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를 위한 전투는 초강대국 투쟁을 제3세계에 가져왔다. 이지역 전역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자 미국 지도자들은 세계 지배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목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1949년10월부터 1950년 6월 사이의 몇 개월은 제3세계에서 냉전이 형성되는 데 핵심적인 기간이었다.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주의 대국으로 등장하자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뒤집혔고, 개발 도상 세계 전체 - P88

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커졌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의냉전 지도자들은 중국, 한국, 인도차이나에서 맹렬히 진행된 일련의아시아 혁명들을 두고 하나의 응집된 전선으로 결합해 전략적 계산을 수행했다. 한편 동쪽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자 주저하던 소련 지도자들은 아시아 혁명가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동지들은 냉전 투쟁의 방향을 중부 유럽에서 동아시아의 포스트식민주의국경 지역과 그 너머로 돌렸다. - P89

마셜은 마오쩌둥과 장제스 사이에서 소련의영향력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중국 공산당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영속적인 합의를 중재하고자 했다. 마셜은 한 손으로는 장제스에 - P111

게 정치 개혁을 시행하라고 압박하는 한편, 다른 손을 이용해 국민당 정권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이 지원으로 국민당은 만주에 대한통제권을 재천명할 수 있을 터였다. 총사령관은 마셜의 압박을 못 견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4대 승전국 중 하나로서 장제스는 명령을 받기보다는 명령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워싱턴은 중국에서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고분고분한 정권을 찾았다. 마셜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장제스의 저항은 원치 않는 분규를 일으켰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면하여 장제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 P112

마셜은 국민당은 워싱턴에 "군사 지도자들이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심하면서 창출하고 있는 진공 속으로" "자금을 계속 쏟아붓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경고하며, 장제스에게개혁을 실행하라고 끊임없이 압박했다. 국민당은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오래전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마셜은 완고한 총사령관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군사력이 중국 공산당과의 투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며 경고를 무시했다. 1947년 1월 7일, 백악관은 마셜 장군이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외교는실패했다. - P133

만주에서 중국이 승리함으로써 자원과 산업, 그리고 "한국과의 필수적인 전략적 연계"가 소련의 궤도 속으로 들어왔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대중국 정책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나타냈다. 내전이 계속되는 한, 중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와 여전히 동맹 관계에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내전과 불안정의 지속은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정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모스크바의 스탈린과 그의 동지들은 확실히 중국 공산당의 잠재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6월에 스탈린은 ‘표도르 쿠즈네초프(전 붉은 군대 사령관)‘라는가명으로 글을 쓰면서, 옌안의 크렘린 요원에게 마오쩌둥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이 중국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 P136

모셔 오기 위해 하얼빈에 비행기를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 P137

실제로 장제스의 옌안 점령은 피루스의 승리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최정예 부대를 버려진 중국 공산당 수도에 투입한 바로 그 순간에도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를 계속 방어했다. 만주는 장제스가 이 지역에 사단들을 마구 투입하면서 정부군의 ‘전략적 덫‘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국민당 군을 만주로 더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미약한 병참선을 길게 늘이고 난징의 예비 자원을 소모시키는 일련의 양동작전陽動作戰을 벌였다. 게릴라 전술에 의존하고 대규모 교전을 거부하는 공산군 사령관들은 수적으로 우월한 정부군 - P138

을 서서히 소모전으로 고사시키는 전략을 따랐다. 한 프랑스인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허우마시를 점령하면서 2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여단장을 비롯해 18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신장시를 점령할 때 그들은 네 명이 다쳤으나, 도시를 방어하려고 했던 700명의 의용군 중에서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국민당 군2개 연대가 방어했으나 공산군 3개 연대의 공격을 받은 치워를 점령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수비대 전체인 2000명을 사로잡는 전과를올렸다." - P139

