戴溪의 ≪通鑑義≫에 말하였다.
"王氏가 漢나라를 대신한 것이 杜게서 이루어지고 劉에게서 끝났다. 이 몇 사람들은 모두 儒學者라고 일컬어져 賢良과 直諫으로써 이름이 나고, 經書에 통달하고 옛것을 배운 것으로써 어질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이 촉망하는 바이고 天子가 소중히 여긴 바였으나 서로 더불어 나라를 그르침이 이와 같았다. 經學에 가탁하고 옛날의理를 수식하여 간사한 꾀를 쓰고 아첨함을 이루었다. 杜欽·谷永·劉歆 세사람은 은총과 녹봉에 의지하여 구차히 를 취하였고, 張禹와 孔光은 나약하고 자립하지 못하여 분을 면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일찍이 비루한 지아비와 小人만도 못할 뿐이다.
시작되어 張禹와 孔光에谷永에게서이 처음에 用事하여 국가의 권력을 도둑질할 때에는 그래도 감히 버젓이 함이 없지 못하고, 반드시 小人이 은밀히 돕고 묵묵히 가르쳐 줌이있어서 그 형세를 도와주어 이루게 한다. 저權臣들은 또한 스스로 자신들이公論에 용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반드시 명망과 재주와 지혜가 있는선비에게 가탁해서 자신들의 엄폐하니, 書生들은 대부분 욕심이 많고 剛한(굳세고 강하여 굽히지 않는)자가 적어서 이익으로 동요하기가 쉽고 禍로 위협하기가 쉽다. 그리하여 지조를 가볍게 바꾸고 깊이 스스로 결탁해서 그 말에 이르기를 ‘차라리 天子를 저버릴지언정 감히 權臣을 거스르지 못하고, 차라리 국가를 저버릴지언정 감히 권문세가를 저버리지 못한다.
하니, 아! 天子가 된 자들은 權臣으로 하여금 이러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해 - P140

야 할 것이다.
權勢가 이미 이루어져서 기염이 두려울 만하면 忠臣과 孝 중에 자신의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을 자가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黨與(도당)가뿌리를 잡아 신하들이 마음을 함께 함에 天子가 위에서 고립되어 온 조정에한 사람도 믿을 만한 자가 없게 되니, 크게 슬퍼할 만하지 않겠는가."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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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최후의 유목제국들

쿠빌라이의 휘하에 있던 투르크인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의 무대로 삼았고, 킵착 칸국 아래의 투르크인들은 비엔나 성문까지 치달았으며, 훌레구 휘하의 투르크인들도 이집트의 강가에 다다랐다. 오직 차가다이의영지인 투르키스탄의 ‘중원왕국‘에 있던 투르크·몽골인들만이 칭기스칸 일족의 세 울루스에 둘러싸여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그런데 이제 그들을 둘러싸던 담이 갑자기 허물어진 것이다. 서쪽으로트란스옥시아나를 두르고 있던 페르시아의 국가가 사라졌고, 킵착칸국이지배하던 서북방도 쇠퇴하여 길을 막을 능력이 없어졌다. 고비사막 방향으로도 ‘모굴리스탄‘이 폐허화되면서 길이 열렸고, 델리의 술탄국도 일시적으로 붕괴되어 과거 차가다이 칸국 때처럼 인더스 강을 방어할 만한 상황이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강요되었던 휴식을 보상할 기회가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외곽에 있던 투르크-몽골 울루스들만이 정복의 재미를 맛보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람들은 몽골식 전투의 영광과 보상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이제 마침내 그들의 시대가 찾아왔다.
티무르의 서사시 - 계속된 배반과 살육을 우리가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면 -는 비록 종족으로는 투르크였지만, 그리고 비록 늦기는 했어도 몽골의 서사사의 일부였던 것이다. - P590

