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원.명 - 곤경에 빠진 제국 하버드 중국사
티모시 브룩 지음, 조영헌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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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 사이에 중국에는 두 왕조가 군림했다. 첫 번째 왕조는 1271년 건립한 원으로, 쿠빌라이 칸은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의 손자였다. 다음 왕조는 명으로, 주원장이 1368년 건립했으나 1644년 북방 초원에서 내려온 만주족에 의해 전복되었다. 원-명은 중국의 전제 체제를 구축했고, 중국 사회를 확대가족 집단으로 재편했으며, 상업적 부가 집중되기 쉽도록 중국의 가치를 재조정한 왕조였다. 원-명 시대는 기후학자들이 '소빙하기'라 부르는 시기와 일치했다. 원-명 사람들은 안으로는 이상 기후에 시달리고, 해안에는 외국 상인이 끈질기게 출현하는 통에 더욱 가중된 혼란을 겪었다. 그 가운데 과거의 전례에 집착하며 이를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과거는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자기를 위한 공간을 찾았다. 원-명 시대가 대단히 혼돈스럽고 불화不和의 사회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 P15~18

하버드 중국사 이번 편은 13세기부터 17세기, 장장 4세기에 걸친 시기를 다룬다. 송을 정복한 몽골은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전 정권의 합법적 계승자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역사를 수집하여 기록하였다. 명은 몽골이 지배한 영역보다 축소된 영토를 얻은 대신 중화를 회복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중국인은 몽골을 '호'라고 여겼으므로, 몽골인에게 스스로 '화'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주장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좀 더 포괄적인 '일통一統'이라는 개념을 찾아냈다. 쿠빌라이는 여러 민족을 자기의 통치권 아래에 두어 하나의 백성으로 만들고 자기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주장했다.
원이 중국 전통 왕조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요사, 금사, 송사라는 세 왕조의 정사 편찬 작업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더 나아가 쿠빌라이는 또다시 중국인의 권고를 받아들여 국가 규모의 지방지를 편찬하도록 했다. 이 안에는 모든 영토를 포괄하는 지리와 행정 명부, 그리고 인물에 대한 기술이 담겼다.
주원장은 몽골 지역과 시베리아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천하일통', '국조일통', '일통만방' 같은 표현들이 주원장 때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지속해서 국가적 담론을 지배했다. - P66~67

나는 성격이 다른 두 왕조를 저자가 왜 한 권에 다루려는 선택을 했을까 궁금했다. 이는 결국 두 왕조 모두 공통적으로 기후 재난의 시기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가뭄과 홍수, 기근, 메뚜기 때의 공격, 소빙하기로 평년보다 낮아진 기온 때문에 농업을 기본 산업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입장에서 큰 혼란이 초래되었다. 책에는 '아홉 번의 늪'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한 번 올 때마다 짧으면 2~3년인 경우도 있지만 길면 15년이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장기간의 재난을 개념화하기 위해 저자는 '슬라우'(번역서에는 늪이라고 표현됨)라는 고어를 사용했다. 슬라우는 거름을 모아두는 곳으로 나그네가 빠지기 쉬운 웅덩이 또는 저지대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곤란한 상황을 묘사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날씨는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다. 당시 사람들도 이상 기후 및 재난에 관한 기록을 정사에 기록했고 기후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재난을 예측하기도 했다. 기후 문제가 역사서에 등장한다는 게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매일의 날씨는 사람들의 기분을 좌우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점점 온난화되는 기후로 인해 이미 지구는 병들어 이상 기후로 나타나고 지구인들은 고스란히 그 피해를 받고 있는 중이다. 하물며 이 시기에 사는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농사를 짓고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뭄, 홍수, 한파 등은 흉작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명은 장자 계승이 기본 원칙이었지만 몽골은 형제 상속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쿠릴타이에서 경쟁자를 물리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때문에 원은 우구데이 사망 이후에 끊임없이 상속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이 지속된다. 원 왕조가 오래 가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이 왕위 계승의 시스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왕위 계승에 장자 상속제가 여전히 유효했으나, 다른 요소도 개입할 수 있었다. 칸은 경쟁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쿠릴타이'라고 부르는 귀족들의 회합에서도 선거로 지배권을 비준받아야 했다. 부친을 계승하려고 형제들이 경쟁하는 관습을 '테니스트리tanistry'(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방에 거주하던 고대 게일Gael인의 계승 제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재산과 지위를 계승하는 관행을 일컫는다.)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형제 간의 살육은 비일비재했으며, 이를 '유혈의 테니스트리'라고 부른다. - P162~163

명은 5차례의 정치적인 중대 위기(호유용의 변, 정난의 변, 토목의 변, 대례의 논쟁, 국본의 위기)를 겪었다. 다섯 사건 대부분이 왕위 계승 등의 문제로 왕권과 신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피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왕조의 합법성을 지켜낸다는 명분을 내건 황제의 바람이 한 쪽을 담당했다면 나머지는 충신의 의무를 지켜내기 위함이라는 관료들의 논리가 있었다.

