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홍범도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어 형용사 ‘카코스(kakos)‘
의 최상급 ‘카키스토(kakisto)‘에 ‘지배, 통치‘를 뜻하는 ‘크라시(cracy)‘를 합쳐서 만든 말이다. 카코스가 ‘나쁜, 못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카키스토크라시를 흔히 ‘가장 저열한 자들의 지배 정도로 번역한다. 이 말은 원래 17세기영국 내전 시 왕당파에서 의회파를 공격할 때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귀족정)‘
의 반대말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즉 아리스토크라시를 교양, 품위, 덕성 등을 갖춘 통치로 규정한 사람들이 그 반대의 의미를 담아 카키스토크라시라는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다.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오늘날카키스토크라시는 낯선 말이 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 말이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통해 실제로 가장 저열한 방식의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P2

국방부 당국자는 ‘독립군‘과 ‘빨치산‘이라는 용어가 서로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 양 이해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용법은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다. 식자층의 웃음을 자아낸다. 빨치산이란 말은 러시아어 ‘파르티잔 - P16

(IIapru3aH)‘에서 온 외래어로서 비정규전에 종사하는 무장부대를 가리킨다. ‘비정규군‘이란 뜻이다. 1919~1922년 시기에 러시아어로 작성된 문서 속에서 ‘한인 빨치산‘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면, 그 용어는 한국어의 ‘독립군‘이나 ‘의병‘을 번역하는 용어로 사용됐음이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빨치산‘이란 말은 ‘독립군‘과 동의어였다. ‘빨치산‘이란 말을 ‘공산주의 무장부대‘로 사용하는 용례는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났음을 유의해야 한다. - P17

홍범도부대 440명은 6월 2일, 고려혁명군의 주도권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대한의용군주둔지를 벗어나 고려혁명군 주둔지인 자유시로 이동했다. 6월 7일에는 총군부 군대(최진동 부대)의 1/4에 해당하는 군인 70명과 국민회군사령관 안무)이 뒤를따랐다. 이러한 행동은 당면한 무장충돌의 위험으로부터 북간도 군인들의 안전을 보장한 지혜로운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간도 무장부대의 지휘관인 홍범도와 최진동은 쌍방간의 무장충돌을 우려하여 평화적인타결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전이 있기 전에는 수차례에 걸쳐 쌍방간에 긴밀한 협의가 있었다. 자유 주둔 병사대회(6월12일), 양측 분대장 이상 통합장교회의(6월 19일), 양측 병사대회(6월22일), 양측 군인대표회(6월 23~24일) 등이그것이다. 여기서 북간도 군인들은 평화적인 통합을 지지했음이 확인된다. 030이로 미뤄볼 때 국방부가 제기한 의혹은 사실의 근거가 박약함을 알 수 있다. 홍범도는 1921년 6월 28일에 있었던 비극적인 무장해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그와는 반대로 평화적인 통합을 지지했다. 그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라는 주장은 사실과 무관한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 P21

일제 식민지 시대에 소련공산당은 한국독립운동의 우군이었다. 레닌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200만 금화 루블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그중에서 도합 60만 금화 루블이 실제로 지급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수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과의 제휴를 다각적으로 모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권대사 한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었다. 이승만조차 소련의 독립운동지원을 얻기 위해 밀사 이희경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국제공산당이 소집한1921년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독립운동계의 다수 단체들이 56명에 달하는 최대대표단을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서는1927년에 소련에 거주하던 홍범도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한국독립운동의 발전을 위한 자연스럽고 합목적적인 선택이었다. 소련과 일본은 시종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도 소련과 미국은 일본에 맞서 싸운 연합국이었다. 1946년에 냉전이 개시되기 전에는 소련과 공산당은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 독립운동의 우군이었음을이해해야 한다. - P22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거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주력군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그랬다.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비밀결사 운동에서나, 해외 망명지의 무장투쟁과 정치·외교 활동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 영토에 거주하는 혁명가가 현지에서 공산당에 입당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에 맞서는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과 국제주의 보편성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됐으리라고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적대의식은 냉전이 격화된 이후에야 생겨났음에 유의해야 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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