1949년 1월 6일 중국 공산당 사령관들은 쉬저우 수비대에최후의 공격을 개시했고, 나흘 뒤 약 20만 명의 정부군이 항복했다. 화이허淮河 전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결정적인 승리는 놀라운 속도로 다가왔다. 마오쩌둥과 그의 사령관들은 "기쁨에 넘쳤다." 그러나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정복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해야 하고, 혁명을농촌의 기원으로부터 도시의 미래로 옮겨야 하는 이중의 난제에 직면했다. 동북부에서의 패배 소식이 난징에 있던 장제스의 귀에 들어가자총사령관은 자신이 직면한 재앙의 규모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는 "패배한 전투들에 대한 보고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며 들어온다"
고 탄식했다. "북중국과 만리장성 아래 지역은 붕괴 직전이다." 장제스는 이제 두 가지 과감한 행동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정부를 난징에서 타이완으로 옮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임하는 것이었다. - P153

마오쩌둥식 사회주의혁명은식민지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마오쩌둥의 체계에서는 탈식민지화와 민족 해방에 대한 요구가 계급투쟁이라는 수사를 대신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뒤쫓아 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알제리,
중동, 라틴아메리카의 반식민주의 혁명가들은 전부 그들 자신의 무장투쟁을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서 마오쩌둥의 게릴라 모델에 주목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냉전 국제 시스템 주위에 크게 울려 퍼지면서, 주요 행위자로서 베이징의 등장을 나타내고 개발 도상 세계에들어맞는 새로운 방식의 사회주의혁명이 출현했음을 알렸다. 아시아의 남부 가장자리 전체에서 호 모양으로 발생한 일련의 포스트식민주의 해방전쟁은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시작했다. 마오쩌둥의 혁명 세력은 옌안에서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이 시작으로 이제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예정인 하나의 운동을 풀어놓았다. - P1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제가 시신(侍臣)들에게 말하였다.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여 나를 받들게 하는 일은 짐(朕)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다. 구혁(溝?, 봇도랑, 해자)을 열어 경읍으로 가도록 하는 것은 대개 부득이한 것일 뿐이다."

황제는 장리(贓吏, 뇌물 받은 관리)를 아주 싫어하여 이후로는 내외관으로 장죄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기시(棄市)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을해일(13일)에 요(遼)의 사천(司天)인 왕백(王白)·이정(李正) 등이 역서(曆書)를 올렸다.
이보다 먼저 후진 천복(天福) 연간에 사천감인 마중적(馬重績)이 주문으로 을미원력(乙未元曆)을 올렸는데 조원력(調元曆)이라고 불렀다. 태종(太宗, 요의 耶律德光)이 후진을 멸망시키고 변(?)에 들어가게 되자 모든 관청의 요속(僚屬)·기술(技術)·역상(曆象)을 거두어서 중경(中京, 內蒙古 赤峰市 寧城縣)으로 옮기니 요에는 비로소 역(曆)이 있게 되었다. 왕백 등이 올린 것은 바로 조원력이다.

황제가 말하였다.
"인생이란 흰말이 틈새를 지나는 것 같은데, 행하는 바가 부유하고 귀하게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여도 금전을 많이 쌓아 놓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스스로 즐기는 것을 많이 하고 자손들로 하여금 가난하거나 궁핍하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병권을 풀어 놓고 나아가 큰 번진(藩鎭)을 지키면서 편리하고 좋은 전택(田宅)을 골라서 사 놓고 자손들을 위하여 영원한 기업을 세우지 않는가? 노래하는 아이와 춤추는 여인을 많이 데려다가 매일 술 마시며 서로 즐거워하며 천수를 마치라! 짐은 또한 경들과 약속하여 혼인하고 군신 사이에 양쪽에서 시샘하거나 의심함이 없게 하여 아래 위가 서로 편안한 것이 역시 좋지 않겠는가?"

오대시기에는 요(遼)가 발해 땅을 전부 가지게 되자 흑수부의 백성들 가운데 혼동강(混同江, 흑룡강 우안의 최대 지류)의 남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요에 적(籍)을 두면서 숙여진(熟女眞)이라 호칭하였고, 요에 적을 두지 아니한 사람들을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여진의 선조는 옛날 숙신(肅愼, 흑룡강, 송화강 일대) 땅에 거주하였는데, 원위(元魏,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렸고, 수대(隋代)에 이르러 호칭을 고쳐서 말갈(靺鞨)이라고 하였으며, 당(唐) 초기에는 흑수부(黑水部)와 속말부(粟末部) 두 부(部)를 가지고 있었으며, 뒤에 가서 속말부가 대단히 강해져서 발해국(渤海國)으로 호칭하였고 흑수부는 이어서 그들에게 속하여 불리어졌다.

