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 수.당.오대십국.북송 : 중원의 황금시대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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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 책을 봤다는 것을 북플의 기록을 보고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읽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뒷부분인 송나라 역사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용 무협 소설 읽는다고 배경이 되는 역사를 훓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덕분에 지금까지도 당시의 굵직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목적을 가지고 읽은 책은 기억에 남는 법인가보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권은 우리에게 익숙한 수, 당, 그리고 짧은 분열기였던 오대십국, 북송 시기까지를 다룬다.

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 왕조가 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 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 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 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 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건의 난부터 시작된 중국의 분열기를 넘어 남북조를 통일한 것은 수나라 왕조였다. 수나라 시조인 문제는 북주의 중신인 양견이었다. 북주는 선비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였으나 수나라는 한족 왕조임을 내세웠다. 수나라는 지방 행정기구를 정리하여 기존의 주군현 제도에서 군을 폐지하고 주와 현으로만 구성하는 대신, 지방관이 임명하던 지방 속리를 중앙 임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드디어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하지만 수나라는 햇수로 38년(581~618)밖에 이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후계자 문제, 고구려 원정, 수도 건설과 무리한 대운하 사업, 2대 황제인 양제의 사치 때문이었다.
당나라 고조인 이연은 그다지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결단력도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뒤이은 태종이 형인 이건성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컸을 것이다. 거병했을 때 이연은 태원 유수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을 반란군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했다. 수나라 말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도적떼들이 황제나 천자를 자칭하며 일어났으나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은 고조였다. 태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과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책사인 위징은 이밀의 부하였는데 이밀은 수나라 말기 자신의 아버지인 이연과 더불어 경쟁했던 상대였다. 게다가 위징은 황태자로 장자인 이건성을 밀었는데도 태종은 그를 국사로 임명한다.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안녹산은 재치 있고 붙임성이 좋았던 모양이다. 현종과 양귀비 모두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안녹산은 거란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양귀비의 일가라는 사실만으로 출세한) 양국충과 손잡고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이임보 배척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이임보가 죽자 안녹산과 양국충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양국충은 수도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반면 안녹산은 외지에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 간했고 불리함을 느낀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다. 그 때 안녹산은 3군 절도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이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 이듬해 마침내 낙양을 함락시켰으나 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현종은 이 때 촉으로 피신을 갔고 왕위를 이어받은 숙종은 위구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의 구원병을 모아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겨우 수복했다.
당은 시 문학이 활발했다. 이백, 두보, 왕유, 백거이 등 지금도 당시(唐詩)의 대명사가 된 이들이 이 시기 차례로 등장했다. 성당시는 당의 국력이 번성했을 때의 시를 말한다. 이백은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성당시인이었다. 그는 당의 국력이 약해질 무렵 죽었고 당 말기가 되면 혼란스러운 사회가 된 만큼 사회성이 강한 풍조를 담은 두보나 백거이 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 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 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할 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 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 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송나라는 당에서 문제가 되었던 절도사의 힘을 약화시켰고 과거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였다. 당나라 때도 과거 제도를 활용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비율로 따지면 소수였다. 과거제는 진사과와 제과로 나뉘었는데 진사과는 시문을 짓거나 논술을 하거나 고전을 일부 발췌하여 적어내야 하는 시험이었다면 제과는 문장을 베끼는 종류의 시험이었다. 진사과는 주로 고급 관리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고 제과는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주로 차지했다. 강남 지방은 예로부터 문인의 기풍이 높았고 화북 지방은 무인 기질이 넘쳤다(남북조 시기까지 거슬러 감). 송나라 초기에는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당나라 말기 권력을 잡았던 세력들)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기가 되면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는 과거제와도 연결되어서 진사과에 지원한 이들이 강남 지방의 문사들로 채워졌다. 화북 관료와 강남 관료 간의 경쟁은 북송 시기 내내 화북과 강남 인력 사이에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 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 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 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P304

