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안은 며칠 전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었는데, 톨루이 칸이그의 침소에 왔다. 무당(qâm)들은 그들이 늘 그러하듯이 주문을 외우고나무로 된 잔에 담긴 물에 그의 병명이 적힌 글]을 씻었다. 톨루이 칸은형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그 잔을 움켜잡고는 정성을 다해서 이렇게 말했다. "오, 영원한 신이시여! 만약 죄를 지었다면 제가 더 많이 지 - P60

었음을 아소서! 여러 지방을 정복할 때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식들을 포로로 삼아 통곡케 했습니다. 만약 [용모의 준수함과 뛰어난 재주 때문에 우구데이 카안을 데려가시는 것이라면, 제가더 준수하고 재주가 더 많습니다. 그를 용서하시고 그 대신 저를 당신에게 데려가소서!" 그는 성심을 다해서 이렇게 말하고는 병을 씻어낸 그물을 마셔 버렸고, 우구데이는 회복되었다. 그[톨루이]는 허락을 요청한 뒤 출발했으나, 며칠 뒤 병이 들어 사망하고 말았다. - P61

밤중이 되어 카안은 과도한 음주로 인해 잠자던 도중에사망하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카툰들과 아미르들은 이바카와 그의 아들이 술잔을 받쳐 들었기 때문에 필시 카안을 독살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카안의 젖 친구(kukeldâsh)이자 잘라이르 종족 출신의 중요한 아미르였던 일치다이 노안은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 이바카 베키의 아들은 바우르치이고 [이제까지 줄곧 잔을 받들어 왔다. 또 카안은 항상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셨다. 무엇 때문에 카안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해야 하는가? 그에게는 운명의 시간이 온 것이니, 다른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과도한 음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지나친 음주가 마침내 그와 같은 해악을가져오게 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 P102

아주 늙고 병든 어떤 사람이 카안의 어전에 찾아와서, 자기에게 금 200발리시를 오르탁)의 형식으로(bi-sabili ortâqi) 달라고 청원했다. [카안이] 주라고 명령하자 신하들은 "이 사람의 일생은 하루의 저녁에 다다른 셈입니다. 그는 거처도 자식도 친척도 없고, 아무도 그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카안은 "그는 일생 동안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았고 [이러한] 기회를 잡으려 했는데, 그를 나의 궁전에서낙담케 한 뒤에 돌려보낸다는 것은 고귀한 뜻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지고한 신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 이 같은 제왕의 지위에도 어울리지않는 일이다. 그가 청원한 것을 신속하게 그에게 주도록 하라. 그가 최후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희망을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 P121

그가 장성하게 되자 항상 아버지와 함께 그를 모시고 있었고 좋을나 힘들 때나 도왔다. 그러나 그와 그의 형제들 즉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사이에는 항상 (156r]「128v 반목과 다툼과 불화가 벌어졌고, ····… 때문에 그와 톨루이 칸 및 [톨루이의 일족, 이 양측은 서로 일치 · 단결의길을 걸었으며, 그들은 결코 비난하는 일이 없었고 그의 출생의] 건전함(sabih)을 인정했다. - P152

어제 나는 그와 속보로 말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내가 카안과 시합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법도인가? 그랬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지었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야사에처해질 수 있도록 온 것이다. 나를 처형할지 아니면 곤장을 칠지 명령을내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고그에게 더 많은 애정을 느끼며 공손하게 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보내어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는 나의 형이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어찌해서 신경을 쓰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고, 마침내 카안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그는 말 아홉 필을 바치고 고두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또한 카안이 차가타이의 목숨을 용서해 주고차가타이는 면죄의 대가로 고두한다는 사실을 듣고 또 알도록 하기 위해 비틱치들은 이러한 내용을 선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는오르두에 들어와 유창한 언변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그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더욱 합심 · 단합하게 되었고, 다른 친족들은 [카안의] 명령서(khatti farman)에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의 길을 다졌다. - P2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문
홍범도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어 형용사 ‘카코스(kakos)‘
의 최상급 ‘카키스토(kakisto)‘에 ‘지배, 통치‘를 뜻하는 ‘크라시(cracy)‘를 합쳐서 만든 말이다. 카코스가 ‘나쁜, 못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카키스토크라시를 흔히 ‘가장 저열한 자들의 지배 정도로 번역한다. 이 말은 원래 17세기영국 내전 시 왕당파에서 의회파를 공격할 때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귀족정)‘
의 반대말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즉 아리스토크라시를 교양, 품위, 덕성 등을 갖춘 통치로 규정한 사람들이 그 반대의 의미를 담아 카키스토크라시라는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다.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오늘날카키스토크라시는 낯선 말이 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 말이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통해 실제로 가장 저열한 방식의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P2