샤 루흐는 티무르조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였다. 무시무시한 티무르의 이 아들은 비록 평화로운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훌륭한 지도자였고 용맹한 전사였다. 그는 인간적이고 온화했으며 페르시아 문학을 애호하였고뛰어난 건설자였다. 또한 시인과 예술가의 후원자였으며 아시아가 그때까지 배출할 수 있었던 가장 탁월한 군주였다. 그 과정은 칭기스칸에서 쿠빌라이로 진행된 동일한 패턴을 밟아 나갔다. 1407년부터 1477년까지의 그의 긴 치세는 문화적 방면에서 페르시아 문학과 예술의 황금기를 맞아 ‘티 - P642

무르조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가 수도로 삼았던헤라트와 그의 아들인 울룩 벡 -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 - 의 거처가있던 사마르칸드는 이 르네상스의 가장 화려한 중심지였다. 역사에서흔히 일어나는 패러독스처럼 이스파한과 시라즈를 파괴한 도살자의 아들들이 이란문화의 가장 적극적인 보호자가 된 것이다. - P643

모스크바 국가의짜르였던 ‘공포왕‘ 이반 4세 (1533-1584)는 카잔의 독립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고, 1552년 6월 강력한 포병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포위하였다. 10월 2일 그는 공세를 취하여 도시를 함락하고 남자주민들의 대부분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으며 모스크들을 부수었다.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에 편입되어버렸다. - P662

서투르키스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후라산의 주인이 된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우즈벡 제국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 4세기 반 동안(1055-1502) 수많은 투르크 및 몽골 군주들에게 복속했다가 이제 막 독립을 회복한 페르시아와 충돌하였다. 백양부의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넘어뜨리고 권좌에 오른 민족왕조 사파비 (1502-1736)는 이제 우즈벡으로부터 후라산을 빼앗아옴으로써 이란의 재통합을 완성시키려고 하였다. - P671

이 우즈벡 군주는 사파비조의 뿌리(시어파 셰이흐의 가문)를 빗댈 양으로 페르시아의 샤에게 수도자가 구걸할 때 사용하는 그릇을 보내면서세속의 권력은 칭기스칸의 자손들에게 맡겨두고 그는 자기 조상들의 직분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모욕에 대하여 샤 이스마일은 자신이수도자이기 때문에 후라산의 심장부에 있는 마쉬하드의 이맘 레자ImamReza의 성묘에 참배하러 군대를 이끌고 가겠다고 응답하였다.
페르시아의 샤는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그 당시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후방에서는 카자흐가 공격해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 티무르MuhammadTimur를 파멸시켜버렸다. 샤 이스마일은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후라산을 침공하였고 자신의 약속대로 마쉬하드에 입성하였다. 메르브에서 그를 기다리던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전투에서 패배해 그 도시 근처에서 - P671

1510년 12월 2일 살해되고 말았다. 주방 올라왔고이 승리는 동방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란 독립의 회복자가 투르크·몽골세력의 부흥자를 죽였다는 사실 - 즉 위대한 사산조 제왕들의 후손이 칭기스칸의 자손을 패배시키고 죽였다는 사실은 이제 시대가 변했고 오랜 세기에 걸친 침입을 끈질기게 참아왔던 정주민이 유목민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시작했으며 농경지가 초원보다 우위를 점하기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 P672

바부르가 통치하던 이란사마르칸드와 현재의 중국령 투르키스탄 지역과의 관계는 단절됨이 없이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트란스옥시아나 사람인 바부르가차가다이 투르크어로 책을 썼지만, 모굴리스탄의 아미르인 하이다르 미르자는 페르시아어로도 저술한 것이다. 하이다르 미르자의 주군인 차가다이가문의 사이드 칸은 투르크어만큼이나 페르시아어로 훌륭하게 말할 줄 알았다. 항공기따라서 16세기 차가다이계 마지막 칸들의 제국을 마치 쇠퇴하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유누스 칸이나 하이다르 미르자와 같이 고도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 반대였음을 입증한다. 중국인들이 그 민족적 특징과 성격을 압살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와의관계를 차단하려고 했던 이 지방은 그 당시에는 이란· 투르크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오는 각종 문화적인 훈기를 받아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쳤다. 유누스 칸의 일생이 이를 입증한다. - P691

