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윤대석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주국은 불과 13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가졌으나 당시 식민지 국가였던 조선, 중국 등 주변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5년 이후 만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대한민국의 뿌리와 관련이 깊어 들여다볼수록 마음을 무겁게 한다. 현대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꿈꾸며 그 역사를 되짚어보지 않을지. 사실 일본인이 만주국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견해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다.


이 책은 만주국의 성립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을 그리며 전체상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입문서적 성격을 지녔다. 입문서답게 분량도 적당해서 부담도 없고 만주국에 대해 본격적인 탐색에 들어가기 전에 핵심 개념을 정리하고 간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될 것 같다. 1989년 <최후의 ‘만주국’ 붐을 읽는다>라는 글이 발표되었을 때 저자는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질 무렵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만주국을 괴뢰국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저자는 만주국이 괴뢰국가이고, 국가 형태를 취한 식민지지배의 통치 양식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구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통합 아시아를 꿈꾼 이상국이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이상국가라는 이야기는 선뜻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왜 그렇게 말하는지 뒷 이야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1920년대 만주와 몽골에 대한 권익 싸움으로 중국과 일본은 격렬하게 대립 중이었다. 1928년 10월 이시하라 간지가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부임했다(그는 향후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만주사변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이시하라는 장쭤린 폭살 사건 전 1927년부터 이미 만주와 몽골을 영유해야 한다는 생각(만몽영유론)을 가지고 있었다. 

만몽 영유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절실한 현안이 있고, 그것이 또한 일본의 국운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의 국운을 결정하는 과제였던가.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방·전략상의 거점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 통치와 방공(防)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이 두 가지 과제는 연관되어 있어 일련의 문제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몽 영유를 달성하면이 과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국내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외 진출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작동하고 있었다. - P43


관동군은 국제적으로 1929년 세계경제공황의 상황으로 미국과 영국이 정신이 없을 때, 중국이 통일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대결로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 만주사변을 일으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여론이 정부보다는 군부를 지지했던 이유도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우선 1929년 가을 이래 세계공황에 의해 "자본주의 일본의 국민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국민이 만몽에서 그에 대한 해결을 구했다는 경제적 배경을 들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만몽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군부가 "앞으로는 반드시 여론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여론을 환기시킬까를 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를 도모하면서 매우 정력적으로 여론 조작을 추진한 것도 한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에는 사회민중당도 만주사변 지지를 결의하고, 12월11일 와카쓰키 내각의 총사퇴에 의해 시데하라 외교가 종언을 맞이하는 등 사태는 급전되었고, 만몽 처리에 관해서는 관동군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P85~86


만주국 건설에는 만주 현지 지역의 군벌과 친일 단체 협조의 힘이 컸다. 

장쭤린의 책사이자 평톈 지방자치유지위원회 의원이었던 위청한은 장쉐량 군벌 및 난징 정부의 입김에서부터 벗어나 자체적인 이상적 왕도정치를 실현시키고 군대를 폐지한 뒤 군사적 기능을 일본에 위임하겠다 했다. 

또한 만주청년연맹은 ① 둥베이 4성의 철저한 문호개방, ② 현주 각 민족협화의 취지에 의해 자유평등을 지향하고, 현 주민으로 자유국민을 구성한다. ③ 군벌을 배제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로 다스리며 병란이 잦은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여 둥베이 4성의 경제적 개발을 철저히 한다는 것 등이 강조하면서 위청한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다.

중국 본토로부터 단절된 왕도국가를 건설해 아시아 부흥의 초석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가사기를 중심으로 한 ‘다이유호카이’라는 단체도 꿈꾸던 바다. 