국방부 당국자는 ‘독립군‘과 ‘빨치산‘이라는 용어가 서로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 양 이해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용법은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다. 식자층의 웃음을 자아낸다. 빨치산이란 말은 러시아어 ‘파르티잔 - P16

(IIapru3aH)‘에서 온 외래어로서 비정규전에 종사하는 무장부대를 가리킨다. ‘비정규군‘이란 뜻이다. 1919~1922년 시기에 러시아어로 작성된 문서 속에서 ‘한인 빨치산‘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면, 그 용어는 한국어의 ‘독립군‘이나 ‘의병‘을 번역하는 용어로 사용됐음이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빨치산‘이란 말은 ‘독립군‘과 동의어였다. ‘빨치산‘이란 말을 ‘공산주의 무장부대‘로 사용하는 용례는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났음을 유의해야 한다. - P17

홍범도부대 440명은 6월 2일, 고려혁명군의 주도권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대한의용군주둔지를 벗어나 고려혁명군 주둔지인 자유시로 이동했다. 6월 7일에는 총군부 군대(최진동 부대)의 1/4에 해당하는 군인 70명과 국민회군사령관 안무)이 뒤를따랐다. 이러한 행동은 당면한 무장충돌의 위험으로부터 북간도 군인들의 안전을 보장한 지혜로운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간도 무장부대의 지휘관인 홍범도와 최진동은 쌍방간의 무장충돌을 우려하여 평화적인타결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전이 있기 전에는 수차례에 걸쳐 쌍방간에 긴밀한 협의가 있었다. 자유 주둔 병사대회(6월12일), 양측 분대장 이상 통합장교회의(6월 19일), 양측 병사대회(6월22일), 양측 군인대표회(6월 23~24일) 등이그것이다. 여기서 북간도 군인들은 평화적인 통합을 지지했음이 확인된다. 030이로 미뤄볼 때 국방부가 제기한 의혹은 사실의 근거가 박약함을 알 수 있다. 홍범도는 1921년 6월 28일에 있었던 비극적인 무장해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그와는 반대로 평화적인 통합을 지지했다. 그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라는 주장은 사실과 무관한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 P21

일제 식민지 시대에 소련공산당은 한국독립운동의 우군이었다. 레닌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200만 금화 루블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그중에서 도합 60만 금화 루블이 실제로 지급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수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과의 제휴를 다각적으로 모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권대사 한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었다. 이승만조차 소련의 독립운동지원을 얻기 위해 밀사 이희경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국제공산당이 소집한1921년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독립운동계의 다수 단체들이 56명에 달하는 최대대표단을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서는1927년에 소련에 거주하던 홍범도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한국독립운동의 발전을 위한 자연스럽고 합목적적인 선택이었다. 소련과 일본은 시종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도 소련과 미국은 일본에 맞서 싸운 연합국이었다. 1946년에 냉전이 개시되기 전에는 소련과 공산당은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 독립운동의 우군이었음을이해해야 한다. - P22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거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주력군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그랬다.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비밀결사 운동에서나, 해외 망명지의 무장투쟁과 정치·외교 활동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 영토에 거주하는 혁명가가 현지에서 공산당에 입당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에 맞서는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과 국제주의 보편성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됐으리라고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적대의식은 냉전이 격화된 이후에야 생겨났음에 유의해야 한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更始가 장수를 보내어 武關을 공격하게 하자, 三輔의 鄧曄과 于匡이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에 호응해서 武關을 열어 漢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여러 縣의 大姓들이 또한 각각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 장군이라 칭하였으며, 長安 부근에 있던 군사들이 사방에서長安城 아래로 모여들었다. 9월 戊申에 군대가宣平門을 따라 들어가니, 불길이 掖庭의 承明殿에까지 미쳤다. 王莽이 불길을 피하여 宣室로 달아나서 자리를 돌려 자루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앉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德을 내려 주셨으니, 漢나라 군대가 나를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庚戌日 아침에 여러 신하들이 王莽을 부축하여 漸臺로 갔는데, 申時에 여러 군사들이 漸臺에 올라가 王莽의 머리를 베고 王莽의 몸을 분해하여 마디마다 해체하고 살점을 나누니, 다투어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 王莽의 머리를 파발마로 전달하여 宛邑에 이르자 시장에 매다니, 백성들이 함께 때리고 혹은 그 혀를 잘라 먹었다. - P1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한(北漢)이 방산채(方山寨, 四川省 巴中市)와 아이채(雅爾寨) 두 성채(城寨)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쳐서 물리쳤다.