13-14세기 중국을 지배했던 칭기스칸 일족의 황제들은 천자가 된 뒤에도 언제나 몽골의 대칸으로 남아 있었고, 지나간 19개의 왕조들의 유산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그들은 차가다이와 훌레구와 조치의 가문이 지배하고 있던 투르키스탄과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다른 칸국들의 주군이면서 동시에 칭기스칸의 후예로 남아 있었다.
반면에 만주인들은, 당시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두 삼림이거나 약간의 화전만이 있었던 자기들의 고향 만주를 제외한다면, 중원 제국이 유일한 관심거리였다. 그들이 쿠빌라이 가문에 비해 정신적인 고유성을 훨씬덜 가졌고 보다 철저하게 중국화된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쿠빌라이 가문처럼 결코 중국에서 쫓겨나지 않고 동화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종족적인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칙령을 내렸지만 1912년 그 왕조가 무너졌을 때 이미 과거 만주인 정복자들은 다수의 중국인 속에 빠져흡수된 지 오래였다. 이는 중국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그러했으며, 하북이나 산서에서 온 이주자들에 의해 퉁구스적인 요소들은 철저하게동화되고 제거되어, 민족분포를 나타내는 지도는 그곳이 완전히 중국인의땅임을 나타내게 되었다. - P719

17세기 초 그들은 거대한 팽창의 격랑에 휩싸였다. 토르구트는 바투와 금장 칸국의 자취를 따라 남러시아의 아스트라 근처 볼가 강 하류로 이주하였다. 호쇼트는 쿠쿠노르 지역에 정착해 멀리 티베트의 라사까지 지배하였다. 초로스, 즉 준가르 본부는 한쪽으로는 모스크바 국가 지배 하의 시베리아에서부터 부하라 - P745

칸국, 그리고 중국의 변경에 이르는 지역을, 다른쪽으로는 홉도에서 타쉬켄트와 홉도에서 케룰렌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들의 ‘수도’인 홉도와 쿨자는 카라코룸을 대신할 듯 보였다.
더구나 그 시대를 표상하듯이 그들은 이미 칭기스칸 일족의 성소들을약탈하였다. 처음에는 갈단의 정치적 활동에 의해, 뒤에는 체왕 랍탄과 체돈돕의 군사적 작전에 의해 그들은 라사의 군주가 되었고, 라마교회의영적인 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카쉬가르와 야르칸드에 있던 무슬림 ‘성직자‘인 호자들 역시 비슷한도구였다. 100년 이상 그들은 내륙아시아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그들의 지도자인 홍타이지들, 즉 바아투르, 갈단, 체왕랍탄, 갈단 체렝은 자신들이탁월한 정치가였고 대담하며 먼 안목을 지닌 강인한 전사였으며 칭기스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기마전사들의 놀라운 기동성 유목민의 보편적특징 을 완벽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 역시 거의 성공에 이르른 것이다. 19---라도어떻게 했으면 그들이 실패를 피할 수 있었을까? 만주인들의 지배가늙은 중국에 새로운 활기와 군사적 체제를 가져다 주기 몇 해 전에 출현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명말의 중국은 너무도 피폐해 있어 어느 누구몽골이든, 일본이든, 만주든 - 그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 왕조가 천자의 권좌에 확고하게 자리잡자마자 중국은150년 동안의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지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그러면서도 케케묵은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최초의 만주 황제들은 나라를근대화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는데, 이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만들어준화포들이 입증해준다. - P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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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년체의 역사에는 속수(涑水, 사마광)보다 훌륭한 것이 없으며 이를 뒤 이은 것으로는 설(薛, 薛應?, 1500~1574)·왕(王, 王宗沐, 1523~ 1592)·서(徐, 徐乾學, 1631~1694)같은 세 분이 있는데, 서씨의 것은 비록 설씨와 왕씨의 것보다는 우수하지만 그러나 서적을 보는 바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남쪽의 역사를 자세히 쓰고 북쪽의 역사를 소략히 하는 병통이 없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여러 책을 널리 쌓아 놓고 정사(正史)를 고증하며 손수 스스로 재정(裁定)하여 송(宋)에서 시작하여 원(元)에서 마치고 《속자치통감》 220권을 만들고 별도로 《고이(考異)》를 만들어 본문의 아래에 붙였으니 무릇 4번 원고를 바꾸어서 완성한 것이다.