만주국 정치를 결정했던 것은, 괴뢰국가·보호국화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현지 중국인의 자주적 발의의 의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관동군의 지도하에 일계 관리에 의해 일본의 통치 의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실현하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표면과 내면의 괴리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국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국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일·만 관계의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 P203

1929년 세계 공황 이후 일본 경제 막다른 길에 몰린다. 일본 농촌은 노동 쟁의가 최고조에 이르고 실업자 수도 상당했으며 결식 아동이 속출하고 생활고로 부모자식이 동반 자살, 딸을 파는 부모도 많았다고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만주국에서 희망을 찾겠다는 만주국 붐을 일으킨다. 하지만 과대하게 선전된 만몽의 자원과 이권에 일본인의 활동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정적 자원에 수요는 많으니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만주국 건국을 둘러싸고 정부 계열 간 균열이 발생하면서 자치지도부 사람들이 중앙정부로부터 배제되는 상황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32년 만주국 승인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고 <일만의정서>에 의해 만주국 통치의 실권은 일본이 법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쇼와 천황은 무토 노부요시 관동군 사령관에게 “장쉐량 시대보다도 한층 선정을 베풀도록 노력하라”는 훈시를 했다. 


일본인은 만주국의 제제를 천황제와 유사한 형태로 만드는 것에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천황제의 황실에 대응하여 제실이 만들어졌고, 국문장에 대응하여 제제 실시 후 일본식으로 난화(花)가 문장이 되었다. 이외에 궁성(宮城)에 대응한 제궁(宮), 행행(行)에 대응한 순수 나중에 순행), 어진영(御眞)에 대응한 어용(御容: 나중에 어영御影), 황위에 대응한 제위, 황후에 대응한 제후라는 식으로 만주국제제는 천황제의 모조)로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 P255

일본은 이렇게 천황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만주국 체제를 이용하여 구성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과 만주국은 마치 마주보고 있는 거울상처럼 일본은 만주국의 상 속으로 각각을 투영시켜 무한의 상을 겹쳐간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자기이고 그 모든 것이 타자인 것처럼 진위를 가리기 힘들게 되어 간다. 


그러나 일본과 만주가 긴밀하게 이렇게 움직이려 했으나 전쟁 상황은 날로 악화일로를 걸어갔고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일. 만 관계가 진정으로 새로운 이념하에서 독자적인 국제관계를 창출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 적합한 개념과 체계로써 구미의 정치학이나 법률학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명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구미의 정치학과 법률학에서 말하는 ‘괴뢰국가의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시아 역사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고 지적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아시아 역사 자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역사란 말인가. 건국 이래 일관되게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지탄해 왔던 중화민국과 삼십 몇 만이나 되는 반만항일군 전사들, 그리고 앞에서 든 겐코쿠대학의 중국인 학생은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아시아를 거론할 때 우리들
일본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아시아 담론을 기만의 방패로삼아 왔다. 만약 자신의 삶을 경멸할 생각이 없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아시아‘라는 담론으로 자신과 타자를 함께 속이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생각한다. - P334

재만 조선인은 만주국 시대에 일본인=‘동양궤이즈(東洋鬼구)‘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얼웨이즈(鬼)‘로서 전후에는 참혹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귀국도 할 수없어 11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주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은 일본인 다음가는 "만주국 중요 구성분자"로서 국방의 책무를 담당했는데,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징병 · 징용되어 중국·남방전선에 동원됨으로써 전범이 되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패전 후에는 일본국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보호나 보상의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 P399


윗 구절을 읽으며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만주국을 통해 설사 이상향을 꿈꾸었다고 해도 그 방향은 분명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주변을 핍박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여긴다. 


책의 말미에는 보론을 싣고 있다. 책의 특성상 간단하게 다뤄져 언급하지 못했던 질문을 추려 저자가 답을 하는 형태여서 독자가 궁금해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주었다. 