애초에 후주 세종이 이미 강북을 빼앗고 강남에 편지를 보내면서는 당(唐)이 회골(回?)의 가한에게 불러 주는 방식처럼 다만 국주(國主)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서(書)라고 하는 용어를 고쳐서 조(詔)
44
라는 용어로 불렀다.

요(遼)의 야율해리(耶律諧里, 解里)가 와서 항복하였다.

지금부터 사자를 사방으로 나가게 하면서 반드시 마땅히 그 적당한 사람을 심사하여 선택해야 하오."

정해일(30일)에 북한(北漢)에서 항복한 백성들을 형(邢, 河北省 邢台市)·명(?, 河北省 永年縣 東南) 두 주로 옮기고 사람 수를 계산하여 부속(賦粟)을 내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가족으로 경사에 있는 자들은 아주 두터운 위무를 받았으며, 군(郡)에 있는 관각(??, 전매)의 이로움은 모두 이들에게 주었으니 그들이 도모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여 무역을 하게하고서 통과하면서 걷어야 하는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변방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부유하게 되었으며 결사대를 모집하고 기를 수가 있었고 간첩을 부릴 수 있어서 적의 사정을 환히 알았으니 매번 변경에 들어갈 적마다 반드시 먼저 알고 예비할 수 있었고, 복병을 두어 습격하였다.

진주의 서북쪽에 있는 석양진(夕陽鎭)은 옛날 복강현(伏羌縣, 甘肅 甘谷)의 땅으로 서북쪽으로는 대수(大藪, 큰 숲)에 이어져 있어서 재목이 나오는 곳인데 융인(戎人)들이 오래 동안 그 이로움을 오로지 하였다. 상서좌승인 수양 사람 고방(高防)이 지진주(知秦州)가 되어 채조무(采造務)를 설치하여
73
그 재목을 가져다가 경사에 공급하자고 건의하였다.

조서를 내렸다.
"조정의 신하가 사자로 나가는데 돌아오는 날에는 보았던 민생의 이로움과 병통을 갖추어 보고하라."

오대 이래로 절도사는 친하게 따르는 사람을 진장(鎭將)으로 보임하여 현령(縣令)과 항례(抗禮)하였지만, 무릇 공사(公事)는 오로지 주(州)에만 보내지니 현의 관리는 직책을 잃었다. 이에 이르러 다시 현으로 통할하니 진장이 주관하는 곳은 향촌(鄕邨)에는 미치지 못하고 다만 곽내(郭內)에서일 뿐이었다. 추밀사 조보의 말을 따른 것이다.

"세 개의 기한을 주는데, 매 기한은 각기 20일이다. 첫 번째 기한 안에 잡는 사람은 현령과 현위가 각기 1선(選)을 감해주고 반이 넘어서 잡는 사람은 2선(選)을 감해 준다. 두 번째 기한 안에 잡는 사람은 각기 1자(資)를 뛰어 넘게 하고, 반의 기한을 넘어서면 2자(資)를 뛰어 넘게 한다. 세 번째 기한 안에 잡는 사람은 현령과 현위에게 각기 1계(階)를 덧붙여 주고, 반을 넘으면 2계(階)를 덧붙여 준다.
세 번째 기한이 지나도 잡지 못하면 현위는 1개월의 녹봉을 깎이는 벌을 받고 현령은 이를 반으로 한다. 현위는 세 번 벌(罰)을 받고 현령은 4번 벌을 받으면 모두 1선을 전(殿)으로 하며 3전(殿)이면 관직을 정지한다. 현령과 현위가 도적과 싸워서 모두 잡은 사람은 나란히 비(緋)를 하사하고 현위에게는 현령을 제수하고 이어서 양자(兩資)를 뛰어 넘게 하고, 현령은 별도로 발탁하여 올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을 따라 지도를 그려보면, 학살은 개발 도상 세계를 관통하는일정한 길을 쫓아가면서, 모두 합쳐 냉전 시대에 발생한 전사자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광범위한 세 전선에 집중되었다. 전선 각각은세 개의 지방 전쟁군중 하나와 연계된 지역 투쟁들로 이루어졌고,
이 지방 전쟁군들은 다시 지구적 냉전 네트워크와 연결되었다. 각 전선은 소련과 중국의 국경을 따라 만들어졌고, 지방 권력의 대두에 집중되었으며, 탈식민지화의 뒤를 쫓아 전개되었다. 다량의 병력이 주둔한 중부 유럽의 변경 지대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남았던 반면, 동쪽에서는 격렬한 충돌이 불타올랐다. - P16

