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사 2 - 아시아세계의 철학 세계철학사 2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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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 이면에서 어떤 본질을 읽어내려 했고, 이 본질은 ‘실재‘였다. 반면 동북아의 ‘무‘ 등은 자연 현상에서 인간적인,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읽어내려 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 자연 현상 저편으로 넘어가 실재를 찾았고, 후자의 경우 자연 현상의 편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려 했다. - P33


서양 철학이 시작된 지중해 세계를 다룬 세계철학사 1권에 이어, 2권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세계의 철학을 다룬다. 동양 철학이 아닌, 아시아 세계의 철학이라는 말이 어색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를 동양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중국과 인도의 철학이 결이 같다고 볼 수 있는가). 동양은 서양이 부여한 용어가 아니냐 등…


세계 철학의 주요 흐름은 서구 세계의 인물과 사상을 배경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는 고중세 시기 동안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발전해왔던 서양과 동양의 세계관이 근대 세계에 와서 서양의 세계관이 힘을 압도하며 역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구 세계 철학은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세계의 철학은 자연 현상을 해석하는 역학이 시작점이 되었다.


이처럼 아시아 철학의 기본은 ‘역’의 개념이다. ‘역’이란 무엇인가. 

성인이 ‘괘‘를 긋고 ‘상‘을 관찰해 ‘사‘를 걺으로써 길함과 흉함을 밝히려 했다. 강함과 유함이 서로 밀어 (剛柔相推) 변화가 생겨나니, 그로써 길함과 흉함은 얻고 잃음의 상이요, 후회와 부끄러움(悔)은 안타까움과 짓눌림 (憂)의 상이요, 변함과 화함은 나아감과 물러남의 상이요, 강함과 유함은 낮과 밤의 상이다. 6효의 변화가 하늘·땅· 사람의 길(三極之道)을 세운다. 하여 군자는 ‘역‘의 배열에 입각해 편안히 안거할 수 있으며, 효사를 읽음으로써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군자가 거할 때는 ‘상‘을 보고 ‘사‘를 즐기지만 동할 때에는 ‘변‘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그를 도우니 이롭지 않음이 있겠는가"라 한 것이다.(「사전 상」, 2장) - P128


중국 철학은 분열을 거듭하던 난세의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묵가 철학, 노자-장자를 바탕으로 한 도교 철학, 법가 철학 등이 난립을 거듭했다. 

그러다 동북아 세계에서 ‘공자’가 나타나며 상황은 달라졌다. 중국의 사상 철학 체계에서 ‘공자’의 위상은 특별하다. 공자는 인간에게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를 넘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형이상학을 펼쳤다. 그의 가르침은 수많은 제자들이 후대에 전수하며 유교적 윤리 세계를 동아시아에 구축하며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동아시아에 공자가 있었다면 서양 세계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둘은 사는 곳도, 사상적으로도 달랐지만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전수했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았다. 물론 서구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넘어 유대-기독교적 흐름을 받아들이며 다른 형태로 진화했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여전히 동아시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도 철학은 종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대표적으로 힌두교와 불교가 있다. 이는 우파니샤드와 붓다의 가르침에서 확인이 가능한데 구체적으로는 ’욕망’과 ‘업’을 을 극복하고 ‘고(고통)’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힌두교는 브라만적 우주관을 다시 세우고 ‘범아일여‘의 사유를 다시 다듬었다. 세계는 주기적 해체와 재창조를 계속한다. 해체는 브라흐만이 세 현현을 거두어들이는 과정이고, 재창조는 다시 세 현현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 P524


붓다의 가르침은 ‘사제(四)‘라 불린다. 처음에 붓다 사유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고‘라는 ‘고제(苦諦)‘였다 일체개고. 그리고 삶의 고뇌가 어떤 이치로부터 생겨나는가를 12연기설을 통해 통찰하는 것은 ‘집제(集諦)‘이다 제행무상. 그리고 고뇌로부터의 벗어남을 12연기를 거꾸로 생각해봄으로써 이해하는 것은 ‘멸제(滅)‘이다-제법무아. 마지막으로 멸제를 이룰 수 있는 길로서 제시된 8정도가 열반적정 (涅槃寂靜)으로 ‘도제(道)‘를 이룬다. - P541


