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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7 - 1990년대 성차화된 개인과 여성주의적 각성 ㅣ 한국 여성문학 선집 7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한국 여성문학 선집 시리즈 읽고 쓰기, 드디어 마지막 권까지 왔다. 1990년대의 시간은 내게도 기억이 비교적 뚜렷한지라 작품의 배경이 익숙한 것이 많았다. 당시 좋았던 시간도 있고 힘들고 아팠던 시간도 있었으나 어쨌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읽으며 뭉클했는데 추억 거리가 이제는 실물로 만날 수 없는,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는 안타까움이 일어서가 아닐까 싶다.
1990년대 여성문학은 여성을 고립과 침묵에 이르게 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여성의 말해지지 않은 욕망과 가치를 복원함으로써 광장과 방의 부당한 분리에 맞서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 작업은 한편에서는 1980년대 운동권 문학을 여성주의적 개입과 성찰을 통해 바라보며 성 평등이 병행되지 않은 민주화는 여성을 주변화시키는 가부장적 기획의 연장이라는 점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금기와 제도적 억압에 가로막힌 여성들의 욕망과 열정을 드러내어 여성의 자유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 P17
1990년대는 군부 독재가 사라지고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유효하지 않게 되면서 억눌렸던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폭발하듯 분출하기 시작한 시기다. X세대, 오렌지족 등이 등장해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인다.’를 표방하며 과거와는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1980년대 강렬했던 민중 분노에 의한 서사와 문학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로 나뉘어져 있던 세계에서 한 축이 무너지면서 동력을 일부 상실했다. 1980년대 노동 현장이나 집회에 뛰어든 여성들은 남성 노동자를 비롯한 활동가와 함께 연대하며 평등을 꿈꾸었지만 현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90년대 들어오면 자유주의 체제 하에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되며 집단의 힘은 무너지고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악조건에 부딪치게 된다. 이 때 ‘여성들의 자유는 어떻게 표현되었는가’가 이 시기 문학의 주안점이 되겠다.
1990년대 초까지는 1980년대의 민중 운동에 대한 성찰과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에서 쓰여진 글들이 여전히 많이 발표되었다.
최윤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되어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소설을 통해 역사적 비극과 고통을 재현한다.
5.18 때 엄마를 잃은 딸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엄마는 오빠가 사망한 뒤 정신줄을 놓은 것이다. 역사적 비극 앞에 한 가정은 이리 쉽게 무너진다. 선택할 수 없는 비극이 인간을 더 비극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지… 기억은 쉽게 잊힐지 모르지만 글 속에 재현된 장은 이를 다시 생생한 사건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한다.
마침내 나는 엄마 손목을 양손으로 꼭 쥐고 놓지 않았지. 그리고 엄마는 미친 학처럼 춤추러 갔어. 사람들의, 함성의, 냄새의 홍수에 실려 그 물살에 뼈가 녹을 때까지 나도 물살에 섞였지. 점점 더 물살이 높아졌어. 사방에 소리와 높은 벽이 앞으로 앞으로 나를 운반했어. 엄마는 내 손을 으스러지게 움켜잡고 내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가는 밀물처럼 밀려오곤 했어. … 내 머리 뒤에서 합창하는 수많은 얼굴들.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들. - P134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사건이 아니다.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 혹독하게 생생한 사건이 된다. 죽음은 대답이 없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완성되어야 할 것의 미완성이기 때문에. - P139
최영미는 1980년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1994년 발표했다. 여성이 노동 운동에 뛰어든 경우 운동은 운동대로 하지만 집안일과 돌봄은 이어졌을 것이다. 운동가나 투쟁가의 남편을 둔 여성이었다면 그를 위한 뒷바라지가 필요했을 테고 말이다. 투쟁가 뒤에는 여성들이 있는데 이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한다. 늘 한 편에는 여성의 전폭적인 노력이 숨어 있음을.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채익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P413
1990년대 여성 문학에는 가부장 가족제도에 도전하고 홀로 길을 떠난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다.
공지영은 학생 운동 및 구로공단에서 활동가로 생활하고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현장 경력을 쌓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자신과 비슷한) 운동권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가부장 제도에 얽매이자 진보적 기치와는 다르게 불합리한 현실에 처하게 되는 위태로운 상황을 담은 소설이다. 모성을 강요당하고 가정 주부 역할을 (판타지를) 강요받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넌 결국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 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에 불과했던 거야.
…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 P525~526
공선옥은 5.18 때 민주화를 경험했다. 이후 전남대에 들어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퇴하고 20대 초반에 시민군이었던 남자와 결혼했다 이혼을 했다고. 아이들과 함께 상경해 미싱사로 일하다가 원고료가 좀 더 높아 소설을 쓰게 되었단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경험이 그의 소설의 재료들이 되었다.
<목마른 계절>에는 영구 임대 아파트를 배경으로 이웃 사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은 몇 대 없고 화물차들이 가득하여 새벽마다 발차하는 소리로 소음 전쟁이 벌어진다. (‘나는 나는 저팔계. 왜 나를 싫어하냐아~’라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그 때 만화 본다고 부모님 눈치를 봤던 기억도 나고.)