명의 정치 문제는 그 원인을 비극적인 결함으로 보기보다는 '타협의 문제'로 보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통치자와 고위 관료 사이에 독재 정치를 수긍하는 '충성' 조항이 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잘못은 관료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통치자가 처신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황제는 독재 정치 시스템의 본질이자 국가의 근본이었고, 그 왕조의 생존을 보증하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담보였다. 황제는 권력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으나 그 방법을 몰랐고, 관료들은 황제를 섬기는 일에 앞서 나라를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고 믿었으면서도 그 원칙을 버리고 황제를 택했다. 이러한 관계에서 발생한 충성은 결국 통치자와 관료 모두를 딜레마에 빠뜨렸다. - P203~204

원-명 시기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정치와 사회의 수준은 따라 높아졌고 농상공업의 발전으로 도시가 발전하자 교류가 활발해졌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거래되는 물품의 가치가 높아졌고 단위가 큰 물건을 구입할 때 휴대가 편리한 은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1436년 명이 일부 지역의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자 은납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조정은 개인이 귀금속을 보유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였기 때문에 국내 은광 개발을 제한하여 은 품귀 현상을 빚게 된다. 16세기 후반 일본과 페루에서 막대한 은이 유입이 되고 나서야 상황이 개선된다. 원-명 시대에는 늘어난 교류만큼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기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다양한 상품이 막대한 규모로 생산, 유통, 소비되면서 황실, 권세가 뿐 아니라 집에 막대한 물품을 쌓아놓은 창고를 소유한 거부(대상大商)가 생겨난다. 돈만큼이나 취향이 경제를 구성하는 중요 기반이 되면서 미적 안목이 있는 감정가들의 몸 값도 자연스레 올라가게 된다. 이제는 사치품을 살 만한 형편이 되는지의 여부보다 어떤 사치품을 구매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책에서는 명 말 수집가들 중 가흥에서 거부가 된 이일화라는 사람의 물품 획득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 서적, 가구, 도자기, 서예와 회화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이일화는 진정한 문화물을 소유하는 것이란 좋은 양육과 교육을 받은 증거라고 간주했다. 그는 투자나 사회적 지위 때문에 명품을 수집하는 부자가 아니라 사심 없이 문화적 전통을 전수하는 자임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중국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원-명은 가족의 사회적 성격이 변화되는 시기였다. 당의 오래된 귀족 가문은 사라졌고, 송의 왕실 가문도 사멸하고 있었다. 명 때는 조상의 연원을 원 이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뼈대 있는 가문이 드물었다. 원-명에도 훌륭한 가문은 계속 출현했지만, 그들은 과거의 명문가들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과 위상은 국가가 아니라 그 개인과 얽힌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친족망이 사람들의 삶에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면, 성의 구별은 친족망을 구성하는 원칙이었고 남성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부계 사회 유지를 위해 사회적으로 관혼상제가 정례화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사후 세계가 어떠한지, 물질세계의 본질은 어떻게 규정되는지, 지구는 평평한지, 도덕적인 삶은 어떤 것인지 다양한 의견을 나눌 준비가 되었다. 특히 16~17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세상을 탐구하고 책을 참조하며 고정 관념을 타개해 나갔다.

만력 연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미 격물格物이라고 하는, 사리事理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내재했던 터라 이들에게 원형 지구 이론은 쉽게 침투될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수학과 천문학의 기초를 잘 다진 뒤 우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 이로 인해 천원지방이라는 자기들의 논리가 훼손됨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선교사들의 논증을 신뢰하게 되었다. - P345
만력 연간 지식인들 사이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기는 했으나, 믿음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단지 소수의 유럽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 후기 사회 내부에 가해진 각종 압력 때문에도 기존의 믿음은 끊임없이 요동했다. 가령 만력과 천계天啓(명의 15대 황제) 연간의 정치적 문란, 급속한 상업화, 신분 질서의 변동, 변경 지방의 군사적 위기, 그리고 환경 조건의 악화 또한 믿음을 변화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믿음을 더는 고수하기 어렵다고 느낀 일부 사람이 주로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찾기 시작했다. - P346

'세계 경제'라는 말은 지중해 유럽을 연구하는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만들어낸 용어로, 본래 의미는 모든 세계의 경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의미는 빨라야 18세기부터 통용되기 시작했다. 본래 세계 경제라는 말은 정기적인 교역망을 통해 수준 높은 통합 경제를 이루어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노동 분업이 자치적으로 지속되는 광대한 지역을 의미했다. '세계 경제'가 가지만의 '세계'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상대적인 자치성 덕분이었다. ...
남중국해는 상대적으로 자치적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통합된 무역 구역이었다. 북쪽으로는 중국 상인이, 남쪽으로는 이슬람 상인이 조직적으로 진출하면서 15세기 후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화 원정단도 이 구역에 중국인들의 참여를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항해로는 아무리 해도 그러한 세계 경제를 창출할 수 없었다. 오직 교역이 조공을 뛰어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 P440~441