기원후 3~6세기가 되면 북방의 여러 세력들이 사분오열되어 중국을 포함한 남방으로 밀려들고, 기존의 중원 문화를 이어간 남방으로 나뉘며 다원화된 질서가 이어진다.  
유교 지식인들의 정체성은 후한 정부에서 형성된 청류, 명사, 일민 등에뿌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은 혼란의 시대인 위촉오 시대에 오히려 꽃을 피웠으며, 예전보다는 퇴락된 형태이긴 했지만 서진·동진 시대에까지도 이어지고 6조 내내 강남의 귀족제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단지 유교 지식인들 내면의 정체성 유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준 구품중정제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던 데에 있다. 이렇게 ‘기득권‘과 지식인들 자신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이 선순환을 이루면서 6조의귀족사회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무에 대한 문의 우위‘도 계속 유지되었다. 무관들도 이 귀족사회에 끼지 못하고서는 출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P622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방식은 북조의 경우와 남조의 경우가 달랐다. 북조의 경우 핵심적인 것은 왕들과 승려들의 관계였다. 왕들은 사분오열된 군사봉건제의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불교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호의적이었고, 승려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안전하게 또광범위하게 포교하기 위해 왕들의 후원이 필요했다. - P652

왕권이 약한 귀족제 사회인 6조에서 승려들은, 남조 귀족들의 문화와 어떻게 어울릴까를 고민했다. 남조의 도가적 유교 지식인들과 서역에서 건너온 또는 중국에서 불교로 개종한 인물들을 이어주는 끈은 ‘청담‘이었다. - P654


남방 지역은 이처럼 ‘문’을 우선시하는 문사-관료들이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인도에서 흘러든 불교를 받아들이며 문명과 문화를 이끈다. 


만약 아시아 세계에 서구처럼 격렬한 종교 전쟁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교와 불교, 도교의 삼교가 각자의 역할을 지킨 채 적정선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교는 정치 철학으로, 도교와 불교는 아시아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중국은 남송 시대에 가서 유학을 집대성한 주희에 의해 성리학으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성리학은 이후 중국 내 원-명-청 왕조에서 뿐 아니라 한반도의 고려-조선, 일본에까지 넓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한반도는 조선 시기 들어오면 리(理)/기(氣)의 이론을 해석을 현실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면서 주자학 이론의 실전 세계가 된다. 


주자학이 새로운 왕조가 건설될 때 특히 큰 매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우주와 인간을 잇는 웅혼한 규모의 사유, 지식인들의 영혼에 정체성을 불어넣는 인성론, 그리고 봉건사회를 정초해준 위계적 정치철학으로 구성된 높은 경지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측면이 새로운 왕조의 구축자들에게는 최상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던 것이다. 명을 세운 주원장의 경우 외관상 농민반란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주도 세력은 지주 계층이었고 주원장 자신이 건국 이후 철저히 유교적 이념에 따라 신왕조를 구축했다. 조선의 경우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세운 주축 세력이 정도전을 비롯해 모두 신진 사대부 계층이었다. 에도 막부의 경우에도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정권을 정비했다. 이처럼 주자학은 사대부(사무라이) 계층의 정신세계와 정치철학을 확고하게 지배한 철학 체계로서 동북아 전체에 걸쳐 일반 문법을 형성했다. 주자학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 자체의 철학적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한 사대부 지식인들의 권력의지 또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 P741


양명학과 성리학 간의 사상 대결도 무척 흥미로웠다. 


1권에서도 느꼈지만 2권에 와서 더욱 느낀 점은 서구 세계 사상가의 철학과 아시아 세계의 철학을 비교하며 사상의 이해를 쉽게 돕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매 페이지, 어려운 개념이나 문장에 대한 각주는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든다. 3권의 내용은 근대 세계의 사상 철학을 다루고 있다. 


