국은 대공황 여파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재미한인 대부분이 실직과 궁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한인 사회에는 독립 진영 내분으로 인한 후유증이 여전하여 독립운동 열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김규식은 미 서부와 동부를 돌며 중한동맹지부 결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동부 지역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뉴욕지부를 만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와이에서는 이용직, 한길수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용직, 한길수가 미일개전과 한국의 반일 움직임을 미 정보 당국에 선전하고 있을 때 김규식은 미국 전역을 돌고 있었다. 짧은 하와이 방문 기간 동안 김규식은 미 육군 정보당국과 인터뷰(1933.7)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을 중한민중동맹의 하와이 미주 대표로 인정하는 신임장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김규식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3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에 복귀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통일된 독립 운동의 흐름을 위해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경제적, 외교적 상황이 계속 나아지지 않자 김규식은 1935년 직을 사임하고 나와 사천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사천대학에는 1942년까지 있었으니 제법 오래 있었던 셈이다. 이때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던 시간이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 선언을 한 뒤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경제 후원과 군사 지원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는 광복전선과 민족전선의 대립을 만들며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창익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가 화북 지대로 이동하면서 중경에 남아 있던 김원봉 조선의용대 세력이 힘을 잃자 중국 국민당은 한국광복군에 힘을 실어주었다(이는 해방 후 국내파 정계 세력에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위기에 몰린 김원봉은 한길수, 재미한인사회와의 연계를 이용하고자 했다. 한길수는 김규식 및 중한민중동맹 관계가 이미 단절되었음에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와 공식관계를 맺었다. 한길수는 중국 내 한인좌파운동 세력으로 미주를 대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김원봉은 한길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독당과 임정 주류 세력에 대한 비난을 하는 동시에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세력을 과장하고(이미 조선의용대 주력군이 화북 지대로 이동했음에도)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및 동북항일연합군 등과의 연대를 강조했다(이 서신 내용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 정말 놀라웠다). 이렇게 김원봉은 한길수를 활용하려 했고 한길수는 김원봉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늘리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한반도 신탁통치론은 1945년 동아일보 오보를 통해 보도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갑작스런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이해하게 되었다. 1943년 카이로 선언 이전 이미 1942년 미 포춘지에 중경의 신탁통치 반대 여론 움직임이 기사로 실렸고 1943년 4월 시카고선의 워싱턴회의의 결과 보고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1943년 중반 이후가 되면 임시정부도 사태를 관망하지 않고 신탁통치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미국의 대중적인 대한정책의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서 강대국 간의 합의에 의한 공동 추구 표명 성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도 중국 내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간에는 암살단 사건이 벌어지고 공금 횡령으로 잡음이 많았다. 이는 중국 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이 통일되지 않은 탓도 컸다. 

중경과 미주는 연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때도 이승만은 갈등의 축이었다. 재미한족연합회와 주미위원부, 임정의 상호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회는 민회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명령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 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재미한족연합회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김구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참 여러 모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때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해방 후 이승만의 국내 지도자적 위치와 입장은 더 제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1945년 임시정부는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김규식은 부주석의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를 시도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군사적으로는 광복군-OSS 작전이 감행되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시도도 이어졌다. 


3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원래 해방 후 내용을 담은 4권이 있었으나 <1945년 해방직후사> 단행본으로 기출간된 바 있다. 그 책을 읽으며 해방 후 정국을 정리해야 비로소 이 시리즈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미 읽었으나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김규식이 해방 전 집필 중이었다는 영시집 <양자유경>은 1992년 출간되었으나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은 이미 나온 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는 있으나 각 진영에 따른 입장 차이에 따라 기술이 제각각이라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더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이처럼 8월 한 달은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읽으며 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훓으며 보냈다. 찌는 여름임에도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보냈는데 저자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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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9-01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해방 이후도 궁금했는데, 이미 출간되어 있다니 기다리는 수고는 좀 덜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거리의화가 2025-09-02 13:12   좋아요 0 | URL
8월 안에 끝낼 줄은 몰랐는데 다른 책은 제쳐두고 읽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 관련해서 그 책 읽으시면 맥락이 이어지실거고 단행본이니 부담스럽지 않으실 듯합니다^^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김규식과 그의 시대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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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의 개인 일대기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이자 한국 근대사로서 읽을 수 있는 고마운 책이다. 김규식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파리강화회의로 대표로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얻는 과정, 이후 1930~40년대 독립운동 세력 간에 균형자로의 노력과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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