두 차례의 만력의 늪과 숭정의 늪, 그리고 만주족의 출현은 명의 붕괴로 이어졌다. 숭정의 늪 때는 하필 재난으로 전염병이 돌고 상업 경제가 중단되었으며 식량이 줄어들어 곡물 가격이 치솟았다.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정부 조달에 의존했던 북방 지역은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곳에 있던 병사들이 도망쳐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이어지게 된다. 청이 들어선 후 명의 생존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만주 정권에 복종했다. 하지만 순순히 항복하지 않은 저항군은 만주군에 의해서 처형되거나 자살로 끝이 났다. 청은 다민족의 통합을 주장하며 들어섰다. 만주족은 제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지 않고 명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이어갔다. 이후에는 청에 대한 저항의 불도 사그러들었고 명의 백성은 청의 백성이 되었다.

만력의 늪과 숭정의 늪은 농업 지식의 결핍이라는 함정에 걸려든 사태이기도 했고, 동시에 나라 안팎에서 진행된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 휘말린 사건이기도 했다. 남중국해에 세계 경제가 성장함에 다라 명의 경제는 연안으로 이동되었고, 물가 역시 단순히 국내 시장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국내 시장이 좀 더 크긴 했다) 남아메리카와 남아시아 및 유럽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재조정되었다. 새로운 사상 또한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기존의 문제에 새로운 문제가 겹치면서, 아무리 훌륭한 전략가라도 체제 재정비의 과제 앞에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44년 청의 등장과 함께 세계 제국들의 급격한 재편이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당혹감 때문에 명은 끝났을 것이다. 만주족은 국경을 차단하고 황제를 칸으로 교체했으며, 제국이 되려는 야망을 부활시켰다.- P512

이 책은 원-명 시기를 환경적 접근을 통해 다루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시기적으로 더 짧기는 하지만 원에 대한 설명은 너무 소략하고 대부분이 명의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된 점이 아쉬웠다. 차라리 분권을 해서 각각을 충분히 다루는 것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국제-교역, 환경적 접근이 특히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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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 백 편 - 한국 시의 독보적 개성, 백석 깊이 읽기
이숭원 엮음 / 태학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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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고독과 우수의 정서가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애썼던 흔적이 엿보였다. 세심한 관찰력과 돋보이는 묘사, 맛깔나는 단어와 문장들을 보면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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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9-04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본 백석으로 읽었습니다.
옛 정서와 모더니티를 지향하는 지식인의 정서가 복합되어 있는 그의 시에서 그리움도 사랑도 갈등도 느꼈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9-04 11:0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정작 백석 시인은 외모도 그렇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데 시에서 느껴지는 향토, 토속성이 놀랍더라구요^^ 그리움이란 정서가 전반적으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 소돔과 고모라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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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무심한 나그네여,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꿈을 꾸지 않으려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붙들고, 석양빛 속에 멀리 푸르스름한 골짜기들이 나란히 사슬을 이루며 닫혀 있는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그 물에 잠긴 말 없는 커다란 초원을 가리켰다. - P25

나와 알베르틴은 베르뒤랭 부인의 만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동시에르 역에 가기 전까지 빈 객차만 찾아다니며 틈만 나면 포옹을 하는 등 화기애애했다. 역에 도착하니 생루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루는 나와 알베르틴의 관계를 인지했기 때문에 알베르틴의 반응을 무시하려고 했고 이를 느낀 알베르틴이 화가 나서 다다다다(!) 하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뒤에 화해를 했지만 이전에도 알베르틴이 생루에게 보인 호의에 질투를 느꼈기에 이번에도 나는 내심 둘의 만남이 불편했던 것이다.

아무튼 둘은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으로 이동했고 이번에도 사교 모임의 장면은 계속 이어진다. 기존에 게르망트 사람들이 아닌 지난 번 모임부터 등장한 베르뒤랭 부인과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 캉브르메르 부인이 새롭게 등장했다. 주최자가 모임을 개최할 결정을 하면 모임을 위한 준비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물밑 교섭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이런 모임합니다. 꼭 오세요. 이런 것을 할 예정입니다. 어때요?" 모임의 주최자가 어떤 훌륭한 가문과 출신이냐가 중요하겠지만 주최자도, 참석자들도 여기에 누가 참여하느냐에 따라 모임의 질이 결정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사교계에는 주최자와 참석자들을 둘러싸고 질투를 넘어선 암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참석한 뒤에는 어떤가.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자신은 높이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이런 과정이 너무 부담스럽고 지루해서 '제발 좀 끝나라!'를 연발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면 이런 곳 참여는 결단코 사절이었을 것 같다. 내가 하필 공주이거나 아니면 부유한 귀족이나 부유한 상공업자 출신 딸이어서 가야 하는 상황이었더라도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하며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베르뒤랭 살롱은 음악의 전당으로 통했다(뱅퇴유 소나타도 탄생했다는데 소나타 이름은 가상이고 당연히 실제 모델은 따로 있다. 이런 장치들을 끊임없이 심어두면서 독자로 하여금 유추해보게 하는 프루스트는 역시 대단하다).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은 부를 이용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 가운데에는 아카데미 회원인 브리쇼, 유명 학자인 코타르, 바이올리니스트 모렐, 샤를뤼스씨도 있었다. 독자들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베르뒤랭 댁과 캉브르메르 댁 사이는 불꽃을 튀기며 설전을 벌였고 당연한 듯 사이는 좋지 않아졌다. 사교계에서 얻어야 할 가르침은 무엇일까, 주최자와 참석자 간에 화합을 표방하며 마련한 자리였다지만 모임이 파하면 허무해지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것을 쫓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게는 그대만이 우리가 늘 찾는 사람으로 보였도다."
그 작은 동아리 회장은 죽을 때까지 ‘신도‘를 확보하고 싶어, 대공 부인에게 두 사람 중 나중에 죽는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 곁에 묻히자고 제안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 그중에는 멸시 받는 게 가장 고통스러워서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속이는 자, 즉 우리 자신도 포함하여 -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은 세 여인과의 우정, 즉 대공비와 베르뒤랭 부인, 그리고 뛰트뷔스 부인과의 우정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한 대홍수가 일어나서 나머지 모두를 파괴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자신이 여느 다른 우정보다 좋아해서 고른 것이며, 또 고독과 검소함의 취향이 그 선택을 제한한 그런 유일한 우정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 P46~47