동북아의 세계는 ‘작(作)‘의 세계가 아니라 ‘생(生)‘의 세계이다. 따라서 조물주 개념은 탈각된다. 역학에도 기학에도 조물주의 개념은 없다. 동북아에도 ‘신‘들은 있지만, 이들은 세계에 내재적이다. 또, 이 ‘생‘의 사유에서 설계도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서만이 인정된다. 이 때문에 기에 구현되는 선험적 질서로서의 이데아 개념 또한 없다. 다만 기 안에 잠재해 있고 기가 특정한 물(物)로서 개별화될 때 비로소 확인되는 내재적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기의 세계는 코라의 세계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경우 코라의 의미는 현저하게 바뀐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물질성, 생명성, 정신성을 내함(含)하고 있는 유일의 실체이다. - 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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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9-02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이 페이퍼 하나 읽는 것 만으로도 똑똑해지는 너낌적인 너낌 ☺️

거리의화가 2024-09-03 07:58   좋아요 1 | URL
쟝 님 철학은 어렵습니다ㅎㅎ 그런데도 철학서를 계속 열심히 읽고 스스로의 언어로 정리하고자 하시는 쟝 님의 시도에 저는 늘 탄복하네요^^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4-09-03 10:05   좋아요 1 | URL
아이 쑥스러워라… 그냥 기운이 남아서요… 🥲
 
청명상하도 - 송나라의 하루
톈위빈 지음, 김주희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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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상하도는 청명절 북송의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이 그림은 수도 전체를 그리지 않고 성 밖부터 성 안까지를 일부분 조망하여 담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지배층이 주로 그리는 가상의 산수화가 아닌, 실제 북송의 거리와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청명상하도는 비단 북송 뿐 아니라 중국 역사 전체 왕조를 통틀어도 이름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나도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세세히 뜯어볼 기회가 없었다. 청명상하도는 가로로 긴 형태로 죽편이나 목편을 돌돌 말아 보관하기에 편리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중국의 당조 이후 서화의 기본 형식). 가로는 길지만 세로는 짧기 때문에 800여 명이 하는 다양한 활동 모습이 압축적으로 그려져 확인하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장택단이라는 화가가 그렸다. 그는 부모의 명에 따라 과거 시험을 준비했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그림으로 전향해 궁정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청명상하도는 금나라의 장저라는 사람의 발문을 ‘별성가수(새로운 유파을 이루었다)’로 적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의 발문이 더해졌다(청대에 이르면 일반인들도 발문을 더함).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부의가 청명상하도를 갖고 출궁했다가 창춘의 황궁에 있었는데, 1945년 그가 급하게 도주하면서 민간에 흘러나왔다고. 1950년 둥베이 박물관에서 1953년부터 지금까지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안장되고 있다. 국보인 청명상하도가 2015년에서야 대중에 공개되었다고 하니 생각보다 아주 최근 일이다. 아직 베이징에 가보지를 못했는데 언젠가 가서 직접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청명상하도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느낀 점은 장택단의 깨알 같은 묘사력과 철저한 계산에 의한 그림 배치 능력이다. 어느 하나도 허투루 그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보는 내내 놀라움을 느끼게 했다. 



1.


여행자로 보이는 무리가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데 줄기가 끊어진 버드나무가 버젓이 그려져 있다. 왜 하필 줄기가 끊어져 있었는지 궁금증을 낳게 한다.

저자는 끊어진 버드나무가 여행자로 하여금 경계의 끈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2.


그림 속에서 중요 역할을 하는 북송의 ‘변하’(황하의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인 강)는 양식 조달 및 물자 공급에 쓰였기 때문에 실제로도 무척 중요했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어서 토사가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해 준설을 해야 했고,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해에 대비해야 했다. 


3.

청명상하도가 그려진 시기는 북송 말기로 소빙하기가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림 속 인물들 중 힘든 노동을 하는 이들은 얇은 옷을 입고 있으나 귀족이나 여행자는 두꺼운 옷을 장착하고 추위에 움츠린 모습을 하고 있다. 


4.


‘개당고’라고 바지의 뒤쪽이 트여 있는 형태의 의복을 입고 있는 남성들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남성들은 엉덩이 등이 노출되어 있으나 여성들은 그렇지는 않지만 빨래를 널어 말리는 모습을 통해서 개당고를 입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육체 노동을 하는데 개당고가 걸리적거리지 않는 편안함을 주었나보다.


5.