1945년 만주국이 무너지고 나서 일본인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급속도로 증가했던 재만 일본인은 중국의 내전으로 일본으로 귀환하려다 상당수가 목숨을 잃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현지에 남아 전문 지식과 기술을 중국인에게 전했다고 한다. 현지에 자발적으로 남은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잘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알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에도 여러 인물이 만주국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국가 탄생 이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친일 청산과 현재도 뿌리 깊은 이념 때문에 벌어지는 색깔 논쟁은 고질병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이미 소멸해버린 만주라는 공간, 만주국이라는 국가를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무참한 희생을 조금이나마 보상하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인류의 예지를 이끌어내어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그것을 과거의 사실로 망각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만주국이 그러한 사상과제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영원한 현재’로서 계속 존재할 터이다. - P4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만주족 이야기 - 만주의 눈으로 청 제국사를 새로 읽다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1
이훈 지음 / 너머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조가 멸망한 후 중국은 청 제국의 강역을 계승했고 만주족은 중국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사의 영역은 중국 내지China proper를 넘어 청 제국이 지배한 광활한 공간을 포괄한다. 중국은 만주 지역을 동베이東北라고 부르며 중국사가 포괄하는 공간으로 편입시켰다. 반면 한국에서 만주 지역은 한국 고대사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두 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태어난 국가를 각자 ‘국사’의 일부에 배치했고, 역사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자의 역사 공간은 충돌한다. 양자의 사이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조상이 영유했던 그들만의 역사와 그들만의 공간은 실종되어 갔다. 이 글은 만주족이 살았던 이야기를 그들의 시각으로 서술했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는 데 이 글이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청의 역사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는 만주족의 역사를 자연스레 훓게 된다. 근대 중국의 마지막 국가가 청이었기도 하지만 중국 땅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와 붙어 있어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던 위치에 있었다. 다만 서로의 이해도가 달라 지금까지도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 있다. 이 때문에 저자의 말처럼 다양한 책과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지명과 인명 등을 원어인 만주어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독자는 낯선 용어로 독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기존에 우리는 관련하여 한어적 명칭과 발음이 자연스러운 탓이다. 현대 만주족의 규모가 거의 줄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역사를 다루는데 만주어에 대한 이해와 고려 없이 한자만을 사용한다면 반쪽짜리 이해일지 모른다. 게다가 중국은 다양한 민족을 구성원으로 하므로 특정 시각에 입각하여 서술된 역사는 몰이해를 불러올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여 만주어를 사용하여 책을 기술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읽다보니 괜찮아졌다.


1599년 누르하치는 여진 통일의 장정을 시작했다. 그해 건주여진은 하다를 공격했고, 하다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했다. 하다의 마지막 버일러인 멍거불루는 생포되어 건주여진의 수도인 퍼알라에 끌려와 있다가, 누르하치의 비첩婢妾과 사통하고 대신인 가가이G’ag’ai, ?盖(?~1600)와 밀통하여 찬탈을 도모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1607년에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약했던 호이파가 멸망당했다. 호이파의 바인다리 버일러는 방어를 위해 도성을 삼중으로 축성한 보람도 없이 누르하치의 공격을 맞아 패배했고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울라는 호이파가 멸망한 후에 6년을 더 버티다가 멸망했다. 해서여진 후기의 맹주였던 여허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버티다가 1619년에 멸망했다. 몇 년간이나마 건주여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방파제가 되어 여허의 멸망을 막아 준 것은 명이었다. 명은 1619년 1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몇 년 전부터 아이신 구룬金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던 건주여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명의 공격이 완전히 실패하자 여허는 후원자를 상실했다. 명은 여허를 후원하고 지켜 주기는커녕 신흥 금나라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해 가을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했고, 동성의 버일러 긴타이시와 서성의 버일러 부양구는 피살되었다. 해서여진의 마지막 국가가 멸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주족의 구성원은 어떤 방식으로 분화했을까. 우선 1644년 청이 중국 땅에 들어와 만주족이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구성원이 다양해졌다. 1635년까지만 해도 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있었던 것은 여진족과 소수의 한족, 조선족에 불과했다. 구체적으로는 강희제 시기 만주 동북부에 있던 퉁구스계 민족과 소수의 러시아 계열의 민족이 유입되고 건륭기에는 동투르키스탄에 있던 소수의 투르크계 사람들이 팔기군에 합류했다.