제국 권력들이 더 이상 자신의 제국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다수의 민족주의자, 혁명가, 군사 지도자들이 부상하며 식민지 세계 곳곳에서 권력을 요구했다. 이 포스트식민주의 세력은 군사력 부족을 혁명 열정으로 보충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달 후, 세계 위기의 대략적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초강대국이 곧 냉전으로 알려지게 될 지구적 권력을 위한 투쟁을 점점 더격렬하게 벌이는 동안, 개발 도상 세계의 인민들은 전면적이고 보통은 폭력적인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국가를 건립하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급변하는 지정학적 풍경 위에서 서로 맞닥뜨린 초강대국, 혁명가, 작은 국가들은 1945년 이후의 세계 위기에서, 그리고 그후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빚을 때 각자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었다. - P46

스탈린은 유럽 국경 지대의 안전을 확보한 후 튀르키예, 이란을 통과하여 극동으로 향하는남쪽 측면으로 눈을 돌렸다. 크렘린이 처음으로 시험 삼아 한 조치는 이란 북부 지방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 종족에 초점을 맞췄다.
이 지방은 1941년 이래 붉은 군대의 통제를 받았다. 그것은 소련군과 영국군이 테헤란이 추축국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각 이란북부와 이란 남부를 점령하는 연합국 합동작전의 일환이었다. 1945 - P54

년 6월 스탈린은 일곱 군데의 다른 장소에서 적어도 10개의 유정을개발할 목표로,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이란 북부에서 유전을 지질학적으로 조사할 특명 조직을 구성하는 극비 법령을 통과시켰다. - P56

1946년 여름 합동참모본부는 암호명이 핀처 PINCHER인 미래의 대소련 전쟁 계획을 입안했다. 중동이 이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이 계획은 소련군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오면 서방열강이 전열을 가다듬고 중동에 설치된 영국공군기지로부터 전략 폭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상정했다. 이 항공 작전이 소련군의 공세를 멈추는 데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나면, 서방 열강은 튀르키예와 동지중해를 통과해 북쪽으로 소련으로 진입하는 - P66

지상군 공격을 준비할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나폴레옹에게도, 히틀러에게도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진 동유럽을 통과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피할 터였다. 따라서 워싱턴의 관리들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을 공격하는 가장 실행 가능한 경로는 튀르키예의 기지를 출발해 중동을 통과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 P67

케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적 경향에대한 장기적이고 끈기 있지만 확고하고 빈틈없는 봉쇄여야 한다는것이 분명하다." 케넌은 미국에 "러시아가 평화적이고 안정된 세계의이익을 침해하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변함없는 대항력으로 대처할것을 요청했다. 케넌의 시각은 워싱턴의 봉쇄 전략의 기반을 형성하게 될 터였다. - P74

리프먼은 봉쇄를 "전략적 괴물"로 혹평했다. 봉쇄는 값비싸고 다루기 힘들며, 미국을 냉전 주변부에 널리 퍼져 있는 국가들의내정에 끌어들일 것 같았다. - P76