‘홍교’는 그림에서 중요 포인트가 되는 지물이다. 최소 8미터에 달하는 목재 다리인데 그림 속 홍교 위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는 모습이다. 말과 마차 간의 충돌, 당나귀와 사람 간의 충돌, 게다가 다리 아래에는 배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이 다리가 교각이나 교대가 없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어선처럼 배가 낮으면 모르겠는데 승객이 있는 높은 화객선의 경우는 충돌할 위험이 얼마든지 있는 상황임을 짐작하게 한다. 홍교 근처에는 네 모퉁이에 장대 위에 장식을 한 조형물인 표목이 세워져 있다. 원래 제왕이 백성의 의견을 듣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은 의미를 상실하여 그저 길을 표시하는 용도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그림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다리 목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을 통해서 상행위에 뛰어든 여성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음식 배달원들의 모습을 통해서는 이 때도 배달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점집을 통해 이때도 사람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많았구나 느낄 수 있다.  

술집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정점은 술 빚는 것까지 가능한 술집인 반면, 각점은 술 빚는 것은 안 되고 파는 것만 되는 술집이다. 술집의 방은 어느 정도의 분리는 되면서도 방음은 안 되어서 서로의 말이 다 들린다는 것도… 따뜻하게 술을 데워 마시는 주호, 온완 세트(온완 안에 주호를 넣는 것)가 있다는 것도.

사탕수수의 존재를 통해 북송 때도 사탕수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향음자라는 한약 냉차를 즐겼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4단으로 구성된 청명상하도를 각 단을 여러 개의 부분 그림으로 쪼개어 확대해 싣고, 그림의 설명(+배경)과 저자의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 그림은 해석자의 시선에 따라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저자의 해석은 참고한 채 독자의 상상력으로 다양한 해석을 해본다면 더욱 책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줄곧 옛 그림을 이해하려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해왔다. 첫 단계는 자세히 살피고 분명하게 보는 것으로, 이는 옛 그림을 이해하는 기초라 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당대 사람들과 오늘날의 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옛 그림이 새롭게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 P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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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8-31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샀어요^^
틈틈히 감상중입니다
강산무진, 촉잔도권, 몽유도원도 이런 그림들 보면서 횡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거든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4-08-31 17:18   좋아요 2 | URL
감상중이라는 말이 딱입니다^^ 저도 이 책은 틈틈이 부분으로 봐도 재밌겠다는 생각 들더라구요^^
같은 시기 한반도에서 유행했던 그림들은 무엇이었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4-09-07 0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 많이 걸렸을 것 같네요 사람이 아주 많으니... 대단합니다 이런 건 다는 아니어도 그때 사람 생활을 알게 해주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9-07 16:40   좋아요 1 | URL
네^^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인물의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는데도 동작이 다 다르고 상황이 다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세밀한 묘사 덕분에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는 그림이 된 것 같습니다.
 
[eBook] 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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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구별 짓기로 형성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감소했고,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 만큼 성숙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포퓰리즘 등이 활개치기 좋아진 상황이다. 중립성이 최선이겠지만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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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된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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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는 식민지 지배에서 시작하여 해방, 분단, 통일을 겪으며 유독 ‘민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당연히 해야만 했던 국민 체조 행하기, 국민 교육 헌장 따라하기, 교련 교육, 태극기를 향한 경례 등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강요 받은 세뇌에 가까운 개념이라 느낀다. 

2000년대 들어 탈근대, 탈민족주의 담론이 제기되면서 역사학계는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 민족주의 논쟁은 한민족의 형성, 권력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성격, 민족(국가) 중심의 인식과 서술, 국사 해체 등에 대한 성찰을 가져온 바 있다.

그러나 비단 이는 과거에만 그친 개념은 아니다. 현재도 경주는 고대 신라 시기를 컨텐츠화하여 유물, 유적화하여 보존, 박물관화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다른 한편에서는 원전을 이용한 개발 이익을 노린다). 부산은 한국 전쟁 때 외국군이 들어온 통로로  이용되면서 자유주의 평화를 강조한다. 그곳에는 UN평화로라는 이름이 존재하고, UN기념공원과 평화기념관이 있다. 인천은 근대 개항장으로 이용되었고, 한국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근대 관련 박물관들과 자유공원(맥아더 동상) 등이 있다. 