아파트 공터를 비롯한 놀이터에는 하교 후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온다. 어릴 때 아파트에 두 차례 살았는데 한 번은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나고 다른 한 번은 아파트 공터에서 아이들과 고무줄 놀이, 땅따먹기 등을 하던 기억 때문인지 그 장면만 스냅샷처럼 남아 있다.
비록 아파트였지만 지금의 아파트 문화와 달리 이웃 사촌이라는 개념이 그 때만 해도 존재했던 것 같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카페 장사를 하는 이웃 사촌의 아이를 대신 맡아서 돌보아 주는 ‘나’가 있다. 한 사람은 소설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카페 주인인데 둘 다 이혼녀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고, 가난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나온다. 모두 다 그 시절 이야기인 것 같지만 여전히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을 이야기다.
목이 말랐다. 속쓰림과 동시에 갈증이 한꺼번에 덮쳐 와 죽을 것만 같았다. … 물 주전자를 기세도 좋게 기울였다. 냉장고에도 물은 없었다. 끓인 물은 아무 데도 없어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이상했다. 수도꼭지에 힘이 없다. 가르륵가르륵, 수도꼭지 속에서 가래 끓는 소리만 난다. … 제한 급수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가뭄이라 하였다. 수원지의 물이 모자라서 격일제 급수를 하는데… - P501
“옘병. 죽을 각오로 살자 그거여. 누구 좋으라고 죽냐 죽기를.” - P513
전경린은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작가로 등단했다.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필명은 전혜린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염소를 모는 여자>에는 여러 명의 친구들이 나온다. 나는 3달 전부터 어떤 남자가 염소를 4일 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건 남자는 염소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마치 영혼의 단짝처럼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염소가 어떻게 될 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변에는 그런 그를 정신병이 있다 이야기하지만. 권태와 냉담 속에 결혼 생활을 하던 나는 남편이 이웃 사무실 여자와 노닥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애써 무시해왔다.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 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리고 하나씩 둘씩 아이를 낳고 남자는 처자식 때문에 죽지도 못해 하면서 툴툴거리고, 그 닭장 안에서 멀쩡한 여자 하나가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오 년씩 십 년씩 매달리고…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깨어나 보면 발이 뻣뻣하게 굳어 영영 걸어 나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 P431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아름다움은 형태가 아니라 본질에 있다. 당신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비로소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벗어날 용기를 얻는다. 수영을 배울 때 물을 먹는 것을 결심해야 하는 것처럼 변하기 위해서는 한 발을 내딛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소설은 <바리-길 위에서>다. 소설을 쓴 작가는 송경아인데 전산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국문학과 대학원을 가셨다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전산학과를 나오셨다는 부분에서 이미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는데 실제로 쓴 작품들이 SF, 판타지, 장르문학 쪽이 많다. 2000년대에는 진보계 쪽에서 정치 활동도 하셨다고 해서 참 다양한 활동을 하셨구나 싶었다. 지금보다 SF라는 장르가 훨씬 낯설었을 1990년대에 이미 그런 글을 쓰기 시작하여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 드는 다양한 글을 써 오셨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바리야. 세계가 멸망하는 원인에 나는 나름대로 두 가지 가설을 세워 봤어. 이 세계, 이 시스템에 어쩌면 레지스탕스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그 하나지. 그 레지스탕스들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연산에 오류를 범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야. … 또 하나는 이 세계, 이 우주, 이 시스템, 네가 무어라고 불러도 좋은데, 하여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이곳이 처음부터 잘못된 프로그램이었다는 거야. 혼란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혼란의 정도가 점점 가중되도록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 P701~702
넌 다른 개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 있어. 호기심과 지적 욕구지. 호기심과 지적 욕구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라. 호기심은 어떤 사건, 우연히 일어나는 어떤 사고들에 대한 관심이지. … 지적 욕구를 가진 개체들은 자기 자신을 확장할 줄 알아. 그들은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물 뒤에 있는 의미를 바라볼 줄 알아. 바라보려고 노력해. … 한 사람이 자신의 왕국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도 몰라. ... 난 네가 그런 경지에 도달했으면 좋겠어. - P703
바리를 비롯한 7명의 자매가 있다. 불라국은 잉여, 부족도 아닌 아름다운 곳이라 바리는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언니들은 불라국이 병에 걸렸다 생각한다. 서천 서역국은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는 곳이라는데. 나는 성선설보다 성악설을 믿는 지라 인간은 원래부터 악하기 때문에 선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세계도 원래부터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작가님의 SF 세계는 지금 보면 전혀 가상 세계 같지 않다. 초기 SF작이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 Data-flow, 서브루틴, 테스터, 포인터, dummy, 변수/상수, 프로그램, 에러, 시스템, garbage, 패킷, 부동소수, 프레임, 패리티 검사, 매개 변수 등 내가 평소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소설에 등장하여 읽을 때마다 반갑기도 하고 피식거리기도 하면서 읽었다. 자매들은 계속해서 모험을 떠날 것이다.
근 3주 정도의 시간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읽으면서 올 여름의 일부를 의미 있게 보냈다. 선집을 통해서 많은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소중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종종 꺼내어 읽어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심 가는 작가는 나중에 깊게 파 들어가기도 하고 말이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에 독자로서 감사 인사를 전한다.