그렇다면 ‘만주족’이 가진 고유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만주족은 성이자 씨족 집단인 ‘할라’, 2개 이상의 씨족 집단이 모인 ‘무쿤’, 하나의 할라가 여러 마을에 들어가서 각 마을에 서로 다른 할라가 섞이는 ‘가샨’ 등을 가진다. 만주족이 성을 잘 쓰지 않는 것은 국가를 세우기 전에 할라인 씨족 집단으로 생활했던 시기의 관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여진 통일 과정에서 대부분 집단 고유의 조직을 니루에 배속시켰기 때문에 그들이 팔기에 편제된 후에도 큰 혼란이 없을 수 있었다.

둘째, 수렵과 군사 훈련이다. 만주족은 국가를 수립하고 나서도 수렵을 생산 활동의 일부로 중요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군사 훈련의 과정으로 이용했다. 

셋째, 황실에서 지낸 샤머니즘 제사인 탕서와 곤녕궁 제사다. 누르하치는 경쟁 여진 부족을 물리친 뒤 씨족 수호 신령을 모신 사당인 당서를 파괴함으로써 누르하치의 탕서가 다른 모든 씨족의 탕서를 대체하게 하면서 복속된 여진인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홍 타이지는 탕서 제사를 황실이 독점하게 하고 굿을 금지시켰다. 곤녕궁 제사는 탕서 제사와 유사하지만 하늘신, 조상신 뿐 아니라 석가모니, 관음신 등 외부에서 가져온 신도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넷째, 조선 시대 말을 끄는 하인인 ‘거덜’이 있었던 것처럼 만주족은 ‘쿠툴러’가 있었다. 쿠툴러도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지만 기병 위주의 전쟁을 하는 만주족에게 말을 관리하는 그들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다섯째, 오락, 전투 훈련으로 빙상 경기를 했다. 건륭제는 자금성 북해에서 빙상 대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192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된 북해는 겨울에 북경 시민이 스케이팅을 즐기는 장소로 기능했다고 한다. 여섯 째, ‘가추하’라는 놀이다. 가추하는 포유류의 발목관절뼈를 지칭하는 만주어로 뼈(주로 양이나 돼지의 뼈를 이용)를 던지며 노는 것이다. 가추하는 실내, 실외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즐기는 대중 놀이였다.

일곱째, 만주어다. 홍타이지는 특히 한어의 유입으로 만주어가 상실될 위협에 놓인 것을 경계하여 한어, 몽고어 어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점차 한족의 문화에 익숙해졌고 한자 사용이 많아지면서 소멸되어갔다.


청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조치는 다양했다. 귀족층 자제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당근을 주는 대신 귀족층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황제가 몽고 왕공을 자주 접견하고 장성 밖에 사찰을 지어 타 민족을 고려하는 모습을 비춰주기도 했다. 동전에 만주어와 한어를 함께 새기면서 백성들에게 통합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도 있었다. 신강을 정복한 이후에는 전쟁기념관인 자광각을 세워 군사적 메시지를 주었다. 한인이 숭배하던 관우 신앙을 만주족 지배자들은 계속 존숭했다. 관우 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청의 변경은 제국의 역사 동안 끊임없이 변경되는 과정을 거쳤다. 1644년 청은 입관 후 수십 년간에 걸쳐 중국을 정복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에서 다수의 병력을 원거리의 동북방 흑룡강 유역으로 파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침입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청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아 소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현지의 부족민을 병력으로 활용하며 때로는 조선군을 동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청은 순치기에만 1652년부터 1660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수백 명 내지 1,000여 명의 소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흑룡강 유역 곳곳에서 러시아인을 공격했고 부족민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다섯 차례의 전투 가운데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 참전했다. 조선의 신유 장군이 참여하여 알려진 ‘나선 정벌’이 이 중 하나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후 만주 지역의 북방은 안정된 상황으로 진입했지만 청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족민을 팔기로 편제하는 정책을 계속 진행시켰다. 시버족은 이 때 만주에서 신강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책은 만주족의 역사도 다루지만 특히 ‘만주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더 중점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겨졌다. 개인적으로 거기에 원하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적합했고 역사만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무얼 하며 살았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서술하기 때문에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주족에 대해서 세밀하게 알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hen Stars Are Scattered (Paperback, 미국판) - 『별들이 흩어질 때』원서
빅토리아 제이미슨 / Dial Books for Young Readers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향은 파괴되고 우여 곡절 끝에 난민 캠프에 들어온 두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게 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배움을 얻고 성장하는 둘의 모습이 대견했다. 가족과 헤어지고 고향이 사라지는 비극은 없었으면 하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4-05-28 06: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4-05-29 21:41   좋아요 2 | URL
괭 님도 완독하셨던 것으로 봤어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미나게 읽었네요. 감동적이기도 했고요. 특히나 저는 난민캠프에서 만난 엄마와의 일화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훔쳤답니다.
완독 축하드려요^^