내가 생각하던 ‘민족’이란 개념은 인종과 문화가 결합된 형태였다. 민족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어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국어 학자인 이희승 선생님의 사전 정의에 따르면, 민족이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이며 국민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을 뜻한다. 전자를 문화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개념이 이희승 선생님이 정의한 개념과 비슷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원어는 nation, ethnic group, ethnicity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 중 네이션nation은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지면서도 구성원들이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개념이라면 ethnic group, ethnicity로 번역되는 에스니는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질 뿐 권리와 의무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nation은 정치적 공동체의 개념이 문화적 공동체의 개념에 더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책에서 ‘민족’은 상상된 개념으로 ‘제한된 범위의 주권을 가진 정치 공동체’라고 소개한다. 그는 민족에도 정치적 공동체 개념을 부여하였다. 민족은 과거 종교나 왕조 국가 공동체가 하던 역할을 근대에 들어서 자본주의와 인쇄 혁명이 준 가능성으로 열린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와 아메리카에 민족 국가의 모델(표준)에 만들어진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발명되었지만 식민지화된 지구들이 기술 복제의 시대에 입장하면서 형태와 기능을 바꾼 세 가지 권력 제도보다 문법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드물다. 세 가지 제도란 센서스, 지도, 박물관으로서, 이들은 함께 식민지 국가가 그 지배권을 상상하는 방식-그것이 통치하는 인간들의 본성, 그 영토의 지리학, 그 유래의 정당성-을 밑바닥에서부터 형성했다(P248). 

센서의 허구는 모두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하나의, 단 하나의 극히 분명한 지리가 있다는 것이다. [1보다 작은] 분수는 있을 수 없다(P251). 

순수한 기호일 뿐, 더 이상 세계를 향한 나침반이 아닌 지도. 이러한 모습으로 무한히 복제 가능한 연쇄에 입장한 지도는 포스터나 공식 문장, 레터헤드, 잡지와 교과서의 표지, 식탁보, 호텔 벽 등에 전이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곧바로 알아볼 수 있으며 어디에서든 가시적인 로고 지도는 인민의 상상에 깊이 침투해, 태어나고 있는 반식민지 민족주의들을 위한 강력한 휘장의 형태를 구성했다(P262). 

박물관, 박물관화하는 상상은 심원하게 정치적이다. 고대 사적을 파헤치고 개발하고, 분석하고, 전시하는 과정이 이어졌다(P267). 


베네딕트 엔더슨은 비슷한 시기 서구적 관점에 의한 민족 정의에서, 식민지 입장의 관점을 적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주로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글로벌 관점에서 지역의 폭이 좁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아 구체적 사례가 좀 더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경험은 다르니 말이다.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은 제국주의를 시행한 곳으로 다른 곳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과 민족주의 관련해서 이 책은 늘 언급된다. 때문에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했는데 독서 모임에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책을 독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첫 술에 배부르랴, 어렵지만 첫 시도였다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민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정리할 수 있었다. 민족의 범위는 어떻게 정해야 할지, 국가는 국민을 어떤 방식으로 동원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해마다 광복절에 반일 담론은 그치지를 않는다. 국가, 지방 정부의 기념 사업은 정치적 노선과 입장의 차이에 따라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한다. 그럴 때마다 국민들은 국가적 정치에 이용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상상된 네이션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 시기가 언제인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상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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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29 0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모임에서 이런 책을 보기도 하는군요 거기에서 책을 봐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겠습니다 다른 것과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람은 숫자가 많아지면 어떻게 하지 못하니 뭔가로 묶기도 하겠습니다 거기에서 큰 게 같은 나라에 사는 민족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걸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8-31 15:25   좋아요 0 | URL
독서 모임을 하면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들을 수 있으니 공부에도 도움이 됩니다.
민족주의는 과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도 끊이지 않고 소환되는데 이를 위해서 여러 모로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희선 님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4-09-02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상된 네이션이지만 아주아주 강한 담론효과를 가지지요… 마치 젠더 수행처럼… ㅠㅠㅠㅠ 화가님 공부짱짱!!! 엄청 자극 받고 갑니다! 눈건강 허리건강 잘 챙기셔요🤸🏻‍♀️🤸🏻‍♀️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4-09-03 08:05   좋아요 1 | URL
‘상상‘이라는 용어가 아주 큰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상상은 사람의 생각이 더 개입되기 쉬우니까.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쟝 님도 긴 독서 생활을 위해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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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이 관심거리가 된 듯하지 않나. 진단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공감이 사라진 시대가 온 것 같다. 인간성은 종적을 감추었고, 그 탓에 사회 각 분야에서 전에 없던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삭막한 삶은 철학을 일상과 분리시켰으며 문학은 시들어 힘을 잃은지 오래고 역사는 극소수가 즐기는 변방의 취미 정도가 돼버린 느낌이다. 사진은 어떤가. 이미지 한 장에 깃든 정신과 사상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기술에만 눈길을 준다.