송나라는 대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관료사회였던 송은 갈수록 국가 방비에는 허술해진다. 내부적으로도 주전파보다는 주화파 정치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요와 강화 조약을 맺고 대하(중국에서는 서하라고 부름)와도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였으나 그만큼 국방에 투자하지 않았던 것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송나라는 세력이 커진 금에게 결국 수도를 뺏기고 남으로 내려가야했다. 이때까지가 북송 왕조다.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 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 송은 형, 요는 동생의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2~46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 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 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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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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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관계는 상대적이다. 외교는 자국의 입장에서 정도의 차이에 따라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에서부터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는 치열한 수싸움의 세계이다. 외교에서 중요한 관계는 아마도 주변국이 될 것이다. 자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외교는 안보와도 연결되어 인식되므로 그렇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세계사적으로 유목 민족이 힘을 키운 적이 몇 차례 있었다. 돌궐, 위구르, 몽골, 오스만 등이다. 돌궐은 유목 제국의 황금기를 연 첫 주자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었다.
예를 들어, 한반도는 고대부터 근대에 오기까지 중국의 영향 하에 있지 않았던 적이 없다(좋든 싫든). 현재 남아 있는 문헌들이 대부분 중국의 것들이고(물론 일본도) 당연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변국들의 입장은 축소되거나 왜곡되어 기술된 경우가 많다. 자국의 역사가 있다면 중국이 써 놓은 기록과 비교해볼 수 있겠으나 고대로 갈수록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있다 해도 부족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다각도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돌궐은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초원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며 호령한 제국이다. 그 이전에 흉노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범위를 차지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유목 국가로서는 최초의 타이틀을 가질 만하다.
돌궐은 552년 건국되어 급격하게 성장했다가(제1제국 시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로 분열되고, 다시 일시적으로 힘을 되찾았으나 630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그 후 한동안 당의 기미지배를 받다 그 세력권에서 벗어나 687년 국가를 재건하였으나(제2제국 시기) 이후 침체 및 부침의 과정을 거쳐 745년 멸망하게 되는데 이처럼 2세기 동안 다양한 양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국가가 성장에서 소멸의 시기를 겪지만 이처럼 제국으로 성장했다가 숨고르기를 하고 다시 일어나 제국을 형성하다니 놀라웠다.

이 책은 돌궐의 주도 집단인 아사나 세력에 주목하여 이들이 권력을 형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아사나 집단의 역사는 곧 돌궐국의 형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아사나는 5세기 바르콜 분지(톈산 산맥 북방)에서 발원해 6세기 초 유연과 고차가 대결하는 과정에서 알타이 산지로 이주하였다. 그때까지 아사나는 유연의 지배 하에 있던 대장장이에 불과한 집단으로 그나마도 건국 이전의 기록은 없고 건국 이후 중국 기록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그 기원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아사나 집단은 자신들이 국가의 주도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들은 과거 흉노, 오손 이래 북아시아의 정통성 계승을 상징해주던 이리 신화를 받아들여 하늘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이어졌음을 강조했다(P97) .

돌궐은 건국 이후 몽골 초원과 중가리아를 넘어 서방으로 진출해 카자흐 초원을 거쳐 아랄 해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의 초원과 그 주변의 오아시스 지역 대부분을 통합하고 단일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냈다. 돌궐은 과거 유목민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고 주변의 오아시스 상인 출신의 관료들을 채용하였다. 이를 통해 동서 교역로인 초원길을 바탕으로 거대한 교역 시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돌궐이 위치한 곳은 주변의 정주 세력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정주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반대로 약해지면 돌궐은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구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남북조 시기 이전 돌궐은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끝나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돌궐의 교역로가 해체되자 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수, 당은 돌궐을 끊임없이 견제하였다. 돌궐은 680년 재기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당나라의 지속적인 무력 대응으로 수나라 통일 이전의 제국 범위 만큼은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720년 이후가 되면 돌궐은 당조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받아들인다.

비록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돌궐이 보여주었던 권위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교역 국가로의 지향, 즉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영역을 확대해 초원과 오아시스를 결합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기초로 장악한 동서 교역로를 바탕으로 중국으로부터 구득한 물자를 유통시키려고 한 방식은 이후 큰 영향을 미쳤다. 돌궐 이후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위구르는 그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했음에도 이와 같은 교역 국가로서의 지향은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위구르는 당조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카라발가순 같은 거대한 교역 도시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또한 10세기 초의 거란(요) 역시 동부 몽골 지역으로부터 초원을 가로지르는 교통로를 장악, 유지하면서 화북과 만주 등지에서 확보한 재화를 동서로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적극 보여주었다. 나아가 13세기 초에 등장한 몽골은 돌궐처럼 서방 진출에 성공해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만이 아니라 주변의 정주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과거 초원을 최초로 통일했던 돌궐을 능가해 정주 지역마저 통제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돋움했다(P595).
아사나가 유목 세계의 투르크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던 노력은 그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된 뒤에도 아시아 내륙에 펼쳐진 거대한 중앙 아시아 지역에 큰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사나는 초원의 중요한 유목민 세력이었던 투르크들을 통합하기 위해 과거 투르크(고차)의 상징으로 북아시아의 중요한 신화소였던 '이리'까지 차용해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전했던 200여 년의 돌궐사 전개 과정을 통해 '투르크'라는 강한 자의식이 초원 유목 세계 내에 형성될 수 있었다. 그 후 누구든 초원의 패자가 되려면 이것을 극복하든가, 아니면 이것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P596).