청아 2024-05-29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4-05-29 21:42   좋아요 1 | URL
미미 님 덕분에 정말 재미나게 읽었어요. 뭉클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후기까지 읽으면 가슴에 불꽃이 절로!ㅎㅎ 요새 일 때문에 스트레스 가득이었는데 이 책 읽으면서 힐링했습니다. 감사드려요. 다음 달 책도 기대해봅니다.
 

이시하라 등이 만몽 영유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절실한 현안이 있고, 그것이 또한 일본의 국운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의 국운을 결정하는 과제였던가.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방·전략상의 거점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 통치와 방공(防)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이 두 가지 과제는 연관되어 있어 일련의 문제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몽 영유를 달성하면이 과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국내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외 진출에 의존할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작동하고 있었다. - P43

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사변에서 군부가 정부를 끌고가는 것처럼 보인 것은 실제 여론이 정부보다도 오히려 군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군부가 정부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 정부를편달했던 것이다"라는 관찰이 있을 정도로 관동군의 행동을 지지하는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우선 1929년 가을 이래 세계공황에 의해 "자본주의 일본의 국민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 - P85

다라" 국민이 만몽에서 그에 대한 해결을 구했다는 경제적 배경을 들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만몽 문제를 단번에해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군부가 "앞으로는 반드시 여론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여론을 환기시킬까를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를 도모하면서 매우 정력적으로 여론 조작을 추진한 것도 한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에는 사회민중당도 만주사변 지지를 결의하고, 12월11일 와카쓰키 내각의 총사퇴에 의해 시데하라 외교가 종언을 맞이하는 등 사태는 급전되었고, 만몽 처리에 관해서는 관동군이 주도권을장악하게 되었다. - P86

만주청년연맹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만몽 자유국 건설 강령>을 제출했다. 거기서는 ① 둥베이 4성의 철저한 문호개방, ②현주 각 민족협화의 취지에 의해 자유평등을 지향하고, 현 주민으로 자유국민을 구성한다. ③ 군벌을 배제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로다스리며 병란이 잦은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여 둥베이 4성의 경제적 개발을 철저히 한다는 것 등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서 민족협화와만몽 독립국가 건설이 동일한 하나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여기서 말하는 ‘자유‘에서 ‘자유‘란 "자유주의와는 다른, 각 민족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하여" 철저한 문호 개방과 함께 재만 일본인이 국적을 변경하지 않고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보증을 요구했던 것이다. - P116

다이호카이는 총 30명 남짓으로, 만주청년연맹과는 달리 대외적 선전활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모임으로서의 강령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어떤 주장이나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는지는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가사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사상에 공명하는 자들의 동지적 결합이라는 색채가 점차 농후해졌는데, 기아시아부흥사상과 불교적 신앙이 그 근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유색인종의 해방‘, ‘세계의 도의적 통일‘ 등을 강령으로 내건 고치샤의 기관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가사기는 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 "국가의 목적과 이상은 이법(理法)을 체현하는 데에 있다"라고 논하고 있다. - P120