인간은 하룻저녁에도 보통 때는 환대를 받던 모임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경박하고 유식한 체하며 세련되지 못하고 무신경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짐작하면서 비참한 마음으로 귀가한다. 그가 남들에게 엉뚱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흔히 여론이나 조직의 문제 때문이다. 흔히 그는 이런 사람들이 자신보다 가치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암묵적인 비난의 도움을 받아 그 궤변을 쉽게 분석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을 방문하고 편지를 쓰고 싶지만, 보다 신중한 그는 다음주에 있을 초대를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때로 이런 실총은 하룻저녁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달 계속되기도 한다. 사교계의 불안정한 판단에서 비롯된 실총은 그 불안정성을 더욱 가중시킨다. - P176~177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우리를 위대한 ‘전체‘ 속에 녹아들게 하는 불교의 니르바나(涅槃] 같은 훌륭한 학설을 이론적으로는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그 전체가 지적인 차원에서는, 뮌헨과 옥스퍼드와 마찬가지로, 파리 근교인 아니에르나 부아콜롱브보다 훨씬 파리에 가까우니까요.) 그러나 일본군이 어쩌면 우리 비잔틴 문명 바로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사회주의의 반군국주의자들이 자유시의 주요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는 건, 훌륭한 프랑스인으로서 또는 훌륭한 유럽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브리쇼가 말했다. - P186~187

사실 몇몇 사람들은 ㅡ 내 경우에는 유년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 타인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고정된 가치를 가진 온갖 것들, 즉 재산이며 성공이며 높은 지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환영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환영을 만나기 위해 모든 걸 실행하고 이용하면서 나머지는 희생한다. 그러나 환영은 지체하지 않고 곧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첫 번째 환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있을지언정 다른 환영을 쫓아 나선다. - P286

알베르틴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는 알베르틴과 매일 밖으로 나가 산책을 했다. 나와 알베르틴의 관계는 그렇다면 이제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는 것인가. 그치만 어머니는 나와 알베르틴의 만남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어느 부모고 자식의 만남을 100% 지지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 자식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해도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 하나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세월이 가면 나도 그 애는 바로 그런 사람이란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 아이가 너를 행복하게만 해 준다면 항상 좋게 생각할 거다. 그러나 나의 행복을 결정하는 일을 내 손에 맡기는 이런 말을 통해, 어머니는 예전에 아버지가 내게 「페드르」를 보러 가는 것을, 특히 작가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었을 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과 같은 의혹의 상태로 빠져들게 했는데, 그때 나는 갑자기 막중한 책임감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 나날이 우리의 미래를 은폐하는 타인의 명령에 따르는 일을 멈추고 드디어 진지하게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우리 각자의 재량에 맡겨진 유일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그런 우울한 감정을 느꼈다. - P133~134

어둠이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언제나 이렇게 옆에 있는 것임을 떠올리며, 스카프와 토크 모자와 더불어 내 몸에 밀착한 그녀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어쩌면 나는 알베르틴을 사랑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사랑을 그녀가 알아차리도록 내버려 둘 용기는 없었다. 설령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해도,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 한 그것은 가치 없는 진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란 내게 실현될 수 없으며 삶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의 질투로 말하자면, 내가 알베르틴과 영원히 결별할 때라야 거기서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음에도, 이런 질투심이 오히려 가능한 한 그녀 곁에서 떨어져 있지 않도록 부추겼다. 나는 그녀 옆에서도 질투를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질투를 내 마음속에 다시 깨어나게 하는 상황이 재개되지 않도록 조처했다. - P290~291

계속되는 알베르틴을 향한 질투의 감정으로 나는 헤어질 생각을 했고 어머니께도 결별하겠다 말씀드린다. 어머니의 반응은 "잘 생각했다." 였다. 역시 그런가.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처럼 쉽사리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떠나겠다던 나의 결심은 오히려 알베르틴을 더 붙잡게 만드는(붙잡고자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알베르틴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 타오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나보다.
질투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것이 없다면 사랑이 시시해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질투는 그만큼 피곤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로 밀당을 못하는 타입이어서 연애할 때 그 피곤하고 지지고볶고 하는 것을 왜 하나 생각할 때가 있었다. 밀당은 자연스럽지 않고 부자연스러운데 왜 이것을 하는 거지? 아무튼 내게는 여전히 멀고도 험한 밀당의 길...