황제는 이미 광남(廣南)지역을 평정하고 나서 점차 강남국(江南國)을 처리하고자 하였지만 정왕(鄭王)인 이종선(李從善)이 입공(入貢)을 하였으므로 드디어 이를 보류하였다. 강남국의 주군은 크게 두려워하여 이달에 처음으로 제도(制度)를 덜어내서 령(令)이라는 용어를 내려서 교(敎)라고 하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을 고쳐서 좌·우내사부(左·右內史府)로 하였으며, 상서성을 사회부(司會府)로 하였고, 그 나머지 관부의 명칭도 대부분 고쳐서 정하였으며, 궁전에서는 치문(?吻)19을 모두 제거하였다.


유창은 해문진(海門鎭)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진주를 채취할 수 있는 사람을 미천도라고 불렀다. 무릇 진주를 채취하려면 반드시 발에 돌을 매달고 허리에 끈을 달아서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깊으면 혹 500척이어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유창이 거주하는 건물은 모두가 대모(玳瑁)26·진주·비취로 장식하여 사치가 아주 사치하고 화려하였다.

송나라의 군사가 불 지르기에 이르자 반미 등은 불 탄 가운데서 얻은 진귀한 보배를 헌상하였고, 또 진주를 채취하는 위험스럽고 고생스러운 상황을 말씀드리니 황제는 급하게 소황문에게 명령을 내려서 가져다가 재상에 보이게 하였고, 이어서 조서를 내려서 이를 철폐하였다.

"근래에 전·복(?·?) 등 여러 주에 장맛비가 거듭하여 내리니 홍수가 걱정이다. 짐은 여러 차례 둑이 터져서 물이 넘쳐나서 일반 백성들이 거듭 곤란을 겪으니, 매번 전 시대의 책을 읽을 적에 경독(經瀆, 하류)을 자세히 고구(考究)하였다. 하후(夏后)에 실려 있는 것 같은 경우에 이르면 다만 황하를 이끌어서 바다에 이르게 하였는데, 산을 좇아서 내를 통하게 하였지 아직은 일찍이 힘을 가지고 여울져 흐르는 것을 통제하려고 넓게 높은 제방을 만들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전국시대부터는 오로지 이로움만을 찾아서 옛길을 막아서 작게 하여서 큰 것을 막았고, 사사로움으로 공적(公的)인 것을 해롭게 하여 구하(九河)의 통제는 드디어 무너졌고, 역대의 걱정거리는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무릇 진신(搢紳)과 많은 선비들, 초택(草澤, 초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평소에 하거(河渠)에 관한 책을 읽어서 물을 소개시키고 이끄는 대책에 깊이 밝은 사람이 있으면 나란히 궁궐에 나와서 편지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며 역참(驛站)에 붙여서 조목조목 상주하면 짐이 마땅히 친히 살펴보아 그 좋은 것을 채용할 것이다."

여진이 백사채(白沙寨)를 공격하여 관부의 말 3필과 백성 128명을 약취(略取)하여 갔다. 이미 그리하고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말을 가지고와서 진공(進貢)하니 조서를 내려서 이를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수령이 다시 와서 진공하며 이미 부락에 명령을 내려서 전에 노략(擄掠)하였던 백성과 말을 보내라고 했다고 말하자 조서를 내려서 그들이 전에 침구하여 노략하였던 죄를 엄히 책망하고 그들이 본받고 순종하겠다는 뜻을 칭찬하고 말을 진공하려한 사자를 풀어 돌려보냈다.

영경공주가 일찍이 옷에 수를 놓은 비취색 저고리를 입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황제가 이를 보고 공주에게 말하였다.

"너는 마땅히 이것을 나에게 주고, 지금부터는 다시는 이러한 장식을 만들지 말라."

공주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용한 취우(翠羽)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공주의 집안에서 이것을 입으면 궁궐과 친척, 마을에서 반드시 서로 본받을 것이니 경성(京城)에서 취우의 값이 높아지고, 하급 백성들은 이익을 쫓게 되어 펼쳐 돌아가면서 판매하고 교역할 것이며 산 것을 상하게 하는 것이 넓게 물들어 갈 것이다. 마땅히 석복(惜福)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데, 어찌 이 나쁜 것을 만드는 실마리를 열 수 있겠느냐?"