"만주사변은 구동북 군벌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 군벌의 붕괴는 그에 수반된 결과로서 수백만 명의 만몽 제민족과 3천만 남짓한 중화민중을 반봉건의 철쇄로부터 해방시켰고, 더군다나 이 해방은 바로 만주사회의 아시아적 본질을 각성시켜, 전통적 생활사상과 자치적 기능에 의해 새로이 왕도국가를 건설하게되었다. 그 때문에 왕도국가의 건설은 역사적·사회적 필연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시아 민족에게 왕도사상은 전통적으로 사회생활의 이상으로서 살아 있기 때문에, 구군벌의 철쇄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반봉건적인 사회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도국가 건설이 민중자치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 수 있는 전제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선언은 이처럼 만주 왕도국가 건설의 필연성을 주장한 후, 나아가왕도연방의 건설을 제창하고 있다. "만주 왕도국가의 건설은 반드시만주인민을 위한 낙토가 아니고, 또한 단지 일본제국의 생명선도 - P136

아니며, 하물며 파시즘의 연기장(場)은 더더욱 아니고, 지금 바로태평양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세계인류 생존전에 임해 우리 아시아 왕도사회의 자존을 확보해야 할 유일무이의 세력인 왕도연방의 모체가되어야 할 사명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 P137

만주국은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그 건국의 동기와 이념의 표명에 있어서 중화민국과의 이질성 · 대극성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거꾸로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승인과 일본의 기존권익 확보의필요성에서도 중화민국과의 국가적 계승성 (state succession)을 부정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화민국에 대해 단절성과 연속성이라는 상 - P143

반되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여기에 만주국의 모반(母)이라 할 ‘출생‘에 뿌리내린 특징이 보이며, 또한 그것이 만주국의 건국이념과 국제 자체를 크게 규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44

만주국 정치를 결정했던 것은, 괴뢰국가·보호국화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현지 중국인의 자주적 발의의 의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관동군의 지도하에 일계 관리에 의해 일본의 통치 의사를 어떻게효율적으로 실현하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일만 정위이건, 일만 비율이건, 총무청 중심주의건, 내면 지도건 모두 국법상의 권한과 사실상의권한이라는 양면성을 표상하면서도 그 어긋남을 호도하기 위한 미봉책이며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표면과 내면의 괴리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국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국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 그것이일·만 관계의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 P203

푸이는 자신과 천황을 정신일체로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천황에 대한 불충이라는 낙인을 들고 나옴으로써 일계 관리와 관동군을 견제할수 있기를 바랐다. 천황에 대한 재만 일본인의 충성심을 역이용했던것이다.
그러나 푸이의 전략은 반드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일계 관리와 관동군 군인들에게 푸이를 천황과 동일시해야 할 필연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만주국의 제제를 천황제와 유사한 형태로 만드는 것에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천황제의 황실에 대응하여 제실이 만들어졌고, 국문장에 대응하여 제제 실시 후 일본식으로 난화(花)가 문장이 되었다. 이외에 궁성(宮城)에 대응한 제궁(宮), 행행(行)에 대응한 순수 나중에 순행), 어진영(御眞)에 대응한 어용(御容: 나중에 어영御影), 황위에 대응한 제위, 황후에 대응한 제후라는 식으로 만주국제제는 천황제의 모조)로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 P255

