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준비된 작전이었다. - P17

선관위는 공정한 선거 관리, 정당과정치자금 관련 사무를 담당한다. 국회와법원, 헌법재판소와 같은 지위를 갖는 독립된 헌법기관이라 계엄이 발동돼도 병력을 투입할 수 없다. 계엄군의 선관위 점령은 헌법과 법률에도 근거가 없는 명백한 위헌, 위법 행위다. 이번 비상계엄이위헌적·반헌법적 친위 쿠데타로 지목되는 이유 중 하나다. - P20

선관위는 윤석열 담화 직후, 2023년 10월10일 공개한 ‘선관위 정보보안시스템 점검 결과‘를 기자들에게 재배포했다. 자료에는 ‘선거 시스템 해킹 가능성이곧바로 부정선거 가능성으로 연결되지않는다‘ ‘선거 조작은 불가능하다. 근거없는 주장은 선거 시스템 신뢰를 떨어뜨려 사회 혼란과 민주적 정당성 훼손 위험이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선관위보안 점검에는 국정원이 참여했다. 윤석열의 주장은 사실관계가 틀릴 뿐만 아니라 극우 유튜버 등 가짜뉴스 선동 세력의주장 및 요구와 판박이다. 대통령 국가비상사태가 아닌 음모론에 따라 동원했다는 사실을 직접 자백한 셈이다. - P22

미국의 관심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윤석열이 아니다. 이들은 ‘누가 정당성을 획득한 다음 책임자가 될 것인가‘를 묻는다. 외신들은 윤석열의 대통령 하야를전제한 상황에서 이후 벌어질 수 있는 갈등에 주목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는 "대통령이 법적 권한을 가진 상태로 구속되면 감옥에서도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있다"라는 주장을 소개하며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구속 여부로 대통령 권한이 무력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짚었다. 즉 민주적 절차에 따른 사퇴, 그리고 정권 이양이지연되는 지금의 상황이 ‘계엄 쇼크‘를 여전히 지속시키는 한국의 가장 큰 정치적리스크라고 보는 것이다. 관건은 계엄 해제를 통해 보여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이 국내 정치를 안정화하는 과정에서도 발휘될 것인가이다. - P31

과거에는 일단 언론기관을 사전검열하는 선에서 기본권을 억압하고일반인의 행위는 ‘유언비어‘에 한하여 금지했다고 한다면, 이번 포고문은 언론과출판으로 대표되는 ‘기성 미디어‘ 행위보다 보통 사람들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벌이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활동 일반에더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문장 구성이 매우 난삽하여, 이게 내란적 허위 정보의 유포를 금지하겠다는 건지, 모든 종류의 허위 표현의유포는 물론 생성까지)을 금하겠다는 건지도 불분명하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으로 보면 사실상 국민의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금하는 조치로까지도 확장될 수 있는데, 이게 온당함을 넘어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이나 한 걸까? 자의적이고 선별적으로 처벌하겠다는 말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 P37

한국에서 부모가 미등록 이주 노동자이면 자녀도 미등록 이주 아동이 된다. 분명 존재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않는 아이다. 주민등록번호도, 외국인등록번호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어떤 혜택이나 지원도받을 수 없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도갈 수 없다. - P49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2021년 4월 법무부가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을 내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미등록이주 아동이더라도 국내에서 출생해 15년 이상 국내에 머물렀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업을 위한 체류자격(D-4)이 나오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더라도 1년간 임시 체류자격 (G-1)을 얻을 수 있다. ‘국내 출생, 15년 이상 국내거주‘ 조건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비판이 나오자 법무부는 개선안을 발표해 2022년 1월 외국에서 출생했더라도 여섯살 미만일 때 입국해 6년 이상 국내에서살아온 아동에게도 체류를 허락했다. 하지만 이 구제 대책은 임시 제도로, 3개월 뒤인 2025년 2월28일자로 종료된다. - P49

‘고리대 승수효과‘는 대부업체가 수익을 벌어들이는 제1의 원리다. 예를 들어 40만원을 빌려 일주일 후 이자를더해 60만원을 갚는 대출상품 (연이율2600%)을 이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일주일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빚은 40만원에서 150%로 커진 60만원이 된다. 이제 채무 원금은 60만원으로 재설정된다. 고리대승수효과는 이자가 원금에 포함되면서 빠르고 기하급수적으로 채무를 불리는 것이 핵심이다. 이제 채무자는 60만원을 빌려 일주일 후 90만원을 갚아야 하는대출상품을 이용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반복되면 여러 업체에 걸쳐 대출을 돌려가며 막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더높은 연이율이 붙어도 피할 방법이 없어진다. 결국 한번 소액급전 시장에 들어온채무자는 처음 진 빚을 갚기 위해 대출과상환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대출 시스템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린다.
상환 기간이 짧다는 것은 채무자가추심업자를 빨리 만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빚을 지고 눈 깜짝할사이에 빚 독촉이 시작된다. - P54