요·금의 정사는 본기를 보는 데 그쳤고, 중간에 한두 명의 열전에만 미치었으니 여러 <전기(傳記)>와 <지(志)>와 <표(表)>는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宋)의 가정(嘉定, 1208~1224)이후로 원의 지순(至順, 1330~1332)이전까지는 거칠고 생략된 것이 아주 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남겨진 일사(逸事)가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하게 본 바를 근거하기에 이르러서 말을 달려 그 번거롭고 풍부하기가 예컨대 서하(西夏)에서 인척(姻戚)의 세계(世系)를 갖추어 서술한 것과 원말(元末)의 쇄사(?事, 자질구레한 일)는 자료를 철애악부(鐵崖樂府)에서 뽑은 것 같았으니, 편년체의 책은 홀연히 흡사 보첩(譜牒)같고 홀연히 흡사 시화(詩話)같아서 특히 체제(體制)에서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집한 재료가 비교적 풍부하였고, 핵심을 상고한 것이 비교적 자세하여 이미 진·왕·설씨를 몇 배나 넘어 섰으니 후에 일으킨 공로는 착수하기에 쉽게 하였으니 역시 그것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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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

840년 위구르의 몰락 이후 초원의 제국에는 실질적인 계승자가 없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모전천막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지고의 칸이라고선포하면서, 투르크인의 조상들(흉노), 몽골인의 조상들(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돌궐과 위구르)이 번갈아 소유하던 이 옛 제국이이제 영구히 몽골인들에게 돌아왔음을 선언하였다. - P320

칭기스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들의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놀라움은 라시드 웃 딘이나 『원사의 편찬자가 지도자 개인에게서 보이는 지혜나 심지어 온건함, 이에 반해서 교육과 유전적 회귀와 사회관습에서 보이는 잔인성, 이 양자가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을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기본적으로 같다. - P339

보는 칭기스칸이 아랍-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최악의 적처럼 행동하였을지라도 그리고 무슬림 작가들에게 낙인찍힌 대로 지옥의 망령들과 저주받은자들처럼 처신하였을지라도, 그는 이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적개심이 없었다. 그가 세정洗淨의 관행이나 무슬림 방식의 가축 도살을 금지하였지만그것은 몽골 관습이나 미신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피르도시Firdawsi나 이븐 시나Ibn Sina에 의해 만들어진 동부 이란의 찬란한 도시문명을 파괴하였지만, 그것은 서남 국경 쪽으로 일종의 무인지대나 인위적인 초원을 만들어 자신의 제국에 대한 제방이나 보호벽으로 삼으려는의도 때문이었다. 그가 ‘땅을 죽인 것‘은 바로 이 목적에서였다. 그는 종교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통치감각이 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초원이 그의 생활방식에 적합하고 통치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농경을 폐지하여(동부 이란을 떠나면서 그는 곡물창고들을파괴하였다) 전답을 초원으로 바꾸려고 했을 정도로 정주생활에 대해서는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유목민이기도 하였다. - P355

루브룩은 1254년 8월 18일 뭉케의 회신을 지니고 카라코룸을 떠났다.
"이것은 하늘의 계명이다. 하늘에는 신이 한 분뿐이고, 땅 위에 군주는 신아들 칭기스칸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뭉케는 영원한 하늘과 지상에서의 그의 대리인인 카안의 이름으로, 프랑스 국왕이 자신의 신하임을 인정하라고 명하였다. - P406

쿠빌라이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칭기스칸의 상속자인 반면, 중국에서는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하였다. 다른 어떤 천자도 그만큼 자기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 송이 멸망한 뒤 그는 그 왕조의 기구들과 행정요원들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시대에 기능하던 관리들의 개인적 충성심을 확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가장 큰 권리는 아마 그가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국에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 P427

트란스옥시아나의 차가다이 지파가 투르크 영주들의 한낱 허수아비 - P488

임금들로 전락하고 있는 동안, ‘모굴리스탄‘, 즉 탈라스, 추강 상류, 이식쿨, 에비 노르, 그리고 마나스Manas에 있던 유목민들은 한동안의 무정부상태가 지난 뒤 차가다이의 왕통을 다시 수립하였다.