본래 사령관 "마음대로 군대를 진퇴시키는 것은 사형에 처한다"라는 육군 형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만주사변을 일으킨 혼조 시게루 사령관 이하 관동군 참모들은 군법회의에서 심문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조는 대장으로 진급하고 남작을 수여받은 데다시종무관장의 중책에 임명되고, 이시하라 등에 대해서도 진급 서훈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율과 명령계통을 무시하더라도결과만 좋다면 상을 받는다는 풍조가 군부 막료 사이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견 군인들의 공명심은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을 취하려고 내몽 공작과 화북에 대한 정치적 · 군사적 진출로 내달리게 되었고, 이러한 풍조는 이윽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盧講橋)사건의 발발로 나타났던 것이다. - P275

일. 만 관계가 진정으로 새로운 이념하에서 독자적인 국제관계를 창출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 적합한 개념과 체계로써 구미의 정치학이나 법률학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명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구미의 정치학과 법률학에서 말하는 ‘괴뢰국가의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시아 역사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고 지적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아시아 역사 자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역사란 말인가. 건국 이래 일관되게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지탄해 왔던 중화민국과 삼십 몇 만이나 되는 반만항일군 전사들, 그리고 앞에서 든 겐코쿠대학의 중국인 학생은는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아시아를 거론할 때 우리들
일본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아시아 담론을 기만의 방패로삼아 왔다. 만약 자신의 삶을 경멸할 생각이 없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아시아‘라는 담론으로 자신과 타자를 함께 속이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생각한다. - P334

재만 조선인은 만주국 시대에 일본인=‘동양궤이즈(東洋鬼구)‘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얼웨이즈(鬼)‘로서 전후에는 참혹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귀국도 할 수없어 11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주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은 일본인 다음가는 "만주국 중요 구성분자"로서 국방의 책무를 담당했는데,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징병 · 징용되어 중국·남방전선에 동원됨으로써 전범이 되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패전 후에는 일본국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보호나 보상의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 P399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은, 중국이 만주사변 이래 일관되게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주권성을 부인해온, ‘위(가짜)국가‘로서의 만주국을 괴멸시키고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항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에 중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이 만주국을 ‘위국가‘가 아니라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 혹은 신중국의 성립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정권과 국가의 정통성과도 관련되는 미묘한 문제를 잉태하고 있는데, 동아시아 세계의 전후를 생각하는 데 조선반도에서의 만주국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도 또한 불가능하다. - P408

대한민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외에도, 최규하 대통령 등의 대동학원 출신자, 강영훈 총리나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등의 겐코쿠대학 출신자 등, 만주국에서 육성된 인재가 전후 한국 정계의 주요 인물이었던 시기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친일파‘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와 뒤얽혀 한국에서 앞으로도논란이 될 터인데, 일본에 유학한 사람들에 비해 만주국을 거친 사람들 쪽이 자신의 능력을 살려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은 무엇보다도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통해 반만항일전쟁을 지도하여 승리했다는 것에 그 근거가 있고, 원래 김일성이라는 이름 자체가젠다오 지방의 조선인사회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상의 민족영웅의름이기도 한 것처럼, 만주와의 관련은 민족적 심성에 깊이 뿌리내리고있는 측면이 있다. - P4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은 토르구트에게 물자와 유목지를 지급했지만 그에 비할 수 없이 막대한 상징적 소득을 얻었다. 1771년 토르구트의 귀환은 세계의 군주를 자임하던 건륭제의 자존감을 한층 더 고양시키고 청의 국력과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먼 곳의 사람들이 귀순하여 찾아오게 만드는 것, 즉 회유원인懷柔遠人은 천하를 통치하는 제왕의 덕목이었고 국가의 부강함을 입증해 주는 증표였다. 토르구트가 러시아를 버리고 자진해서 청에 귀순해 온 것은 건륭제의 입장에서 회유원인의 실현이고 청의 성세를 입증해 주는 보증서였다.