스피크먼은 ‘주변 지역‘이 심장지대로 들어가는 주요 접근로를 관할하고, "해상 세력과 대륙 세력 사이의 충돌을 완화하는 거대한 완충지대를 형성했다"라고 설명했다. 이 거대한 중간 지대는 1945년 이후의 세계에서 지구적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열쇠를 지녔다. 스피크먼은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며,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통제한다"라고 설명했다. - P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는 프랑스에게 공격 개시일을 앞당기기로 약속했지만 그 일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막바지에 이르자 즉흥적인 대응이 불가피했다. "전방동원"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이것은 며칠 정도 시간을 벌기 위해 사전 준비단계 일부를 생략하는 방법이었다. 파리로부터 쉴새 없이 밀려와 팔레오로그의 유창한 언변을 통해전달되는 일련의 전보들도 압박을 가중시켰다. 8월 6일 러시아군 총참모부가 발령한 명령에는 "프랑스군의 위급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가능한 이른 시기에 독일에 대해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나 이를 위해서는 물론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져야만 한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자 "충분한 전력"이라는 단서는 빠져버렸다. 그 날자 명령은 "독일이 프랑스를 상대로 획책하는 엄청난 도발에 대하여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우리의 지원은 독일이 동프러시아에 남겨둔 병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가능한가장 신속하게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되어있었다. 제1군과 제2군은 M-14(8월 13일)에 진격할 수 있는 "위치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보급품은 M-20(8월 19일) 까지 완전하게준비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보급 지원도 없이 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P427

동프러시아에 울려 퍼진 "코삭이 밀려온다! (Kosaken kommen!)"는외침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이 지역을 막아 보겠다는 독일의 결심을 흔들었다. 4와 2분의 1개 군단, 1개 기병사단,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새 수비대 그리고 몇몇의 지방 여단으로 구성된 프러시아의 제8군은 수적으로 2개 러시아군 중 하나와 대략 비슷했다. 이들이 몰트케로부터 받은 명령은 동서프러시아를 방어하되 우세한 적에게 패배하거나 쾨니히스베르크 요새로 쫓겨 갇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압도적인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면 그들은 동프러시아를 적에게 내어주고 비스툴라 후방으로 후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 P434

무엇이 OHL로 하여금 공격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 전선이 약화됨에도 불구하고 3개 군단씩이나 빼내도록 설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연실색한 그는 타펜에게 동부전선에서병력 증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라도 이미 시작된전투에 맞추어 오기는 너무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타펜은 그들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써도 좋다고 말했다.
이 중대한 결정의 발단은 러시아군이 독일군의 예상대로 동원 후 6주가 아니라 2주 만에 공격을 시작하자 OHL에 야기된 공포였다. 타펜이지원병력을 보내줄 수 있다고 언급하게 된 주 요인은 프랑스 국경에서 - P466

거둔 "위대한 승리"였는데, 이로 인해 "OHL 내에는 이미 서부전선에서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 배경에서 8월 25일 몰트케는 "자신에게 쏟아진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으로부터 동프러시아를 구하기 위한 지원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 P467

리에쥬보다 더 큰 이두 번째 승리에도 불구하고 루덴도르프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렌넨캄프 군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 내게 가해진 긴장감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서부전선으로부터 몰트케가 보내 준 새로운 2개 군단과 합세하여 렌넨캄프와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승리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는데, 비록 그 이유는 틀렸지만 시종일관 정확하게 렌넨캄프가 추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제8군을 이동시켜 삼소노프와 맞서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명령을 준비한 호프만, 루덴도르프의 명령을 거부하며 삼소노프의 좌익을 확실하게 포위한 프랑수와, 결정적인 순간에 루덴도르프의 불안감을 덜어 준 - P486

힌덴부르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했던 것은 치밀하기로 소문난 독일군의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인 없었던 러시아군의 무전이었다. 루덴도르프는 참모들이 낮 동안 정기적으로 수집하여 해석 또는 번역한 다음 매일 밤 11시 자신에게 보내준 감청 보고에 의존하게 되었다. 만일 어쩌다가 그 보고가 늦어지면 그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직접 암호 해독실에 나타나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을것이다. 호프만도 감청이야말로 탄넨베르그 승리의 진정한 요인임을 인정했다. "우리에게는 우군이 있었는데, 바로 적이었다. 우리는 적군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 P487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궤멸시켜야만 하는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정부는 - P508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그 이후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목표는 독일군국주의와 그 황실의 패망이라고 선언하면 할수록, 독일도 더욱 완강하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관된 맹세를 다짐했다. 윌슨 대통령의 중재안에 대한 답신에서 베트만홀베그는런던조약이 독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독일도 강화를전제로 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양측은 전쟁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 P509