공주가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였다.

"관가(官家, 황제를 가리키는 말)께서는 천자가 되신 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하여 황금으로 장식된 견여(肩輿)를 사용하면서 타고서 출입할 수 없습니까?"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사해(四海)의 부유함을 가지고 있으니 궁전을 금은으로 장식한다 하여도 힘으로는 역시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내가 백성들을 위하여 재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망령되이 쓸 수 있겠느냐? 옛말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지만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봉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으니 만약에 자신을 봉양하라는 뜻이라면 백성들이 무엇을 우러러보겠는가?"

이승진이 말하였다.

"장종은 수렵을 좋아하고 고식(姑息)적으로 병사를 거느리기에 힘썼으니 매번 근교에 나갈 적마다 금병(禁兵)의 위졸(衛卒)들은 반드시 말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차갑고 춥다고 알리고 이어서 구해주기를 바라면 장종은 즉시 그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대개 위엄이 시행되지 않았고, 항상 하사하는 것에는 절도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20년간 황하를 사이에 두고 싸워서 천하를 얻었으면서도 군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들을 단속하며 그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를 멋대로 하며 이것으로 다가 갔으니 진실로 아이들의 장난이었다. 짐은 지금 사졸들을 어루만지고 기르는데, 진실로 작위를 주고 상 주는 것에서 인색하지 않을 것이지만 만약에 나의 법을 어기면 오직 칼날만 있을 뿐이다."

봄, 정월 정유일(6일)에 쇠로 부도(浮圖)와 불상(佛象) 그리고 인물의 쓸데없는 것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농기구를 훼손하여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전에 운주(?州, 山東省 ?城縣) 노현(盧縣, 山東省 濟南市)의 현위(縣尉)였던 언릉(?陵, 河南省 許昌市) 사람 허영(許永)이 나이가 75세인데 예궤(詣?)18하여 말하였다.

"아버지 허경(許瓊)은 나이가 99세이고, 큰형은 나이가 81세이며, 다음 형은 나이가 79세이니 빌건대 가까운 지방의 관직 하나를 주셔서 가서 봉양하게 하여 주십시오"

경자일(9일)에 허경을 불러 편전에서 만나보고 근래의 일을 물었는데 허경은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에게 후하게 하사하고 바로 허영에게 언릉현령을 제수하였다.

북한(北漢)에서는 처음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군비(軍費)를 부담하게 하였고, 문무관원들의 녹봉을 감액했는데 재정에서 쓸 것을 공급하지 못하였던 때문이다.

갑자일(9일)에 요(遼)의 특리곤(特里?, ?隱)인 야율휴격(耶律休格, ? ~998)이 당항(?項)을 쳐서 이를 깨뜨렸고 그 포로와 획득한 것을 헤아려 올렸다. 야율휴격은 일찍이 북부재상 소간(蕭幹)을 좇아서 실위(室韋)와 오고(烏庫) 두 부(部)를 치는데 공로를 세웠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전적(戰績)이 드러났다.

이달에 고려왕인 왕소(王昭)가 죽고, 아들 왕전(王佃, 고려 5대 경종)이 즉위하였다.

3월 초하루 을묘일에 방주(房州, 湖北省 房縣)에서 후주(後周)의 정왕(鄭王, 953~973)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황제는 소복을 하고 발상하고 조회에 10일 동안 나가지 않았고, 시호를 공제(恭帝)라고 하고 경릉(慶陵)의 옆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게 하고 순릉(順陵)이라고 불렀다.

요(遼)에서는 황후의 할아버지를 한왕(韓王)으로 삼고 아울러 그 백부(伯父)에게 관직을 증직하였는데, 황후가 용사(用事, 집권)한 연고였다.

강남국에 기근이 들었는데, 강남국의 주군에게 조서를 내려서 유시하고 배를 빌려서 호남(湖南)지방의 쌀과 밀을 조운하여 그들을 구제 하였다. 신해일(27일)에 강남국의 주군이 사자를 파견하여 진공품(進貢品)을 올리며 은덕에 감사하였다.

야율찰극(耶律察克)이 세종을 시해하자 야율오진은 목종(穆宗)을 보호하여 어려움을 면하게 하고 여러 조정을 섬기면서 공로와 치적을 누차 드러났고 요나라에서는 의지하는 중신이었다. 죽으니 57세였는데, 요주(遼主)가 아프게 애도하며 3일 동안 조회를 거두었다.