2008년부터 불법사채 피해자를 지원해온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은 특히등록 대부업체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점을 강조한다. "현재는 개인이 1000만원만 있어도 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해 대부업체를 운영할 수 있다. 대부중개업체는이런 금액 기준마저 없다. 등록 기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소규모, 부실 업체들이 난립한다. 정부는 공적 금융을 투입해 저신용자를 지원하는 대신 너도나도 민간 대부업체를 만들 수 있게 함으로써 피해자를 방치하고 있다." - P55

쿠팡이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하며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더라?‘라는 말이 고객들의 입에서자연스럽게 나오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게 쿠팡의 미션이다. 그들의 목표대로 세상은 굴러간다. 시간 빈곤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소비자는 편리함에 길들여졌다. 노동자의 죽음은 의식하지 못한 채. - P59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체온을 지닙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반대하는 일입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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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한국의 오리엔탈리즘
학술서와 문학 작품 사이의 역학적 관계
통치사상과 지적 규율 사이의 관계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에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 타인을 억압하고 조작하지 않고 절대적 자유와 자치의 입장에 서서 상이한 문화와 상이한 민족에 대한 연구

*문화적 지배의 구조, 자신이나 타자에게 문화적 지배의 구조를 적용했을 때 위험성과 유혹에 대한 인식

크로머가 기록한 <현대 이집트>는 1911년 일본에 번역되어 한국 침략을 위한 일본의 참고문헌으로 이용되었다?
-> 어떤 식으로 기술되어 있을지 실제 확인해보고 싶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과 그 곳에서 행한 철저한 조사에 의한 출판에 의해 유럽에 의한 서양이 동양을 점령 및 지배해도 된다는 생각의 바탕에 시작이 되었음.
그리고 수에즈 운하가 일으킨 동양, 이슬람에 대한 거리감 좁히기

오리엔탈리즘의 한계 다른 문화, 민족,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정수를 뽑아 버리며, 그것을 박탈하는 결과로 생기는 한계. 동양을 서양을 위한 구경거리로 보고 서양에 대해 고정된 그대로의 존재로 보이게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총체적으로 동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오리엔탈리즘이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동양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서양 때문이다. - P52

세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아랍과 이스라엘에 관한 인식은 가장 단순한 것조차 고도로 정치화되어 거의 혐오스러운 문제로 변했다. 첫째, 서양의 대중적인 반아랍적/반이슬람적 편견의 역사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아랍과 이스라엘 시오니즘 사이의 투쟁으로서, 그 투쟁이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문화와 대중 쌍방에게 그리고 동시에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왔다는 점이다. 셋째, 아랍이나 이슬람과 연대하거나 그것에 관하여 냉정한 입장에서 논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상황이 거의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중동은 강대국의 정책, 석유경제 그리고 자유를 존중한다는 소위 민주주의 이스라엘과, 이에 대해 사악한 전체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아랍을 대치시키는 단세포식 사고의 이분법이 세 가지 요소와 완전히 동일시되고 있다. 따라서 중동이 화제가 되는 경우 그 화제에 대해서만 분명히 얘기하는 논의가 성립될 여지가 거의 없다. - P60

그에 의하면 종속 종족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선인가를 알 힘이 없다. … 크로머에게 편리했던 점의 하나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조건은 달랐어도 동양인에 관한 취급방식이 대체로 동일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동양인은 어디에서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 P76

크로머의 서술에는 스스로의 관찰에 근거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정통 오리엔탈리즘의 권위자들(특히 에르네스트 르낭과 콘스탄틴 드 볼네)를 인용했다. 동양인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이러한 권위에 완전히 복종했다. - P79

특유의 표상적인 담론의 영역은 상상의 지리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담론에 의해 사실로 인정된 사항-예컨대 마호메트가 사기꾼이라고 하는 것-은 담론의 구성요소이며, 마호메트의 이름이 나타나는 때에는 언제나 담론의 기능에 의해 사람들을 반복시키게 한 하나의 서술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속의 여러 가지 구성요소-곧 동양을 말하거나 쓰는 경우에 언제나 사용되는 어휘-의 밑바닥에는, 표상적인 비유표현의 집합이 숨어 있다. 이러한 비유표현과 현실의동양(매지는 여기서 주된 관심 대상인 이슬람) 사이의 관계는, 연극에서 양식화된 의상과 등장 인물 사이의 관계와 흡사하다. … 그 연극무대에서는 관객도, 감독도, 배우도 유럽을 위하여, 단지유럽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 P134