그녀는 덧붙였다.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이곳에 계속 있을게요."그녀는 바로 ― 그녀만이 내게 줄 수 있는 ㅡ 나를 타오르게 하는 독약에 맞선 유일한 해독제를, 게다가 독약과 같은 종류의 약을 주었는데, 즉 하나는 달콤하고, 다른 하나는 쓴 것으로 둘 다 똑같이 알베르틴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병(病)인 알베르틴은 내게 고통을 유발하기를 포기했고, 그러자 이번에는 나의 약(藥)인 알베르틴이 나를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처럼 온순하게 만들었다. - P472~473


"특히," 하고 베르뒤랭씨의 말을 듣지 못한 코타르가 브리쇼에게 말했다. "베르뒤랭 부인 앞에서는 ‘모튀스(motus)‘하기요." "걱정 마시오. 오! 코타르, 당신은 테오크리토스의 말처럼 현자를 상대하고있소. 게다가 베르뒤랭 씨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고 덧붙였다. 그는 언어 형태와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유발하는 관념을 비교할 수는 있었지만, 정교함이 부족한 탓에 베르뒤랭 씨의 말에서 가장 용기 있는 금욕주의적 표현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 P89

베르뒤랭 부인은 진짜 뛰어난 사람들은 수많은 미친 짓을 한다고 확신했다. 거기에는 뭔가 진실이 담겨 있지만 틀린 생각이다. 물론 사람의 ‘광기‘란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깨닫게 되는 불균형은, 보통 섬세한 생각을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의 두뇌에 섬세한 생각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들의 기이한 모습에 분노하는데, 사실 매력적인 사람치고 기이한 점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160

자동차는 아픈 사람도 그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어, 그 장소를 개별적인 기호 혹은 대용품이 없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의 본질로 여기는 것을 내가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ㅡ 방해한다. 또 자동차는 아마도 내가 예전에 파리에서 발베크에 갈 때 탔던 기차처럼, 그곳을 일상적인 삶의 우연성에서 벗어난 목적지, 우리가 출발할 때면 거의 이상적으로 보이고 도착할 때도 여전히 그렇게 남아 있는 목적지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 P273

우리에게는 몇몇 새들에게 있는 방향 감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감과 시정감(視程感)도 부족하여 우리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는 이해 당사자의 관심을 그들과는 반대로 매우 가깝게 상상하며, 또 그런 시간 동안 우리가 오히려 다른 이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음은 짐작하지 못한다. 이렇게 샤를뤼스 씨는, 자신이 헤엄치는 모습을 반사하는 물이 어항 유리 너머로까지 펼쳐져 있다고 믿는 물고기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옆 그늘에서 자신의 뛰노는 모습을 쫓으며 즐거워하는 산책자나, 예기치 못한 운명의 순간에 지금 남작에게는 훗날로 미뤄진 ―자신이 좋아하던 그곳에서 무자비하게 끄집어내어 다른 곳으로 내던질 그 전능한 양어가(養魚家)(파리에서 이 양어가는 베르뒤랭 부인일 것이다.)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 P345

지금 내가 상륙한 곳은 무시무시한 ‘미지의 땅‘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고통의 시대가 열렸다. 그렇지만 우리를 함몰시키는 이 현실의 홍수는 비록 우리의 소심하고도 미미한 가정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가정을 통해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지금 막 들은, 알베르틴과 뱅퇴유 양의 우정과도 같은, 내 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테지만 앙드레 곁에 있는 알베르틴을 보면서 어렴풋이 불안에 떨며 두려워했던 것이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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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 Life Stories: Anne Frank (Paperback)
Stephen Krensky / Dk Pub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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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성장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당시 역사도 자연스레 공부하게 된다. 올컬러에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이 포함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특정 용어에 대해서는 따로 칸을 만들어 설명해주어 좋았다. 뒷편에는 퀴즈도 있고 색인도 있어서 원서 학습자를 위해 친절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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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8-28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는 책 중 하나인데 읽다가 눈물 날 것 같아서
미루고 있었어요. 이 가격에 올컬러,퀴즈등 좋네요^^