최근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광복 직전 일본 히로시마에 머물고 있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금시초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P11, 12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은 이야기 두 번째, 러시아와 네덜란드 편을 펼쳤다. 이번에는 바다가 아닌 들녘이다. 러시아는 중국을 제외하고 특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공간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말 일들이 많다. 저자의 할아버지 이야기도 아버지께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영영 알 길 없는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일본에 가게 된 이유가 강제 징용 때문인지 자발적 노동자로 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공간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질문을 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 이민은 1863년 연해주에 조선인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883년 조선 월강 금지가 해제되고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인 한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1891년 한인을 3단계로 분류하는데 원호는 러시아 국적 취득자로 규정하여 관리했다. 원호들에게는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가구 당 토지를 분배하고 조세, 부역, 군역 의무를 지게 하고 상투/댕기를 정리하도록 했다. 


연추는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이다. 최재형은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연해주에 정착한 1세대 한인 중 하나였다. 이범윤은 1903년 간도관리사에 임명되여 러시아와 함께 일본과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자 연추로 이동했다. 연추에서 그는 최재형의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이후 동의회가 창립될 때 둘은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최재형과 이범윤은 물과 기름처럼 갈등했고, 결국 이범윤 측은 최재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909년 최재형은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다. 

저자도 말하지만 안중근에 대한 일화를 보니 영화 <영웅>에서 그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풀어준 일본 포로에 의해 본인이 오히려 쫓기는 사연이 나온다. 이걸 보고 있자니 그의 이론은 너무 거창했나 싶기도 하다. 나중에 그가 말했다던 동양평화론도 요원한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거창한 논리 앞에 인간의 이기심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속수무책인 것이 아닌지… 

연추의 포시예트 항구는 당시로 말하면 코리아 타운이 형성된 곳이었다. 지신허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옛터만 남아 있다. 1937년까지 1천 7백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 정도로 매우 큰 마을이었다. 이곳에 가수 서태지가 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무엇이라도 남아서 사진 작가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에 저자는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직접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블라디보스토크를 선조들은 해삼위라고 불렀다. 신한촌 개척리가 세워지고 1910년 성명회를 조직하고 일부 한인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무력 시위를 펼쳤다. 일본 영사관은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1911년 개척리 철거를 확정한다. 3천 명의 한인들은 이때 철도 공사 현장이나 광산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고. 

1917년 러시아 내전 발발 후 1차 대전에 출전해 있던 러시아 내 체코 군단은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의 의견에 따라 서부전선 합류를 할지, 동부 전선에 머물지 고민하다 체코 임시정부가 있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 체코 군단은 짐을 줄이고 경비를 마련해야 했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무장 강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서로가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영화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배경 이야기인 철혈광복단의 15만원 사건도 시작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파견된 중견 관료인 기토 가쓰미와 손을 잡고 1922년까지 밀정을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혼선을 주었다. ‘15만원 탈취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의 밀정 노릇이 더 길게 이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아무튼 일제는 더는 활용 가치가 없어진 그를 버렸다. 


네덜란드 헤이그는 현지명으로는 텐하그라고 불린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본래 1906년에 열리기로 되어 이용익이 특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로 연기되자 그 사이 사망한 이용익을 대신해 특사로 파견할 이를 구해야 했다. 이때 상동교회 교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던 상동파가 적극적인 역할에 나섰는데 이준이 상동파 청년회장이었기에 헤이그 파견자로 낙점되었다. 이상설 이외에 부사이자 통역인 이위종, 거기에 선교사 호머 헐버트도 제4특사로 함께 했다. 러시아 초대공사였던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헤이그 특사들을 위해 물밑에서 도왔다. 일제는 그를 갖은 고문, 협박, 회유 등으로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부한 채 러시아에 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되고 이범진은 10월 가진 재산을 모두 처분해 연해주 한인 사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미국 동포들을 위해 자금을 보내고 장례 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장례 비용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서 세 통을 작성한 뒤 한 작은 집에서 천장에 목을 매기까지… 그 마지막 가는 길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의 유해는 1911년 2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스펜스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헤이그에 이준열사기념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1992년 네덜란드 한 신문에 이준 열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요. 그걸 본 거예요. 그리고 한걸음에 드 용 호텔 건물을 찾았죠. 1층은 당구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에서 3층은 무주택자 임시 숙소로 쓰이고 있었어요. 건물 상태는 다 허물어져 가고 있었지요. 당시 건물은 헤이그 시 소유였는데 재개발이 추진 중이었어요. 건물을 구매하려면 공매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입주자에게 매매 우선권이 있었어요. 당시 시장에게 헤이그 특사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하는 청원서를 보냈죠. 다행히 시장이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주었어요. 그렇게 시 협조를 얻어 이 건물을 사게 됐죠. - P208