당시 모굴리스탄으로 알려진 일리의 재건된 칸국의 군주를 맞아들이기 위해, 트란스옥시아나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은 차가다이 가문의 사람을 먼저 찾기 시작한 것은 불라지였다.
네이그때 에센 부카의 아들로 알려진 투글룩 티무르라는 인물이 일련의전설적인 모험에 찬 생활을 하면서 모굴리스탄 동부에서 이름 없이 살고있었다. 그의 계보가 진짜든 가짜든 이 사람이 바로 불라지가 찾아서 불러들인 차가다이계 사람이었다. 불라지는 그를 악수에서 정식으로 맞아들한국의 초대 아미르가 되었다. - P489

라시드웃 딘이 재록한 훌레구와 칼리프 간의 서신에는 역사상 가장 거만한 구절들이 사용되었다. 칸은 압바스 가문 36인의 칼리프들의 계승자에게 요구하기를, 바그다드에서 일단 부이조의 총수들에게 주어졌다가 나중에 셀죽의강력한 술탄들에게 위임된 속세의 권력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대는 칭기스칸 이래 몽골군이 세상에 가져온 운명을 알았다. 영원한 하늘의 은총에 의해, 어떤 굴욕이 호레즘 샤들의, 셀죽들의, 다일Daylam 왕들의, 그리고 여러 아타벡들의 왕조를 덮쳤던가! 그러나 바그다드의 문은 이러한인종들 누구에게도 닫히지 않았고, 그들 모두 그곳에 그들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그러면 그러한 힘과 그러한 권력을 가진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기치에 대항하여 무기를 잡지 않도록조심하라!" - P503

훌레구의 영향권 내에서 기독교도들이 누린 호의는 크게 그의 정비도쿠즈 카툰 덕이었다. 그녀는 케레이트의 공주로서 케레이트의 마지막 군주였던칸 토오릴의 조카이다. 그녀의 지혜를 매우 높이 산 뭉케는 훌레구에게 그녀와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충고하였다.39) 라시드 웃 딘은 "케레이트는 오래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도쿠즈 카툰은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늘 주의를 기울였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독교도들은 번영하였다.
훌레구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그들에게 호의를 듬뿍 베풀었고, 배려의 징표 - P506

를 보였다. 그의 왕국 전역에 새 교회들이 건설되었고, 도쿠즈 카툰의 오르두문앞에는 항상 예배당이 있었고 거기서는 종이 울렸다." - P507

가잔은 전적으로 무슬림적인 국내정책과 훌레구아바카·아르군에서유래된 대외정책을 결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이슬람 개종의 성실성과 영구성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본 대로이며, 이에 대하여 라시드 웃 딘이 제공하는 증거도 충분하다. 그는 가족종교인 불교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였으며, 그래서 불교 승려나 라마들은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거나 나라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그의 대외정책에 적합하도록, 그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고 그들의 총대주교 마르야흐발라하 3세에게 우정을 베풀었다. 1303년 6월, 가잔은 늙은 종정이마라게에 다시 지은 수도원으로 그를 방문해 그에게 명예와 선물과 자신의 배려의 정표를 듬뿍 주었다. - P540

초판의 몰락은 투르크인의 아나톨리아를 운명에 맡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304년 술탄 마스우드 2세가 죽고 코나의 술탄국이 사라진 이래페르시아 조정이 임명한 몽골 총독들은 자치 왕들처럼 행세하는 경향을보였다.
우리는 초판의 아들 티무르타쉬가 어떻게 독립을 목표하고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다. 그의 가문에 재앙이 없었다면 그는 아부 사이드가 죽은뒤 코냐나 카이세리에 아나톨리아의 몽골 술탄국을 세웠을 것이고, 그 술탄국은 분명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1327년 티무르타쉬가 몰락하고 8년 뒤에 아부 사이드의 죽음이 뒤따랐는데, 이로써 아나톨리아는 주인 없이 남겨지고 동남의 카라만가와 서북의 오스만가의 토착 투르크 아미르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오스만 제국의 발흥은 간접적으로는 1327-1335년까지 중요한 몇 해 동안페르시아의 몽골 조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결과인 것이다. - P547