거리의화가 2023-08-28 10:30   좋아요 1 | URL
앤의 결말을 알고 있어서 슬프긴 한데 다이어리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 있어서 흥미롭더라구요. 앤의 성장 과정, 언니와의 차이점 등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니까 더 재미났던 것 같아요. 가격 대비 진짜 훌륭한 구성이에요! 8권을 만오천원에 사다니 참 잘 장만한 것 같습니다. 미미님도 기회되면 읽어보셔요^^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 - 남송.금.원.명 : 초원의 질풍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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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국사 5권은 남송, 금, 원, 명이 건국된 이후 시기까지를 다룬다. 정강의 변 이후 금군이 개봉을 점령하여 북송 정권이 멸망하고 떠밀리듯 내려가 남송을 세운 강왕 조구는 고종으로 즉위한다. 금나라는 장방창을 초 황제로 삼아 금릉에 정권을 세웠지만 회하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다. 이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여진족의 비율이 지나치게 적어져 본인들에게도 불리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희종 시대에 약 100만명 정도 되는 규모의 여진족 중원 이주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동 후 그들은 여진족 본연의 수렵, 사금 채취 생활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농경 생활을 해야 했으니 한족에 비해 소출이 잘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한족에게 땅을 뺏기는 일도 벌어진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진인들이 한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인 것 같다. 거란인은 한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 본연의 문화는 살아 있었다. 그런 반면 여진인은 이주 후 상당 부분이 한 문화에 동화되어 중원 국가화되었다.

문화에 면역성이 없는 여진족은 곧바로 한문화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민족 고유의 야성적인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큰 문제였다. 여진족의 한족화(漢族化)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요나라의 경우는 ‘한(漢)의 분위기가 연운 16주로 한정되어 있었다. 국가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이원제(二元制, 二院制) 정치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북을 취하고, 나아가 하남으로 진출한 금나라는 ‘한‘의 것이 주류였다. 이원제의 정체(政體)를 폐지한 것은 그것으로는 이제 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달리 한적(漢的)인 중원 국가로 변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나라 황제는 여진족의 수장이라는 성격보다 한적 중원 국가의 천자라는 성격을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 P76~77

금나라 땅은 쌀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고 쌀을 남송에서 받아야 하는 처지인 상황에 이주한 여진인들이 한화하면서 쌀 수요가 늘었다. 해릉왕은 이에 남정을 단행했으나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위한 징병 등 증세로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이에 세종은 해릉왕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다. 세종은 금나라의 '요순'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해릉왕은 항주까지 진격했으나 남송군에게 밀려 숨고르기를 했다. 그는 3일 이내 도강하지 않으면 장군들을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장수들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해릉왕이 시해되자 금군은 철수했고 남송군에게 화의를 신청했다.
남송은 금나라가 영유하고 있는 북쪽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중화제국의 영예를 되찾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남송이 지키는 회남 이남 땅을 빼앗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결함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모두 북벌과 남벌이 국가의 기본방침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그것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다시 강화를 맺었다. 국경선은 이전 소흥(금나라 황통) 화약과 똑같았다. 다만 해릉왕의 폭주와 거란족의 대반란 등으로 금 쪽이 조금 불리했다. 따라서 효종 건도(乾道) 원년(1165, 금나라 세종 대정 5년)에 맺은 새로운 화약은 남송에게 조금유리해졌다. 소흥 화약의 세공은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이었으나, 건도 화약은각각 20만 냥, 20만 필로 줄었다. 더구나 이를 ‘세공‘이라 하지 않고 ‘세폐(幣)‘라고 불렀다. 소흥 화약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가 남송이 금나라에 신종(臣從)하는것이었다. 건도 화약은 이를 ‘숙질(叔)‘ 관계로 고쳤다. 옛 화약에서 군신이었던 것이, 새 화약에서 숙부와 조카 관계로 개선된 것이다. ‘공(貢)‘을 ‘폐(幣)‘로 한 것은 속국의 진공이 아니라는 의미다. - P101

남송 제일의 시인은 육유다. 그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애국 시인인 굴원과 같은 위치를 점했던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북송 휘종 때 태어나 정강의 변을 겪었을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인 육재가 주전파였던 만큼 그도 북송은 멸망했지만 송의 국토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했다. 하필 진사 시험에서 진회의 손자와 붙는 바람에 낙제했는데 이 때문에 주전파에 더 천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육유는 평생 1만 수의 시를 썼을 만큼 다작을 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시를 썼는데 마지막 작품은 <아들에게>라는 제목의 시였다.
꿈에서도 잃어 버린 땅의 회복을 잊지 않은 육유는 애국시인으로서도 칭송받는다. 중국이 외국에게 영토를 빼앗겼을 때, 사람들은 육유의 시를 애송했다. 송나라 시 중에서도 육유의 시는 특이하다. 송시의 특징은 그 냉정함에 있다. 조용히 응시하는 시 정신에 뒷받침된 탓이다. 그런데 육유의 시는 결코 냉정하지 않다. 후세의 역사가가 ‘남송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 시대도 육유는 그것을 절반은 침몰한 시대로 받아들였다. - P116~117
죽으면 만사가 헛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나,
다만 구주가 하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게 슬프구나.
황제의 군대가 북녘땅 중원을 평정하는 날,
집안 제사를 잊지 말고 내게 알려다오