박물관 원장의 가이드에 따라 저자는 이준의 무덤을 봉환한 뒤 남은 원래 자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1907년 사망한 이준의 사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가 순국한 방 벽에는 사망진단서가 걸려 있는데 사인이 빠져 있다. 7월 14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타살인지 자살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의 죽음을 그저 황망히 생각할 따름이다. 방 한 구석에는 이준의 무덤에 처음 썼던 비석도 놓여 있다. 그 비석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우수리스크에는 아픈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상설이 눈을 감은 곳이고, 최재형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상설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뿌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 이민원, <이상설>, 2017*


만주로 망명한 뒤 내내 국외를 떠돌던 이상설은 병석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족들과 이별한 채 그리움을 안고 사망했으니 말이다. 

이범진도, 이상설도 마지막 가는 길이 참담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끝맺음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시 중심에서 떨어진 소비에트 스카야 언덕에는 1920년 4월 참변 당시 400여 명이 총살된 현장이고 최재형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언덕을 무수히 올랐다는 저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어떤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을까. 궁금증과 물음, 갈증으로 보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유시는 더 참담한 현장일 것이다. 간도 참변의 재현인 자유시 참변이 있던 현장이 아니던가. 참변 현장은 체스노코프역이고 독립군들이 매장된 곳은 클라드비세 공동묘지다. 자유시 참변 추모비는 현재 스보보드니 외곽 소벳스키 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1937년 강제 이주 전까지는 한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과거 러시아 사람들은 ‘고려촌’으로 불렀다. 자유시 참변 당시 마을 인근에서 사망한 독립군이 묻힌 인연으로 2017년 6월 9일 추모비가 세워졌다. 생각보다 참 많이 늦었다. 비석에는 아래와 비문이 적혀 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력 1921.06.28. 흑강 자유시사건 독립군순절지.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

같은 독립군들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어쩌면 남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더 충격에 빠졌을지 모른다. 한동안 해외 독립운동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하바롭스크는 김유천 거리, 조명희의 흔적, 한인사회당이 창당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제는 김알렉산드리아의 자취로도 알려진 곳이다. 김알렉산드리아는 1914년 홀로 우랄행 열차에 올라 혁명가의 길에 뛰어든다. 그녀는 현지 노동자의 인권과 처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책임서기, 회계에 선임되었다. 1918년 체코 군단이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으키자 일본-서구 연합군은 군사를 개입시키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백군과 연합한다. 미처 피하지 못한 김알렉산드리아는 잡히고, 전향을 거부한 그녀는 31살의 나이로 순국한다. 김알렉산드리아의 처형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우초스 절벽 또는 죽음의 계곡으로 두 가지 설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했다. 주인 의식이 있었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음 편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 기대되는 시리즈가 될 예정이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기록하는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일상의 관심 밖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삶의 울타리를 넘으면 무관심의 들녘이 펼쳐진다. 거기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총을 든 경비원들 뿐이었다. 그를 피해 잠시 긴장을 놓으면 어느새 버스가 떠나버리기도 한다. 들녘을 터벅터벅 걸어 어렵사리 목적지를 찾아가면 황량한 빈터가 전부이거나, 누군가 두 팔 벌려 환영해줄지 모른다는 상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기록해놓을 순 없다. 또박또박 찍어 나가는 사진은 분에 넘치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편하자고, 비용을 줄여보자고 카메라를 잘못 선택하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 같다. 누가 정해놓거나 시킨 게 아니다. 단지 당당하고 떳떳하고자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 나보다 먼저 나라를 생각하며 지금을 존재케 한 과거의 그들에게.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내게 그런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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