계해일(10일)에 요(遼)의 유열(裕悅, 于越)인 야율오진(耶律烏珍, 屋質, 915~973)이 죽었다. 야율오진은 간결하고 조용하며 그릇이 되었고, 식견이 있었는데 일을 급하게 만나게 되어도 이를 처리하는 것이 종용하여서 다른 사람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신미일(18일)에 여진(女眞)이 요(遼)의 변경을 침범하여 요의 도감(都監)인 달리실(達里迭) 등을 죽이고 변경에 사는 백성과 소, 말을 노략질해서 몰고 갔다.

6월 경인일(8일)에 여진이 그 재상으로 하여금 요에 조근(朝覲)하게 하였다.

공로를 세워서 당연히 관직을 올려 주어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는 평소에 그 사람을 싫어하여 주지 않았다. 조보가 힘껏 그에게 주기를 청하였더니 황제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짐이 관직을 올려주지 않겠다면 장차 어찌 할 것인가?"
조보가 말하였다.
"형벌을 주어서 악한 것을 징계하고, 상을 주어 공로 세운 것을 갚아 줍니다. 형벌을 주고 상을 주는 것이란 천하 사람들의 형상(刑賞)이지 폐하의 형상이 아닙니다. 어찌 즐거워하고 화가 나는 것으로 이를 오로지 할 수 있습니까?"
황제가 듣지 않고 일어나니 조보가 그를 좇아갔다.

조보가 진수 지역으로 나가서 편지를 올려서 스스로를 변명하여 말하였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신(臣)이 황제의 동생이신 개봉윤을 가볍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황제의 동생께서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덕을 온전히 가지었으니, 어찌 틈새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소헌황태후(昭憲皇太后, 902~961)가 크게 위독하실 적에 신이 실제로 고명을 들었는데, 신을 아는 사람은 군주이시니 원컨대 밝히 살펴 주십시오!"
황제가 그 편지를 봉함하여 이를 금궤(金?)에 감추었다.

기사일(19일)에 황제의 동생인 개봉윤 조광의(趙光義, 939~997)를 책봉하여 진왕(晉王)으로 삼았다. 산남서도(山南西道)절도사 조광미(趙光美, 947~984)를 영흥(永興)절도사 겸시중으로 삼고 황제의 아들인 귀주방어사(貴州防禦使) 조덕소(趙德昭, 951~979)를 산남서도절도사·동평장사로 삼고, 이부시랑·참지정사인 설거정(薛居正)을 문하시랑으로 삼고, 추밀부사·호부시랑인 심의륜(沈義倫, 909~987)을 중서시랑으로 삼고 나란히 평상사로 하였으며, 한림학사·지제고인 노다손을 중서사인·참지정사로 하고, 좌교위(左驍衛)대장군 판삼사인 초소보(楚昭輔, 914~983)를 추밀부사로 삼았다.
임신일(22일)에 진왕 조광의에게 조서를 내렸는데, 반열이 재상의 위에 있게 하였다.

11월 초하루 신해일에 요(遼)에서는 처음으로 목종(穆宗)을 시해한 역당(逆黨)인 근시 소격(?格)·화격(華格)·석곤(錫袞) 등을 붙잡아 함께 복주하였다. 요주가 도적을 토벌하면서 느슨하게 하자 논의하는 사람들이 이를 가볍게 생각하였다.

12월 무술일(18일)에 북한(北漢)에서 기원(紀元)을 고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요(遼)에 명령을 내려 주시기를 품의(稟議)하였다.

참지정사 노다손·지제고(知制誥) 호몽(扈蒙, 915~986)·장담(張澹, 919~974)에게 명령을 내려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장정·순자격(長定·循資格)》과 일반적으로 내리는 제서(制書)를 가지고 어긋나고 다른 것을 상고하여 정하고 중복되는 것을 잘라 없애며 빠지고 누락된 것을 보충하여 《장정격(長定格)》 3권, 《순자격(循資格)》 1권, 《제칙(制?)》 1권 그리고 《기청조(起請條)》 1권을 만들게 하였는데, 책이 완성되자 이를 올렸다. 반포하여 영구적인 격식으로 하니 이로부터 전선(銓選)과 주수(注授)하는 것이 더욱 조리가 있었다.