칭기즈 칸의 팽창은 금나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일어났다. 대책을 강구하려고 해도 사태는 시시각각 변했다. 어쩌나, 어쩌나 하는 동안에 이미 대책을 강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금나라는 여러 유목 부족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냈으나, 칭기즈 칸 같은 전쟁의 천재가 출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금나라의 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않다. 오는 강가에서 쿠릴타이를 연 뒤, 칭기즈칸은 전체 몽골 민족의 조직을 개조했다. 목가적인 동족 공동체였던 것을 철저하게 군사적 집단으로 다시 편재한 것이다. 10호, 100호, 1천 호, 1만 호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행정단위이면서 동시에 전투단위도 되었다. 여진족의 맹안이나 모극과 비슷하다. 몽골족은 자주 이동하기 때문에 이 조직은 특히 효과적으로 기능했을 터이다. 십호장(戶長),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만호장에는 칭기즈 칸이 신임하는 보르추, 무카리, 나야아가 임명되었다. - P137~138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치기 전에 금을 섬기는 서하를 먼저 공격함으로써 금에 경고장을 보냈다. 서하는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금나라는 움직이지 않았고 서하는 남송에 손을 뻗는다. 칭기즈칸은 친정하여 금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어서 후퇴해야 했지만 이 무렵 금나라 내부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육유가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원호문은 19세 정도의 나이였다. 육유는 북방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망했으나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건도화약으로 금과 남송 간의 관계가 평화로웠다. 하지만 원호문은 칭기즈칸이 금을 침공하던 무렵 22살이었고, 금이 몽골에 멸망했을 때 45세의 나이였다. 그가 68세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했고 끝내 금나라가 원에 멸망할 때까지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난세가 시인을 만든 셈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시 중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조협려에 등장한 '정이란 무엇이길래'이다. 제목을 봐도 느껴지지만 기러기 한 쌍을 보고 지은 시인데 정이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세상 사람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저 새야.
지친 날개 위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느냐?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임이여 대답해주소서,
아득한 만리 구름이 겹치고
온 산에 저녁 눈 내릴 때
외로운 그림자 누굴 찾아 날아갈꼬. - < 안구사雁丘詞 >

원호문은 120년을 이어온 금조에서 감히 비교할 자가 없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남송을 포함해서 12세기와 13세기 중국 최고의시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태평성대였어도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중국문학사에서 이렇게까지 위대한 존재로 만든 것은 역시 몽골의 침공이라는 난세를 시로 읊었기 때문이다. 주제가 너무 엄청나면 시문이 받아들이기어렵다. 하지만 원호문의 시문은 처참한 시대의 모습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청나라의 조익이 원호문을 노래한 시 가운데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이라는 구절이 있다. 조심하지 않은 표현 같지만, 이 구절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다. - P149
몽골의 공격으로 마침내 개봉의 성문이 열렸다. 금나라 주요 관료들은 포로가 되었는데 원호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요성이라는 곳에 유폐되었다. 유폐된 곳에서 < 계사 5월 3일 북으로 건너가다 >라는 제목으로 그는 시를 지었다.
길가에 쓰러져 엎어진 포로가 즐비하고,
지나가는 전차는 물이 흘러가는 듯하다.
여인은 곡하며 회골의 말을 뒤따르고,
뉘를 위해 걸음마다 뒤돌아보는가.

1234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의 공격에 금나라는 마침내 멸망했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족계 정권이어서 막내 아들이 상속하는 관습을 따랐다. 단 영지상속과 몽골의 국주 계승은 별개의 문제였다. 칭기즈 칸 제국의 약점은 쿠릴타이의 구성과 기능이 명확하지 않아 후계자 선출에 불안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세계 제국이 된 뒤에도 여전히 부족공동체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오는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시기에는 그것이 소박하고 평화롭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과 이슬람, 유럽의 문명지역까지 뻗어나간 나라가 된 이상,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 P189 칭기즈칸 사후 대쿠릴타이에서 카간으로 추대된 것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였으나 상속법에 따르면 톨루이가 계승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행히 톨루이는 우구데이의 즉위를 인정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 우구데이는 태종으로 즉위한 기간 동안 금나라를 토멸하고 카라코룸에 궁전을 지었다. 그는 후계자로 손자인 시라문과 톨루이의 장남 뭉케를 지목했으나 대쿠릴타이에서 황후인 투르게네가 그의 유지를 어기고 장남인 구육을 즉위시켰다. 구육은 정종으로 즉위했지만 주치 집안의 가장인 바투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두 세력 간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정종의 급작스런 사망(3년 만에)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투는 쿠릴타이를 열어 톨루이 집안의 뭉케를 칸으로 추대했다. 헌종 뭉케는 남송 토벌군을 일으킨 1259년 사망했는데 계승을 둘러싸고 또 툴루이 집안의 네 아들 간에 내분이 일어난다. 잘 알고 있듯 최종 승자는 쿠빌라이다. 이 때 고려의 원종이 적지 않은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사실이다.