이 책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장점은 사료로 비단 중국의 한문 문헌만 참고하지 않고 고대 투르크(오르콘룬) 문자로 쓰인 비문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투르크 비문은 19세기 말 유럽 탐험대가 확인한 이후 연구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투르크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이후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돌궐은 이전 유목민들과 달리 6세기 후반 소그드인의 문자를 차용하고 680년 이후에는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였다. 사용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일방적인 한문 자료로의 해석에서 탈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돌궐의 문자는 이후 위구르, 키르기스 등에서도 10세기까지 사용되었고 이후 거란, 서하, 여진, 몽골, 만주 등도 독자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선례를 만들었다. 단점은 (아사나 집단의 세력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내용의 구성과 책의 분량, 시간상의 제약으로 몽골 중심으로 전개된 부분만 다루어져 서돌궐의 범위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을 펴 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고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정주 세력인 중국의 자료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래서 유목 세력의 역사들을 함께 고찰해야 일방적인 해석을 벗어나 빈 공간의 역사를 메우고 왜곡된 역사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당이 고구려에 몇 차례나 공격에 막히고 고구려 이후 대조영이 세력화하기까지 돌궐과 생각보다 많은 관련이 있어 흥미로웠다. 아주 유익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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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 역사를 보면 정주민인 한족과
유목민족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습니다.

청조 멸망 이래 한족의 중원지배가
불과 한 세기 정도 밖에 안된다는 걸
볼 때, 다시 유목민족이 발흥하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0 09:15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도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중화라는 명분 아래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죠. 세력이 끊임없이 교체한 역사를 확인해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7-09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궐이 큰 나라였네요 돌궐이라는 말은 알아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큰 나라라고 해서 그게 오래 이어지지 않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거 생각하면 지금 한국은 언제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 사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오니... 역사에는 남겠지만... 돌궐 역사를 보면 고구려나 발해도 조금 알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0 09:19   좋아요 0 | URL
네. 돌궐이 굉장히 넓은 땅을 소유했더라구요. 이전의 흉노족이 있기는 했지만 땅의 범위가 더 컸다고 하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2세기 정도 이어진 걸 보면 결코 짧은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수나라는 단 38년을 유지했으니까요^^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며 후대에 유목 민족의 하나의 루틴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웟습니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지만 사실 우리 피에는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죠. 기원설도 여러 개가 있고요. 그리고 이만큼 오래 지났는데 설마 하나이기는 하겠습니까! 고구려, 발해, 수, 당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었답니다^^
 
Animal Farm and 1984 (Hardcover)
Orwell, George / Houghton Mifflin Harcourt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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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의심해야 하는 세상에서 항시 긴장하며 정신을 챙겨다니는 일이 가능할까. 온전한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그 반대의 상황은 상상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지. 이 세계는 정말 살아가고 살아남는 것이 치욕일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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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조지 셀 - 콜럼비아(소니) 앨범 녹음 전집 [한정반 106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조지 셀 (George / SONY CLASSICAL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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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녹음이 1969년이라 하는데 어쩜 이리 음질이 수준급인지 놀랍기만 하다. 명반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으나 그동안 계속 고민하고 침만 삼키다 이번에 막차를 겨우 타서 다행이다. 시작부터 드보르작의 경쾌함을 만나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데 남은 리스트들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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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05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6CD라는 건 106장이라는 걸까 하고 보니 맞네요 106장 언제 다 듣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루에 한장만 들어도 106일이 걸리니... 음악도 아주 많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05 09:50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106장이에요. 셋리스트 보고 있으면 아주 부자가 된 느낌입니다!^^ 다 들으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으나 하루 cd 한장 듣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오 2023-07-05 0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썩이는 화가님 상상중