동양은 그 최근 현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유럽의 먼 과거와의 일련의 접촉에 대하여 부여된, 가치평가의 집합체로 존재했다. - P158

인간적인 것과 직접 만나서 방향을 상실하는 것보다도, 도리어 텍스트의 도식적인 권위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결점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결점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특히 텍스트 의존적인 태도가 지배적일 수 있는 특수한 조건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고 위협적이며 과거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매우 가깝게 만나는 경우
-(텍스트로 인해서) 성공이 초래되는 경우
-> 지식과 현실은 담론(푸코)을 낳고 담론의 내부에서 생긴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본질은 담론의 실체적 존재나 무게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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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ing

오리엔탈리즘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19세기 초까지는 인도와 성서관련국만을 의미한 동양 사이에서 경험된 특수한 근접관계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초엽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프랑스와 영국이 동양과 오리엔탈리즘을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고 과거의 프랑스, 영국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동양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힘은, 심지어 그것이 항상 서양의 동양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시위하여 왔다고 해도 너무나도 생산적이었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내부로부터 내가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가 나타났다. - P19

오리엔탈리즘이란 지정학적 지식을 미학적, 학문적, 경제적, 사회학적, 역사적, 문헌학적인 텍스르토 분배하는 것이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이란 지리적인 기본 구분일 뿐만이 아니라, 일련의 ‘관심’, 곧 학문적 발견, 문헌학적 재구성, 심리학적 분석, 풍경, 사회학적 서술과 같은 매개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관심’을 주도면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이란, 우리의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또는 우리의 세계와 대체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배하고 조종하며, 심지어 통합하고자 하는 일정한 의지나 목적의식-그것을 도리어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도 도리어-그 자체이다. 무엇보다도 오리엔탈리즘이란 하나의 담론, 곧 살아 있는 정치권력과 직접적인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아니라, 도리어 다양한 권력과의 불균형적인 교환과정 속에서 생산되고, 또한 그 과정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식민지 제도나 제국 제도에 나타나는) 정치권력과의, (비교언어학, 비교해부학 또는 현대의 여러 가지 정책과학과 같은 유행 학문에 나타나는) 지적 권력과의, (취미와 텍스트 그리고 가치에 관한 정통성 및 규범에 수반되는) 문화적 권력과의, (‘우리의’ 행동에 관한 관념 및 ‘그들은’ ‘우리와’ 같이 행동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관념에 나타나는) 도덕적 권력과의 교환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형성된 것이다. 사실 참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이 현대의 정치적 지적 문화의 중요한 차원 가운데 하나를 단순히 대변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그 차원 자체로서, 동양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세계와 더욱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 P35

인문학의 연구는 각각의 연구, 그 주제, 그 역사적 상황이 형성하는 독특한 맥락 속에서 지식과 정치의 관련성이 갖는 성질을 정식화하여야 한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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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의 <마을과 세계>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개인의 삶에서 나아가 철학과 사회, 역사까지 아우르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절감하고 있다. 몰랐던 정보를 얻는 것도 좋지만 그녀의 삶에서 배우는 삶과 사회에 대한 통찰까지 덤으로 얻어간다. 이 고급 정보가 에세이로 담겨 쓱쓱 읽혀서 더욱 좋다.


마리아 미즈는 어릴 적부터 농민의 딸로 태어나 자급자족하는 삶을 느끼고 배웠다. 내 땅을 소유한다는 것, 사회적으로 보장되었던 공유 재산의 가치, 공동 작업과 상호 부조에 대한 중요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1930년대 이후 독일에 나치당이 사회에 뿌리 내렸고, 생활하던 마을에도 불어닥쳤지만 미즈의 부모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미즈는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기에 나치즘을 설파하는 학교 교사에 대해서도 동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30년대 후반을 지나며 아이들은 전쟁놀이가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을 짐작하며 성장했다(적군은 늘 프랑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미즈의 다섯 오빠들은 징집되어 독일 상비군으로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쟁으로 마을에 난민들이 들어닥치자 미즈의 가족들은 피난처를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 지냈다. 미즈는 그들에게서 대도시의 폭격과 기아, 파괴 등 처참한 전쟁의 피해에 대해 듣는다. 

상대적으로 서부에 치우쳐 있던 마을은 전쟁 초중반까지는 버텼으나, 미국이 프랑스를 침공한 뒤 독일까지 밀고 들어와 마을이 공격받자 지하실로 대피해야만 했다. 

그래도 전쟁은 끝이 났고 전쟁터로 떠났던 미즈의 오빠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이 험난한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즈의 어머니의 자급자족하는 자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 말이다. 


미즈가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여러 모로 인상적이었다. 