몽과 샤를루와 전투가 끝나자 시체로 뒤덮인 전장에서 장기전이라는 피할수 없는 사실이 그 실체를 드러내며, 연합국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장기전이 되면 그들은 미국에게 식량, 무기 그리고 자금을 (이때까지는 누구도 병력은 생각하지 않았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독일에 대해서는 이 같은 지원이 차단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며 거대한 중립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점차 필수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상충하는 일이 되었다. 중립국과 독일 간의교역에 새로운 제약이 추가될 때마다 공해상의 자유에 대한 미 국무부 - P528

의 또 다른 정당한 항변이 제기되면서 거북하게도 영국은 결국 두 가지목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당장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영국인의 천성적인 거부감을 가진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암초를 피해가는 조타수처럼 큰 원칙을 피하면서 또한 어느 한쪽이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 당할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에까지 논의가 비화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매 사안마다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목표는 자신의 말대로 사안이 제기될 때마다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강제할수 있는 최대한의 해상봉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 P529

카이저는다시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전함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북해함대 사령관의 지휘권은 더욱 제한될 것이며, 황제의 사전 허락없이는 대규모 기동을 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후로 영국 해군이 독일을 에워싸는 봉쇄의 벽을 쌓는 동안 독일해군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사슬에 얽매여 힘을 잃은 불행한 티르피츠는 9월 중순에 "우리가 전투에 성공할 수 있었던 제일 좋은 기회는 선전포고 후 2주에서 3주 사이였다"고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 - P535

공의 기회가 커지기는커녕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그는 예견했다. "실재하는 함대‘가 가지는 최대 효과 즉, 중립국들에 대한 과도하게 가중된압력, 독일의 해상 교역에 대한 완벽한 파괴, 실행 가능한 최대한의 봉쇄를 거둔 쪽은 영국 함대였다. - P536

8월 28일 전방 지역이 확장되어 파리와 그 양쪽으로 세느에 이르는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면서 파리시 정부는 군정장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전 10시 갈리에니는자신의 군사 및 민간 내각을 소집하여 수도방위위원회를 개최했는데 모두 기립한 채로 진행된 위원회는 10시 15분에 끝났다. 위원들은 파리를방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적의 출현으로 인해 "비상 사태"에 관한 법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순히 인증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법적 근거를 제공할 서류는 이미 만들어져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갈리에니는 한 사람씩 불러 서명하게 하고 곧바로 폐회를 선언했다. 그것은 그가 주재한 처음이자 마지막 위원회였다. - P586

그날 밤 클룩의 선회를 다시 한번 검토한 다음 파리쪽으로 노출된 측면이 불안해진 몰트케는 새로운 일반명령을 내렸다. 좌익에 대한 문제처럼 그것은 확신이 없었던 그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1군과 제2군에게 "프랑스군을 파리로부터 멀리 남동쪽으로 밀어붙이라"고 명령 - P625

함으로써 클룩의 선회를 재가했다. 그와 동시에 클룩 군에게 "제2군의후방에서 제형(echelon, 梯形)으로 뒤따르며 "군의 측면을 엄호하는 책임을 맡으라고 명령함으로써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 하였다.
제형으로! 클룩에게 그것은 일전에 OHL이 자신을 뷜로브의 지휘 하에 두었던 것보다 더 심한 모욕이었다. 한 손에는 소총, 다른 손에는 권총을 들고 우익을 이끌고 있던 사나운 모습의 아틸라는 그 누구에게도뒤쳐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1군에게 "프랑스군을 남동쪽으로 몰기위해 내일도[9월 3일] 마른을 넘어 진격을 계속하라"는 독자적인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파리쪽으로 노출되는 측면에 대한 방어는 가장 약한두 부대 즉, 브뤼셀에 1개 여단을 남기고 온 제4 예비군단과 9월 1일 영국군과 벌인 전투에서 심하게 피해를 입은 제4기병사단을 후방에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P626