거리의화가 2023-07-05 09:5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실제로 들썩거렸는데 몸이 유연하지는 못해서 삐그덕거렸다는 게 맞을 듯합니다!ㅎㅎ
 
토지 18 - 5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8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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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문에는 온통 전쟁에 관한 기사뿐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신문은 전쟁에 관한 것 일색이었지만 전선이 달라지고 적대국이달라지면서부터 일종의 히스테리처럼 신문지면은 요란해진 것이다. 식량증산, 저축장려, 국방헌금, 유기·기타 금속류의 헌납, 지원병 독려와 아울러 동태 상황에 대한 선전, 각종 단체들은 영일(寧日)없이영미)를 성토하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연일 진충보국(盡忠報國)과 성전환수를 외쳐대고 있었다. 특히 지식층, 그 중에서도 글 써서 행세해왔던 문인들 문학단체들은 남 먼저, 보다 과격하게 일왕(日)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마치 총 든 놈이 뒤에서 목덜미를 겨누고 있기라도 하듯이. - P53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일으켰고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격화되었다. 그러나 1943년 2월 1일 일본은 과달카날에서 철수하였고 4월 18일 일본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비행기 속에서 사망하였다. 2월 2일 독소전쟁의 격전지인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 원수인 파울루스가 항복한다. 7월 25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체포되고 같은 달 28일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이 해체되면서 침략국의 전세는 전체적으로 어두워졌다. 같은 해 조선에는 3월 1일 징병제가 공포되고 8월 1일에 시행되었다. 6월에는 학도 전시동원체제 확립 요강을 결정하고 10월에 실시되었다. 3월에는 친일 문화 단체를 통합한 반도문인보국회가 결성되었다.

8월 9일 조선식량관리령(식량의 수급 및 가격을 조정하고 배급의 통제를 목적으로 함. 정부는 매입한 미맥을 조선식량영단이나 조선 총독이 지정하는 자에게 매도하거나 기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이 공포되어 식량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식민지 조선 경제는 더욱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일본은 식민지의 식량을 통제하는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모두 쓸어갔고 이에 피해를 보는 것은 가난한 대중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대중을 이끌어가야할 지식인이나 경제계 인사들은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조선인들을 탄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쟁에 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이 무렵 학교에서 하는 교육이라고는 군사 훈련 과 근로 봉사였다. 결국 전쟁 예비 훈련인 셈인데 아이들을 이러려고 교육받게 한 것은 아닐텐데 참 헛웃음이 나왔다. 천으로 무슨 머리를 가릴 것이며 목검으로 무슨 싸움이 되겠는가. 막상 조선 내 전쟁이 벌어진다면 공멸이 아니였을까.

중학생, 그들은 과연 학생인가? 카키색 교복에 전투모를 쓰고 배낭을 짊어지고 각반을 다리에 감고 그들은 등교한다. 운동장에서는 연일 목(木)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 그 지난달 그러니까 팔월에는 드디어 조선에도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 누군가의 말로는 조선인에게는 병역을 실시하지 말 것이며 절대로 무장시켜선 아니 된다 하고 명치천황(明治天皇)이 유언을 했다던가 어쨌다던가. 사실이 그렇다면 얼마나 다급했으면 유언을 무시하고 징병제를 시행하겠는가. 아무튼 앞으로 중학교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할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공부 안 하기로는 여학교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전보다 교련시간이 많아졌고 목검(木劍)이다, 나기나타다 하며 무술시간은 체육이나 무용시간을 완전히 점령했고 모내기에서 보리 베기, 벼 베기에 동원됐으며 폐품수집에서 국채 팔러 다니기, 센닌바리 만들어주기, 공장에서 미완성으로 나온 군테 마무리 작업, 게다가 방학의 십일 간을 반납하고 교사부지 고르는 데 동원된 근로봉사, 그런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고통스러운 것이 방공연습이었다. - P222

"알다시피 요즘 학생들 군사훈련 아니면 군수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노동자들 선동하기, 눈치껏 태업하기, 공장기구 파손, 변소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후미진 곳이라면 어디든 벽면에 낙서하기, 그 낙서의 종류에는 별의별 것이다 있는 모양인데 조선독립만세서부터 귀축 일본 물러가라, 해방의 그날이 오면 너희들 모가지는 추풍낙엽이다. 친일 분자의 모가지부터 비틀어버리겠다 등등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다는 거고, 하는 수 없이 학교 당국에서는 호주머니 속에 백묵이나 연필 따위가 들어 있는지 조사를 해서 들여보내는데도낙서는 줄지 않는다는 거다. 요즘 애들 결코 정면 대결은 하지 않아."
"신통하군요."
"그 애들 보면 희망이 생겨, 옥쇄가 아니고 지속성이거든." - P334