몽골은 남송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하남 땅을 남송에게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남송에는 주전론이 힘을 얻으면서 군대를 출병시켰다. 몽골군은 송군의 출병 소식을 듣고 남하했다. 남송군이 출병하지 않았다면 몽골군은 남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후 수년에 걸쳐 남송과 몽골의 싸움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되었다. 이미 원(元)이라 칭한 몽골이 남송을 공격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양양(襄陽)이었다. 남송이 양양을 확보하고 있는 한, 원은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킬 수 없었다. 뭉케의 명령으로 쿠빌라이가 남하했을 때도 양양을 공략하지 않고 악주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번에는 양양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대원이라는 국호를 세운 지 2년 뒤인 지원 10년(1273) 정월, 원군은 마침내 번성(樊城)을 함락했다. 이로써 양양의 운명은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양양성은 고립되어 쉴새 없이 긴급사태을 알렸으나, 재상 가사도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수장 여문환(呂文煥)은 성내를 돌 때마다 남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쿠빌라이의 항복 권고문이 도착했다. - P252

이후에는 몽골이 중원에서 실권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고려는 이 때 몽골과의 외교적 변화를 꾀했다. 쿠빌라이 지원 원년(1264)에 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고려의 원종은 권신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그 행사에 참가했다. 고려는 건국 이래 346년, 24대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외국의 책봉을 받은 일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한 일은 없었다. 이때 원종의 입조가 처음이었다. 몽골 제국도 성격이 바뀌었지만 고려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고려의 국왕은 권신의 강한 반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원종은 김준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大都, 북경)로 갔고,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권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힘에 의지하면서 고려의 속국화는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 P300 원은 남송을 완전히 제압하고 싶어했다. 일본은 여전히 남송과 통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에 괴씸죄가 부과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원은 일본에 원정을 감행한다. 고려는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상황에서도 의병, 삼별초 등의 항쟁이 이어지면서 원을 계속 괴롭혔다. 하지만 원은 삼별초 항쟁을 물리치고 고려에 전선 건조와 병사, 어부 등의 동원 명령을 내린다. 그럼에도 원은 일본 원정에 두 차례나 실패했는데 이는 일본의 운(?)도 있었겠지만 급박스런 선박 건조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해석이 많다. 두 번에 걸친 원정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선을 건조하고 병대를 파견한 고려와 남송이 떠안았을 뿐 원나라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본 원정으로 고려와 남송이 피폐해지는 것을 어쩌면 원나라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폐해질수록 반항할 기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남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2차 원정에 실패한 이듬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령하고 일단 폐지한 정동행성을 부활했다. 충렬왕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때에 강남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일본 원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번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사고가 일어나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P324

원나라는 북경을 국도로 삼았기 때문에 운하 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면, 천진의 백하(白河) 하구가 북경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해상 수송의 이점은 운하 수송보다 큰 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의 염전 단지에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상 수송을 많이 이용했다. - P397 강남 땅을 손에 넣은 원 왕조의 사치는 심해졌고 이제는 강남이라는 곳이 원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가 되어 버린다. 해상 수송을 이용하게 되면서 해적이 출몰하게 되는데 해적 소탕을 명했음에도 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배경에서 방국진의 난을 시작으로 온갖 군벌들이 등장하였다. 장사성도, 주원장도 이런 세력들 중 하나였다. 장사성이 고우에서 남하한 것은 기아(餓) 지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지 특별히 장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주원장의 남하는 이선장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장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더구나 이 남하군은 매우 숙연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은 말단까지 철저했다. 이것은 홍건군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이선장의 헌책이기도 했다. - P464
여러 가지로 명나라의 주원장은 한나라의 유방과 비슷해서인지 비교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공격하면서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등의 태도와 유방 곁에 장량이라는 참모가 있었듯 주원장 곁에는 이선장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군벌들 중 최종 승자는 주원장이었고 명나라는 이렇게 건국되었다. 

책임자가 되면 주변에 있는 것을 모두 쳐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홍무제는 여러 번의 옥사를 일으키며 주변 세력을 남김 없이 섬멸한다. 호유용과 남옥의 옥(獄)에 관해서는 다음에 인용하는 조익의 의견이 정확할 것이다.
명조(明祖, 홍무제)에 이르러 옥사를 일으킨 것이 빨랐다 해도 천하가 평정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는 온화하고 인자했다. 의문이 죽고 손자는 더욱 나약했다. 마침내 앞날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또다시 대옥을 일으켜 일망타진했다. 이것으로 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있다. 호유용이 죽은 것은 홍무 13년으로, 함께 주살된 자는 진녕, 도절 등 몇 명에 지나지않는다. 호당(胡黨)의 옥에 이른 것은 23년의 일이다. 호유용의 죽음에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찌 죽은 역적의 공모자라 하여 10여 년이지난 지금 새삼스레 문죄할 수 있으랴. 이는 호유용을 빙자하여 죄목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견제하고 이들을 올가미에 얽으려는 계책일뿐이다. 호당을 이미 주살하고도 여전히 미진하여 26년에 다시 남당의 옥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공신과 숙장이 사라졌다. -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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