클룩 안쪽으로 선회한 것을 알아챘음에도 죠프르와 GQG에 있는그 참모들은 이때까지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예상치 않았던 절호의 기회를 보지 못했다. 9월 2일 클룩 영국군을 추격하기 위해 방향을틀자 그들은 혹시 그가 다시 파리를 향해 방향을 돌리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어쨌든 그들의 마음은 파리가 아니라 세느를 따라 펼쳐질 전면전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확고한 전선이 재구축되기 전에 이 전투를 감행할 수는 없었다. GQG에서 계속된 속타는 협의 끝에 죠르는 군대가멈추게 될 지점까지 후방으로 며칠간 더" 퇴각을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이 기간 동안 우익으로부터 증원군을 데려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모젤 방어선이 약해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1군과 2군으로부터 각각 1개 군단씩 차출하기로 결정했다. - P639

그날 밤 입안되고 다음날 이른 아침 발령되어 전 군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은 우익의 실패, 벨기에의 중립마저 희생시켰던 승리를 위한 독일의 기도가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벨기에 침략만 한 달째인 9월 4일자로 된 그 명령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담고 있었다. "적은 제1군과 제2군의 포위공격을 빠져나갔으며 그 병력의일부는 파리 방위군과 합류했다"고 언급했다. 적 부대는 모젤 전선으로 - P653

부터 철수하여 "십중팔구 파리 지역에 우세한 전력을 집결시켜 독일군의 우측을 위협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이동 중에 있다. 따라서 "제1군과제2군은 파리의 동쪽 전선을 마주한 채 그 지역으로부터 가해진 적의어떠한 작전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대기해야만 한다." 제3군은 세느를향해 계속해서 남쪽으로 진격하고 나머지 군들은 이미 하달된 9월 2일자 명령에 따르도록 하였다. - P654

이미 정해진결정을 재확인하기 위해 작전실로 들어선 죠르는 그곳에 모여 있던 - P673

장교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진격나팔이 울려 퍼질 때 전 장병들에게 낭독될 명령에 서명했다. 대개 프랑스어는 특히 대중에게 공표될 경우 그것이려하게 들리도록 정성을 들이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거의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요지는 강하고 단호했다. "이제 전투가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은 적을 공격하여물리치는 데 기울여져야 합니다.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한 부대는 어떤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하며 뒤로 밀리기보다는 차라리그 자리에서 전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 P6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제로 프랑스군 수송 선단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궤벤과 그동료 전함이 1912년 진수 후에 지중해를 순항하도록 파견된 한 가지 이유였다. 마지막 순간 독일은 그들이 해야 할 보다 중요한 역할을 발견했다. 8월 3일 독일군이 머뭇거리는 터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가능한 모든 압력을 가할 필요를 느꼈을 때, 티르피츠 제독은 수숀 제독에게콘스탄티노플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 P249

한동안의 격렬한 논쟁이 거듭된 끝에 한 장관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독일이 이 전함들을 우리에게 팔 수는 없을까요? 그들의 도착을 계약에 의한 인도로 간주할 수는 없을까요?"
모두들 이 딜레마를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척의 터키 전함을 압류한 영국의 독선적인 정의에도 대항할 수 있는 이 훌륭한 생각에 기뻐했다. 독일이 합의하자 이 매매는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공표되었고 이어서 바로 야우스(Jawus)와 미딜리(Midilli)로 명칭이 바뀐 궤벤과 브레슬라우는 승무원들이 터키식 모자를 쓰고 터키 국기를 게양한 채 군중들의 열광 속에서 술탄의 사열을 받았다. 마치 자신들이 도둑 맞은 두 척군함을 대신하여 귀신이 보내 준 것 같은 갑작스러운 독일 전함의현은 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독일에 대한 인기를 치솟게해 주었다. - P274