그럼에도 희망은 있었다. 조선인 아이들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오오 덴노사마." 천황을 부르는 말에 웃었다는 이유로 뺨을 갈긴 일본인 선생에 그 학생은 반항을 했고 조선 말을 쓴다 하여 조선인 선생이 벌을 준 일이 교내에 퍼지자 학생들은 흥분하고 분개했던 일도 있었다. 여러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도 조선인 학생들은 갖은 행위로 학교 당국에 경고장을 날렸다.
'아이들, 학생들이 희망이다'. 이것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결국 학교 내에는 균열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 많은 학생들을 모두 단속한다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선의 악화로 학교도 예비 군사 훈련소가 되어버린 탓도 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선생들도 아이들을 억지로 붙잡아 두고 학생들을 일탈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18권에서 크게 두 가지의 사건이 있다.

양현과 영광, 윤국의 이야기가 있었다. 영광은 양현이를 열망하듯 사랑했으나 윤국이의 벽을 인식하면 무너져 버렸다. 그렇게 그는 양현의 마음을 끝내 거부했고 양현은 그런 영광의 마음을 알면서도 괴로워한다. 양현은 윤국과 결혼하라는 서희의 말에 고뇌하고 윤국은 또 윤국대로 고뇌한다. 결국 셋 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어서 마음이 짠했다. 양현이의 사정을 안 명희도 그 옛날 통영에서 방황하던 때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당시 썩은 동아줄을 잡았던 명희는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데까지 갔었기에 양현이가 자신과 같은 상황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명희는 자신의 감정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양현을 부러워한다. 그런 점에서 명희는 여전히 과거를 털어내지 못한 것 같다. 세월이 지난다고 흉터가 저절로 아무는 것은 아니다.

욕망과 희생의 싸움이었다. 사람 속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한몫을 하겠다는 충동과 세상을 바라보며 국외자로서 흐르는 대로 흘러가겠다는 에고이즘과의 싸움이었다. 집념과 포기의 싸움이었다. 도덕과 반도덕, 그에게는 윤국이 거대한 성(城)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은 더욱더 자신이 피를 많이 흘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것은 믿지 못할 자기 성격적 결함이었다. 제2의 혜숙을 또 만들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은 그의 전진에 제동을 걸었다. 영광은 양현을 사랑했으며 이 세상에 나와서, 가장 강렬한 집념이었다. - P266

팽팽하게 당겨진, 결코 누그러질 수 없는 긴장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양현은 계속해서 울었다. 명희는 저도 모르게 뜨개질하다 만 것을 집어들었다.
‘언제나 그렇게 엇갈려. 왜 그렇지? 그러면서도 사람은 살아간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그런 슬픔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살아가고,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 양현아, 실은 나도 지금 혼란스러워" - P271

불안한 사랑,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랑, 그러나 양현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그 불안한 사랑에 매달려 있는가를 깨닫는다. 외부의 장애보다 영광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장애물이 그 얼마나 큰 것인가를 양현은 새삼스럽게 통감한다. 그것은 그의 처절한 외로움이며 그 외로움을 타고 흐르려는 그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양현은 그를 꽉 붙잡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의 외로움을 녹여주리라! 마치 영광이 옆에 있는 것처럼 그러는가 하면 등을 돌리는 뒷모습에 매달리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영원히자기 앞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리는, 그 돈암동 거리를 눈앞에 떠올려보기도 한다. - P302

윤국은 차안에 서서 피안의 양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강을 결코 건너지 못하리라는 것을, 피안에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윤국은 깊이 깨닫는다. 양현은 양현의 길을 가고 자신은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 P325

김두만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그는 기생인 월화와 바람을 피우는데 정부가 된 서울댁(조강지처였던 막딸은 결국 호적을 팠음)은 이에 노발대발 사건은 터졌다. 그는 진주에서 음식점을 차려 두만이네 식구를 먹여 살린 만큼 지금의 김두만 부는 서울댁의 지분을 무시할 수가 없다. 물론 막딸을 버리면서 부모와도 갈라서고 서울댁은 집안에서 전횡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바람 피운 것이 자랑은 아니지 않나. 그 때 막딸을 때리고 내칠 때도 '미친 놈 개자식!' 욕지거리를 했었는데 정말 끝내 이 놈은 변하지가 않는구나 싶어서 혀를 끌끌 차게 된다.