중국의 학자들은 토르구트가 귀환한 일리 일대가 귀환 당시 청의 영역이었고 현재 중국의 영역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토르구트와 그들의 본령이었던 서몽고 오이라트와의 관계는 무시하고 준가르 제국의 의미를 축소하며 토르구트가 그들의 조국인 청에 귀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추어 재단하는 환원론teleology적 시각이며, 현재와 과거를 착종시킨 시대착오적anachronism인 서술이다. 이런 시각과 서술로는 토르구트의 역사만이 아니라 중국의 변강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에카테리나 2세의 식민지배 정책으로 인해 토르구트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다. 정치와 행정의 자치권은 러시아에 의해 박탈당했고 가축을 유목하는 초지도 잠식당했다. 이들은 러시아로부터 탈출했다.
토르구트의 탈출은 단순히 러시아 변경의 일개 부족의 이탈로 그친 문제가 아니었다. 토르구트의 탈출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해도 이들이 아무런 저지 없이 러시아 변경을 빠져나간 사건은 러시아 변경의 방어선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러시아인들은 흑룡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부족민들을 약탈했다. 러시아인들은 1650년 흑룡강 상류역의 다구르인 거주지인 약사Yaksa, 雅克薩에 알바진 요새를 세우고 흑룡강 연안의 부족민을 본격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야삭이라고 부른 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했다.
172)
청은 입관 후 수십 년간에 걸쳐 중국을 정복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에서 다수의 병력을 원거리의 동북방 흑룡강 유역으로 파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침입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청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아 소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현지의 부족민을 병력으로 활용하며 때로는 조선군을 동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청은 순치기에만 1652년부터 1660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수백 명 내지 1,000여 명의 소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흑룡강 유역 곳곳에서 러시아인을 공격했고 부족민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다섯 차례의 전투 가운데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 참전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후 만주 지역의 북방은 안정된 상황으로 진입했지만 청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족민을 팔기로 편제하는 정책을 계속 진행시켰다. 시버족에 대한 지배권을 코르친으로부터 이양받아 팔기로 편제한 것도 이 정책의 일환이었다.

준가르의 본거지였던 일리 일대는 인구가 텅 비어 버린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일리는 청이 신강과 몽고를 영유하기 위해서는 비워 둘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일리는 신강의 북부를 제어하는 요지일 뿐만 아니라 그 북동쪽에 있는 타르바가타이(현 신강의 탑성塔城)와 호응하여 몽고의 알타이 지역과 호브드(현 몽골국의 지르갈란투)까지 통제할 수 있는 요지였다. 청은 1762년(건륭 27) 밍슈이ming?ui, 明瑞를 일리 장군에 임명하여 일리에 혜원성惠遠城을 건설했고 그 인근에 안원성安遠城과 수정성綏定城 등을 계속 건설해 갔다. 그리고 이 주둔지들에 파견할 병사를 선발하여 배치하기 시작했다. 몽고의 차하르, 솔론, 다구르가 일리 일대에 주둔군으로 영구 파병되었고 심지어 한인 군대인 녹영綠營에서도 주둔군이 선발되었다. 시버족도 영구 파병군으로 선발되었다.

시버족은 병역의 의무 외에 자신들이 먹고 살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을 해야 했다. 이주 초기에는 정부에서 정착에 필요한 식량과 자원을 제공했지만 그것은 한정된 기간에 국한되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주둔병은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군사 의무와 경작을 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버족은 주로 벼를 재배하고 목축업도 겸하며 일리강 유역을 개발했다. 더욱이 시버족은 신강 남부의 호탄, 카쉬가르 등 무슬림 지역에 있는 주둔지에 3년씩 파견 근무를 나가야 했다. 시버족에게 부과된 임무는 상당히 과중했다. 시버족은 이주 후에 만주팔기와 몽고팔기에 배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버영錫伯營, Sibe k?waran으로서 독자적인 군대 조직을 유지했고 일리강 남안의 시버족 영역인 찹찰에서 집단 거주했다. 이렇게 분리되고 고립된 거주 형태는 시버족이 만주어를 모어로 유지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영제營制가 와해되고 민간인으로 재편되기 전까지 청의 서북 변강을 수비하는 병력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