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선의 통로는 고문회의의 조직이었다. 고문회의라는 조직 형태는 한민당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명망과 식견을 구비한 인사로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과 인사에 자문케 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수용되었다. 윌리엄스는 하지로부터 미군정을 위해 전국 고문회의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지만,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한민당에서 나왔고, 윌리엄스를 통해서 하지의 재가를 받은 것이었다. 고문회의는 일제 시기 어용기관이었던 중추원(中樞院)의 재판이었는데, 좌파는 인민공화국의 약화를 우려했고, 우파는 임시정부의 약화를 우려했다. 한국인들의 열광적 환호도 없었다. - P320
한민당은 미군정기 핵심 국가 권력기구였던 고문회의(김성수, 송진우), 경찰(조병옥, 장택상), 사법부(김병로), 검찰(이인) 등을 장악했다. 고문회의를 통해서 주요 직책에 한민당원을 추천했으며, 공권력의 핵심인 경찰, 검찰, 법원을 한민당원들이 장악함으로써 미군정기에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다. - P332
이승만과 한민당, 미군정은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슬로건으로 내건 정당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독촉중협을추진했으며, 이는 미국 기록에는 전한국국민집행부·통합고문회의·정무위원회로, 이승만 기록에는 국무회의 · 국정회의·민의 대표기관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독촉중협은 좌파와 중도좌파는 물론 임시정부 세력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성립은 되었지만 내용적으로 실패를 면할 수 없었다. 또한 좌파·중도파 임시정부 세력을 포함한 민족통일의 완전체가 모스크바회담 개최 이전에 완성되었어야 하지만, 시기적으로 이미 늦은 상태였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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