애초에 북한의 주군은 대내도순검(大內都巡檢)이었는데, 효화제(孝和帝)는 그가 어리고 나약하여서 유계흠(劉繼欽, ? ~973)에게 명령하여 그를 돕게 하고 금위(禁衛)의 일을 맡겼다. 북한의 주군이 서자 유계흠은 시기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병들었다고 사죄하면서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북한의 주군이 말하였다.
"유계흠은 다만 먼저 돌아가신 황제를 섬기었는데, 어찌 나를 위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인가?"
마침내 내쫓아 교성(交城, 山西省 呂梁市)에 거처하게 하면서 원침(園寢)을 받들게 하고 얼마 후에 사람을 파견하여 그를 죽였다.

3월에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요(遼)에 보냈었는데, 요의 사자인 탁주(?州, 河北省 保定市)자사 야율창주(耶律昌珠, 耶律昌朮, 929?~979)가 시중(侍中)의 직함을 덧붙여가지고 와서 빙문(聘問)하며 강화(講和)하였다.

요의 야율희곤(耶律喜袞, 耶律喜隱)이 스스로 고쳐 책봉하여 송왕(宋王)이 되어 뜻을 얻어서 교만하게 되었고, 요의 주군이 그를 불렀는데, 때맞추어 도착하지 아니하자, 화가 나서 그에게 채찍질을 하였다.
이로부터 분하여 원한을 가지고 반란할 것으로 모의하다가 합문사(閤門使)인 작고(酌古)의 아들인 해리(海里)에게 고발되니 야율희곤은 걸려들어 폐출(廢黜)되었다.

노다손이 이미 돌아오고 나자 강남의 주군은 황제가 남쪽을 정벌하겠다는 뜻을 가진 것을 알고 사자를 파견하여 책봉(冊封)받기를 원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이에 다시 합문사(閤門使) 양형(梁?, 928~986)을 파견하여 사자로 가게 하였다.
양형이 종용히 강남국의 주군에게 물었다.
"조정에서 지금 시료(柴燎)의 예(禮)를 거행하는데, 나라의 주군께서는 어찌 제사지내는 일을 돕지 않으십니까?"
강남국의 주군은 ‘에에’ 하면서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양형이 돌아오자 황제는 비로소 이를 칠 것을 결심하였다.

번약수는 황제에게 계문을 올려서 노모와 친척들이 모두 강남국에 있어서 이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우니 영접하여 치소(治所)에 오게 하기를 원하였다.
황제가 즉시 강남국주에게 호송하도록 조서를 내리니 강남국의 주군이 명령을 들었고, 무진일(22일)에 번약수에게 조서를 내려서 찬선대부로 삼고 또 사자를 파견하여 형주(?州)와 호주(湖州)에 가게 하여 번약수의 계책대로 큰 배와 황흑용선(?黑龍船) 수천 척을 만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군정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선의 통로는 고문회의의 조직이었다.
고문회의라는 조직 형태는 한민당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명망과 식견을 구비한 인사로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과 인사에 자문케 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수용되었다. 윌리엄스는 하지로부터 미군정을 위해 전국 고문회의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지만,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한민당에서 나왔고, 윌리엄스를 통해서 하지의 재가를 받은 것이었다. 고문회의는 일제 시기 어용기관이었던 중추원(中樞院)의 재판이었는데, 좌파는 인민공화국의 약화를 우려했고, 우파는 임시정부의 약화를 우려했다. 한국인들의 열광적 환호도 없었다. - P320

한민당은 미군정기 핵심 국가 권력기구였던 고문회의(김성수, 송진우), 경찰(조병옥, 장택상), 사법부(김병로), 검찰(이인) 등을 장악했다.
고문회의를 통해서 주요 직책에 한민당원을 추천했으며, 공권력의 핵심인 경찰, 검찰, 법원을 한민당원들이 장악함으로써 미군정기에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다. - P332

이승만과 한민당, 미군정은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슬로건으로 내건 정당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독촉중협을추진했으며, 이는 미국 기록에는 전한국국민집행부·통합고문회의·정무위원회로, 이승만 기록에는 국무회의 · 국정회의·민의 대표기관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독촉중협은 좌파와 중도좌파는 물론 임시정부 세력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성립은 되었지만 내용적으로 실패를 면할 수 없었다.
또한 좌파·중도파 임시정부 세력을 포함한 민족통일의 완전체가 모스크바회담 개최 이전에 완성되었어야 하지만, 시기적으로 이미 늦은 상태였다. - P4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