킵착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 칸국들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다르다. 몽골인들은 정복한 다른 땅에서는 자신들을 어느 정도 주위환경에적응시켰으며 정복된 자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후손들은 중국인들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가잔·울제이투 아부 사이드로대표되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다.
반면에 남부 러시아의 칸들인 그들의 사촌은 슬라브. 비잔티움문화에정복되고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 지리적인 명명이 암시하듯이 ‘킵착의 칸들‘, 즉 그 이름 그대로 투르크 유목민들의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도 없고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러시아 초원에 아무 역사도 남겨놓지 않은 ‘쿠만‘ 투르크인들, 즉 폴로브츠이의단순한 계승자에 불과하였다.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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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순수한 중국 왕조 수가 3세기 이상의 분열을재통일했던 바로 그때(589), 중앙아시아는 거대한 두 개의 투르크(돌궐)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동돌궐 제국은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했고, 서돌궐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으며, 페르시아와는 옥서스와 메르브 강 사이 즉, 옥서스강 남쪽을 따라가는 경계로 구분되었다. 힌두쿠시 산맥 북부의 모든 토하리스탄이 정치적으로 투르크의 판도 안에 들어왔다. - P146

한자로 골력배라骨力裴羅라고 알려진 위구르의 칸은 오르콘 상류에 있는 제국의 근거지에서 쿠틀룩 빌게Qutlugh Bilge라는 호칭으로 - P182

카간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등극은 당조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현종은 그에게 회인懷仁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당의 기록에는 그의 지배영역이 알타이에서 바이칼 호까지 뻗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는 즉위한 다음 해(745)에 죽었는데 어떤 자료에는 756년으로 되어 있지만 어쨌든 그의 업적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위구르 제국이 동돌궐 제국을 대체했고, 약 1세기 정도지속되었다(744-840). 사실상 일어난 일이라고는 몽골리아의 패권이 한투르크 집단에서 그와 긴밀하게 연관된 다른 집단으로 바뀐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구르는 늘 중국의 위험한 이웃으로 여겨졌던 돌궐과는대조적으로 처음에는 상당히 충성스러운 추종자였고, 그 뒤에는 유용한 동맹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때로 부담스럽긴 했지만 당조의 귀중한 보호자였다. - P183

한자로 차비鼻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투르크인 왕 또는 타쉬켄트의 투둔(tudun)은 중국에 거듭 충성을 맹세했다(743, 747, 749). 그러나750년 그때 쿠차의 절도사였던 고선지는 변경의 방어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투둔을 꾸짖었다. 고선지는 타쉬켄트에 도착하여투둔의 목을 베었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고선지의 폭력적인 행동서역에서의 반발을 초래했다. - P191

751년 7월 고선지는 연합군에게 탈라스 강가 즉 현재 아울리에 아타Aulie Ata(잠불) 근처에서 패배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지야드 이븐 살리흐는 수천 명의 중국 포로를 사마르칸드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바르톨드는 이 역사적인 날이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전반적인 흐름이 전조를 보여주었던 것처럼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무슬림 쪽으로 방향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카를룩은 이 승리 이후 발하쉬 남부와 이식쿨 북방의 일리 지역 전체로영역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서돌궐의 옛 카간들의 본거지가 그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들의 수령은 분명히 위구르 카간의 공격을피하기 위해서 야구라는 하급의 칭호에 만족하였다. - P192

이렇게 거란의 도움으로 중국의 황제가 된 석경당은 감사의 표시로유주幽州 또는 연주州(현재의 북경)를 포함하는 하북 북부와 산서 최북단의 운주(현재의 대동) 등을 거란에게 할양해주었다. 이로써 야만인들은장성 이내에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고, 북방의 변경지역에서 중국의 정책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석경당의 배반은 오랜 전통을 지닌 제국의 통일성에 최초의 틈을 만들어, 이 틈은 점차 더 벌어져 이후 12세기에는 유목민들이 북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13세기에는 전중국을 지배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 P205