"허무해서 아마 그러실 거다. 돈이 많아도 쓸 곳이 없고."
"허무해서 그렇다는 말엔 나도 동감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업은 올스톱, 돈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부동산 매매나 된단 말가, 땅에서는 공출로 몽땅 나가버리니, 전쟁은 불리하고………… 현재를 실감하는 데 여자밖에 더 있어? 나 역시 그래.
마음 붙일 곳이 있어야지. 나는 출발에서부터 야망 같은 것 없었으니까, 자네들 수재하고는 형편이 달랐어. 한순간 순간을 즐기다가 가는 거지 뭐. 어차피, 땅속에 들어가 썩을 몸 아닌가." - P346

"네년이 나한테 칼을 들이대 놓고서도 그 자리가 온전할 것 같나? 독사 같은 년, 내가 그거를 모리고 이날까지 살았제. 만정이 떨어진다." 또 서울네는 새우같이 등을 꾸부리고 앉아서 눈을 치뜨고 두만을 노려본다. 힘이 다 빠져서 입도 몸도 뜻대로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래가지고는 어디 마음 놓고 집이라고 찾아오겠나? 저년은 서방 밥그릇에 비상 타고도 남을 년이다. 생각해보믄 저년으로 인해서 부모 형제하고 등졌고 죄 없는 제집 민적까지 파고 자식 놈은 저 모양..…………."
새우처럼 꾸부리고 있는 서울네 등이 튀듯 움직였다. - P352

어느덧 1943년을 지나고 있다. 19권은 보나마다 더욱 각박해진 전황 때문에 암울한 일들이 줄줄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도시에는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 아래, 얼음 갈라지는 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서늘하고 푸른 하늘 아래,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군상들, 누더기 같은가 하면 곤충 같기도 한 군상들이 서로 방향을 달리하며 혹은 같이하며 가고 있었다.
낡은 상자 같은 트럭이 달리고 짐 실은 우마차도 지나가고 있었다. 여인을 신이 만든 꽃이라 했던가, 자연의 열매라 했던가. 꽃으로도 열매로도 볼 수 없는 몸뻬 차림의 우중충한 모습들, 남자들은 한결같이 카키색, 사람들에게는 계절이 없었다. 배급소에서 식량을 달아주고 배급표를 챙기는 그 현실만이 있었을 뿐이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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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02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생들한테 군사훈련까지 시키다니, 그게 오래 남았던 것 같네요 지식인은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하고... 일본 사람보다 더 일본 사람 같은 조선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런 사람은 조선이 독립했을 때도 달라지지 않았네요 학생들이 일본에 반항하기도 하다니 대단하다 싶기도 해요 제가 학생이었다면 그러지 가만히 있었을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02 21:18   좋아요 1 | URL
얼마 전에 읽었던 ‘제국의 소녀들’이란 책에도 40년대 무렵이 되면 군사 훈련하고 농촌 봉사 하고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조선인이 세운 학교가 일본인 교장, 일본인 교사가 대부분인 곳으로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이렇게 반항하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기도 하면서도 대견하더라구요. 어른들도 독립운동을 접고 친일로 전향하는 마당에… 그래서 아이들이 희망이다 싶더라구요^^*

독서괭 2023-07-12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읽었네요! 18권, 학교 이야기 재밌었어요. 똥 싼 이야기에,, 심각한 학교 상황인데도 큭큭 웃었네요. 아휴.
양현이 너무 안됐어요. 윤국이도 안 되긴 했지만, 양현이가 여러모로 훨씬 힘든 상황이겠죠. 그래도 말못하고 결혼해버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 이제 두권 남았어요~~으흐흐~~^^

거리의화가 2023-07-13 08:53   좋아요 0 | URL
똥싼 이야기는 상황은 심각했을지라도 조선인 입장에서는 사이다일 수밖에 없죠! 19권 읽고 있는데 양현이랑 영광이 이야기가 또 나오더라구요. 영광이는 환국이와도 관계가 애매해지고. 윤국이는 다시 휙 떠나고 안쓰럽습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괭님도 남은 분량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