기독교 도제 하의 교육 시스템은 소년 기숙사만 제공되었고 소녀기숙사는 없었는데 나치는 체제에 협력하고 부응하는 학생을 길러내기 위해 과거의 이런 관행을 깼다. 나치즘은 문제지만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준 것은 일정 정도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여서 섬뜩하다.

15살 이후가 된 소녀는 다른 집에 가서 일을 해주는 하녀로 있다가 결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즈는 이를 거부했고 16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학교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 ‘인도’라는 세계를 만나 외국어 학습을 할 기회가 생겼고, 종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타자를 통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이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는 후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의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는 철학 하에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그 세계가 좁다고 느꼈다. 세계로 나가 변화를 돕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그녀는 인도에서 독일문화원 강사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미즈는 인도의 종교, 카스트 규범 제도와 인도 여성의 실제 삶 간의 괴리 등을 보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녀의 지인이 한 말이 후에 그의 삶을 바꾸었다. “계급 투쟁을 보았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년을 채우고 돌아오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투병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그녀를 받아줄 만한 그릇의 사회가 아니었다. 1968년의 세계적 분위기 속에서 미즈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마르크스주의에 감화를 받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가 그녀를 행동하는 삶을 지속하도록 만들었다. 

가톨릭교로 자란 그녀는 야간시국기도회의 참여를 통해서 종교(교회)와 정치가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는 여성 차별과 억압 문제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71년 1월 야간시국기도회 체제공개비판 선언을 통해 그녀는 종교가 더는 억압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버린다.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쾰른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을 통해 여성에 대한 사적 폭력이 공적인 사회 문제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도왔다. 페미니스트 연구 방법론을 통해 자본주의 하에서의 여성의 가사 노동이 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는 비단 여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농민과 농촌은 낙후되고, 노동자와 도시는 진보적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다. 

나는 ‘노동’, ‘생산 노동’ 같은 용어를 명확히 하고 싶을 때마다 마르크스의 파란색 책을 꺼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의 정의는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의미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1972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Luxemburg, 1913)을 읽은 사람은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룩셈부르크가 ‘자본 축적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비자본주의 환경’도 점점 더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어떻게 증명했는지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 ‘비자본주의 환경’이 농민, 소규모 수공업자, 일용직 및 식민지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엔에서 정한 ‘비공식 부문’의 착취는 필연적으로 이들의 생계를 파괴한다(Bennholdt-Thomsenm, 1981).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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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22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읽은 글들, 페이퍼 보며 다시 정리가 되니 좋네요^^
끝까지 잘 읽을 수 있겠죠?
전 1/3쯤 남았네요~~~

거리의화가 2024-12-23 07:56   좋아요 1 | URL
은하수 님 저도 정리 차원에서 올렸는데 도움이 되신 것 같아 기쁘네요^^
1/3이면 얼마 안 남으셨네요. 크리스마스가 껴 있는 주인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뒤숭숭해서 연말 분위기는 안 나지만 모쪼록 마음만은 따뜻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추운 날씨 건강 잘 챙기시구요!
 

2

1939년 이후 우리 마을과 헛간에는 항상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에는보병들, 그다음에는 다른 육군 부대가 여럿 왔다. 1944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는 나치친위대(SS)가 왔다.
군인들은 향수병에 시달리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들은 마을 사람을만나고 싶어 했고 우리 집 거실과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우리는 겨울에 유일하게 따뜻한 방인 부엌에 라디오를 하나 놓았고 그곳에 모여 뉴스나 음악을 들었다. 내 동생들은 군용 빵이나 ‘야전 주방‘에서 가져온 음식을 주는 군인들과 함께 놀았다. - P63

아우엘은 다운에서 처음국가사회당(NSDAP) 단위가 생긴 마을이었다. 규모가 꽤 큰 소방대 행렬이 나치 깃발을 휘두르는 사진이 내게 있다. 1934년의 학교 사진도 있는데 소년들은 나치 완장을 찼다. 사진 속 큰언니는 세 살이던 나를 팔에 안았다.
국가사회당과 나치돌격대 (SA)의 구성원은 주로 실업자였다. 이 젊은이들은 종종 노래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며 마을을 행진했다. 아버지는그들을 경멸했고 ‘게으름뱅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도 그들을 미워했고특히 오만한 지역당 지도자를 싫어했다. 1930년대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중앙당에 동조했다. - P61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 "삶은어떻게든 계속될 거야"라고 혼잣말만 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인 농부의 아내지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겠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해 자연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것을 알았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것이 어머니의 소망, 열정, 철학이었고 그녀에게 용기와 활력을 주었다.

지금까지-특히 전쟁과 재난 이후-딸, 아들, 남편, 자연을 위해 삶이 계속되도록 책임진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었다. 남성이 자연과 외국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 그 뒤를 치우는 것은 여성이다. 우리는 가부장적 전쟁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전쟁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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