바깥 세상에서 보기에 리에쥬를 공격 중인 독일군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타임』지 종군기자의 말처럼 "아주 깨끗하게 박살 난 것" 같았다. 그 당시 잠깐 동안은 이 말이 거의 맞았다. "잠자는 양을 아주 손쉽게 제압할 것으로 기대하며 허풍을 떨었던 독일군은 요새를 강습 점령하는 것에 실패했다. 8월 9일 이후 독일군은 공격을 멈추고, 비록 병력은 아니었지만 지원군을 기다리게 되었다. 공성용 대포를 기다렸던 것이다. - P304

리에쥬의 의원인 셀레스탱 뎀블롱은 그때 쌩 피에르(St. Pierre) 광장에 있다가 공성용 대포가 광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포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너무 거대하여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괴물은두 부분으로 나뉘어 다가왔으며 36마리의 말들이 끌었다. 포장된 도로가 들썩거렸다. 군중들은 이 엄청난 기계장치의 출현에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천천히 쌩 랑베르(St. Lambert) 광장을 지나 테아트르(Théâtre) 광장으로 들어간 다음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을 끌어 모으면서 소브니에르(Sauveniere) 대로와 아브루아(Avroy) 대로를 따라 느릿느릿 무겁게 지나갔다. 한니발의 코끼리들도 로마인들을 이보다 더놀라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과 동행하는 병사들은 거의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절도있게 행진했다. 그 대포들은 악마였다..…그것은 아브루아 공원에 조심스럽게 설치된 다음 정밀하게 조준되었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는데, 군중들은 뒤로 나가떨어졌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가까운 곳의 창문은 모두 박살이 났다." - P321

영국해군의 막중한 임무를 미리 예견하고 지중해 함대에 대해 궤벤을도모하면서도 "우세한 적과의 교전을 피하라고 명령했던 처칠처럼 키치너는 자신이 만들어야 할 백만 대군을 내다보며 BEF에 대해 상호 조화되기 어려운 정책과 임무를 부여하였다.

프랑스군의공격 위주 전략에 대해 비난을 반영하고 있는 키치너의 명령은 만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동원되지 않은 채 영국군이 "적의 공격에 과도하게노출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공격 작전"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받는다면존 경은 우선 본국 정부와 협의해야 하며, "경의 지휘권은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며, 경은 어떠한 경우라도 동맹국 장군의 명령에 어떤 의미로도 통제 받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P338

8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총공격에 임하게 된다. 허작은 상브르에 도착했으며 영국군도 그와 이웃한 위치에 있었다. 그동안 우왕좌왕하던 존 프렌치 경도 마침내 죠프르에게 다음날이면 작전에 임할 수 있 - P374

도록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로렌에서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루프레흐트의 반격이 엄청난 위력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카스텔노의 제2군은 죠르가 일부 군단을 벨기에 전선으로 이동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후퇴 중이며, 듀바이도 혹독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알자스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독일군을 상대로 포장군이 물루즈와 그 주변 지역을 전부 재탈환했지만 이제 허작 군이 상브르로 이동하면서 중앙공격에 투입될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어 포의 군대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야만 했다. 죠프르의 어쩔 수 없는 입장 때문에 포의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알자스마저 가장 큰제물로써 플랜17의 제단에 바쳐지게 된 것이다. - P375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체 서부전선 중 네 군데였으나, 역사는 이들을 묶어 국경의 전투(the Battle of the Frontiers)라부른다. 8월 14일부터 우측의 로렌에서 이미 시작된 각각의 전투 결과가전 전선에 알려지게 되면서 로렌의 소식이 아르덴느에, 아르덴느는 다시 샤를루와 전투로 불리는 상브르와 뫼즈에, 그리고 샤를루와는 몽에영향을 미치게 된다. - P377

8월 24일 독일군은 거대한 자신감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패퇴한 적만 보였고 슐리펜의 천재성이 입증되었으며, 결정적인 승리가 독일군의 손 안에 잡힌 듯 보였다. 프랑스에서 프앙카레 대통령이 일기를 적었다. "아군은 후퇴하고 적이 침입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난 2주간의 환상은 그토록 컸던 것이다. 이제 프랑스의 미래는 국가적인 저항 능력에 달려 있다."
생의 약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 P4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