사만조의 위대한 시대는 874-875년에 칼리프 무으타미드Mu‘tamid로부터 트란스옥시아나를 봉읍으로 받고 사마르칸드를 거처로 삼은 나스르이븐 아흐마드Nasr ibn Ahmad에서부터 시작된다. 그해에 나스르는 형제인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Isma‘il ibn Ahmad를 부하라의 ‘왈리‘(wali) 즉,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곧 이 형제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는데(885, 886) 이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왕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좋지 않은 경향이었다. 892년 나스르가 죽자 이스마일이 트란스옥시아나의유일한 군주로 남게 되면서부터 그의 왕궁이 있는 부하라는 사만조의 수도가 되었다. - P220

사만조가 붕괴되자 그들의 유산을 두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자인 카라한조와 후라산의 지배자인 가즈나조가 다투고 있을 때, 셀죽 투르크인들은 근대 투르크멘 부족들이 그러했듯이 이 같은 전반적인 혼란을 이용해한 발씩 전진하여 트란스옥시아나의 심장부에 근거를 두게 되었고, 985년에는 부하라의 동북방에 운영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1025년경 그들의수령이던 아르슬란(투르크식 이름으로 ‘사자‘라는 뜻) 또는 이스라일(무슬림식 이름) 야구라는 칭호로도 알려짐 - 은 가즈나조의 마흐무드에대항하던 지방 카라한조의 알리 테긴의 보조군대를 지휘하였다. 마흐무드는 아르슬란을 포로로 잡아 가즈니로 끌고 가 엄격한 탄압조치로 나머지부족들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유목민들의 생활방식에는 정주민들이 취하는 어떠한 조치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가즈나조는 알리 테긴이트란스옥시아나의 패자가 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자(1032) 그동안 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던 것으로 보이는셀죽인들은 그의 아들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들 생각대로 전쟁을감행하였다. - P230

야율대석耶律大石이라는 황가 귀족의 지휘 하에 서북방으로 간 거란의 이주민들은 운이 좋았다. 그들은 오늘날 추구착 근처의 타르바가타이에있는 이밀에 근거를 두었다.38)이 당시 이식쿨의 서쪽 발라사군에서39) 군림하던 카라한조의 군주는 일리 강 하류의 카를룩족과 아랄 해 북쪽의 캉글리계 투르크인들로부터 양쪽으로 위협받고 있었는데, 거란의 수령인 야율대석에게 구원을 청하자 그가 도우러 와서 카라한 군주를 폐위시키고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해서 발라사군은 야율대석의 도읍이 되었고, 그 자신은 ‘구르칸‘ (gtür gan) 즉 ‘사해의 군주‘라는 칭호를 취하였으며 그의 후손들도 그를 따라 그렇게 하였다.40)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구르칸은 카쉬가르와 호탄을 지배하던 지방 카라한조를 복속시켰다. 동투르키스탄에 건설된 새로운 거란 제국은 이제 무슬림 역사에서 ‘카라 키타이‘ - ‘검은 거란‘ 혹은 ‘검은 키타이‘ - 제국으로 알려지게 되고 여기서도 그렇게 불릴 것이다. - P249

소위 호레즘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을결속시킨 유일한 요소는 술탄 무함마드 자신이었다. 그리고 비록 그가 동방의 어떤 군주들보다 행운의 바람을 더 오래 맞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열정 못지않게 쉽게 낙심했다. 칭기스칸이 이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 부하라와 사마르칸드가 호레즘인들에게 소속된 것이 8년도 채 넘지 않았고, 사마르칸드는 기습과 학살을 치른 이후에야 점령되었다는 사실·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칭기스칸의 침공이 있기 전, 아프가니스탄이 호레 - P255

즘에게 완전히 병합된 것은 4년도 채 되지 않았고(가즈니는 1216년에), 서부 페르시아가 확고하게 호레즘령이 된 기간은 3년이었다(1217). - P256

아바르 그리스어로는Abares·Abaroi, 라틴어로는 Avari Avares 가 유럽으로 들어온 것은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565년 사망)의 치세 말년 무렵이었다.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테스는 그들이 "훈누구르Hunnugur와 사비르Sabir와 다른 훈족 계통의 집단들"을 앞으로 내몰면서 왔다고 하였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사로시오스Sarosios라고 불렀던 알란족 왕은 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외모는 비잔티움 사람들에게 고대 훈족의 외모를연상시켰는데, 다만 훈족과 달리 아바르는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서 등뒤로 내려뜨렸다. - P258

아바르의 쇠퇴 이후 유럽에서 투르크 몽골인의 주요한 역할은 당분간불가르인들이 담당하였다.20) 투르크계에서 기원하고 훈족의 쿠트리구르와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민족은 7세기 2/4분기 동안에 코카서스의 서북방, 즉 쿠반 계곡과 아조프 해 사이의 지역에서 불가르의 온오군두르 부족의 지도자인 쿠브라트(642년 사망)의 영도 아래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 쿠브라트가 죽은 뒤 불가르는 하자르족의 진입으로 둘로 나뉘었다. 쿠브라트의 아들인 바얀Bayan이 지휘한 한 집단은 그곳에 남아 하자르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이 분파의 후손들은 후일 북방의 카마 강과 카잔 쪽으로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 대불가리아를 건설했다가 13세기에 칭기스칸 몽골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들의 최후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추바쉬Chuvash인들로 여겨지고 있다). 불가르의 두 번째 집단은 쿠브라트의 또다른 아들인 칸 아스파루흐Asparukh의 주도 하에 서쪽으로 이주하여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서 옛 모헤시아 땅에 정착하였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705-711)는 비잔티움 내전 중에 아스파루흐의 후계자인 칸 테르벨Tervel(701-718)의 보호를 받았고, 그들이 그 지역을 영유한 것을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 P265

17세기 초에 러시아 초원의 서남부와 다게스탄은 하자르 제국의 흥기를 목도하게 되었다. 하자르는 텡그리를 숭배하며 카간과 타르칸targan들의 지배를 받는 투르크 민족이었다. 바르톨드는 그들을 서부 투르크, 더정확하게 말해 서부 훈족 계통의 한 분파로 보았다.25) 그들은 626년 칸이었던 지에빌Ziebil이 헤라클리우스의 티플리스에서의 회견에서 한 요청에따라 비잔티움 황제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할 수 있도록 4만 명의 인원을제공해주었을 때는 이미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지원군을 데리고 사산조의 영역인 아제르바이잔 지구를 황폐화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비잔티움과 하자르 사이에 맺어진 연맹은 왕실혼인에 의해 여러 차례 새롭게 다져졌다. - P269

마르크와르트에 의하면 한때 서돌궐 연맹의 일부를 구성하다가 카를룩 투르크인들에 의해 시르다리아 하류와 아랄해 방면으로 밀려난 투르크 계통의 부족이었다.29) 그들은 서쪽으로의 이주를 계속하면서 우랄(야익) 강과 볼가(이틸) 강 사이에서 유목하고 있었는데, 913년경(이는 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니투스에 의거한 것)하자르와 오구즈의 연합공격으로 그지역에서 쫓겨났다. 페체넥은 더 서쪽으로 가서 아조프 해 북쪽의 ‘레베디아’를 점령하고 그곳을 마자르인들로부터 탈취하였다. 얼마 후 페체넥은다시 서진을 재개하여 아텔쿠주, 즉 드네프르와 다뉴브 하류 사이에 있는서부 러시아 초원에서 마자르를 축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900년경 페체넥은 드네프르 하구와 다뉴브 하구 사이의 초원을 이용하게 되었다. - P274

킵착은 1222년 칭기스칸의 부장들이 침공할 때까지러시아 초원의 패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부 킵착 수령들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킵착은 후일 몽골 지배 하의 러시아에 자신들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 건설된
"칭기스칸 일족의 영역이 킵착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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